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의식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의식의 출발점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는 질문은 당신이 누구이든, 당신이 어디에 있든, 직업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매우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과연 국가여야 하는가?, 아니면 존재 자체여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과거 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철저히 국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런 일방주의가 반세기동안 통했던 것은 ‘친일 잔재청산을 주장하던 민족적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거꾸로 자신의 사적이익 추구를 위해 민족을 배반했던 일제 부역 세력에 의해 청산 당하고, 그 일제 부역세력이 분단 이후에 이 나라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한몫 합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뜻과 동의어로 통했던 ‘묻지 마 다쳐’의 금기를 기득권 보호에 애용하기도 했으며 ‘국민의 윤리와 정신적인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라는 미명하에 헌장을 반포하고 그것을 통치에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에 의해 이 땅에는 반세기동안 체계적인 국가주의 교육에 의한 국가중심 의식형성과 교육과정과 대중매체를 틀어쥔 수구세력의 끊임없는 세뇌, 그로 인해 자기존재가 실종되어 버리는, 결국에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의식화가 일어났습니다. 흔히 운동권 인사들이 말하는 의식화와는 정반대 방향의 의식화가 체계적으로 진행되어 온 것이죠.
한국에 노동자가 1,400만명 있지만 아무리 외쳐봐야 노동자 의식을 갖고있는 이들이 극소수인 것도, 400만 농민과 400만 도시 빈민이 있지만 민족적 정체성과 계급적 정체성을 갖게 하기 어려운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정치의 계절이 오면 ‘지역감정’처럼 반드시 동조해야 하는 과잉 동조의 사회현상까지 횡행하는 것도 교육 받은 사람들이 사상적 평형은 고사하고 모두가 꼭두각시처럼 행동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수구 세력이 장악해온 교육과정과 대중매체로 인해 형성된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에 대한 탈의식화 과정!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분들! 이 땅에 태어나면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특수한 임무를 띠고 태어나신 분들! 국가의 대소사를 자기 문제로 인식하고 자기 이익과 결부시켜 생각해보기 보다는 숭고한 사명감으로 판단하는 그런 분들이 절대 다수를 점하는 한국사회에서 진보적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희생을 요하는 일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경쟁과 물질주의가 판치는 요즘 세상에서 진보의 물결이 소용돌이치는 작금의 현실은 ‘혼란’ 그 자체로 느껴질 것입니다. 특히 ‘현정권 두들겨 패기와 남 잘못을 책망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국민교육헌장 세대’에게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지식인이라면 모름지기 사상적 평형을 가져야 합니다.
민주공화국에서 모든 시민은 개인의 행복과 사익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건강한 것입니다. 전후좌우로 포탄이 마구 떨어지는 참호 속에서 나라 안위를 먼저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테러리스트의 칼에 언제 목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파병의 당위성을 주장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 힘든 상황에서 나라 걱정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남들을 비난하고 매사를 비평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고 있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들을 욕하고 저주해서 돌아 올 것이 뭐겠습니까? 눈이 뻘개 희생양을 찾아 다니고 사회전반의 문제를 따지고 욕하며 저주할 사람들은 굳이 당신이 아니더라도 이 땅에는 차고 넘칠 만큼 많습니다.
사업가는 사업을 잘하면 되는 것이고 종업원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면 되는 것입니다. 노동자와 농민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식당 주인과 택시기사가 자신의 본분을 다할 때 비로소 세상은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비난과 욕설로 대화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면 새삼 ‘보수의 층이 이렇게 두텁구나’라고 절감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차라리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는 요즘 젊은이들이 나아 보입니다.
이처럼 진보의 길은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인간은 매우 보수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쉬운 길이라면 누구나 갔을 것이고 진보라는 말 자체에 특별한 의미도 부여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진보는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에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스피노자도 지적했듯이 사람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설령 그것이 자기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일지언정 한번 형성된 의식은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바꾸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이 바뀌는 그만큼 진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보는 그야말로 느린 걸음입니다. 때로 가난한 진보운동가들의 운동은 바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백안시되고 거부당합니다.
그래서 진보 운동가들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으로 역사가 지향하는 일이고 그야말로 떳떳하고 묵묵하게 걸어가야 하는 길이라면, 그것이 또한 가치 있는 삶을 실현하는 길 아니겠습니까?
20대에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사람도, 또 40대가 넘어서도 계속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있는 사람도 바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저는 여전히 진보를 사랑하며 영원한 진보주의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