《文學의 숲을 거닐다》 in story
🍃 잊히지 않으려고
✒ 강호형(1938~ )
얼마 전, 정신이 번쩍 드는 메일 한 통을 받았다. 내가 주간을 맡고 있는 잡지에 실을 원고 청탁에 대한 어느 여류수필가 답신이다.
‘'원고청탁은 고맙습니다만 어느 지면이든 원고료 없이는 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글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같은 작가로서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잡지 편집자들은 좋은 글을 읽으면 그 작가 이름을 메모해두었다가 원고를 청탁하는 경우가 많다. 이분도 그런 연유로 청탁서를 보냈는데 이런 답신을 보내온 것이다. 수필전문지 주간을 맡아 45호까지 내는 동안 고료를 지불한 경우가 거의 없는 데다가 나 또한 30년 가까이 수필가 행세를 하면서도 고료를 받은 경우가 가뭄에 콩 나기보다도 드물었지만 자존심이 상하기는커녕 청탁해준 것만 고마워서 기름을 짜내듯 써 바쳐온 터라 낯이 뜨거웠다.
수필가가 되고 싶어 《文學精神》지에 응모한 수필이 당선되었다는 통지서를 받고는, 이제 내 작품이 발표되고 나면 사방에서 원고 청탁이 쇄도할 것만 같아, 어디서든 청탁이 오면 즉시 보내려고 부랴부랴 준비까지 해가며 1년을 기다려도 원고청탁과 관련해서는 전화 한 통 걸려오지 않았다.
- 이 나라의 잡지 편집자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수필문단에 혜성처럼 나타난 이 강 아무개를 알아보지 못한단 말이냐!
돈키호테처럼 비분강개하여 편집자들을 원망하다가 제풀에 지쳐 구걸이라도 하기로 했다. 내 등단작품을 심사하신 박재식 선생 권유로 구독 중이던 《隨筆公苑》에 청탁받지도 않은 원고 한 편을 보내놓고, 가뜩이나 짧은 목을 한껏 길게 빼고 하회를 기다리기 여러 날 만에 책자 하나가 배달돼왔다. 박연구 선생 출세작 《바보네 가게》였다. 선생의 서명이 있는 속표지 갈피에 조그만 쪽지도 한 장 끼어 있었다.
“좋은 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 호에 싣겠습니다. 주간 박연구”
대개 이런 내용이었다. 너무나도 감격해서 특유의 그 악필 필체까지 우러러 보였다. 책에다 대고 절이라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후에는 부부를 테마로 한 연작수필 <부부도>를 한 호에 두 꼭지씩 3년 동안 연재했지만 고료는 한 푼도 받지 못했고, 그 잡지 편집과 신인작품 심사를 도우며 여러 해 동안 무보수로 봉사하면서도 그저 ‘혜성’(?)을 알아봐 주신 박연구 선생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문득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내가 햇병아리 시절에 겪었다는 일이 생각난다. 3학년 담임이던 어느 해, 자기 반에 한글도 깨치지 못한 지진아 하나가 있었더란다. 공부나 놀이에는 뒤지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말썽을 부리지도 않아서 늘 친구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는 듯 없는 듯 외톨이로 지내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이런 아이에게는 칭찬이 약이라는 걸 알고 있던 터라 마땅한 칭찬 거리를 찾고 있던 어느 날 미술시간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이 곁으로 다가가,
“아무개가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구나.”
한 마디 하는 순간 아이 표정이 함박꽃처럼 피어나더니 다음날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림 한 장씩을 그려다 내밀며 귀찮을 정도로 따르더라는 것이다.
원고 청탁을 거절당하고 보니, 선배의 배려에 고무되어 견마지로를 다하면서도 그걸 오히려 특혜로 여긴 내가 바로 그 아이 꼴이 아니었던가 싶어 낯이 뜨겁다.
내가 ‘혜성’은커녕 유성도 못 된다는 걸 깨달은 요즘도 원고 청탁이 오면 사양하거나 거절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젊어서는 청탁을 받으면 내가 혜성인 줄 알고 나라는 존재를 더 알리고 싶어 무료 봉사조차 감지덕지했다면, 요즘은 그나마 쓰지 않으면 나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들 기억에서마저 사라질 것만 같아 날밤을 새우곤 한다.
이렇듯 고료 안 주고 못 받는 것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닌 풍토에 길들어오다 보니 내가 자존심 내려놓았다고 남의 자존심까지 헤아리지 못하고 원고를 청탁해 받아 싣고 고료 한 푼 안 주면서도 태연했으니 이 또한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오늘 내 전화기에 저장된 이름 하나를 또 지우면서 처연한 가슴을 달랬다. 20년 지기 한 분이 또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동안 이렇게 지운 이름이 얼마나 많았던가.
- 머지않아 내 이름도 누군가의 수첩에서 이렇게 지워지겠지– 하지만, 어차피 인간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세상을 어떻게 산 사람이든 죽음에 이르러서는 친구나 처자식을 망라한 그 누구 구원도 받지 못한 채 스러져가기 마련이다.
나는 지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마른행주를 짜듯 메마른 감성을 쥐어짜 가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당분간이나마 잊히지 않으려고.
/ 강호형(1938~ ) 수필가. 경기도 광주 출생
현 과천도서관 문화센터 수필 강사
수필집
《돼지가 웃은 이야기》(지인당, 1996), 《행복을 디자인하는 부부》(하서출판사, 2001), 《붕어빵과 잉어빵》(수필과비평사, 2007), 《빈자리》(수필과비평사 2016) *수필선집; 《바다의 묵시록》(선우미디어, 1999) ,《20세기의 전설》(교음사, 2002), 《정류장에서》(좋은수필사 2011) , * 월간《좋은수필》 주간
독자 평
‘ 잊히지 않으려고’
읽으면서 쿡쿡 자꾸 웃음이 나온다. ‘수필전문지 주간을 맡아 45호까지 내는 동안 고료를 지불한 경우가 거의 없는데다가, 나 또한 30년 가까이 수필가 행세를 하면서도 고료를 받는 경우가 가뭄에 콩 나기보다 드물었지만 자존심이 상하기는커녕 청탁해준 것만 고마워서 모범생이 숙제하듯 해온 터라 낯이 뜨거웠다’
어느 여류수필가에게 원고청탁을 했다가 고료를 주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 자존심에 관한 문제라는 답을 듣고 쓰신 소회 중 ‘청탁해준 것만 고마워서’라는 대목이 나를 웃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니 선생님 같은 분도 청탁해준 것만 고마우시다는 말인가. 그러면 우리 같은 무명은 만약 그럴 경우 납작 엎드려 절이라도 할 판 아닌가.
평소 선생님 글을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왔다. 호방하고 걸쭉한 문체, 해학과 유머로 낮은 자리를 향하는 따뜻한 시선과 사유를 무겁지 않게 풀어내시는, 가슴으로 쓰는 글이 좋았다.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글쟁이들 세계도 삼각형의 도형을 이룬다. 소수의 빼어난 작가들이 정점을 이루고 차츰 저변을 이루는 많은 작가들,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게다가 열악한 출판사 형편. 그러다보니 고료는커녕 청탁도 가뭄에 콩 나듯 하기도 한다.
그래도 선생님 같은 분이 청탁해준 것만 고맙고, 잊히지 않으려고 글을 쓰신다니 재미있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지만 감히 동병상린의 짭짜롬한 비애를 맛보게 해주시니 이 또한 내게는 힐링이 아닐까.
(저자 블로그에서 옮김)
첫댓글 금아 피천득 선생님을 많이 아시는 수필문우회 회원입입니다. 금아 문학전집을 출간한다니 축하 하시면서 저서를 보내주셨습니다.
세월은 흘러 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