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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나두산목사 *게시일 : 2003/03/12 (수) AM 11:38:42
한 여름의 '살인더위'가 한풀 꺽이고 아침 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 오는 8월의 마지막 주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알아보기 위해 찾아간 곳은 전라북도 옥구군.
옛부터 '임금이 나라 안의 다른 곳에 흉년이 들어도 임옥평야의 농사만 제대로 되었다면 한시름 놓았다'고 하는 호남 평야의 주요 곡창지대인 옥구군은 전라북도의 서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땅 모양이 마치 독수리 부리가 바다 밖으로 쏙 튀어나온 것처럼 생겼다.
군산시와 더불어 다가오는 21세기 서해안 시대의 거점도시로 부상하고 있는 옥구군은 동남쪽으로 익산군과 김제군 사이로 만경강이 흐르고 그 강의 주변에는 드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또 오성산을 위시한 노령산맥의 낮은 지맥들이 있는 북쪽으로는 충청남도 서천군과 마주해 있으며, 그 사이로 금강이 흐르고 있다. 이렇듯 예로부터 만경강과 금강을 접하고 있는 탓에 옥구군은 곡창지대일 뿐만 아니라 교통의 주요 지역이 되었다.
육로교통이 발달되지 않았던 19세기말 초대 선교사들의 선교여행은 으례이 배를 이용하게 되었고 군산(옥구군)에 처음 온 선교사들도 배를 타고 왔다. 때는 1895년 3월 군산이 개항(1899)되기 4년전. 미국 남장로회 소속의 선교사 가운데 전위렴(Rew. W.M Jun Kim)선교사와 의사인 유대모(Dr.A.D.Drew)가 인천에서 범선을 타고 모진 비바람과 안개와 싸워가며 10여일만에 금강 하류에 있는 군산에 도착했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서울에서 군산에 가기위해 배를 타지 않을 것이다. 서울에서 아침 7시좀 지나 출발한 고속버스는 김수진목사가 쓴 '호남선교100년과 그 사역자들'을 읽는동안 어느새 군산 시내를 들어서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10시 4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 선교사들이 도착할 당시 군산은 1백여호의 초가집으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어촌이었다. 주민들은 '무지하고 무속신앙적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의 군산은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오는 연말쯤에는 전국 시군통폐합으로 옥구군까지 편입하게 되는 군산시는 명실공히 21세기 서해안시대의 거점도시로 발도움하고 있었다.
최초 2명의 선교사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군산시에는 현재 2백여개의 교회가 있으며 교인수만도 전체인구 26만여명 가운데 40%정도인 8만여명에 이르고 있다. 다른지역에서 일찍이 찾아보기 힘든 선교의 열정이 출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함께 옥구군에도 90여개의 교회가 있으며 교인수는 2만여명(전체인구 6만6천)인 것으로 현지 목회자들은 추산하고 있다. 이렇듯 이 지역에 기독교가 뿌리를 깊이 내리고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 수 있었던 것은 처음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의료봉사와 어촌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정서가 맞아 떨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인근에 있는 전주에서 선교사들이 배척을 받은 것과는 달리 이 지역에서는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고 옥구군 '군지'(1992)는 기록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곳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의료선교로 주민들의 인심을 얻는데 성공을 했던 것이다.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자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군산시 중앙로에 있는 옥구군청. 군청 문화공보실에 들려 살펴본 '군지'에는 옥구군 기독교의 역사와 현재의 상황이 잘 나타나 있었다.
삼국시대 마한의 땅이었던 옥구군은 조선시대 옥구군으로 불리었으며 1914년 군산부 분리, 그후 1973년에는 8개리와 1개리가 군산시와 익산군에 각각 편입됐으며 1989년에는 미성읍과 오식도, 비응도가 군산시에 편입 현재 옥구읍을 비롯 옥산면 회현면 개정면 대야면 임피면 나포면 서수면 옥도면 옥서면등 1읍 10개면으로 인구는 6만6천명에 이르고 있다.
호남지방의 곡창지대
군지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주민들의 좋은 반응을 얻은 이들 선교사는 동학혁명의 후유증으로 1896년에야 비로소 전위렴목사와 유대모의사 가족이 군산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이사를 온 이후 이들은 군산지방을 중심으로 옥구, 이리, 익산지방, 김제일부와 부안지방, 그리고 금강 건너편에 있는 부여, 서천, 보령, 장항지방에까지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다녔다.
1899년 군산항이 개항됨에 따라 선창가에 있었던 선교기지를 구암리로 이전할 무렵 군산주위에는 만자산(지경), 남차문(남전리), 송지동(김제)등의 예배처소에서 교인들이 예배를 드렸다.
위 기록에 의하면 옥구군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는 대야면에 있는 지경교회.
지경교회를 찾아가는 동안 끝없이 펼쳐진 들녘에는 이제 막 열매를 맺기위해 고개를 내민 벼이삭들이 싱그러운 바람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얼마 안 있으면 황금물결로 장관을 이룰 임옥평야. 지난 여름 논바닥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는 지독한 가뭄에도 죽지 않고 살아나서 열매를 맺고 있는 벼들을 보고 있자니 '주여, 남국의 따사로운 햇살을 삼일만 더 내려주옵소서'라고 기도하던 시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이곳 옥구군에 뿌려진 믿음의 씨앗은 가뭄보다도 더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고사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다.
지경교회가 세워진 것이 1900년 10월,그러니까 94년 전의 일이다.
옥구군에는 지경교회를 시작으로 1901년 나포면 서포리 서포교회, 1903년 서수면 서수리에 서수교회, 1906년 옥산면 옥산리 옥산교회, 1922년 옥구읍 이곡리에 이곡교회, 1926년 임피면 읍내리에 임피교회, 1932년에는 서수면 금암리에 금암교회와 성산면 성덕리에 성덕교회, 그리고 1935년 나포면 나포리에 나포교회 등이 해방전까지 차례로 창립됐다.
해방전까지 8개에 불과하던 교회는 이제 90여개에 이르고 있다. 근 1년에 1개의 교회가 세워진 셈이다. 지금까지 옥구군에 세워진 교회를 교파별로 살펴보면 90여개의 교회 가운데 한국기독교장로회가 30개의 교회로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이 19교회, 통합측이 18교회, 기독교대한결결교회가 10교회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밖의 교단으로는 대한 하나님의성회와 나사렛성결교회가 각각 3교회, 기독교한국침례회가 2교회,. 그리고 예장 개혁측 및 독노회, 감리교, 하나님의교회, 예수교성결교회가 각각 1개교회 인 것으로 나타났다.
처음 이 고향 믿음의 선배들은 지금은 자동차로 불과 몇 십분이면 당도하는 거리를 1,2시간 넘게 걸어서 다녔다. 지경교회에서 군산에 있는 선교부까지는 30리 길이다.
1950년 이성춘목사가 기록한 지경교회사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주후 1897년은 유명조선국이 독립된 대한제국으로 년호 광무원년이라.기독교가 크게 발전하던 시대엇다.이때에 전남에서 본동서만자 매밖에 래주하는 교인 조선달씨가 미국인 선교사 전위렴씨의 교회 군산을 다니면서 최흥서씨를 위하여 강채오 정치선 최관보 정백현 이양화 제씨에게 전도, 이분들이 3년동안 30리길을 도보로 예배 참석을 하면서 본동리에 열심 전도를 한 결과 교인이 점점 증가됨으로 본동에 처음 교회를 설립하게 되다. 주후 1900년 추 중만자동에 초가삼간을 금20원에 매수하야 예배당을 만들고 20여명식 예배를 보니 이것이 지경교회의 시작이라" 그후 지경교회는 1902년 최흥서집사를 장로로 장립하였으며 1907년부터는 부위렴선교사의 지도를 받았으며, 일찍이 다음해부터는 예배당 부속 행낭을 개조하여 2년제 소학교를 설립 교육에 힘쓰게 되었다. 초대 졸업생은 이요한 최주일 김준실 양해성 고란섭 등이며 이 가운데 이요한씨는 1947년 초대 제헌국회 국회의원과 전북도지사가 된다.
고난과 역경의 연속
대부분의 초대교회 역사가 그러하듯이 지경교회 역사는 한국교회의 영광과 좌절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지경교회는 1910년 한일합방을 당하여 망국지한의 비통한 심경으로 구국기도회를 가졌으며 1991년에는 이 교회에서 애국기도회를 드린 것이 화근이 되어 이교회 강홍선(청년)과 여선생 이순길이 투옥되었다.교회의 수난은 끝없이 이어진다. 1945년 6월 왜정이 극도로 악랄해지고 있을 때 지경교회도 성종을 강탈당하고 예배당은 왜군의 수용소가 되어 교인들은 교회를 빼앗기고 이집 저집을 돌아가며 예배를 보았다. 교회의 수난은 같은 동족에게서까지 이뤄졌다.1950년 7월 공산군에 피습을 당한 교회는 그해 9월 김창호장로를 비롯 양만영 최옥중 등이 피납되어 전주교도소에서 학살되었다.
이렇듯 고난의 역사를 걸어온 지경교회는 믿음의 선배들의 뜻을 고히 간직하고 있는듯 했다.지경교회는 이러한 선배들의 고귀한 믿음을 후대에 전하고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지난 1992년 '지경교회 선교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이길구장로)를 구성하고 몇가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지경교회가 추진하고 있는 기념사업은 크게 성전건축 및 장학기금조성, 교회사 편찬등 세가지이다.이러한 사업과 연계해 지경교회는 초대 교회 선배들의 믿음을 계승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문영학목사와 이길구장로는 일찍이 '그리스도신문'(1901년 8월 1일자) 교회통신란에 소개된 것과 같이 "지경교회는 교인들이 부지런히 농사일에 힘쓰고 또 주의 일을 위해 열심으로 일하며 무슨일을 당하든지 '유무상통'한 전통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6백여명의 교인이 출석하는 지경교회는 1백주년 사업을 펼치면서 무엇보다도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열려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이 교회 이길구장로는 교회의 뿌리를 찾는데 누구보다도 열심이어서 '그리스도신문'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등의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지금까지 지경교회의 역사를 자세히 소개한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그것은 매번 지역교회 탐방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교회는 교회의 뿌리에 대해 너무 소홀하며 또 선배들이 어떠한 고난과 역경속에서 믿음을 지켜왔는지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90여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옥구군에는 굵직한 교회들이 많이 창립됐으며 또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해 냈다.현재 옥구군에 있는 90여개의 교회 가운데 교인수가 2백명 이상되는 교회가 20여개에 이르고 있으며 3백이상인 교회는 10여개에 달한다.
출석교인이 3백명 이상인 교회로는 지경교회, 대야교회(1954년설립). 임피교회, 옥봉교회(1953년), 옥구교회(1948년), 서수교회 등으로 나탔다. 그러나 전통적인 농촌지역인 이곳 역시 60~70년대 심각한 이농현상으로 교인이 50명 이하인 미자립 교회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이들 미자립교회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교회가 있다.옥서면 옥봉리에 있는 성화교회(1982년 창립)는 불과 10여년만에 교인이 2백50여명의 교회로 성장했다. 이 교회가 이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최윤식초대목사를 중심으로 이내현장로와 이완세장로(기독교신문 전북지사장)등의 제직들의 공이 컸다.
그러나 근본적인 성장요인은 끊임없이 교회가 지역주민들과 함께하는 열린교회를 지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김세준목사의 진단이다. 김목사는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교회가 되기위해 교육관 신축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 교육관이 완공되면 지금보다도 더 깊숙이 지역주민들 사이로 교회가 들어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지금은 교회와 별개 이지만 초기 이교회는 이완세장로가 중심이 돼 어린이집과 신용협동조합을 운영, 교회 성장에 한 몫을 했다. 현재 신용협동조합에는 교인을 비롯 지역 주민 6백여명이 조합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또 이보다 30여년전인 48년 창립된 옥구읍 선제리 옥구교회는 '인권선교'와 민주화 운동의 요람으로 자리잡고 있다. 한신교회 이중표목사를 비롯 홍철화목사 전양권목사 등이 담임했던 이교회는 옥구군에서 다른 어떤 교회보다도 주님의 일꾼들을 많이 배출해 낸 것으로 유명하다.이 교회 출신 목회자로는 진연섭목사, 전병금목사, 전병생목사, 전성록목사, 전용추목사, 전부권목사, 전영균목사. 전영훈목사 등이 있으며 특히 이교회 조남수권사는 2명의 아들과 1명의 손자가 현재 목회의 길을 걷고 있으며 이 교회에서 제직을 맡고 있는 전병호장로 또한 그의 아들이다. 이 교회는 역사는 그리 길지 않지만 많은 목회자를 길러 내면서 무엇보다도 인권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 70,80년대는 요주의 교회로 낙인이 찍혀 선교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역으로 교회가 성장된 특수한 경우이다.
한편 옥구군 취재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찾은 서수면 서수교회는 앞으로 농촌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었다. 9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이 교회 역시 젊은이가 없기는 다른교회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 교회는 일찌감치 노인선교에 눈을 돌려 큰 성과를 보고 있다. 노인 한명을 전도하면 그에 딸린 많은 식구들을 전도할 수 있으며 학생들의 교육에도 효과 만점이라는 것이 진목사의 설명이다. 또한 진목사는 이렇게 웃사람을 공경할 줄 알 때 교인들의 화평과 조화가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현재 서수교회에 나오는 노인들은 90여명. 이 가운데 혼자된 노인이 30여명에 이르고 있다.
어찌됐든 앞으로 한국교회가 계속 성장하고 내실을 기하기 위해서는 농촌교회가 살아나야 하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옥구군에 있는 교회들을 취재하는 동안 희망보다는 알 수 없는 자괴감에 가는 곳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것은 옥구군에 기독교연합회 같은 연합기관이 없어서 연합활동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언제까지나 개교회적인 행태가 계속될지 알 수 없으며 굳게 닫힌 교회의 문이 언제 활짝 열릴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는 답답함일 것이다. 그러나 올 여름 '살인 더위'를 이겨내고 기름이 잘잘 흐르는 '쌀'을 잉태한 옥구평야의 저 벼들처럼 옥구군 교회들도 현재의 역경을 이겨내고 지역사회를 위한 밀알이 될 것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옥구군에는 닫힌 교회보다는 열린교회가 훨씬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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