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몸짓
제14회 작품상
서태수
시간을 묵히고 공간을 누비며 흘러내리는 강의 몸짓은 언제나 묵언黙言이다. 강이 전하는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실상實相은 은유로 드러낼 뿐, 산에 들어 산을 볼 수 없듯 강에서는 강을 보지 못한다.
수수만년을 흘러내린 강. 강에는 무엇이 흐르는가. 물이 흐르는가, 시간이 흐르는가. 흐르는 것은 무엇이며, 흐르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강의 등짝에 새겨진 굴곡은 무엇이며, 도도한 물길 속에 잠겨 있는 산은 무엇이며, 잔잔한 수면에 엷게 비친 뜬구름은 무엇인가. 그리고 기나긴 강둑에 피고 지는 지상의 풀꽃들은 또 무엇인가.
금정산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산야山野를 감도는 낙동강이 굽이굽이 서려 있다. 서로 다른 골짝에서 모인 숱한 물길들이 한몸으로 꿈틀거리는 강. 부서지고 뭉개지면서 돌부리를 울리고, 때로는 폭포수로 뛰어내렸던 물길이다. 수많은 실개천이 하나의 몸통으로 엮인 물줄기는, 출신이든 이념이든 서로를 차별하지 않음으로써 도도한 강이 되어 끝까지 올 수 있었다. 근본이 개천이라고 손가락질하지 않고, 물빛이 다르다고 돌멩이를 던지지 않고, 물맛이 낯설다고 침 뱉지도 않았다. 물머리와 몸통과 물꼬리가 한데 어울려 어깨 나란히 겯고 출렁출렁 넘실넘실, 파란만장한 세상살이를 온몸으로 헤치며 굽이진 강이다.
강이란 무엇인가. 머나먼 근원에서 방울물로 솟아나 숱한 산길 들길 에돌아 감돌아 흘러내리는 도도한 물줄기만이 강은 아니다. 존재의 수평을 향해 낮은 곳으로 직진하는 천방지축天方地軸의 물줄기를 세상의 마음으로 가다듬어 주는 강둑이 있어야 한다. 강이란 두 개의 강둑과 그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다.
강의 등짝에는 그가 톺아온 세상의 기억이 알뜰살뜰 새겨져 있다. 바람에 돋은 양각, 빗물에 패인 음각, 성엣장 둥둥 뜨고 너테로 뒤엉겨서 난해한 상형문자를 새겼다. 구포龜浦에서 구미龜尾까지 거북등에 아로새긴 낙동강 물길문자는 영웅호걸,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누천년 역정이 켜켜이 일렁이는 갑골문자甲骨文字다. 여기에는 아직도 가야의 말굽소리와 6.25 포성이 들리며, 긴 강둑에는 방랑시인 김삿갓의 시구가 바람결에 낭랑하고, 객지살이 자식들 소식 기다리는 어머니의 나루터를 향한 눈길까지도 애틋한 온기로 스며 있다.
높낮이를 두지 않는 공평한 붓끝으로 세상일을 낱낱 새긴 강의 몸짓은 묵언으로 드러내는 세상의 은유다. 그래서 강가에 처음 서 보는 사람의 눈에는 강은 보이지 않고 시퍼런 물만 어지럽게 보인다. 멈춘 듯 흐르는 유유한 물길도 보이지 않고, 강둑에 피고 지는 세상의 표정도 읽지 못한다.
시퍼런 강바람을 맞으며 더 오랜 세월을 강가에 살다 보면 강이 드러내는 은유의 실상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한다. 어지럽던 물이 도도한 물길로 익숙해지는 날 비로소 강둑이 눈에 잡힌다. 세상의 마음으로 포용하는 긴 강둑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물길. 낭창낭창 맑은 물 퍼 올려 밥을 짓고, 남실남실 물살 휘저어 머리를 감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강에 젖어든다. 산에서 숲을 보고 숲속에 난 길도 찾아내듯, 강둑 언저리의 삶이 강으로 이어진다. 등짝에 새겨진 선인들의 발자취도 보고, 새로운 물길도 만들면서 강과 더불어 시간이 묵는다.
시간이 묵어간다는 것은 스스로를 삭혀 어우러지는 과정이다. 강물에 몸을 적시는 시간이 곰삭을 무렵이면 드디어 추상抽象의 강이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쉼없는 물길과 기나긴 둑이 하나로 어우러진 강. 여기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담기고 시간이 여무는 것을 본다. 산속에서 산을 깨닫듯 강가에 살면서 강을 깨닫는다. 이즈음이면 거울 앞이 아니래도 아침 머리맡에서 발견한 하얀 머리카락이 자신의 세월임을 눈치챈다.
흐른다는 것은 시간이 묵고 공간을 누빈다는 뜻이다. 시간이 묵으면 세월이 되고 공간을 누비면 경륜經綸이 된다. 시공時空을 넉넉히 묵힌 안목은 강을 통해 실체를 보고, 실체를 통해 강을 발견한다. 자신도 강과 함께 흘러가고 있음을 느낄 즈음이면 강으로 스며드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다. 이때 비로소 은유로 들앉은 실상, 인류 역사의 유구한 발자취를 기록한 강의 서체書體를 해독하게 된다.
강만 강이 아니라 흐르는 모든 것은 강이다. 존재는 강을 따라 유한하게 흐르고, 만유는 강이 되어 무한하게 흘러간다. 땅속의 벌레도, 길섶의 풀도, 생장과 사멸을 통해 강을 따라 흘러가고 강이 되어 흘러간다. 세상의 희로애락이 흐르고 사람의 일생도 생로병사로 흘러간다. 천만년을 제 자리에 꿋꿋이 버티고 앉았을 것 같은 바위도 강이 되어 흘러간다. 강과 만상이 하나로 엮이어 흐르는 몸짓은 강이 묵언하는 상징의 궁극이다.
촌각寸刻이 모여 시간이 되고, 시간이 흘러 세월이 되듯, 물방울 굴러 물줄기 되고 그 물줄기 모여 강이 된다. 물방울은 삶의 실체로 구르고, 물줄기는 삶의 가치를 엮어 흐르고, 강은 삶의 진실을 담아 굽이진다. 그리하여 물방울은 문학의 몫이고 물줄기는 철학의 몫이며 강은 역사의 몫이다.
인류 평화의 염원을 담아 수평의 먼동을 향해 오체투지로 굽이진 강의 생애. 부서진 뼛조각을 윤슬로 반짝이며 만유의 실상을 은유로 드러내는 강이다. 물색 모르는 이들은 풍랑이라 여기지만, 인류 역사를 상징으로 낱낱 새겨 영원한 생명으로 흐르는 낙동강은, 난바다가 바라다보이는 기수역汽水域을 맴돌며, 유방백세流芳百世 유취만년遺臭萬年의 증거를 오늘도 묵언의 몸짓으로 전한다.
혼자 가려거든 물방울로 굴러가라. 함께 가려거든 물줄기로 엮어가라. 끝까지 가고 싶으면 강물로 흘러가라.
첫댓글 시간을 묵히고 공간을 누비며 흘러내리는 강의 몸짓은 언제나 묵언黙言이다. 강이 전하는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실상實相은 은유로 드러낼 뿐, 산에 들어 산을 볼 수 없듯 강에서는 강을 보지 못한다.
수수만년을 흘러내린 강. 강에는 무엇이 흐르는가. 물이 흐르는가, 시간이 흐르는가. 흐르는 것은 무엇이며, 흐르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강의 등짝에 새겨진 굴곡은 무엇이며, 도도한 물길 속에 잠겨 있는 산은 무엇이며, 잔잔한 수면에 엷게 비친 뜬구름은 무엇인가... 강만 강이 아니라 흐르는 모든 것은 강이다. 존재는 강을 따라 유한하게 흐르고, 만유는 강이 되어 무한하게 흘러간다. 땅속의 벌레도, 길섶의 풀도, 생장과 사멸을 통해 강을 따라 흘러가고 강이 되어 흘러간다....물방울은 문학의 몫이고 물줄기는 철학의 몫이며 강은 역사의 몫이다.
..오늘도 묵언의 몸짓으로 전한다.
혼자 가려거든 물방울로 굴러가라. 함께 가려거든 물줄기로 엮어가라. 끝까지 가고 싶으면 강물로 흘러가라.(본문 부분발췌)
물방울은 문학의 몫이라고 합니다. 그 물방울 한조각 붙잡아 쓰는 일이 쉽지 않은 듯 해요
강에 대한 사유로 가득한 글. 깊은 생각에 빠져들게 합니다. ^^감사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