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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 음 악 사
1. 상고시대의 음악
고대 중국인들은 우리 민족을 이족(夷族) 또는 동이족(東夷族)이라 불렀으며, 동이족의 음악을 매 리(離) 주리(侏離)라 하였고, 춤은 지모무(持矛舞)라 불렀다.
음악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음악 이름의 글자로 보아 춤은 창을 들고 추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농경 사회 이전 수렵 사회에서 추었던 춤으로 이해 할 수 있다. 또 구이(九夷)의 음악과 춤을 하(夏)나라 왕 앞에서 연주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B.C. 2000년경의 우리 음악이 우수했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민속을 소개한 문헌의 글은 매우 상세하게 쓰여져 있다. 부여에는 매년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고, 고구려는 10월에 동맹이라는 행사를 열었으며, 동예는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다. 온 국민이 한데 모여 며칠 밤낮을 춤과 노래를 즐기며,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빌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이미 노래나 춤과 악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현악기인 '슬'이라는 악기가 진한과 변한에 있었다고 한다. 영고 동맹 무천은 모두 추수가 끝난 후 하늘에 감사하는 국가적인 하늘제사로써,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 제사한 후 며칠 계속하여 술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고 즐겼다. 또 남쪽의 마한에서도 5월 씨뿌리기를 끝내는 때와 10월 추수하고 난 후 자연에 제사하고 연일 음식과 술을 먹고 노래와 춤으로 즐겼다.
부여 고구려 동예가 언어 풍속이 같고 마한 진한 변한도 북쪽지방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영고 동맹 무천과 마한의 행사는 그것의 제천 의식과 온 국민이 즐거움을 함께 한다는 뜻으로 보아 같은 풍속이며, 이러한 풍속이 선사 시대 우리 민족의 공통된 습속이었을 것이다. 특히 진한에는 '슬'이라는 현악기가 쓰였다고 하는데, 이 악기는 우리말로 '고' 라는 악기일 것이며 가야고의 원형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어느 민족이나 언어와 함께 고유한 음악이 있다. 이 음악은 종교와 더불어 생성 발전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음악이 독립하여 연주하지 못하고 문학 음악 춤이 혼연일체되어 연주된 선사 시대에는 음악이 종교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제사도 음악으로서 의식을 집행했으며 제사가 끝난 후 즐거운 놀이에도 음악과 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제사는 일종의 굿이므로 이러한 굿과 놀이는 현재 5월의 강릉 별신굿과 10월의 각 지방의 도당굿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풍속으로 보더라도 5월 단오를 수릿날이라 하여 수릿떡을 만들어 먹고 노래와 춤으로 즐기며, 10월(음력)을 상달(上月)이라 하여 초생달 아래에서 집집마다 신에게 고사를 드리고 선조 무덤에 제사하는 옛 풍속이 남아 있다.
2. 삼국시대의 음악
이전시대의 음악을 계승 발전시킨 삼국시대는 고구려와 신라, 백제, 가야가 제각기 고유한 국가체제와 문화를 형성하였던 3세기 경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668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고구려에서는 거문고가 가야에서는 가야금이 창안되어 이 시대의 음악사를 주도했다. 또, 문화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이 시대는 중국, 서역의 음악이 전래되었고, 삼국의 음악이 중국, 일본에 진출하는 등 전례없는 국제교류시대가 전개되었다.
1) 고구려 :
고구려의 음악문화는 고구려 고분의 벽화와 『삼국사기(三國史記)』『일본서기(日本書記)』『수서(隋書)』등의 문헌자료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악기 거문고는 『삼국사기』악지에 의하면 진(晉)나라에서 보내온 중국의 칠현금을 왕산악(王山岳)이 악기의 외형은 그대로 두고 구조를 개조하여 새악기를 만든 후, 이 악기를 위한 일백곡을 지어 연주를 하니 갑자기 '검은 학'이 내려와 춤을 추므로 '현학금(玄鶴琴)'이라 이름 붙였는데 훗날 '학'자가 빠지고 '현금(玄琴)', 즉 거문고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유래로 연주되기 시작한 거문고는 독주 악기로, 또는 춤 반주 악기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현재까지 우리 음악사에 중요한 맥을 이루며 전승되고 있다. 또 중국 문헌인 『수서(隋書)』동이전에, 고구려에서는 오현금․피리․횡취(橫吹)․소(簫)․고(鼓) 등이 연주되었다고 전하는데, 일본에 전해진 군후, 횡적, 막목, 춤의 편성과는 달리 중국 전래의 외래악기가 포함된 것으로 고구려 음악의 전혀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이 밖에 서역에서 들어온 관악기 피리가 편성에 추가되므로써 풍부한 음향을 가진 새로운 고구려 음악이 연주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서』와 『구당서(舊唐書)』등에는 중국 수(隋)와 당(唐)나라 때 중국 궁중에서 연주되던 각나라의 음악을 7부기(七部 伎)․9부기․10부기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는 고구려악이 포함되어 있어 이는 국제적인 음악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라 할 수 있다.
제 1 기 (B.C. 1세기~A.D. 4세기)
고구려가 융성하기 시작한 시기로써 여러 문헌들과 함께 안악 제 3호분의 주악도나 통구의 무용총 등과 같은 고분을 통해서 당시의 음악 문화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시대에는 기악과 성악, 춤이 종합 예술체에서 분리되고 중국 한(漢)나라의 음악이 들어와 고구려의 초기부터 음악 문화가 풍요했었다.
제 2 기(A.D. 4세기 ~ A.D. 6세기)
이 시기의 고구려는 백제의 서울 한성을 함락시키고 북부 지방의 부여를 통합하는 등 나라 안팎으로 가장 강력한 국가를 만들었다. 나라의 힘이 크므로 중국 대륙은 물론 서역 지방과도 교역이 활발하였고, 음악도 서역계 음악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제 3기(A.D. 6세기 ~ A.D. 7세기)
수세기에 걸쳐 막강한 힘을 가진 고구려는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입을 받게 되고, 백제와 신라와의 전쟁으로 인해 결국 705년간에 걸쳐 28대 왕들로 이어지던 고구려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668년 나라를 잃게 되었다. 고구려는 이렇게 어려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앞 시기에 이루어 놓은 음악 자산을 키워 5세기 이후 들어오기 시작한 중국 음악과 서역 음악은 더욱 많아졌으며, 이렇게 수입된 음악들은 고구려인의 취향에 맞게 고구려 음악화되었다. 또한 다양한 음악 문화를 흡수했던 고구려 음악은 해외로 나가 연주할 만큼 훌륭한 음악을 만들었다.
음악 연주와 춤, 놀이는 궁중에서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성행했었는데 기록이나 벽화에는 보이지 않으나 노래도 많이 불렀을 것이고 또 고구려는 부여, 동예를 통합하였으므로 영고, 동맹, 무천과 같은 집단적 제천 의식과 음악, 춤, 놀이도 풍습으로 지속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구려 제 1기가 음악이 뿌리내리고 싹이 돋은 시기라 하면, 제 2기는 나무가 자라고 꽃이 핀 시기이고, 제 3기는 열매 맺어 씨를 뿌린 시기라고 하겠다.
2) 백제 :
선사 시대의 마한땅을 중심으로 왕국을 건설한 백제는 고대 음악을 알 수 있는 역사적 자료가 부족하여 음악에 대한 내용을 잘 알기 어렵다. 선사 시대로부터 있어 온 제천 의식과 백제인들이 불렀던 노래들이 일시에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며, 게다가 남부 중국과 교역함으로써 음악이 상당히 발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B.C.18년 ~ A.D. 660년) 음악 전체를 한 시기로 묶는다. 이 시대의 음악은 중국의 남송이나 북위 등에 소개되었고, 일본에도 전래되었다. 일본 서기에 의하면 백제의 악인 삼근․기마차․진노․진타 등의 악사와 악기와 춤을 가르쳤다. 특히 미마지는 7세기 초에 중국의 오나라에서 기악무를 배워 일본에 전하였다. 백제의 음악문화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인 시기는 늦으나 5세기~6세기 사이에 중국 남송과 북위 등에 고구려악 못지 않게 소개되기도 하였다. 삼국 중에서 일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측되는 백제음악은 고구려 음악과 같이 군후․막목․횡적․춤의 편성으로 되어 있다. 특히 미마지(味摩之)가 오(吳)나라에서 배운 기악무(伎樂舞)를 일본에 전한, 이 기악의 가면은 일본 여러 절에 지금까지 보관되고 있다. 이기악은 산대도감(山臺都監) 놀이 및 봉산 탈춤과 같은 가면무라고 한다. 동이전에 의하면, 백제 국내에서는 고(鼓)․각(角)․공후․쟁․우․지․적(笛) 등 일곱가지 악기가 사용되었다. 이들 악기는 중국 남조의 청악(淸樂)과 유사하다. 한편, 백제의 가요로 유명한 정읍사(井邑詞)가 있고, 곡목만 전해지는 방등산․무등산․지리산 등이 있다.
3) 신라 :
옛 진한 땅 경주 지방의 사로국에서 발전한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왕국을 건설하여 4세기 후반에 이르러 그 세력이 막강하였고, 6세기에 가야국들을 병합하였으며, 7세기에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을 통일하였다. 신라(B.C. 57년 ~ A.D. 935년) 음악은 통일 이전의 음악과 통일 이후의 음악 두 시기로 나눈다. 통일 이전의 신라 음악은 가야고로 연주하던 음악과 향가가 있었다.이 시대는 가야금 음악이 대표적인데, 삼국 사지 중 '악지'에 의하면 가야국의 가실왕이 가야금을 만들고, 우륵이 악곡을 지었다고 한다. 신라의 음악문화는 삼국 중 중국과의 국제교류가 가장 저조했다. 가야국의 성열현(省熱縣) 사람인 우륵(于勒)은 가야금을 위해 12곡의 가야금곡을 지어 가야금 시대를 열었다. 우륵이 지은 12곡의 가야금 곡의 제목은 대부분 현재 경상남북도의 여러 지명(地名)과, 이밖에 탈놀이 중의 사자춤과 관련이 있을 듯한 <사자기>라는 곡명, 구슬던지기 놀이의 일종인 <보기(寶伎)>라는 곡명으로 되어 있어 우륵이 향토색 짙은 각 지역의 음악 및 민간에 전승되는 놀이 등을 주제로 가야금곡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6세기 경에 신라에 수용된 가야금은 신라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당시 신라악은 대부분 가야금과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 편성이다. 통일 전의 <신열악>․<사내악>․<미지악> 등 고악(古樂)은 가야금을 수용한 이후, 곡이 세련되고 아정한 음악으로 바뀌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또한 신라 음악사를 보면, 조상제사, 연희 등에 소용되는 음악을 위해 둔 것으로 해석되는 '음성서(音聲署)'라는 국가음악기관을 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민간에서 널리 불려졌던 가요로 향가가 있는데, 당시 위흥과 대구 화상에 의해 향가가 수집, 편찬되었으나, 지금은 25수의 가사와 제목만 전하고 있다.
3. 통일신라시대의 음악
이시대의 음악문화는 불교음악이 본격적으로 전래 되었으며, 궁중에서는 삼현삼죽(가야금․거문고․비파․대금․중금․소금)이 주축을 이루는 향악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신라고유의 향토음악 향악은 삼현삼죽과 박판(拍板)․대고(大鼓)․가(歌)․무(舞)로 이루어져 훨씬 다양하고 화려해졌다. 이는 서역의 악기 향비파, 당나라의 악기 박판․대고 등을 복합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3현 3죽과 음악
3현 3죽은 가야고, 거문고, 향비파의 3현과 대금, 중금, 소금의 3죽을 말한다. 3현중에서 가야고는 통일 이전과 같이 기악 형태로 연주되었고 또 노래와 춤에 편성되어 연주되었다.
문무왕 8년(668년) 신라가 통일되었는데, 거문고는 이 당시에 고구려로부터 전해진 것 같다. 그 뒤 거문고가 연주되지 않고, 신기(神器)로 간주되어 월성(月城) 천존고(天尊庫)에 보관되어 오다가 9세기경부터 일반인들이 연주 악기로 사용하기 시작 하였다. [삼국사기]에 거문고가 들어온 이후 악기로 사용하기까지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라 사찬 벼슬을 가진 공영의 아들 옥보고가 지리산 운상원에서 50년간 거문고를 익혀 스스로 30곡을 작곡하여 이를 속명득에게 전하였는데, 속명득은 다시 귀금선생에게 전하였고, 귀금선생은 역시 지리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신라왕은 금도(琴道)가 단절될 것을 두려워하며 이찬 벼슬의 윤홍으로 하여금 그 음악을 전수받기 위해 남원 공사로 임명하였다. 윤홍이 부임하여 안장과 청장 등 총명한 두 소년을 뽑아 지리산에서 거문고 음악을 전수받도록 하였다. 귀금선생은 그들에게 거문고를 가르쳤으나, 비곡(秘曲)은 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윤홍은 부인과 함께 귀금선생에게 가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나를 남원에 파견한 것은 선생의 음악을 전수받게 하고자 함인데 3년이 지나도 비곡을 가르쳐 주지 않으니 내가 왕에게 무엇이라 말하리이까' 하고 부인과 더불어 모든 예의를 갖추니 비로소 표풍(飄風)등 3곡을 전수하였다. 안장은 그의 아들 극상과 극종에게 그 음악을 가르쳤고 극종이 7곡을 작곡했는데, 극종 이후로는 거문고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춤과 연희
하신열무(下辛熱舞), 사내무(思內舞), 상신열무(上辛熱舞), 소경무(小京舞), 한기무(韓岐舞), 미지무(美知舞), 대금무등이 있었으며, 하신열무 등 4편의 춤은 가야고와 노래 춤의 종합예술이었고, 한기무 등 세 편은 가야고 편성의 춤이었다. 이밖에 화랑 관창의 가면을 쓰고 춘 검무와 원효대사가 파계하여 각 고을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을 춘 무애무가 있다.
팔관회가 열였는데 하늘과 명산, 큰 강이나 용신 등 토속신에게 제사하고 국가와 왕실의 태평 행복을 기원하며, 화랑에 의해 노래와 춤 놀이를 하였다. 흔히 제사는 11월에 거행하고 이 날에 모든 백성들이 함께 즐기는 행사였다.
학자 최치원(837년 ~ 876년)이 쓴 시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향악잡영 5수]로서 이 시를 통해 다섯가지 놀음과 이에 따르는 음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섯 가지 놀음은 금환, 월전, 대면, 속독, 산예인데, 금환은 백제의 농주(弄珠)와 우륵의 12곡 중 보기와 유사한 공놀이 또는 오자미의 일종이고, 월전은 재담, 대면은 탈춤, 속독은 춤, 그리고 산예는 우륵의 12곡 중 사자기와 같은 사자춤이다. 또 금환, 대면은 중국계통의 놀이이고, 월전, 속독, 산예는 서역 계통의 놀이지만 음악은 알 수 없다. 최치원의 시는 서역악이 신라에 들어왔다는 증거가 되는데,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헌강왕 11년(885년) 이후에 시를 썼고 향악이라고 말한 점에서 중국 음악과 서역악이 9세기말에 향악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음악 범패
불교 음악은 절에서 재를 올릴때 부르는 범패(梵唄)와 포교를 위해 우리말로된 화청(和請)과 회심곡(回心曲)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경덕왕 19년(760년) 국선(國仙)에 속한 월명사가 "향가는 알지만 범패는 부를 줄 모른다."는 기록에서 8세기 중엽 범패가 신라에서 가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범패를 부르는 범패승과는 달리 원효대사가 무애가를 부르며 춤을 춘 것은 포교를 위한 거사(居士) 소리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범패의 기록은 옥천사에 세운 진감선사(眞鑒禪師)의 [대공탑비문]에 범패의 오묘함을 배우려는 사람이 많다는 내용이 처음이다.
진감선사는 애장왕 5년(804년) 당나라에서 불도를 닦고 27년만인 홍덕왕 5년(830년)에 귀국하여 옥천사에서 불법과 범패를 가르쳤으므로 범패는 늦어도 9세기 신라 사찰에서 널리 가창되었을 것이다. 당시 적산원(赤山院)에는 대중이 석가를 칭송하는 회중가의 신라풍과 당나라에서 부르던 당풍, 그리고 당나라의 범패보다 더 오랜 고풍의 세 범패가 있었는데, 신라의 범패는 신라풍과 고풍의 두 양식의 음악이 가창되었다고 본다. 범패 자료는 [동음집](同音集)과 1931년 출간된 [석문의범](釋門儀範)이 있다.
당악이 들어옴
문무왕 4년(664년) "성천(星川)과 구일(丘日)등 28명이 부성에 가서 당악을배웠다." 고 한다. 신라가 통일한 것은 668년이고 부성에 당나라 군대가 주둔했던 점으로 보아 이때 배운 당악은 고취(궁중 의식이나 군대 행진에 연주되는 일종의 취주악) 형식의 음악일 것이다.
삼현삼죽 음악에 사용된 궁조, 월조, 반섭조 등 당악의 조이름을 사용하고 여러 유적에서 나타난 악기들을 보면 당악이 많이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고, 요고, 횡적, 당비파와 퉁소, 쟁, 소, 생, 당피리, 적(笛), 박판, 공후 등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음성서 설치
국가가 안정되고 문화가 팽창됨에 따라 신라의 궁정은 의식을 제정하여 집행하게 되고, 의식에는 음악 연주를 수반할 수밖에 없게 된다. 궁중의 의식 음악은 예고됨이 없이 항상 열리는 것도 있으므로 음악인을 궁중에 상주시켜 연주, 행정, 교육을 담당할 음악 기관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음악 기관이 음성서(音聲署)이다. 음성서가 설치된 연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진덕왕 5년(651년)에 음성서의 관리를 임명했는데, 음성서는 늦어도 진덕여왕 이전 7세기 중엽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의 무속
환웅천왕이 내려온 신단수 부근은 신역 또는 재단으로서 이 주위를 신시(神市)라고 하였다. 단군은 이 천왕의 아들이라 하여 천왕을 제사하고 모시던 고조선의 제주(祭主)이며 군장(君長)이었다. 고조선뿐만 아니라 신정시대 즉 제정일치 시대의 모든 군장이 제주를 겸하였다. 따라서 이 때 백성들은 제주인 무당을 통해 하늘에 제사하고 신을 섬겼는데, 신라는 왕호를 차차웅(次次雄) 즉 무당이라는 호칭을 가졌으며 고구려는 사무(師巫), 마한의 천군(天君)은 모두 제정이 하나로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의 호칭이었다.
가야국의 계락(稽洛), 동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백제의 소도 등은 단군신교의 유풍으로 후세에까지 전해졌으며 유(儒) 불(佛) 선(仙)이 들어옴으로써 고유한 무속이 변형되었다. 즉 유교의 길흉의 예의와 불교의 분수(焚修)의 법, 도교의 초제의 의식 등과 혼합된 무속이 되었다.
굿 또는 제사의 주제(主祭)를 무(巫)라 하였는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신을 내리게 하고 기도로써 재앙을 피하여 축복을 내리게 하였다. 여무를 무당 또는 만신이라 하고 남무를 박수 또는 복사라 한다.
고구려는 10월에 하늘에 제사했다는 부여신과 그 아들인 고등신(高登神)을 모신 신묘가 있고 신수라는 큰 구멍에 왕이 직접 제사했다. 고구려 초기 시조묘를 세우고 제사하는데 이 때부터 제정이 분리되었다. [삼국사기]에 무당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달리 건국초까지 제정이 분리되지 않았다. 신라인은 차차웅으로 항상 귀신에게 제사하였기 때문에 차차웅을 경외하였으며 드디어 군장을 차차웅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도 차차웅이고, 제2대 남해왕도 차차웅으로서 박혁거세묘를 세워 제사하였고 사직단을 세우고 명산대천에 제사하였다. 또 선농제, 중농제, 후농제, 풍백제, 우사제와 영성제 등을 지냈다.
삼국의 무속은 무당이 주제자(主祭者)로서, 의무(醫巫)로서, 예언자의 직능을 가지고 있었다. 또 고대 삼국의 원시 종교에는 신을 숭상하고 존경하는 신도적 신앙과 악령을 숭배하며 제사하는 샤만적 술법같은 신앙이 혼합되어있다. 따라서 남무(男巫)는 박사(搏士), 박수, 화랑, 낭중, 양중이라 일컬었으며 화랑은 결국 광대(廣大), 창우(倡優), 우인(優人), 재인(才人)으로 후세에 계승되고 있다.
이들의 굿노래가 전해오는 것은 없지만, 현재 제주도의 본향풀이나 서울 바리 공주의 가사는 고대 서사시의 계통을 이은 무사 가요로서 고대에 그 연원을 둔 것이 아닌가 해석된다.
신라의 가야고와 백제의 군후도 일본에 전했는데, 가야고를 신라금(시라기고도), 군후를 백제금(구다라고도)라고 하며 일본에 전한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기록에 의하면 삼국 중에서 신라 음악이 먼저 일본에 전하였으며, 백제와 고구려는 연대가 명확하지는 않으나 당시 교역 상황으로 보아 백제가 고구려보다 앞서 일본에 음악을 전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대외적인 면에서 고구려는 중국의 북조와 서역 지방에서 음악을 받아들였고, 백제는 중국의 남조와, 신라는 중국을 거쳐 서역 지방에서 음악을 수입하였다. 대내적으로는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 음악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백제가 더욱 그러하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음악을 받아 자국화 시킴으로써 세 나라가 각기 고유한 음악 문화를 형성하였고 이를 다시 일본에 전하여 고대 일본 음악문화 형성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일본에 전한 고구려와 백제의 악기가 같음에도 일본 궁중에 고구려 음악과 백제 음악을 나누어 연주하게 하고 가르쳤던 것은 두 나라의 악기는 같으나 음악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상류사회 지식계층에는 거문고를 중심으로 한 금가(琴歌)의 문화가 맥을 이루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금가인 <풍입송>류의 음악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민간에서는 고대의 제천의식을 수반했던 국중대회의 전통이 팔관회(八關會)로 이어지기도 했다. 또한 이 시대의 특징으로 범패를 들 수 있다. 이는 불교의 의식음악으로 830년 신라의 진감선사가 당나라에서 배워 옥천사에서 가르쳐 불교음악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편 신라의 향가는 진성여왕 2년(888)때 위홍과 대구화상이 편찬한 삼대목이란 향가집은 전해지지 않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처용가, 헌화가, 서동요 등 10여곡이 전해지고 있다.
4. 고려시대의 음악
고
려시대의 음악사는 의종 말년(1170)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 고려조는 불교를 숭상하여 불교적인 행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고, 전통적인 무격의식과 관련되어 면면히 이어온 것도 있다. 고려 시대에는 팔관회와 연등회 같은 불교 행사의 끝에 '악․가․무'의 민간 행사가 있었다. 또 당악이 들어오면서 향악이라는 遁명칭이 생겼으며, 예종 때에는 송나라로부터 아악이 수입되어 향악․당악․아악이 구분되기도 하였다.
1) 향악(鄕樂) :
당나라 음악이 들어오기 이전의 우리 나라 음악으로, 사모곡․서경별곡․한림별곡 등의 고려 속악이 있었으며, 악기는 통일 신라 시대의 삼현(가야금․거문고․비파)과 삼죽(대금․중금․소금), 그 밖에 장구․피리․박 등의 악기가 있었다. 무용 반주를 위한 삼현 육각의 악기 편성도 이때에 생겨난 것이다. 전기는 향가와 화랑의 전통, 팔관회와 연등회 등 통일신라의 유풍이 강하게 전승되는 한편, 중국으로 부터 아악이 전래되어 향악, 당악, 아악의 전통이 정립되었다. 종묘 사직 등 국가의 중요한 제사에 사용된 중국 고대의 의식음악인 아악은 금․석․사․죽․포․토․혁․목의 팔음(八音)악기를 당상악(堂上樂;登歌)과 당하악(堂下樂;架)으로 구분 배치하여 율려(律呂)에 맞게 교대연주하는 독특한 음악이다. 뿐만아니라 여기에 악장과 춤이 반드시 따르는 악, 가, 무 총체의 음악으로서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가장 이상적인 음악으로 인식되어 왔다.
2) 당악(唐樂) :
당․송․원나라 음악을 합친 것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곡으로는 낙양춘․보허자 뿐이며, 이 두 곡도 모두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향악화 되었다. 당악은 악기나 춤에 있어서도 당악기․향악기 및 당악정재․향악정재라는 구분이 생겨나게 된다. 당악정재(唐樂呈才)는 방향․비파․생․당적․피리․장구․박 등이 당악기 반주 및 순한문으로 된 송사(宋詞)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당악의 핵심을 이룬다. 송나라에서 들어온 교방악(敎坊樂)․사악(詞樂)과 원나라의 일부까지를 포괄한 중국의 속악을 통칭한 당악은, 향악과 양립하여 쌍벽을 이뤄 좌우로 구분(양부악(兩部樂); 좌방악(左坊樂) - 당악, 우방악(右坊樂)-향악) 되었다.
고려의 향악은 향악기 및 사뇌․삼국악․양부악의 전통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통일신라의 향악을 계승하였다. 중엽에는 동래에 귀양살이를 하던 중 거문고를 어루만지며(撫琴) 노래하였다는 <정과정(鄭瓜亭)>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금곡(琴曲)이 출현, 이는 우리말 가사를 가진 조선조의 <진작(眞勺)>으로 이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3) 아악(雅樂) :
궁중 의식에서 연주되던 전통 음악으로, 지금까지 악기는 많이 남아 있지만, 악곡은 오로지 '문묘 제례악' 한곡만 전해지고 있다.
후기에 들어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유풍이 점차 사라지고, 아악의 전통도 주변 정치상황에 기인하여 문란해졌다. 이 시기 음악문화는 전기에 수입된 아악과 당악이 고려 후기의 혼란기를 통해서 점차 쇠퇴해 가는 일면과 이런 사회상을 반영한 새로운 노래들이 대두된 것이 또한 하나의 특징이라 하겠다. 당악은 쟁과 대고 대신 대쟁과 아쟁, 교방고가 쓰이고 새롭게 퉁소가 사용된다.
고려후기의 향악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별곡(別曲)'의 출현이다. 별곡은 8장으로 된 <한림별곡>이나 13장으로 된 <청산별곡>의 경우에서와 같이, 여러장으로 된 긴 가사가 1장의 음악으로 반복되는 유절 형식의 장가(長歌)이다. 그외 <만전춘> <이상곡> <쌍화점>이 있다. 이러한 고려의 속악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 가사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는 이유에서 잡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그 음절은 조선 초기의 궁중음악에 차용됨으로써 그 음악적 내용을 후대에 전하였다. 의종이 무신(武臣)들에 의해 시해(1173)된 사건을 계기로 여러차례의 외침과 장기간의 천도로 악공이 흩어지고 아악기 손실 등 그 전승에 타격을 입어, 1371년, 공민왕이 아악서(雅樂署)를 신설, 아악복구작업을 일으켰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다.
5. 조선시대의 음악
조선 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하여 예와 악을 중히 여김에 따라, 태조 때 음악을 관장하는 전악서와 아악서를 두었고, 정도전․하 륜 등이 납씨가․정동방곡․순덕곡 등을 지었다. 고려 때와는 달리 불교 대신에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은 예악(禮樂)을 존중하여 이를 정치, 교육의 근본 이념으로, 건국 초에 아악서(雅樂署)와 전악서(典樂署)를 설치하면서 조선조의 음악을 관장하기 시작하였다.
1392년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까지 전기의 특색은, 숭유(崇儒)불교억제정책으로 연등회와 같은 불교관련 행사의 폐지, 아악의 일신 그리고 건국 개업을 칭송하는 <봉래의> <발상> <보태평> <정대업> 등 신악(新樂)의 창작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음악제도 보존을 위해 성종 24년『악학궤범』9권 3책의 형태와 같은 악서가 발간된 것이다. 『악학궤범』은 음악역사 서술을 생략하고, 12율의 결정법, 등가악과 헌가악의 중심음 사용법, 악기 진설법, 춤의 진퇴작변(進退作變), 악기제조법과 조현법 등 음악의 실용성을 광범위하고 상세하게 기술하는데 치중하였다.
1) 세종 :
박연에 의한 아악의 정리와 맹사성에 의한 향악의 정립, 편종과 편경을 비롯한 새로운 악기 제작, 새로운 기보법인 정간보가 창안되기도 하였다. 한편 권 제․정인지․안 지 등이 지은 용비어천가를 가사로 한 '여민락'은 지금도 기악곡으로 연주되고 있으며, 정대업과 보대평 등이 작곡되었다. 세종에 이르러 박연, 남급, 정양, 맹사성과 같은 이론가에 힘입어 음악 사업을 활발하게 벌여 아악의 부흥, 향악의 창작, 악보 창안, 간행을 하였다. 아악기 제작으로 악기를 자급자족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중요한 악기제작으로 편경(編磬)과 편종(編鐘)을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간보(井間譜; 매정간이 시간단위를 표시하는 유량악보) 창안 및 악보출간을 들 수 있는데, <정대업> <보태평> <치화평> <취풍형>등의 신악이 이 기보법에 의해 악보화되었다. 이는 다른 기보에 비해 싯가(時價)가 분명한 점이 장점이다.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속악보는 용비어천가를 가사로한 여민락 만. 문묘악 그리고 세조실록 악보에 전하고 있는 정대업․보태평 등이다. 성종대에 차츰 당악기는 향악에 편성되는가 하면 악기 개량도 보인다. 이러한 악기들은 박(拍), 월금(月琴), 당비파, 장고, 해금, 아쟁, 당적, 당피리, 태평소 등이다.
향악은 『대악후보』 『시용향악보』 및 『금합자보』에 기보되었고, 특히 직업음악인이 아닌 선비들간에 애탄(愛彈)되었던 금곡 『금합자보』의 첫머리에 실린 평조의 <만대엽>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평조, 우조, 평조계면조, 우조계면조의 <중대엽>과 <삭대엽>을 파생하였다.
2) 세조 :
세종이 만든 정간보를 근거로 하여 오음 약보를 만들었으며, 보태평과 정대업을 개작한 것을 종묘 제례악으로 채택하여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3) 성종 :
고려 음악의 개작과 당악기 계통의 악기를 개량하였고, 성 현이 중심이 되어 악학궤범을 편찬하였다. 이 악학궤범은 우리 나라 음악 전반에 걸친 내용을 총정리한 것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전통 음악의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임금의 거동에는 여러 형태의 고취악이 연주되었는데, 이는 전정헌가(殿庭軒架), 전정고취(殿庭鼓吹), 전부고취(前部鼓吹), 후부고취(後部鼓吹)등을 말한다. 행례에 사용되던 음악은 대개 여민락 만, 여민락 영, 유황곡, 정동방곡, 낙양춘, 보허자 등의 곡을 들 수 있다. 전정헌가와 전정고취가 전․후부고취와 다른점은, 전자는 거문고, 가야금 등 놓고 타야 되는 악기와 편종, 편경, 건고, 응고, 삭고 등 들고 다니기 어려운 악기로 편성되어 있어 일정한 장소에 위치하여 연주하는 형태이고, 후자는 행악(行樂), 즉 행진할 때 연주되는 음악형태로 주로 어깨에 메고 다닐 수 있거나 들고 다닐 수 있는 악기들이어야 된다.
아정한 음악 또는 담백하고 복잡하지 않은 정악이라는 음악이 있다. 이는 전문음악이 아닌 선비들의 음악이라는 점에서 '금가'와 통한다. 정악의 또다른 뜻으로 그 명칭이 음률로 지칭되었던 예와 같이 노래를 수반하지 않는 기악곡을 가리키며, <영상회상> <여민락> <보허자> 등이 이 음률의 대표적인 곡에 든다.
4) 영조 :
악학궤범을 복간하고 부족한 악기를 새로 만들었으며, 가곡․가사․시조․판소리 등이 크게 발전하였다. 영조 무렵에 고개를 든 판소리(타령 또는 잡가)는 문헌 유진한(柳振漢: 1711~1791)의 만화집(晩華集)에 춘향가 200구(句)가 있고, 송만재(宋晩載:1769~1847)의 판우회에는 12마당이 들어있다. 그 중 현재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박타령), 수궁가(토끼타령; 별주부전), 적벽가(화용도)의 다섯마당만 전하고 배비장전 이하의 7곡은 가사 또는 곡을 잃었기 때문에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 판소리는 한 사람의 창자(唱者)와 고수(鼓手)와 함께 긴 이야기를 소리와 몸짓, 아니리(말체)로 끌어 가며 청중을 울리고 웃기는 대중음악이다. 소리나 아니리의 여러가지 표현에 맞는 동작을 취하는 것을 발림(科)이라고 한다. 그리고 고수가 북을 치며 "좋지", "얼씨구" 등 감탄사나 흥을 돋구는 말들을 간간히 하는데, 이것을 추임새라고 하며, 이는 장단을 정확하게 치는 만큼이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판소리 초창기 인물로 우춘대(禹春大)를 비롯하여 권삼득(權三得), 모흥갑(牟興甲)등을 꼽을 수 있고, 그 후에도 박유전(朴裕全), 염계달(廉季達) 등 헤아릴 수 없는 명창들이 많이 있다.
이 판소리 외에도 조선후기의 민속악은 많은 분야가 새로 생겨났다. 즉, 서울지방의 잡가(12잡가), 절간에서 타락한 우바새(男)나 우바이(女)들이 절간으로 혹은 민가로 돌아다니면서 재주를 피우고 소리를 하는 사당패 음악, 남도 무악계의 시나위와 이 시나위에서 파생되어 점차 체계를 잡은 산조(散調) 등이 있다.
그외 별곡과 함께 장가에 속하는 노래로 단가(短歌)인 가곡과 대조를 이루는 가사가 있다. 이는 음악중심인 가곡과 달리 사설이 중심이 되는 노래다. 시절가라고도 하는 시조는 가곡의 사설을 차용하지만 음악의 형식에 있어서 가곡처럼 5장이 아닌 3장으로 되어 있고, 1장의 박자수도 가곡보다 적어서 가곡을 단순화한 것이 바로 시조라 할 수 있다.
5) 조선시대 말기 :
12잡가․민요․시나위․산조․풍물 등이 발전하여 오늘날 전통 음악의 바탕이 되었다.
그러다가 1910년 통치권을 일본에게 빼앗기면서 우리 나라 전통 음악은 존폐 위기를 맞게 되었으며, 궁중 폐쇠에 따른 궁중 음악의 양식 변화와 아울러 민간 음악도 침체 되었다. 그리고 갑오 경장 직후 700여 명이던 궁내부의 악사들이 40여 명만 남게 되었고, '이왕직 아악부'에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여 왔다.
한편 갑오 경장 이 후 문호가 개방되면서 서양 음악이 들어와 보급되었다. 1910년에 이화 여자 전문 학교에 음악과를 두어 처음으로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으며, 고종 때에는 민영환에 의해 궁중에 군악대가 창설되어 음악인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6. 근세․현대 사회의 음악
1) 조선시대 말기 :
12잡가․민요․시나위․산조․풍물 등이 발전하여 오늘날 전통 음악의 바탕이 되었다.
고종31년 갑오경장(甲午更張)이후 제국주의의 간섭과 침략으로 대한제국은 급속도로 붕괴의 과정을 밟게 되고, 이후 한일합방과 일제 식민지시대로 접어들면서 음악문화도 급속한 변화를 겪었다.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던 궁중음악은 왕실의 몰락과 함께 쇠퇴의 길을 걸어야만 했으며 궁중음악에 종사하던 많은 음악인과 궁중연회에 참여하였던 무기(舞伎)들은 생업을 바꾸거나 새로이 생겨난 공연장에서 공연활동을 하였다. 그 결과는 왕실을 위한 의식음악(연향, 조회, 동가(動駕), 군례(軍禮)의 중단, 제례음악의 중지, 궁중음악인의 감소를 가져왔다. 갑오경장 직후만 해도 772명이나 되던 악사들은 차차 문화 말살정책으로 1917년에는 겨우 50여명만이 남게 되었다. 서양음악이 들어왔는가 하면 서양식 군악대가 창설되고 국악은 또다시 수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조선조 음악이 공연예술로 전환되는 시대적 변천과정을 겪으며, 『조선악개요(朝鮮樂槪要)』 『조선아악요람(朝鮮雅樂要覽)』 등 여러가지 악서의 출판, 경종보 대금보 피리보 당적보 해금보 아쟁보 단소보 현금보 등의 악보제작과 오선보로의 채보 음반취입 등의 작업이 이루어져 조선조의 음악전통이 현대로 전승되는 과도기적 사명을 수행하게 된다.
이왕직 아악부(雅樂部)의 전통은 해방 이후 후계자 양성을 위한 구황궁아악부로 존속하다가 1950년 국립국악원의 창설로 그 맥을 이었다. 조선조 중 상류층에서 애호되던 정악도 왕조의 몰락과 신분제도의 붕괴로 크게 위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공연형태를 통해 대중에게 파고들기 시작한 민속악에 밀려나는 위기를 맞아, 정악 애호가들이 정악의 융성을 통해 전통문화를 계승코자 1909년에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를 결성하게 된다. 이는 최초의 사설의 음악기구라는 역사적 의의와 전통음악과 양악을 동시에 교육시키는 음악교육기관으로 평가된다.
그러다가 1910년 통치권을 일본에게 빼앗기면서 우리 나라 전통 음악은 존폐 위기를 맞게 되었으며, 궁중 폐쇠에 따른 궁중 음악의 양식 변화와 아울러 민간 음악도 침체 되었다. 그리고 갑오경장 직후 700여 명이던 궁내부의 악사들이 40여 명만 남게 되었고, '이왕직 아악부'에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여 왔다.
한편 갑오경장 이 후 문호가 개방되면서 서양 음악이 들어와 보급되었다. 1910년에 이화 여자 전문학교에 음악과를 두어 처음으로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으며, 고종 때에는 민영환에 의해 궁중에 군악대가 창설되어 음악인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창극은 판소리의 새로운 변형으로서 현대국악사에 큰 의미를 지닌다. 판소리를 각 등장 인물별로 그 역을 분담하여 분창하는 양식으로 출현하였다. 이는 외래 공연양식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이 시기의 사회변화상을 반영하고 있다. 창극은 최초의 서양식 원형극장인 원각사에서 첫 선을 보였다. 판소리는 창극에 밀려 고유의 음악적 발전은 크게 진전되지 못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조선성악연구회> 결성 이후 판소리 명창들은 대규모 창극공연과 판소리 공연활동을 벌임으로써 남도음악의 전승을 공고히 할 수 있었고 그것이 오늘에 이어지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광복 후 1951년 국립 국악원의 개원으로 전통 음악의 연구 및 연주 활동이 활발해 졌으며, 국립 국악원에서는 부설로 '국악사 양성소'를 운영하여 전통 음악 보급에 힘썼다. 1960년에 접어 들면서 국악원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활발해져 중앙의 대소 연주를 비롯, 지방순회연주, 국외의 파견 연주, 국가 의식의 연주악, 문묘 종묘 등 연례적인 제악 연주 및 TV 라디오 방송을 통한 각종 연주회를 연 백회이상 실시하여 국악 보급 활동에 전력을 다했다. 국립국악원은 아악이나 창작 국악 뿐만 아니라 민속악(民俗樂)부분, 즉 판소리 산조(散調) 민요(民謠) 민속무용(民俗舞踊)까지도 포괄한 범국악(汎國樂)의 종가(宗家)로 군림해 왔다.
한편 서울 대학교를 비롯하여 각 지방 대학에까지 국악과가 신설되어 전통 음악 교육과 함께 전문 국악인을 양성하고 있다. 그 밖에 서울 시립 국악 관현악단을 비롯한 여러 국악 연주 단체에서도 전문 국악인을 수용하여, 연주회를 통해 전통 음악을 계승․발전시키고 있다.
현재 우리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노력들이 다양한 곳에서 벌여지고 있다. 국악인들의 끈질긴 집념과 60년대의 탈춤부흥운동, 70년대의 마당극, 풍물, 마당굿, 대동놀이 등 연희성을 띠는 연행예술운동의 진행으로 우리 음악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 풍물의 대중화는 서양음악에 밀리는 국악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하게 되었다. 또한 김덕수 사물놀이패 등 우리음악을 세계에 알리는 활동을 끊임없이 시도하면서, 우리 국악을 세계속에 독특하고 훌륭한 음악으로 인정받게 하였다. 방송매체에서도 국악의 이론 등 다채로운 공연을 소개하고 있고, 이러한 폭넓은 활동은 현재 국악의 재평가, 정립으로 새로운 시도를 도모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전통 음악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형태로 보존과 발전의 균형을 이루어 가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전통 음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는 것은 전통 음악의 미래에 밝은 빛이 되고 있다.
7. 20세기의 음악의 현실
어느 사회에서나 음악은 사회적 활동의 소산이다. 음악이 사회적 활동의 소산이라는 말은 몇 가지 각도에서 설명될 수 있다. 먼저, 음악은 사회적 수요와 공급이라는 유통체계를 전제로 존재하게 된다. 이 말을 쉽게 하면 음악을 업으로 하는 음악 전문가는 먹고살기 위해 음악을 한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계속 먹고살기 위해서는 계속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정상적 인 사회에서의 정상적인 음악의 자생력이다. 또 음악이 사회적 활동의 소산이라는 말은 음악은 당대의 사회적 의식과 경향을 철저히 반영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회 의식과 무관한 순수음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순수음악이라는 말 또한 어떤 이념을 옹호하는 태도일 뿐이다. 어쨌거나 19세기까지 우리 음악은 이렇게 정상적인 구조 속에서 정상적으로 생성되고 유통되었다.
그러다 190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새로운 음악이 유입되기 시작한다. 통로는 많았다. 선교사가 들고 들어온 찬송가, 신식 학교에서 가르친 창가, 광무 연간에 창설된 서양식 군악대의 음악. 이런 외래음악의 유입은 역시 정상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문화는 이처럼 서로 접하고, 서로 주고받으며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후 전개된 사태는 다분히 충격적이고 폭력적이었다. 먼저 일제의 강점과 조선 왕조의 멸망은 우리 음악사의 물길을 급격히 바꿔놓은 사건이었다. 조선 왕조의 멸망이란 비단 왕가의 몰락만이 아니라 감영, 군영 등의 모든 지배체계와 지배계급의 몰락을 의미했으며, 이는 곧 가장 큰 음악 수요자의 상실을 의미했다. 음악 수요가 막힐 때에 이미 있던 음악은 자생력을 잃고 박제화, 화석화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민간의 음악 수요는 여전했다. 원각사에서는 명창의 열창에 갈채를 보냈고, 남사당을 반기는 시골 마을은 많았다. 하지만 일제 강점이 햇수를 더해갈수록 상황은 바뀌어 갔다. 보통교육을 통해 유포한 창가류와 일본 음반자본이 만들어낸 황성옛터류의 음악에 대중의 음악적 감수성이 서서히 변질되어 갔던 것이다. 우리 음악과 유행가의 음반 발매 분포가 1930년대 중반을 고비로 역전되었다는 사실이 이런 사정을 잘 말해준다. 이 시점의 마지막 음악 시장의 하나는 요릿집과 권번이었다. 권번 음악은 우리 음악사에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같이 보여준다. 긍정적인 면은 권번이 그나마 우리 음악을 보존할 수 있었던 자생적 공간이었다는 점이고, 부정적인 면은 수요자의 취향에 따르다보니 우리 음악에 분칠을 하여 모습을 왜곡시켰다는 점이다. 어쨌거나 여기에서 보존된 음악은 해방후 복권되어 우리 음악의 큰 물줄기 하나를 이루게 된다.
해방 전의 상황은 그것이 비록 급격한 역사 변동이었을지라도 다분히 표피적인 일로 보인다. 왜냐면 심층을 이루는 더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창부타령을 선호했고, 국극단에 열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전개되는 양상은 더 충격적이고 더 조직적이다. 이 부분은 분석적인 접근보다는 상징적인 예를 드는 것이 본질에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