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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4:7~15
시편 23편 3절 말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도다" 이미 우리가 생각한 말씀 중에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으면 참된 만족을 누릴 수 있고,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으면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했는데 얼른 생각할 때 이 말씀이 좀 이상하게 들릴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삼아 부족함이 업이 지내고,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내 영혼이 소생을 받으리만큼 고통을 받거나 피곤한 자리에 이르거나 아니면 좌절상태에 이르는 일이 있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시편 42편 11절 같은 데를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목자가 되셔서 인도함을 받는 양 중에 넘어져 있는 양을 연상하게 됩니다. 넘어져 있는 양은 불쌍합니다. 가련합니다. 벌렁 나자빠진 채 발로 허공을 치며 허우적거리며 일어나 보려 안간힘을 쓰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양이 말은 못하지만 살려 달라고 소리 지릅니다. 이상한 것은 양은 한번 자빠지면 자기 힘으로는 일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보통 다른 짐승은 넘어 졌다가 다시 자기 혼자 일어납니다. 소도 자빠졌다가 혼자 일어납니다. 개도 자빠졌다가 혼자 일어납니다. 그런데 양은 자빠지면 혼자서 일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다가 기진맥진해서 죽어버릴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꼭 있어야 하는 이유는 혹시 양이 자빠지게 되면 얼른 찾아가서 부뜰어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양과도 같습니다. 자빠지면 일어서지를 못합니다. 가령 목회자에게 즐거움이 있다면 교회에서 모이는 모임에 꼭 참석하는 일입니다. 성도들이 그 자리에 늘 참석하시는 것을 보면 그렇게 반갑고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 자리에 늘 보이시던 분이 보이시지 않습니다. 궁금한 생각이 들어 '그 아무개가 요사이 잘 안보이시는데 좀 찾아가 보세요'라고 교역자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러면 교구 담당목사님이 찾아가시는데 가보면 발랑 나가 자빠져 있습니다. '내가 이번 우리 아이 대학입학시험 위해서 40일 조반 굶어가며 기도했는데 떨어졌어요. 그런 하나님 믿을 것 없어요. 이번 기업체 구조조정에 우리 집 양반 퇴출 됐어요' 하면서 발랑 나가자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들이 '아니, 성도님, 시험이야 합격될 수도 있고 불합격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물론 상심이 되시겠지만 힘을 내셔야죠. 우리 흔히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은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방면으로 축복하실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어서 일어나세요'하면서 부뜰고 이끌면 못 견디는 척하고 나오십니다. 아마 이 자리에도 그런 분이 계실꺼예요. 그래서 목회자가 필요한 것 아닙니까? 자빠지는 양을 예수님 대신해서 부뜰어 세우려고 목회자가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넘어져 있는 양을 부뜰어 일으켜 세울 뿐 아니라 양을 잡아먹는 맹수들의 위협으로부터 지켜 주는 일을 합니다. 매나 독수리, 늑대와 이리 같은 짐승들이 넘어져 있는 양을 손쉬운 먹이로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공중의 세력을 잡고 있는 마귀는 하나님의 양무리 중에 넘어진 양을 먹이로 생각하고 달려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혹시 잘못해서 넘어지면 우리는 목자 되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경험 있고 신실한 목자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양들의 수를 세어보고 혹시 자빠져 있는 양이 발견되면 지체하지 아니하고 붙들어 세워 줍니다. 목자는 아침 일찍 밖에 나아가 하늘을 쳐다봅니다. 검은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천천히 기다란 나선형을 그리며 돌고 있는 것을 볼 때는 걱정스러운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제쳐놓고 목자는 양들이 있는 곳에 가서 어떤 이상이 없는지를 확인하고 양들의 수를 세어 봅니다. 한 마리의 양이 넘어질 때 목자는 이 넘어진 양을 위하여 얼마나 마음을 쓰는지 모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은 영적인 미궁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무력한 상태에서 좌절되어 있을 때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시고, 나에게 실증을 느끼시고, 나에게 화를 내신 것 아인가?"고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생각이 아닙니다. 주님을 선한 목자로서 사랑과 동정으로 나를 해대 주십니다. 주님은 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 하나 하나를 사랑으로 대해 주십니다. 주님을 멀리 떠나 자기 혼자 살 수 있을 것처럼 교만을 부리다가 넘어진 사람을 찾아가십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돌이켜 볼때도 주님이야말로 넘어진 양을 일으켜 세우는 선한 목자이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사람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넘어진 베드로의 영혼을 일으켜 세우시고, 새 힘과 새 용기를 주시고, 새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온유와 사랑과 인내로 넘어진 양을 부뜰어 세우십니다. 주님은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넘어졌을지라도 왜 넘어졌느냐고 추궁하지 아니하시고 나를 일으켜 세우시려고 조용히 다가오십니다.
시편 56편 13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을 발견합니다.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치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라고 말씀했습니다. 시편 100편 3절에서도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오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그의 백성,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으면서도, 주님의 인도와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도, 때때로 낙심하고, 절망하고, 좌절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자신감을 갖는다는 것도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맥없이 비틀거리고 쓰러지기 쉽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믿음이 자라난 것 같아서 교만해 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 이런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했습니다.
그러면 양들이 왜 넘어집니까?
필립켈러라는 분이 쓴 '목자가 본 시편 23편'이란 책에서 네 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로, 너무 편한 곳을 찾다가 넘어진다고 합니다.
양들은 옴폭하고 편한 곳이 있으면 '편해서 좋다. 편해서 좋다'하다가 그만 자빠지고 맙니다. 마찬가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도 고생 없이 평안히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위험한 것입니다. 편한 것만 찾다가는 넘어지기가 쉽습니다. 가령 우리가 뛰는 것보다는 걷는 게 쉽습니다. 걷는 것보다는 서 있는게 쉽습니다. 서 있는 것보다는 앉아 있는 것이 편합니다. 앉아있는 것보다는 누워 있는 것이 편합니다. 누워 있는 것보다는 자는 게 편합니다. 자는 것 보다 아주 자면 더 편합니다. 편한 것 편한 것 찾다가 발라 자빠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좀 힘들고 귀찮아도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도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연습은 같은 일의 반복입니다. 지루하고 귀찮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연습은 실력의 향상을 가져오고, 믿음의 성장이 있게 합니다. 학생 치고 공부하기 좋아하는 학생은 거의 없습니다. 만에 하나 정도의 학생은 공부 안 하면 죽을 정도로 싫다는 학생이 있다고 합니다. 보통은 주일이 좋고, 공휴일이 기다려지고, 방학이 되면 신명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휴일이 싫을 정도로 공부가 좋은 학생은 정신과 전문이의 말에 의하면 머리가 조금 돈 경우라고 합니다. 공부는 싫어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정에서 자녀들이 공부 안 하겠다고 하면 야단치지 말고 하나님께 '정상적인 자녀 주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왜 싫은 공부를 해야 합니까? 공부 안 하면 상급학교 진학을 할 수 있습니까? 입시 시험에 합격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싫어도 해야 하는게 공부 아닙니까? 내려가는 것은 힘쓰지 않아도 쉽게 내려갑니다. 그러나 올라갈면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평안하고 쉬운 곳만 찾다가는 내 영혼이 넘어지기 쉽습니다.
둘째로, 털이 너무 자라면 넘어진다고 합니다.
양의 털이 자라는 것은 자연입니다. 그 털로 우리 옷을 만들어 입지 않습니까? 그런데 너무 길게 자라면 거기에 오줌이 묻고 똥이 묻어 마르면 딱딱해 지는데 지나가다가 나뭇가지에 걸리면 뱅그르르 돌아서 자빠지게 됩니다. 성경에서 털은 그리스도인의 낡은 습관에 비유해서 말씀했습니다. 자기 중심의 생활입니다. 꼭 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길어지고 길어지면 자빠지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갈 때 털옷을 입고 들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퍽 의미 있는 일입니다. 양털은 자신의 자랑과 개인적인 우선권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마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양의 털이 너무 길면 무거운 털로 인해서 양이 넘어지기 때문에 선한 목자는 양의 털을 깎아 주어서 넘어지는 위험에서 건져줍니다. 그런데 이것이 양에게는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양은 털을 깎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실은 목자에게도 힘이 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취미나 습관 중에 그것이 꼭 죄는 아니더라도 그것이 길어지고 너무 깊어지면 자빠질 위험이 있는 것이 없습니까?
전에 어느 농촌에서 목회 하시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농번기에는 교인들이 다 밭이나 논에 나가 일을 하기 때문에 심방도 할 수 없고, 좀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지만 혼자 몸으로 누구는 돕고 누구는 안 돕고 할 수도 없어서 낚시를 배워가지고 거기에 재미가 붙었습니다. 그리고 고기가 아침과 저녁에 잘 물리니까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에야 돌아오곤 했습니다.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이 목사님이 여느 날이나 다름없이 낚시 기구를 가지고 낚시를 나가는데 어느 여집사님이 정장을 하고 찬송 성경을 끼고 어디를 가시더래요. 그래서 목사님이 "집사님, 이렇게 아침에 어디가세요?"하고 인사를 했더니 그 집사님이 "아니, 어디가다니요? 교회에 가지요. 오늘이 주일 아닙니까?" 이렇게 되면 일 다 된 거지요. 여러분, 낚시가 죄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 깊어지면 목사가 주일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우리 삶의 주변에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자빠질 염려가 잇는 것은 아쉬워도 잘라 버려야 합니다.
친구 사귀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라면 잘라 버려야 합니다.
셋째로, 양이 너무 비대해 지면 넘어진다고 합니다.
양이 너무 비대해 지면 건강에도 좋지 않고 생산도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대한 양일수록 더 넘어지기를 잘합니다. 체중이 무거운 양일수록 자연히 느리고 둔합니다. 다리는 가는데 위는 무거우니까 돌에 걸리기만 해도 나가자빠지고 움푹한데 빠져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자빠지고 맙니다.
사람도 그렇잖아요? 위가 좀 무거운 분들은 자빠지기도 잘하고 발목도 쉬 상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이런 비대한 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엄격한 정량의 사료로 배급량을 줄입니다. 목자의 소원은 비대하고, 연약하고, 무기력한 양이 아닌 튼튼하고, 정력적이고, 민첩한 양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몸이 너무 비대해지면 성인병이 생기는 것 때문에 가족들이 걱정합니다. 그래서 절식을 해야 하는데 이것이 그렇게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해야될 줄 알면서도 실제가 어렵습니다. 본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절식을 하면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고 합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수입은 적은데 소비열량은 많아서 그럽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집사님은 그런 분들을 위해서 단식원을 경영하는데 일단 입원을 하면 식사는 안주고 아침, 점심, 저녁 세때 녹즙을 한그라스씩 줍니다. 그리고 7-8㎞ 걷고 뛰게 합니다. 먹은 것 없이 걷고 뛰니까 얼마나 고생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몸이 빠지는데 열흘정도 하면 10㎏정도가 빠져 보기에도 나타나고 본인도 몸이 가벼워 진 것을 느낄 정도입니다. 그리고 퇴원할 때는 150만원 내고 나옵니다. 안 먹고 돈 내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되고, 성공적일 때, 안정감과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때가 어떤 의미로 위험한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기적으로 건너게 되고 난경불락의 도성 여리고를 성공적으로 함락시키고 그 다음 작은 성 아이성과의 전투에서 완패의 쓴잔을 마시게 된 사실을 기억하시지요? 우리가 축복을 받았을 때, 우리가 은혜를 받았을 때, 우리가 성공을 했을 때 사실 그 순간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위기 일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 이후를 조심해야 합니다. 응답 이후를 조심해야 합니다. 성취이후를 조심해야 합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내 뜻대로 되어 질 때 그때가 내 삶에서 가장 무서운 위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요한계시록 3장 17절에 지적한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비록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부유하고 풍부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는지 몰라도 실상은 절망적인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상 적인 보이는 것의 성공이 반드시 영적인 건강의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아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단련시키기로 한 사실을 말씀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힘들고 고달픈 일이 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비대해져서 제 몸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다가 넘어지고 마는 양이 되기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무서운 불운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강인성은 인내와 고생의 단련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세상 적인 것으로 인해 너무 살이 쪄있는데 이것을 좀 빠지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좀 괴롭고 힘이 들어도 우리에게 훈련을 시킵니다. 막 괴롭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결코 기대하시거나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들고 괴로운 훈련을 받을 때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신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믿음과 신뢰는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내 영혼을 소생하게 하시고 새롭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왜 양이 넘어집니까?
넷째로, 너무 힘들면 지쳐서 넘어 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면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납니다. 시편에 보면 '우리가 넘어지나 아주 넘어지지 아니함은 여호와의 오른손이 나를 부뜨심이요'라고 말했습니다.(시 37:24)
고린도후서 4장 8절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은 사람도 세상에서 넘어질 때가 있고, 실패할 때가 있고, 환난을 당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안에 잇는 사람은 환난과 역경 그리고 실패 속에서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능력의 오른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싸임을 당해도 싸이지 않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합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나 버린바 되지 아니합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필립스의 번역대로 표현하면 Knock down 당합니다. 그러나 망하지 않습니다. Knock out 되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은 어떤 환경과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그러나'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위로 받을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절망적인 상황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절망이란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절망적인 상황을 주님의 약속을 향한 전진의 기회로 변화시키는 생활을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가운데 놓였을 때 체념하고 포기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 말씀을 보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선다'는 말은 계속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때로는 우리 앞에 원치 않는 장벽, 막힐 때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어려운 길을 가지 않게 하겠다'고 말씀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은 많습니다. 이제 다음 주일 생각하겠습니다마는 우리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해 다른 좋은 길을 예비해 두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절망하지 말고, 주저앉지 말고, 이 절망적인 상황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전진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영이 편한 자리에 누우려 하지 않습니까? 양의 털이 너무 자란 것처럼 세상것 때문에 걸려 넘어질 염려는 없습니까? 아쉽고 힘들어도 자랄 버려야 합니다. 세상일이 너무 잘되어서 자만심에 빠진 분은 안 계십니까? 주님 앞에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앙망합시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 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심령이 피곤하고 지쳐서 거의 자빠진 분 안 계십니까? 선한 목자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붙들려 영혼이 소생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