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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1:7-9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되었을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임자가 잘하면 후임자는 엄청나게
힘든 법이다. 이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바로 앞장 신명기 34장 10에 이렇게 썼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이표현 보다 강렬한 묘사가 있을까? 여호와를 대면한 자가 몇이나 될까? .
모세가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우둔하고 모자라서 아무 것도 못한다고 하자 하나님께 용기를 주시며 약속하신다.
“여호와께서 그가 오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애굽기 3:4
후에 그가 지도자가 된 뒤에도 직접 대면하지 않으시고 말씀의 증거를 주시면서 다시 약속하셨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어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출 3:11.12
그러면 모세와 같이 여호수아를 부를 때 무언가 특별이 나타나시거나 눈으로 보는 약속이 있었는가? 아니다.
여호수아를 부르실 때는 모세를 부르실 때와 달리 무조건 이렇게만 말씀하셨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여호수아 1:8
여호수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누구보다도 용맹하고 두려움이 없는 용사로서의 이미지다.
민수기 14:9 에 그 용맹이 기록되었다.
"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여기 보면 여호수아는 전혀 두려움이 없는 듯하다. 심지어 찬미가 271장 에도 “ 허락하신 새땅에 들어가면서 ......... (후렴) 여호수아 본받아 앞으로 가세” 라고 작사될 정도로 우리 뇌리에는 여호수아는 담대하고 용맹한 자로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여호수아 1장을 자세히 보면 “강하라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어 나온다.(6절, 7절, 9절)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여호수아도 어떤 두려움에 있음을 암시한다.
부조와 선지자 하권76 에 여호수아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여호수아가 자기 앞에 놓인 일을 바라 보았을 때에 크게 근심하고 망설였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 중 하나는 성경은 사람에게 초점을 맞춰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관점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주인공이다.
여호수아의 관점에서 여호수아를 해석하면 안 된다. 강해 보이지만 여호수아 역시 두려워할 일에 대해서는 여전히 두려워 했고 놀랄 일에 대해서는 여전히 놀랐다. 성경을 여호수아 관점에서 보니 인물 중심으로 보게 되고 행간의 이면에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바라는 것을 놓치고 있다. 여호수아 역시 우리와 같다.
성경은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든다는데 주안점을 두다 보니 그의 내면기록은 놓치기 쉽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시고 우리를 위하여 어떤 구원을 베푸셨는가에 초점이 있기 때문이다.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맞추어 읽어보자.
인간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가나안 정복은 전쟁이다. 가나안 땅은 함의 후예인 가나안의 자손들이 살았다. 그 이름은 가나안 히위 헷 브리스 기르가스 아모리 여부스등 일곱 족속이다. 아모리 같은 거인족속도 있고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소문난 여부스 족속도 있었다 무엇 하나 만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곳을 정복하기에 앞서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는, 군사훈련을 하고 칼을 준비하고 정복의 계책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에는 맞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을 달랐다.
너희의 오직 준비할 것은 오직....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가 전부이다. 왜 그러셨을까?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언급하신 구절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여호수아 1: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으니”
형용모순이다. 아직 가나안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줄 것이다"가 아닌 "주었다"라고 쓰여있다. 문법이 맞는가?
히브리어에서 “주었다”와 같은 미래 완료 완성형시제를 종종 쓴다. 성경에서 이 용법은 수 없이 많이 나오지만 이 시제는 하나님의 확고한 약속에 따라 확실이 이루어진 것과 같은 상황일 때에만 쓰는 시제다. 아직 가나안에 들어가지도 않았지만 명령해서 싸워서 빼앗는 땅이 아니라 순종함으로 그냥 들어가는 땅이다라는 의미다. 진입도 안했는데 정복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의미다.
언제 그땅이 주었는가? 창세기에 그 해답이 나온다. 여호수아 훨씬 이전인 400여 년 전 아브람과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창세기 15:18절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잡혀간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길리고 연습한 자 380명을 거느리고(창 14:14)" 겁도 없이 용감하게 가나안 전쟁에 어쩔 수 없이 뛰어든 그는 보복이 심히 두려웠다(창 15:1) 밤을 세워 고민하던 그때, 하나님께서는 근심하던 그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신다. "주 여호와여 내가 이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창 15:8) "가나안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5:18) 90이 다 된 그에게 심지어 아들 조차 없었을 때였다 . 그런데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하셨다. 하나님은 이미 그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다. 믿지 못한 그에게 아예 수양을 쪼개고 갈라 계약서를 쓰시기 까지 한다. 하나님은 그 계약 내용을 400년 후인 여호수아 시절에 이루려고 한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기 훨씬 전에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셨다고 배웠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모든 것은 반드시 이루신다. 즉시가 아니라도 어느정도 시차가 있을지라도, 반드시 행하신다.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그의 후손인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해 약속을 이행하셨다.
하나님이 약속 하신 일이시기에 반드시 실행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약속에 따른 이룸을 기다리는 일만 하면 된다.
신앙인이 하나님과의 교통의 유일한 방법은 , 약속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 뿐이다. 약속대로 무조건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단 하나의 요구조건은 순종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도 순종의 결과였고 우리의 매일의 하루살이 삶도 알고보면 모두 순종의 결과이다.
기도의 성취를 100% 바란다면 , 또 기도자가 유일하게 붙들어야 할 것은, 과거의 경험도 아니고, 지혜와 지식도 아니고, 믿음이 더 좋은 목사의 조언을 붙드는 것도 아니고, 미래에 일어날 예언을 믿고 그렇게 되리라는 희망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록된 약속의 언약" 만을 붙드는 것이다. 예수님도 사도바울도 여호수아도 그리고 모든 믿음의 거장들도 기도할 때 모두 성경의 "기록되었으되"라는 약속만을 붙들고 그대로 성취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모두100% 이루어졌다.
딸을 끔직히 사랑하여 꼼짝 못하는 아빠를 가리켜 딸바보라 한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꼼짝 못하는 것이 하나가 있다. 그 분은 한 가지에는 바보가 되신다. 그것은 그분이 하신 말씀의 약속을 들이밀며 그것을 지키주시를 요구하는 기도 요청에는 꼼짝 못하신다. "하나님 이거 약속 하셨잖아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약속바보 이시다.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신앙의 성취는 언제나 그분의 약속만 붙들고 순종할 때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는 유일한 행위는 약속의 순종 뿐이다.
그러면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말씀에 대한 순종"을 어떻게 할지를 구체적으로 뭐라고 기록되었는가?.
여호수아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위 구절에 이스라엘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가를 여호수아의 말을 빌어 이야기 한다
1.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떠나지 말며" 는 히브리어로 에무나(emuna : אמונה) 인데, 이 "에무나"가 성경에 처음 쓰인 곳은 르비딤에서 아말렉을 쳐부술 때 이야기인 출애굽기 17:12절의 기록이다. "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출애굽기 17장 12절에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하다"라는 구절에 "내려오지 않다"에 "אמונה"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모세와 훌과 아론이 한 행동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운명을 그분께서 장악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그들의 신뢰자로 삼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싸우시는 믿음의 상징이었다 " 부조와 선지자 상261
어떤 단어가 처음 쓰일 때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단어가 가진 가장 본질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이 אמונה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에 "믿음"이라는 단어와 동일하게 사용되는 것을 보면 의미심장하다.
그 외에 유명한 구절이 출애굽기 13: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애굽기 33:11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등이 있다.
선지자의 글에는 "네 입에서 떠나지 말며"를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가족은 거룩한 계명을 날마다 반복해야 했다" 선지자와 왕 464
그들은 문설주에도 기록하여, 그걸 보면서 끊임없이 자녀들에게 매일 입으로 반복하도록 했다. 심지어 모든 사람이 율법의 복사본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간직한 생각은 입으로 표현된다. 인간에게 있어서 생각하는 것이 입을 통해 발현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입을 통해 생각을 제어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정말로 엄청난 역발상이다. 그들은 생각이 정리되기 전에 말을 반복하면 말로 인해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다라고 유추했고 실제로 이를 실천하여, 생각이 말을 통해 바꿀수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전통의 시작점은 여호수아 당시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명령한 것이 단초가 되었다.
불신은 불신을 하고자 하는 생각이 작용해서 온다. 유대인은 수 많은 경험을 통해 뇌가 모든 것을 바꾸는 것임을 알았고 그 뇌에다가 끊임없이 말씀을 반복해서 넣어 줌으로서 그들의 생각길 느낌길 습관길을 바꾸고 넓혔다.
후에 2000여 년이 지난 후, 미국 리노에 위치한 네바다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스티븐 헤이즈가 수용전념치료(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 ACT)을 강조하면서 쓴 논문에 이 원리를 기록했다. 21세기 들어서야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는 사실을 겨우 알아낸 것이다 . 그는 그의 논문 첫머리에 이렇게 썼다.
"우리 자신은 스스로 생각을 관찰해 내지 못하고, 생각을 통해서야 세상을 관찰하기 때문에 생각을 다스리는 입(언어)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소리 내서 읽으라 . 인간의 능력이 기이한 것은 보통 때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지만 소리를 내어 읽으면 소리가 귀에 들리는 순간 다시 뇌에 활성화가 되어 말씀이 뇌에 박히게 된다"고 설파했다. 유대인은 수 많은 착오 끝에 여기서 순종의 길을 찾았다. 말의 행동 없이는 참된 순종은 불가능하다. 율법의 말씀을 통하여 , 그들은 먼저 율법의 사람이 되었고, 율법에 쓰여진 "순종하라"는 길을 찾아 갔다.
2. "주야로 묵상하며"
시편에서도 반복되고 강조되는 이 "묵상"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가(Haga הָגָה) 다. 요가의 명상과 불교의 명상과는 다르다. 원어는 대개 두가지 의미가 있다. 첫번째는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찾는 행위"를 말한다. 더불어 하가는 "반추(反芻)하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 두가지를 합성해서 의미를 이해하면 더욱 명확하다. "치열하게 생각하고 반복하여 실행하라". 신명기 6:6을 보면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희는 마음에 새기고"라는 새김이 바로 이 용례이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율법에 대한 묵상(Haga)은 치열하고 반복적이며 고도의 집중을 가지고 반복하여 생각하는 행위를 말한다.
순종의 길은 고상하지 않다. 순종의 길은 치열하고 고단하게 집중해야 겨우 이룰 수 있다.
3. "다 지켜 행하라" 하나도 빼지 말고 지켜라. 순종의 마지막 명령은 빠짐없이 지키는 것이다. 인간은 연약하여 한 두개씩은 빼먹는다. 사울과 같이 한 두개씩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다 보면 기어코 모든 것을 어기게 된다. 삼손도 아내를 잘못 얻는 실수를 했다. 그 결과로 비참해졌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이유는 다 지켜 행하기 위해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아간 등 수도 없는 실패자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한 두가지의 결핍 이었다.
그리하여 결과가 어찌 되었는가?
그리하면 평탄하고 "형통하리니" 형통은 성경에 두가지 히브리어 단어가 쓰이는데 첫 번째 찰라흐(chalkh, צלח )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형통을 말하며, 두번째 셀라흐(selakh, שׁלח )의 형통은 보통의 인간사 만사형통을 가리키는 말이다
전자의 형통의 유명한 예를 성경에서 보자 .
창세기 39장의 요셉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어"(2절) 애굽 주인의 집에 있었다. "형통하여 " (3절) 종의 주인의 총무가 되었다 " "형통하여"(29절) 감옥의 제반 사무를 보았다. 형통의 결과가 요셉의 입장에서는 종이요 감옥이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훈련의 도구였다. 찰라흐의 형통은 겉으로 보이는 결과가 우리의 지금 기준으로는 이상하지만 하나님께서 내 안에 심으신 그 분의 뜻이 이루어지고 성취되어 결론이 창대해진다.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형통은 결과가 혹독하고 힘들고 어렵지만 "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한 형통의 결과는 아름답다. 지금 집안의 자녀문제로 경제문제로 직장문제 등 기타 여러 문제가 우리기준으로는 형통하지 않고 탐탁지 않지만 지금 우리 모두의 삶은 나름대로의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형통한 삶임을 기억하자. 형통은 순종의 그림자이다.
" 하나님에게 순종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는 그러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고 참람(僭濫)이다" 정로의 계단 61
하나님께 용서 받지 못하는 죄는 성령을 거스리는죄와 참람죄다. 참람죄를 범하면 레위기 24장 16절에 "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고 했다. 여기서 훼방은 원어로 나카브(נקב)로서 "참람되게 함"을 의미한다. 또 민수기 15장 30절에는 "본토 소생이든지 타국인이든지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카다프)(גדף)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며" 라고 했다. 여기서 카다프는 모독한다는 뜻이다. 신약에서는 전자를 함부로 성호를 부르고(에포노마조 ἐπονομάζω), 후자는 대놓고 저주하는(카타라오마이 καταράομαι )것으로 표현했다.
신약에서 "신성모독"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는 헬라어 "블라스페미아"(βλασφημία)는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에 대한 범과(犯過)다.
헬라어는 명사 βλασφημία , 동사 βλασφημέω , 형용사 βλάσφημος는 신약성경 전체명사로서 18번, 동사로서 34번, 형용사로서 4번 모두 56번 사용되었는데, 원 뜻은 비방, 비난, 모독, 조롱의 뜻을 지닌다. 이 단어는 그 형태를 통해 두 단어의 결합으로 볼 수 있는데, stupid라는 뜻을 가진 βλάξ(블라스)와 speech 혹은 fame(명성)의 뜻을 가진 φῆμις(페미스)와 결합된 형태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 안에 거한다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3, 6).
하나님을 아는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려면, 그리고 이웃에게 떳떳하고 당당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계명을 지키는 자 즉 순종하는 자가 먼저 되어야 한다. 하나님안에 진실로 거하고 싶으면 예수님의의 행하셨던 바 그대로 따라 행해야 한다. 가나안은 순종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정복하여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은 순종하여 들어가는 곳이지 투쟁하여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