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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 하나님의 활동(the Work ‘ἔργον’) 이다. 인간의 영광을 티끌 속에 묻어 버리고 인간 자기 힘으로 혼자 할 수 없는 일( the Work ‘ἔργον’)을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하시는 것이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도록 준비되는 순간이다. ”
(믿음으로 살리라 111)
요한복음 6:22-40
일은 인간에게 숙명적인 것이다. 필자는 30년 이상 약사로서 일했다. 일하는 도중 힘들어 그만 두고 싶을 때가 많았다. 하여 2년 동안 일하지 않고 논 때가 있었지만 일하는 것보다 더 힘들어 다시 일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의 일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요한복음 6장 22에서 40절까지 기록된 기사에서 보면 우리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하시는 일이 있다.
무엇이 하나님의 일일까?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떤 일을 해서 주님께 잘했다고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요한복음 6장 28에서"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라고 질문했다.
요한복음 6장 29에서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고 답하셨다.
이 기사를 이해하기 전에 있었던 직전의 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 마태복음 6장 상단에서 기록된 사간을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동편 벳세다 광야에서 가난하고 작은 아이가 한끼를 먹기위해 어머니가 준비하여 내어놓은 보리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5천 명 이상 배불리 먹이셨던 기적같은 일이 사방으로 퍼졌고 , 이 일을 통해 무명이었던 예수님이 집중도와 관심이 커졌고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이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의 하신 일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지도자가 되면 늘리고 불리고 커지는 일에 엄청난 도음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일임을 알았다. 사람의 관심사는 예나 지금이나 늘라고 불리고 커지는 것이 아닌가?
22절 이하를 보자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 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요 6:24.25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이튿날(아침일찍KSV)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벳세다 광야가 아닌 갈리리 서쪽에서 예수를 호기심으로 보거나 새로운 인물에 대한 기대감에 들뜬 정치적으로 관심 있는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찾아 왔다
"랍비여 어느 때(언제)에 여기 오셨나이까"(2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먹는 것에 관심 두지 말고)" "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 도리어 영적인 양식에 관심을 두거라)"(27)
이 말을 들은 무리는 대뜸 이렇게 질문한다
요 6:28절 "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the Works of God. ἔργα)을 하오리이까"
그들은 어제 오병이어의 일을 기억하면 사람등의 먹는 수고를 덜어 주는일을 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우리의 일 (=사역 ἔργα)즉 먹고 마시고 시집보내고 장가보내는 세상일과 동일하게 생각하면서 하나님도 우리와 같은 일을 합니까 라고 물은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분명하게 답하셨다.
29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the work of God. ἔργον)이니라 하시니"
우리는 헬라어를 잘 몰라 생경하다 . 그러나 성경에는 분명하게 말한다 무리들은 복수(ἔργα)로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단수(ἔργον)로 대답하셨다. 번역에 번역을 거듭하며 의미는 희미해진다. 하지만 당시에 모국어로 헬라어를 쓰는 자들에게는 우리 언어 "들어라" "먹어라"가 즉시 같은 뜻으로 알지 않듯이, 그들에게도 이 복수와 단수의 의미를 확실히 구분할 줄 알았다.
복수는 우리의 일이고 단수는 하나님의 일임을 담박에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 의도적으로 질문한다.
30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그럼 사람으로서 이적도 행(복수)하였는 그럼 어제 행하신 이적도 하나님의 일이지 않습니까?
본문 주위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처럼 우리도 흔히 하나님의 일을 전도, 봉사, 구제 등 구체적 어떤 일(사역)을 생각하곤 한다. 특히 27절의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것을 오해하여, 영생의 대가(代價)를 마치 인간의 일을 행함으로 즉 선한 일과 좋은업적을 행함으로 나온 업적 덕택이라고 여긴다.
당시 유대인은 인간의 힘으로 어떤 고등 노동들(하나님의 일들)을 하므로 영생을 얻고자 했고 또한 일의 수량에 의하여 문제 해결을 보려고 한 것이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당시 유대인처럼 자기의 어떤 고등 노동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신 “일”은 노동을 의미하는 일이 아니라 신앙을 의미하였음을 모르고 엉뚱한 대답을 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어떤 일들이 하나님의 일이냐는 질문에 주님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로 그 일이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고 말씀하심으로 모든 다른 일들 곧, 인간적인 어떤 노력과 수고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유일한 일이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스펄전(Spurgeon)은 말하기를, "작은 믿음은 영혼을 하늘로 가져가고, 큰 믿음은 하늘을 영혼에게 가져온다"라고 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해낼 수 없다.
오병이어의 경험에서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는 것은 육신의 배부름으로 채워주는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잘못된 신앙관을 가졌다.
하나님께 감사가 없으면 원망과 불평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일(단수)과 하나님의 일들(복수)로 표기한다.
28절의 유대인들이 질문할 때의 “하나님의 일은” 복수(the Works of God)이고, 주님의 대답은 정관사가 붙은 단수(the work of God)로 대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자를 헬라어는 ‘엘가’(ἔργα복수)라 한다. 엘가를 쓸 때는 통상 자기 생각과 상식, 자신이 깨닫는 범위에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믿고 행하는 일들을 뜻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후자 “하나님의 일(the work of God)”이란 단수로서, 헬라어로는 ‘ἔργον’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이란 어떤 행위적인 일을 하기 전에 먼저 보내신 자를 믿어야만 한다. 이 순서가 뒤바뀌면 안 된다. 먼저 보내신 자를 믿는 일, 하나님의 일( ἔργον 엘곤)에 한 후에야 하나님의 일들(ἔργα엘가)을 제대로 할 수가 있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일 과 사람의 일에 관하여 구체적인 사건이 하나더 나온다. 그것은 바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있었던 베드로와의 대화에서 단서를 찾는다.
마가복음 8장 27절 ~ 38절
이때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이 아니라 거의 마치는 무렵 유월절 직전의 사건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수차레나 십자가의 희생에 대한 필요성을 이미 많이 알려줬고 제자들의 귀에 박히도록 강조했었다.
27절 "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가이사랴 빌립보 혹은 빌립보 가이샤랴는 지금의 레바논 남부지방의 이방 도시였고 가이샤랴는 시이져 황제를 이르는 말로 시이져 황제의 도시였을 뿐 아니라 헤롯 빌립보 즉 헤롯대왕의 이름을 같이 붙여 그들이 세운 기념비적인 도시였다. 이곳에는 당시 유대 포함한 근처의 도시 중 가장 화려하게 꾸민 국제 도시로서 로마의 이방 문명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사역을 하시다가
그들에게 예수에 대한 주위의 평판을 물었다.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한다.
28절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절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침묵을 깨고 항상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모범답안을 내 놓았다.
30.31절 "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전부터 제들에게 사역에 관한 개괄적인 일을 진술했지만 오늘은 구체적으로 예수님 자신의 일이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는 것이라고 비밀을 말했다.
이 말씀에 화가가서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이렇게 이렇게 말한다.
32절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베드로가 예수의 소매를 바싹 당기고 그에게 거칠게 항의하였다"(새번역)
"Then Peter took Him aside and began to rebuke Him" (NKJV) 여기서는 "예수께 비난했다."고 표현한다.
33절 "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에게 쎈 말을 하신다. " 사단아 네 뒤로 물러가라" "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여기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언급하셨다.
슬픔과 놀라움으로 입을 다문 채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들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베드로의 시인을 받아들이셨는데 바로 그가 이제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씀을 하시니 그들은 이해가 잘 안가는 모양이었다. 베드로는 침묵을 지킬 수 없었다. 그는 선생을 굳게 붙잡고 마치 예수를 마치 절박한 죽음에서 끌어내려는 것처럼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 하리이다”라고 부르짖었다.베드로는 그의 주를 사랑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자기를 고난에서 막겠다는 욕망을 나타낸 베드로를 칭찬하지 않으셨다. 베드로의 말은 큰 고난을 앞두고 계신 예수께 도움과 위안이 되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말은 잃어버린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에 일치하지 않았으며, 예수께서 친히 모본을 보이심으로써 가르치러 오셨던 자아 희생의 교훈과도 일치하지 아니하였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업에서 십자가를 보고자 하지 않았다. 베드로의 말이 주는 인상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따르는 자들의 마음에 끼치기를 원하셨던 것과는 정 반대의 것이었다. 그래서 구주께서는 당신의 입술에서 떨어진 책망 중에 가장 가혹한 책망의 말씀을 하시게 되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사단은 예수를 낙심하게 하여 그를 그 사명에서 돌아서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으며, 베드로는 그의 맹목적 사랑으로 유혹의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생각의 장본인은 악의 임금이었다. 그 충동적 호소의 이면에는 그의 교사(敎唆)가 있었다. 광야에서 사단은 굴욕과 희생의 길을 버리는 조건으로 세상의 통치권을 주겠다고 그리스도에게 제의하였었다. 이제 사단은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그 같은 시험을 제시하고 있었다. 사단은 예수께서 베드로가 그의 눈을 돌려 보기를 원하신 십자가를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세상의 영광에 시선을 집중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사단은 베드로를 통하여 다시 예수에게 유혹을 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구주께서는 시험을 거들떠 보지도 아니하시고 당신의 제자를 위하여 염려하셨다. 사단은 그 제자의 마음이 자기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굴욕을 당하시는 것을 보고도 감동을 받지 않도록 그의 선생과 베드로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베드로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베드로를 구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힘쓰고 있는 자에게 하신 것이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나와 나의 실수하는 종 사이에 더이상 개입하지 말라. 내가 베드로와 직접으로 면대하여 나의 사랑의 오묘를 그에게 드러낼 수 있게 하라.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길이 고뇌와 비천으로 수놓여졌다는 사실은 베드로에게 쓰라린 교훈이었고 그는 이 교훈을 느리게 깨달았다. 이 제자는 그의 주님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풀무불의 열기속에서 그는 그 축복을 배우게 될 것이다. 오랜 후에 그의 활동적이던 몸이 연령과 활동으로 굽어졌을 때 그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 13)고 기록하였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희생의 생애가 제자들이 따라야 할 생애의 모본이 됨을 그들에게 "하나님의 일"로서 설명하셨다.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사람들을 제자들과 함께 가까이 부르시고 마침내 34절을 말씀하신다.(cf:마 16:2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하나님의 일)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시므로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설명하셨다.
사람의 일이라는 관점에서 이 성경구절을 보자. "아무든지 출세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기를지고 나를 좆을 것"이라고적용 다면 이보다 더 모순된 구절이 없다. "아무든지 출세 하려거는 자기를 높은 위치에 올려 놓고 남에게 나의 모든 책임을 전가하라" 라고 해석해야 맞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가 진짜 죄인임을 자각하는 것이요 .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 내 눈에 보이는 앞의 타인(네 눈에 띄는자가 네 십자가다)이 내 십자가요 그들을 감당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그리스도를 안 따라가는 나는 누구일까? 생각 속에 그리스도 없는 나는 그리스도인 맞는가? 예수님의 명령을 경히 여기는 내가 에수님의 제자 맞는가? 행위 속에 그리스도의 긍휼이 없는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과연 타당하가나 한가? 그리스도를 따라가지 않는데 그리스도인인가 ? 외계인 ?
이어지는 마가복음 8장 35절에서도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말씀으로 잘 풀어내고 있다. "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세상의 일은 소유하고 갖고 높아지고 불어나는 것이 사람의 일 이지만 하나님의 일은 작아지고 죽고 희생하는 일이다, 번영을 위해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나의 정체성이 뭔가? 내가 누구인가 ? 그리스도에게 속한자임을 확인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마가복음 8:36.37.38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 하나님의 활동(the Work ‘ἔργον’) 이다. 인간의 영광을 티끌 속에 묻어 버리고 인간 자기 힘으로 혼자 할 수 없는 일( the Work ‘ἔργον’)을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하시는 것이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도록 준비되는 순간이다. ”
(믿음으로 살리라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