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위 박꽃
제11회 작품상
강근숙
초가지붕 위 박꽃은 눈을 감아야만 볼 수 있다. 집 근처 언덕배기나 헛간 지붕에 덩굴을 올려 여름이면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박은,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우리 집 외양간과 뒷간 지붕에는 해마다 박넝쿨에서 하얀 꽃을 피웠고, 가을이면 달덩이만 한 박이 뒹굴었다. 단단하게 여문 박을 켜서 속을 파낸 뒤, 삶아 햇볕에 말린 뽀얀 바가지는 순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얻을 수 있는 자연의 선물이다.
그릇이 흔치 않던 시절, 바가지는 없어선 안 되는 물건이었다. 큰 것은 큰 것대로,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쓰임새가 다양하다. 큰 것은 말斗로 사용했고, 작은 것은 됫박, 자루 달린 조롱박은 술을 뜨거나 간장 푸는 용도로 제격이다. 긴긴 여름 한낮, 엄마는 개떡이나 삶은 감자를 바가지에 담아 시렁에 올려놓고 밭일을 나가신다. 꿀맛 같은 개떡 한 조각 꺼내먹고, 바쁜 엄마를 도우려는 마음에 중간 바가지에 보리쌀을 퍼서 남새밭 우물가로 달려간다. 작은 바가지로 물을 퍼서 보리를 말갛게 씻던 어릴 적 기억은 꿈결인 듯 아련하다.
직장 동료에게서 ‘시골집에 박꽃이 피었다’는 말을 듣고 불현듯 박꽃이 보고 싶어졌다. 마침 다음날이 휴일이기에 소풍 가는 마음으로 무작정 따라나섰다. 박꽃도 보고, 밤하늘 달과 별도 맘껏 보고 싶은 마음에서 였다. 자동차가 쉴새 없이 달려가는 광탄 혜음로 주변에 자리한 동료의 집은 말이 시골집이지, 시골이 아니었다. 상가와 고층건물 사이 텃밭이 딸린 아담한 이 집은 농작물을 가꾸며 수시로 고단한 몸을 내려놓을 수 있는 휴식처요, 맘 놓고 웃고 떠들며 쿵쾅거려도 눈치 볼일 없는 가족 별장이었다.
꽃과 나무들에 둘러싸인 동료의 집은 꽃 대궐이다. 대문 앞에는 봉숭아, 채송화, 꽈리, 댑싸리 등 재래종 꽃들이 흐드러졌고, 키 큰 가죽나무가 수문장처럼 집을 지킨다. 그 아래 상추, 방울토마토, 배추, 쑥갓, 부추, 쪽파가 싱싱하게 자라는 마당 한 귀퉁이는 그대로 꽃밭이었다. 손바닥만 한 땅도 놀리지 않고 정성 들여 가꾼 집주변은 주인장의 살뜰한 마음이 묻어있다. 밤나무를 돌아 집 뒤쪽으로 가니, 동료의 남편이 붉은 고추를 따고 있었다. 어두워지면 덜 익은 고추와 분별할 수가 없다기에 나도 잠깐 일손을 거들었다. 고추가 실해서 금방 소쿠리가 넘친다. 어쩜 이렇게 농사를 잘 지었느냐는 감탄에, ‘남편 덕’이라고 모든 공을 돌리는 후덕한 아내가 더없이 믿음직스러웠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박꽃이 하나 둘 벙근다. 박꽃은 어찌하여 대낮에는 잎을 오므리고, 서늘한 어둠 속에 피어나는 것일까. 담장을 타고 오르는 박넝쿨을 들여다보며, 잊었던 첫사랑을 만난 듯 가슴이 두근거린다. 순백의 꽃잎 다섯 개는 어긋나고 세모진 심장을 닮았다. 잎겨드랑이에 꽃이 한 개씩 피는데, 암꽃에는 새알 모양의 작고 둥근 열매가 달렸다. 이 작은 열매는 달빛과 더불어 여물어 마침내 세상에 필요한 그릇이 될 것이다. 대체 박씨는 어느 제비가 물어다 주었을까. 알고 보니 박씨는 흥부 할아버지가 손주들을 위해서 씨앗을 구해다 심은 것이라 하였다. 이곳은 단순히 텃밭을 가꾸는 시골집이 아니라, 자연을 배우는 학습장이요,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뛰놀 수 있는 보물섬 같은 놀이터였다.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던 박꽃이 사라진 것은, 새마을 운동을 하고부터다. ‘잘 살아보자’는 구호를 바탕으로 전개된 새마을 운동은 국가정책 차원에서 도로확장, 담장, 지붕 개량과 공동 빨래터, 우물 설치 등 마을 공동 사업으로 낙후된 농촌환경이 개선되었다.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초가지붕이 사라지고 슬레이트로 교체된 것이다. 슬레이트 지붕은 농촌 근대화 새마을 운동의 상징으로, 약 100만 동의 농가나 서민들의 지붕이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추수가 끝나면 해마다 이엉을 엮어 지붕을 바꿔 이는 수고로움을 덜었으니, 농가에서는 그야말로 최고의 건축자재로 인기가 높았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우리는 모든 것을 자연에서 얻고 자연으로 돌려보내며 순박하게 살았다. 1970년대 밀려오는 산업화로 우리는 소중한 것을 너무 쉽게 우리 곁에서 떠나보냈다. 초가지붕과 박넝쿨은 이제 민속촌이나 가야 구경할 수 있을까. 그러나 초가지붕에 박꽃을 영원히 볼 수 없다 해도 섭섭하거나 연연하지 않는다. 훨씬 편리하고 오래 쓸 수 있는 플라스틱 바가지와 다양한 제품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초가지붕이 스레이트로 바뀌면서 일손 부족한 농가에도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손뼉을 쳤다.
자연은 느리고 더디지만, 독소를 내뿜어 생존을 위협하지 않는다. 빠르고 편리한 것이 재앙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사람들은 뒤늦게서 알게 되었다. 불과 30년 만에 스레이트에 함유된 석면이 1급 발암물질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와, 서서히 스레이트 지붕이 다른 자재로 바뀌기 시작했다. 싼값으로 편하게 쓰고 버리는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제품 또한 분해되는 기간이 500년 걸린다고 경고하지만, 편안함을 깊숙이 끌어당긴 현대인은 옛날로 돌아가지 못한다.
내게는 오래된 황갈색 바가지가 있다. 친정 외양간 지붕에 뒹굴며 여문 바가지여서, 가끔 솔로 닦아 햇볕에 말려두고 옛집이 그리울 때 매만지곤 한다. 박은 어이해 캄캄한 어둠 속, 달빛 아래 꽃을 피워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을까. 박꽃은, 자신의 운명을 탓하지 않고 의지와 끈기로 기어코 꿈을 이루고 마는 여인을 닮았다. 많고 많은 꽃 중에 달빛 묻은 박꽃에 비길만한 아름다움이 또 있을까. 오늘은 칠월 열사흘, 구름에 가린 흐릿한 별자리와 볼록달이 흐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연의 신비를 만끽한다.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지붕 위 박꽃, 나는 오늘 박넝쿨 수놓은 지붕 아래 누워 나뭇결처럼 따스한 기억을 더듬는다.
첫댓글 초가지붕 위 박꽃은 눈을 감아야만 볼 수 있다. .. 박넝쿨에서 하얀 꽃을 피웠고, 가을이면 달덩이만 한 박이 뒹굴었다. 단단하게 여문 박을 켜서 속을 파낸 뒤, 삶아 햇볕에 말린 뽀얀 바가지는 순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얻을 수 있는 자연의 선물이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박꽃이 하나 둘 벙근다. 박꽃은 어찌하여 대낮에는 잎을 오므리고, 서늘한 어둠 속에 피어나는 것일까.... 내게는 오래된 황갈색 바가지가 있다. 친정 외양간 지붕에 뒹굴며 여문 바가지여서, 가끔 솔로 닦아 햇볕에 말려두고 옛집이 그리울 때 매만지곤 한다. 박은 어이해 캄캄한 어둠 속, 달빛 아래 꽃을 피워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을까. 박꽃은, 자신의 운명을 탓하지 않고 의지와 끈기로 기어코 꿈을 이루고 마는 여인을 닮았다. (본문 부분 발췌)
뽀얀 바가지를 품고 살던 시대는 순수하고 너그럽고 인정이 넘치던 시대가 아니었을까. 문명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