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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現代繪畵와 海石美의 鑑賞
1) 해석문화의 발전적 課題
이제까지 우리는 우리의 전통문화가 지닌 미의식을 바탕으로 해석 감상의 세계를 살펴보았다. 이렇게 해석 감상의 세계를 전통문화의 미의식에 바탕을 둔 것은 실제 이러한 전통적인 미의식이 해석의 장르를 이루며 작용하고 있는 현실에 우선 접근하기 위한 것이고, 다음으로 전통문화의 미의식에 바탕을 둘 때, 적어도 우리 민족의 정서와 체취를 담아내는 해석문화를 이룩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였다.
나아가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듯이, 먼저 우리 것인 전통문화를 해석문화의 큰 틀로 했을 때 우리의 해석문화가 세계적인 해석문화가 될 수 있다는 확신 또한 컸기 때문이다. 어차피 각국의 문화는 세계문화라는 큰 틀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할 것이지만, 문화적 우월성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석학들의 예측은 우리 수석인들로 하여금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문화의 주체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다. 전통문화를 이러한 주체성을 확립하는데 무엇보다 긴요한 것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전통문화는 수석문화를 발전시키는 토대이자 토양이며 길잡이인 것이다.
한편 전통문화를 세계적인 문화로 발전시켜 나가려면 우리 전통의 틀과 振幅을 넓혀야 하는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국이 지닌 문화 전반을 이해하고 그것을 消火하고 吸收할 수 있는 문화적인 胃腸을 키워가며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문화적 위장을 키우는 데는 별다른 王道가 있을 수 없다. 오직 각국의 문화를 유기적인 관점에서 깊이 탐구하는 길뿐이다. 그러나 광범위한 각국의 문화를 여기서 두루 취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해석을 감상하는 주된 방법이 회화와 조각적 안목에 있으므로, 현재 각국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現代美術의 내용과 경향을 살피는 것으로 해석문화의 넓이와 깊이를 더하고자 한다.
미술의 세계는 넓고 깊다. 특히 현대미술은 난해한 존재이다. 이런 미술의 세계를 海石과 관련하여 살펴본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해석문화를 발전시켜 세계적인 것으로 나아가려면 해석인이 어차피 넘어야 할 커다란 바위이기에 스스로 파도가 되어 부딪혀볼 수밖에 없다. 현대미술에 관한 이해와 소화, 그것은 세계를 향해 가는 海石文化의 課題이다.
2) 海石美 감상과 現代美術의 흐름
바닷돌을 탐석하다 보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형상이나 문양을 자주 만난다. 어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돌의 숫자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다. 더욱이 이런 돌에 웬일인지 마음이 자꾸만 끌리면 모셔갈 것인가 아닌 가로 고민스럽기까지 하다. 이러한 고민을 지워버리기 위해서도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현대미술의 흐름을 해석의 감상이라는 관점에서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가. 눈으로 보는 그림
자연현상이나 사물을 그대로 그려놓은 그림은 누가 보아도 그것이 무엇을 그렸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그림과 같은 돌의 문양이라면 우선 그 문양을 감상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다. 오히려 사실과 꼭 닮았다는 것만으로도 놀라고 감탄할 일이다. 사람이 그린 것도 아닌데 자연의 문양이 어쩌면 이럴 수 있나 하는 묘감에 젖어들어 이런 문양석과 만났다는 사실을 수석 하는 보람으로 생각 할 것이다. 더욱이 이런 사실적인 문양을 이미 살펴본 전통문화의 미의식을 바탕으로 감상을 할 때는, 사실적인 문양이라는 신비감이나 묘감에 더하여 그 감상의 깊이와 폭이 더욱 넓어질 것이다.
이런 사실적인 그림을 좀더 짚어보면, 아무리 사실을 그래도 그린 그림이라 할지라도 사실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어디까지나 회화적인 표현을 한 것에 불과하다.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는 데는 알다시피 몇 가지의 표현기법이 있다. 역으로 사실적인 그림이란 이런 표현기법에 따른 그림이다.
그림의 역사에서 사실적인 표현기법이 발견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예컨대 고대의 고분벽화나 원시의 고분벽화는 사실을 그렸음에도 실제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그림은 2차원적인 平面畵이기 때문에 사실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사실로 보이게 하려면 우선, 현실을 화면에 옮겨온 듯한 空間感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공간성을 표현하는 방법이 遠近法이다. 즉 멀리 있는 것은 멀리, 가까이 있는 것은 가깝게 느껴져야 공간감을 가질 수 있으며,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된 방법이 원근법이다.
둘째로, 어떤 물체가 현실적인 것으로 보이려면 입체적인 것으로 보여야 한다. 이와 같은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해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을 가려 표현하는 기법이 明暗法이다.
셋째로, 사람이든 새든, 꽃이든 간에 그림은 살아 있는 것 같아야 된다. 다시 말해 생기가 있어야 되는데, 이미 창백해진 시체에서 생기를 느낄 수 없듯이 사물에는 색채가 있어야 된다. 따라서 실체를 그리려면 색채를 적합하게 칠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어떤 사물에 원근감을 주고, 빛의 밝기를 불어넣고, 색칠을 한다고 해서 실물과 똑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무생물인 경우는 이와 같은 표현기법으로 실체를 그대로 그리는데 별 문제가 없겠지만 생물인 경우에는 生動感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생동감을 주려면 아무래도 구조적 메카니즘이 동원 되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解剖學 등 生態分析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끝내는 魂을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표현기법을 사람들이 찾기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 방법 때문에 그림은 사실을 그대로 재현해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눈으로 보는 사실적인 그림의 세계다. 실제 우리가 탐석을 해보면 어느 정도는 모르지만 사실적 그림과 같이 원근이나 명암이 처리된 문양석은 극히 드물다. 더욱이 분석적인 면이나 색채가 실물의 것 그대로 되어있는 것은 더더욱 드물다. 하물며 혼을 이야기해서 무엇하겠는가.
사실 문양석의 대부분은 고분벽화나 우리의 민화같이 2차원적인 평면화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면화를 아무런 거부감 없이 사실화로 보고 있다. 또한 옛 그림이 대부분 평면화라 해도 그것을 사실화로 감상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우리가 문양석을 보는 방법은 화가가 어떤 현상이나 사물의 특징적인 요소, 즉 회화적인 요소로 그림을 그려내듯이, 우리 수석인들도 문양에서 특징적인 요소를 가려내어 감상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문양에서 이런 특징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데는 直視的인 판단이 가능한 대상 이외에는 우선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 보는 눈을 기르려면 평소 자연과 사물을 세심히 살펴보고 그것을 돌의 문양과 견주어 보는 습성을 길러야 한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年輪이나 眼目은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연륜이 쌓이고 안목이 깊어지면 공중에 떠있던 매가 물 속의 고기를 낚아채듯이 문양의 상징을 순간적으로 포착할 수 있게 된다. 돌의 문양이 사실적이라 해도 보는 이에 따라서 解釋이 다를 수 있다. 어찌 보면 이것이 수석의 묘미이자 眼目의 함정일는지 모른다. 따라서 海石은 解釋을 잘 해야 된다.
끝으로 우리가 이미 수석이론에서 문양석은 사실을 그대로 닮은 것보다는 비슷하면서 정서나 해학성이 강조되어 있는 것이 더 묘미가 있다는 점도 새겨둘 필요가 있다.
나. 마음으로 보는 그림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그림에는 사실적인 그림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림에 따라서는 사실적인 표현기법인 원근법이나 명암법, 해부학적 분석법, 그리고 색채를 아예 무시한 그림도 많이 있다. 즉,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사람의 마음인 주관이 강조된 그림으로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그림이 있다. 마음으로 느끼는 불안, 공포, 기쁨, 고통 등을 형태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나무가 빨갛다고 느껴지면 빨갛게 칠하고, 태양이 검다고 느껴지면 검게 칠한다. 또 태양이 빙빙 돈다고 느껴지면 태양에 팔랑개비를 단 듯 빙빙 도는 모습으로 그린다. 즉 가슴속에 묻혀 있던 뜨거운 감성을 일깨워내는 그림이 바로 마음으로 보는 그림이다. 다시 말하면 주관적 표현주의의 그림이다.
이런 그림을 보면 그림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였는지, 나아가 무엇을 그렸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면서도 이런 그림은 아름답고 무엇인지 모를 뭉클함이 있고 무척 감미롭다. 격정이 저절로 치솟게 하는 등, 화면을 뛰쳐나오는 그 어떤 메시지에 흡입되기도 한다. 하지만 미술에 문외한은 이런 그림의 회화적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답답하다. 이 답답함을 때때로 '요새 그림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식으로 치부하고 아예 고개를 돌리는 경우가 있다. 좋으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그림들, 돌밭에서 이런 그림을 보면 알 수는 없으나, 문양이나 색채에 마음이 끌려 일단 주워들었다가 아무리 보아도 무엇인지 알 수 없어 그대로 돌밭에 두고 온 경험이 해석인들 중에는 더러 있을 것이다. 그리고 훗날에 그 문양이 명화처럼 명석이었다면 어쩌나 하는 아쉬움도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후회 없는 탐석을 위해서, 또 안목을 넓히기 위해서도 마음으로 보는 그림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어찌 보면 이것은 수석감상의 제2의 도약일는지 모른다. 마음으로 보는 그림을 살펴보면.
첫째, 뭉크의 '절개'와 같이 눈으로 보는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주관적인 마음으로 느낀 불안이나 공포를 강조하기 위해 형태를 일그러뜨린 그림이 있는가 하면.
둘째로, 고흐의 '까마귀가 있는 보리밭'과 같이, 어떤 사물 등 대상에서 받은 감동을 그대로 표현한 그림이다. 나무가 빨갛다고 느끼면 빨갛게, 태양이 빙빙 돈다고 느끼면 돌아가는 듯 그린 그림이다. 즉 마음으로 느끼는 형태나 색깔을 과장하거나 변형시켜 가슴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뜨거운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이다.
셋째로, 근대의 산업문명이나 도시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인간의 순수한 마음으로 느끼는 대상을 그대로 그리는 그림이다. 고갱은 때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을 지니려고 타히티 섬으로 가서 원시인이나 다름없는 그곳 원주민과 더불어 살면서, 원시의 순수한 마음으로 사물을 새롭게 다시 보고 이것을 화폭에 옮겼다. 이상에서 살펴본 그림들은 사실적 눈이나 이지적인 눈과는 달리 비논리적이고 비분석적이다. 이런 그림에서는 형태의 윤곽이 분명치 않고 어느 그림은 아예 형태가 깨져있는가 하면 색채가 지니는 미묘한 감성의 차이도 무시되어 있다. 물론 원근이나 명암, 그리고 입체감도 무시하고 있다. 즉 눈으로 보는 객관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이렇게 객관성을 갖출 필요가 없다는 것이어서 결국 화가가 형태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음을 의미하게 된다.
넷째로, 마티스는 고흐나 고갱보다 형태를 더욱 일그러뜨렸고, 고갱보다도 더 격렬하게 색채를 칠해나가 野獸派라는 이름까지 얻었다. 격렬한 색채를 칠하다 보니 형태에서 색채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여 결국 형태에서 색채가 해방되었다. 위에서 예시한 뭉크나 고흐, 고갱의 그림에서는 형태가 깨지고 색채가 형태의 예속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무엇을 그렸는지는 알 수 있는 그림이어서, 그림에 문외한이라도 충분히 미감을 느낄 수 있는 정도의 회화적 변화다.
다섯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추상화의 선구자인 칸딘스키의 '즉흥35'라는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을 보면 형태와 색채의 구별이 없다. 색채가 형태에서 빠져 나와 색채만을 그림이 이루어졌다. 결국 칸딘스키는 형태 없이 색채만으로 그림을 시도한 것이다. 아무 형태 없이 인간의 내면에서 요동치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끌어내어 화면에 격렬하게 쏟아 붓는 그림이 바로 '즉흥35'와 같은 추상화이다.
여섯째로, 잭슨 플록의 '집중'과 같이 화가가 아예 페인트 통과 붓을 들고 캔버스 안으로 들어가 그린 그림을 보자. 캔버스로 들어간 잭슨은 마음을 완전히 풀어 젖히고, 자신의 내면 세계의 율동에 따라 슬픔과 놀람과 분노 등을 분출시킨 그림이다. 결국 뭉크나 고흐의 방법을 가지고 스스로 캔버스 안으로 들어가 더욱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칸딘스키나 잭슨 플록의 그림을 보면 도대체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다. 인간 내면의 형태 없는 에너지를 그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려낸 것이다. 만일 이런 그림을 좋아하는 수석인이라면 그는, 보아서 이것이 무엇이라고 얼른 알아낼 수 있는 직시적이고 사실적인 문양석에만 안주하지 말고, 자기 내면의 소리에 같이 울려주는 문양석, 즉 共嗚하는 문양석을 찾아 즐기며 더욱 넓은 애석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마음의 눈으로 보는 그림의 세계를 간추려 보는 의미에서 마음의 눈을 살펴본다. 마음은 뜨거운 용광로이다. 모든 것을 녹여버리는 용광로이다. 가령 바위에 앉아있는 仙人像을 마음의 눈으로 보는 그림으로 그리기 위해 이 마음의 용광로에 넣는다고 가정해보자.
첫 단계에서는 뭉크의 '절규'와 같이 형태가 일그러져 흐물흐물해질 것이다. 둘째 단계에서 더 열을 가하면 형태는 더 일그러지고 색채는 형태 밖으로 빠져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셋째 단계에서 더 열을 가하면 완전히 녹아버려, 녹아 헝크러지는 형태가 되어 결국 그것이 무엇이었나를 알 수 없는, 즉 正體性이 없는 기이한 형태가 될 것이다. 넷째 단계에서는 형태와 색이, 사람으로 보면 뼈와 살이 녹을 정도로 완전히 녹아버리면 용광로 바닥에는 진한 액체, 또는 찌꺼기만 남을 것이다. 이것을 그릇에 담아 캔버스 위에 흘리고 뿌리면 잭슨 플록의 '집중'과 같이 전혀 형태가 없는 그림인 추상화(추상표현주의)가 될 것이다. 이런 그림이기 때문에 칸딘스키나 잭슨 플록의 그림이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그림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사실적인 그 무엇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현대의 그림이 난해한 것이다.
다. 理性으로 보는 그림
감각적인 눈이나 주관적인 마음의 눈보다는 이성의 눈을 강조하고 있는 그림이다. 즉 물리적인 감각으로 대상을 보는 눈(眼)이나 五慾七情에 따라 대상의 느낌이 달라지는 마음의 눈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知的인 思惟過程을 통해서 대상(事物)을 分析하여 그린 그림으로, 현대미술의 대부분은 이런 분석적인 눈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분석적인 눈을 통한 몇 가지 표현방법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이 묶어볼 수 있다.
첫째, 형태의 본질을 빛으로 본 印象派의 그림이다. 인상파 화가들은 이제까지 화실에서 그리던 캔버스와 붓을 들고 밖으로 나와서 야외의 햇살 아래서 그림을 그렸다. 모든 물체는 내리쬐는 햇살로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음을 보고, 빛을 형태의 본질로 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外光派라고도 한다.
인상파는 빛을 형태의 본질로 보았기 때문에 마네의 '해돋이'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형체의 밝은면 만을 그리되, 빛의 변화에 따라 물체의 모양이 달라지므로 순간적인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서 되도록 그림을 빠른 순간에 그리려 했다. 나아가 빛에 따른 색채의 가시석 효과를 노리기 위해 물감을 점으로 찍어 가는 표현방법(新印象派)을 쓰기도 했다. 바닷돌 중에서 검은 바탕에 노란 점을 붓으로 찍어낸 듯한 돌을 보면 그 색이 마치 강한 햇살인 양 유난히 선명한 것을 보면 이 點描法의 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둘째, 형태의 본질을 원통으로 본 세잔은 인상파의 순간 포착이나 빛나는 색채는 인정하면서도 그림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보았다. 이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형태라는 것이다. 그는 인상파의 말대로 아침에 보는 사과와 점심에 보는 사과, 그리고 저녁에 보는 사과가 빛에 따라서 달리 보일지라도 사과는 사과로서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형태라는 것이다.
그는 미술의 본질은 형태에 있고, 지상에 있는 모든 형태는 球나 圓筒, 그리고 원뿔(圓錐)이라는 본질적인 형태로 단순화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예컨대 사람을 머리인 求와 원통인 몸체와 팔다리로 단순화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이러한 변하지 않는 고정적인 형태에 빛나는 색채를 주기 위해 표현의 필요에 따라 빛의 영향을 자의적으로 조정해가며 그림을 그렸다. 즉, 그는 원근법의 시점을 자유롭게 잡아갔을 뿐만 아니라 명암법도 파괴해버린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림이 내부의 造形世界로 급속히 발전해 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점 때문에 그를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다.
셋째, 圓筒을 입체로 본 피카소, 피카소도 미술의 본질을 형태로 보아 세잔의 造形思考를 계승했다. 그는 '형태란 面과 面의 集合'이라고 했다. 즉, 형태란 앞면, 뒷면, 윗면으로 구성된 입체의 덩어리로 보았다. 또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서 시간마저도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인 존재임을 보고 그림에서도 전. 후. 상에서 본 이 면들을 펼쳐놓는다(2단계). 그런 다음 각각의 면 조각들을 짜 맞춘다(3단계). 이렇게 하면 입체파 그림(分析的 立體派)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림은 종래의 3차원적에서 4차원으로 차원을 높인 것이지마는 도대체 무엇을 그렸는지 혼란스럽다.
인간이란 대상을 볼 때 눈의 초점은 그것이 설사 순간적일지라도 고정되어 늘 3차원적인 것을 보고 살아왔기 때문에 4차원적인 것에서는 삶의 정서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숙제로 남았다. 이에 피카소는 분석적인 방법은 유지하되, 기쁨이나 슬픔 등 삶의 정서를 표현하는 방법을 찾았다. 즉 사물의 형태는 유지하되 그 속에서 분석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컨대 울고 있는 여인을 그리되, 양 측면에서 본 결과 정면에서 본 얼굴을 결합하면 얼굴의 형태가 유지되어 기쁨이나 슬픔 등 삶의 정서가 표현되는 것이다.(綜合的 立體派)
넷째, 입체를 면으로 본 몬도리안, 빈 맥주 캔을 세워놓고 위에서 발로 밟아 납작한 원이 되게 하듯이 피카소가 단순화시켜 놓은 입체를 한 번 발로 밟아보자. 그러면 단순화된 평면이 될 것이다. 이것이 소위 현대의 幾何學的 抽象美術이다. 예컨대, 나무를 단순화 시키면 수평선과 수직선이 결합한 형태가 될 것이고, 이것을 밟아 압축하면 수직선이 될 것이다. 수평선과 수직선을 조형적인 美感에 따라 배치한 그림이 '적.황.청의 콤포지션'이다.
이렇게 몬드리안에 이르면 그림은 더 이상 외부의 사물이나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이 아닌 것이다. 즉 그의 미술은 자연이나 인간의 삶, 그리고 그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點이나 線. 面(면). 色(색)과 같은 純粹(순수) 造形(조형)으로 그려진 미술세계인 것이다. 선과 선, 색과 면, 선과 면의 조화의 세계이다. 그러나, 자연물인 돌에도 순수 조형을 느끼게 하는 문양이 있으니 자연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고, 이것을 발견하여 즐기는 수석인 이야말로 행복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현대미술은 결국 삶의 이야기를 그림에서 지워버렸지만 수석인들은 그런 그림으로 오히려 풍류적 삶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4. 結語
다만
이 글이 해석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조그만 보탬이 되면 그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두연 선생님의 노고에 해석인의 한 사람으로써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