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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크리님 안녕하세요....카오스입니다.
님께서 올리신 글이 시간이 조금 지나서,.. 댓글의 의미가 줄어들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워낙 ‘진부한 문제(?,사실은 정말 중요한 문제임)’여서 쉽게 결말을 내기 어렵다고 봅니다. 하지만, 카오스가 그동안 연구(?)해 온 바를 바탕으로 결론적인 부분만 열거해 보겠습니다. 아마 상당히 다른 면을 보실 수 있을 것인데,...혹시 동의가 않되시더라도 참고로만 해 보시기 바랍니다....[참, 결론적인 욧점만 나열한 것이므로, 너무 피상적인 해석을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글자 하나하나 까지에도 나름의 깊이가 있을 것’이라고 보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선, 비문에서 중요시 되는 기사의 년대와 당시의 고구려, 백제, 신라, 왜의 정치상황을 먼저 간략히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391년(辛卯년) :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고구려 : 19광개토왕1년(즉위),
백제 : 16진사왕7년(폐위되기 직전임) = 친고구려정권이었었음
신라 : 17내물마립간36년 = 최초의 김씨왕조, 백제와 고구려에 양다리외교로 국체유지
일본(왜) : {왜곡기년:16인덕천황79년} => {실사기년:大和국(390년건국)1應神왕(왜왕讚)2년}
400년(庚子년) :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 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5] □新羅城□城 倭寇大潰 城▨▨▨盡□□□安羅人戍兵....“
고구려 : 19광개토왕10년 = {392년~395년 : 鹽水,稗麗등거란(6~700영)정벌=1차북방정벌}
백제 : 17아신왕9년 = {392년 : 친고구려였었던 16진사왕을 살해하고 즉위}
신라 : 17내물마립간45년 = (백제와 고구려에 양다리외교 계속중)
일본(왜) : {왜곡기년:17이중천황1년} => {실사기년:大和국1應神왕(왜왕讚)11년}
404년(甲辰년) : "十四年甲辰 而倭不軌侵入帶方界. [和通殘兵]□石城□連船□□□. 王躬率□□ 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 斬殺無數...”
고구려 : 19광개토왕14년
백제 : 17아신왕13년
신라 : 18실성마립간3년 = (402년 : 고구려가 친고구려인 실성왕으로 교체시킴)
일본(왜) : {왜곡기년:17이중천황5년} => {실사기년:大和국1應神왕(왜왕讚)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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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하나하나 주요한 맥락(키워드)에 대해서 카오스의 결론을 정리하겠습니다.
(1) 391년(辛卯년)기사 ;
1) ‘百殘=17아신왕의백제’ : 이 비문의 시제는 391년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百殘을 징벌한 400년~404년이후가 되므로 391년 당시의 16진사왕백제와 구분하는 것임. 즉, 친고구려 정책을 구사한 16진사왕은 그대로 백제라 한 것이고, 그러한 16진사왕을 죽이고 즉위해서 반고구려정책을 평친 17아신왕의 백제를 百殘(백제떨거지들)이라고 비칭한 것입니다.
2) ‘新羅=김씨신라’ : 17내물마립간이 비록 백제와 고구려에 양다리외교를 하고 있었지만, 대체로 우호적이었으므로 고구려는 신라에 대해서 보호국(上國)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었음.
3) ‘舊是屬民由來朝貢=391년 당시의 16진사왕백제와 김씨신라’ : 비문의 시제가 404년 이후이므로 391년에 대한 상황을 ‘옛날(舊)’라고 한 것임
4) ‘倭=大和국1應神왕(왜왕讚)이 바다를 건너서 파견한 군사들’ : 여러 논란이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倭는 당시 현,열도에 있었던 大和국이 파병한 군사들입니다. 즉, 364년부터 389년까지 열도(현,일본)에서 서로 피터지게 싸우던 백제군(당시,백제아화태자)과 응신군이 389년에 백제16진사왕을 축출하여 아화태자를 백제왕으로 만들고 응신은 열도에서 열도의 최초국왕이 되는 조건으로 극적으로 비밀군사동맹을 맺고서 390년에 대화국의 군사들이 백제본토지역으로 출병했었던 것입니다.
5)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 열도(현,일본)에서 백제본토로 출병한 (아신+응신)연합군이 바다를 건너서 주둔한 곳이 당시 백제에게 눌려지내던 신라지역과 가라지역이었었던 것을 고구려의 입장에서 ‘왜가 百殘,□□,新羅를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표현 한 것입니다. [따라서, ‘□□=가라or임나’로 보아야 할 것임]
다만, 이 (아신+응신)연합군은 백제본토에 도착해서 바로 백제16진사왕을 축출하지 못하고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었지만, 결국 체포하여 처형하고 392년에 아화태자가 백제17아신왕으로 즉위한 것이고, 이때 열도에서 출병한 응신군은 대부분 철수하고 일부만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고구려측에서는 이들이 직접 고구려를 공격하지는 않았었으므로 우선 시급한 북방정벌 때문에 백제사태에 대해서 일단 유보적이었었으므로 백제17아신왕은 비교적 쉽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원래 15침류왕이 죽은뒤 바로 그 아들인 아화태자가 즉위해야 했었었는데, 삼촌인 16진사왕이 왕위를 탈취했었던 것이므로 왕위 정통성은 아신왕에게 더 있었던 것임]
(2) 400년(庚子년)기사 ;
1) 이 400년 기사에 앞선 399년의 기사에 “九年己亥(399년)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 >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내려가 순시하였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신라의 국경에 들어차 성지(城池)[4]를 부수고 노객(신하, 즉 신라 내물왕)을 왜의 민(民)으로 삼으려 하니 왕께 귀의해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와서 그 충성심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 고하게 하였다.”라고 하였었던 것입니다....
이는 399년에 백잔(17아신왕)이 고구려에게 군사적 도전을 먼저 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아마, 추측컨대... 고구려에서 17아신왕에게 무리한 량의 조공품을 요구하며 臣屬하도록 강요하자, 17아신왕은 어쩔 수 없이 비우호적인 고구려와 맞장을 뜰 수 밖에 없다고 인식하고 당시의 국력으로는 백잔(17아신왕) 혼자서 고구려를 칠 수가 없었었으므로 대략 396년경부터 17아신왕이 열도(현,일본)의 大和국왕인 응신(倭王讚)에게 군사지원을 요청[百殘違誓與倭和通]하여 399년경에 열도응신군이 2차로 백제본토로 출정[倭人滿其國(백제+신라)境]하여 백제군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때 열도의 응신왕이 17아신왕에게 군사지원을 하면서 군사들의 안전을 위해서 17아신왕의 아들을 인질로 요구해서 전지태자가 열도로 인질보내 지는데, 나중에 17아신왕이 죽은 뒤 응신왕이 전지를 백제로 돌려보내서 백제18전지왕으로 옹립시킴]
이때 한꺼번에 신라지역으로 몰려온 倭兵(응신군)의 압박을 피하려고 신라왕이 고구려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389년~404년) 열도응신군이 백제본토로 출병했었던 것’을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의 신라정벌’로 윤색해서 신화로 만들어 넣은 것입니다. 물론 열도응신군은 결국 고구려군에게 박살나서 백제본토지역에서 궤멸되어 열도로 철수하였었던 것인데, 일본서기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가 신공황후에게 모두 항복했다’라고 주객을 바꿔서 기록해 둔 것이므로 일본서기의 내용 자체를 역사로 볼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다만, 그 이후에 고구려가 항복한 응신왕을 일종의 용병으로 삼아서, 백제와 신라를 관리토록 한 부분이 조금 있는데, 일본서기에서 이를 ‘약2세기에 걸친 임나일본부’로 왜곡하고 있지만, 이 부분은 다음에,...]
2) ‘敎遣步騎五萬=고구려의 백제지역정벌군사들(5만명)’ : 고구려가 (백제+대화)연합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백제지역으로 파병한 군사의 숫자가 5만명이라고 보입니다만, 실제 숫자인지는 불명확하다고 봅니다.
3)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 기록에는 분명히 고구려군의 파병목적을 ‘신라구원’이라고 적고 있지만, 이는 분명한 왜곡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당연히 신라가 구원받는 상황이 되겠지만, 고구려는 신라를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었고, 고구려의 권위에 도전하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바다를 건너 원정해온 대화군을 섬멸하려고 했었던 것인데, 비문에는 이 전쟁의 상황을 ‘고구려,백제,신라 사이의 얽히고 설킨 밀땅상황’ 정도로 축소시키는 의미에서 이런 기록이 만들어지게 된 것으로 봅니다. 즉, 이는 이 비문이 이미 ‘고구려의 위상을 축소시키려는 후대세력(唐과 日本 및 新羅)의 입장’이 반영되어서 왜곡기록된 것이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비문은 장수왕때 기록된 비문이 아니라 그 후대에 변조된 것임을 의미함]
4) ‘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 결국, 이 전쟁의 주체는 백잔(17아신왕)이었었는데, 비문의 내용은 어느순간에 ‘倭와 任那加羅의 관계’로 둔갑하고 있음에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이 문장은, 고구려군이 ‘임나가라까지(任那加羅) 추격해서(至), 결국(從) 성을(城) 함락시키자(拔), 성이(城) 바로(卽) 항복하였다(歸服)’라고 해석해야 되는데, 대체로 통설에서는 ‘고구려군이 임나가라의(任那加羅) 종발성에(從拔城) 이르자(至), 성이(城) 바로(卽) 항복하였다(歸服)’라고 城의 지명을 종발성(從拔城)으로 오인함으로서 임나가라가 정상적이고 대단한(?) 행정체(혹은,國家)인 것처럼 오해하게하여 ‘임나일본부’를 과대포장하는 일제사힉지들의 왜곡사관에 일조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즉, ‘任那加羅(임나가라)=가라지역에 있는 임나라는 마을’정도로 보면 되며, 구체적으로는 ‘任那(임나)=臨那의音變字=임시수용소’를 말하는 것으로서 대략 6세기 중반까지 백제본토와 가라지역에서 열도(현,일본)로 철수하지 못한 사람들을 임시로 체류시킨 임시수용소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물론 일본서기에 ‘御間城(어간성=미마나)천황의 이름을 따서 任那(임나=미마나)라고 했다’라는 견강부회성 연결고리를 만들어 역사왜곡을 뒷받침하고 있지만, 任那(임나)는 부산 초량에 있었던 왜관만도 못한 임시수용소로 보면 될 것입니다.
5) ‘安羅人戍兵. □新羅城□城 倭寇大潰 城▨▨▨盡□□□安羅人戍兵.]’: 미확인글자들 때문에 혼란이 생기고 있긴하지만,.. ‘安羅(안라)=阿尸羅(아시라)의축약형’으로서 이들의 출자지역의 특징이 ‘阿(언덕,아)’임을 말하는 것인데, 대략 모용선비계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상세설명:생략]. 그런리고, 이 문장 속에는 ‘安羅人戍兵’이라는 부분이 두 번 등장하는데,...앞의 것은 ‘임나가라의(任那加羅)에 있는 사람들이 安羅人(안라인)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뒤의 것은 ‘倭寇(왜구=열도에서 건너온 응신군)를 궤멸시켜서 安羅人(안라인)들에게 지키도록햇다’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즉, 이 ‘임나가라에 잇었던 安羅人(안라인)’과 ‘열도에서 건너온 응신군인 倭寇(왜구)’의 정체성을 서로 구분했었기 때문에 이런 기록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말해서 이 문장은, ‘열도에서 응신군(倭寇)이 건너오기 이전부터 加羅(가라)지역에 安羅人(안라인)이 있었었던 것’을 말하므로 ‘任那加羅(임나가라)란 것은, 加羅(가라)라는 지명에 任那(임나)라는 단어를 덧붙인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3) 404년(甲辰년)기사 ;
1) ‘而倭不軌侵入帶方界 [和通殘兵]’ : 이 문구는,.. 다른 기록들을 참조하면, 403년경 백제17아신왕이 고구려군에게 체포되어서 고구려에 포로로 송환되었었는데, 백제17아신왕을 추종하는 잔여세력들이 17아신왕을 구출하려고 대방계를 침범해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즉, ‘倭寇(왜구=열도에서 건너온 응신군)’은 이미 400년에 임나가라까지 추격당해서 고구려군에게 궤멸되어 소멸되었었는데 그들 중에서 도망친 일부 殘兵들이 다시 백제17아신왕을 추종하는 잔여세력들과 결집하여[和通殘兵]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인 帶方界를 침범했었던 것을 말합니다. 즉, 이는 열도 대화국 응신왕이 고구려에 반발한 것이 아니라 백제에서 궤멸된 응신군들 중에서 일부가 반발해서 문제를 일으킨 것을 말하는데, 결국 확실하게 참살되어 소멸되어 버리게 되는 과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2) 일단 이 비문에서는, 백제나 왜와 관련된 내용이 여기까지 나와있는데, 다른 기록들을 참조하면,... 403년~404년경 고구려로 잡혀간 백제17아신왕이 화형을 당해서 죽자, 405년에 열도(현,일본) 대화국왕 응신(왜왕찬)이 인질로 데리고있던 전지태자를 급거 백제본토로 귀국시켜서 백제왕으로 즉위시키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백제귀족들이 훈해(訓解)를 옹립하여 전지의 즉위를 거부하기도 하였었지만, 설례(碟禮)등의 도움으로 전지가 18전지왕으로 즉위하게 되어 이 이후의 백제와 신라는 열도 대화국(응신왕)의 관리를 받으면서 고구려를 맹주로 섬기는 상황이 되어 백제24동성왕대까지 왕권이 대체로 대화국의 영향을 받게 되었었던 것입니다. 물론 열도 대화국(응신왕)도 맹주인 고구려의 통제를 받아 백제와 신라, 가라를 관리하면서 자체적으로도 조공했었던 것이므로 백제,신라,가라를 대화국의 속국으로 볼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상 더 자세한 부분 :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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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통설이나 님이 보시는 부분을 카오스가 정리한 부분과 함께 감안해서 다시 살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아마, 우리가 알아았었던는 역사와는 사뭇 방향이 많이 달라질 것으로 봅니다. 다만, 아직 단편적인 내용이므로 전체적으로 확대해석해서 ‘엉뚱한 방향으로 재단’하지는 마시기 당부드립니다...
님의 역사연구에 조금이라도 참고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