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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성찬에 참여하는가?
마태복음 26장 26-28절 / 26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참고 구절 : 고린도전서 11:23-26; 시편 32:1-5; 51:1-5)
그리스도이신 주 예수께서는 구속주로서의 행적을 가져나가시는 자신의 공생애에서 구약 이스라엘에게 행해져왔던 유월절을 종결시키는 -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통해 유월절로 시작되는 모든 절기도, 그리고 절기에 따르는 모든 제사도, 또한 절기를 따라 제사가 드려지는 성전도 함께 종결된다 -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는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가지면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의 몸과 그 몸에서 흘리실 피를 가지고서 행하실 일인 '죄 사함을 얻게 할 언약'을 맺으시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에 따라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에서 주께로부터 받은 가르침에 따라 주의 만찬 - 성찬 - 을 주께서 세우신 교회에서 행하는 것임을 밝히면서 이것을 가져나가는 것이 무엇때문인지를 알려주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떡을 받는 것에서 제자들은 주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의 구속 사역에 의해서 하나님께 바침에 있는 헌신제사에 의한 희생제물이 갖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해 내어 떠올리고 그 생각에 잠겨 있어야 하며, 잔을 받는 것에서 제자들은 주의 몸을 통해서 흘리신 피로 세운 죄 사함을 얻게 하시는 새 언약에 의해서 자신들이 죄 사함을 받음에 있는 구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며 그 기억에 있어, 이로 인해 주님과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을 대함을 귀하게 여기고 주께서 대속물이 되심에서 공급하신 사랑으로 또한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을 사랑함에 있게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주의 만찬 - 주의 식탁 - 을 초대교회에서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모일 때마다 가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주의 만찬은 점차 예배의식에 의해서 가져나가게 되면서 '성찬예식'으로 자리하였습니다. 주의 만찬에 의한 식탁에서 갖는 식사의 성격으로 갖든, 또는 예배에서의 예식으로 성찬을 가져나가든 이것을 갖는 것에서 주께서 가르치시고 또한 제자들에 의해서 가르쳐 온 의미인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에 의해서 행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인 성도는 이 성찬에 참여의 부름을 받음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성도는 성찬 - 주의 식탁 - 에 나와 참여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마땅히 해야 할 바입니다. 상기시키거니와 주님께서는 자신과 함께 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 떡을 먹고 잔을 받아 마셔라" 라고 명하셨으며 그 명령을 받들어 사도 바울은 교회의 성도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것을 행하라” 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성찬을 성도들 중 누구도 습관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참여하도록 허락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30주일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누가 주의 상에 나아 올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진실하게 자신을 미워하고,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고 또 자신에게 남아 있는 연약함이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으로 덮여져 가리워진 것을 믿는 사람이며, 또 더욱더 자기의 믿음이 강건하게 되고 또 자신의 삶이 새로워지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입니다. 성찬의 참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주께 가진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한 신자에게 허락된 것이지만, 그 사실 자체만으로 성찬에 참석할 권리를 부여 받은 것은 아닙니다. 성찬은 (1) 믿음의 고백에 있는 자에게서 자신의 죄를 미워하고, (2) 또 자신이 지은 죄가 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믿으며, (3) 주의 사람으로 믿음에 합당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임을 알려주시어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주이심을 믿음으로 받음은 성령께서 예수를 주시라고 시인에 있게 해 주시는 까닭입니다. 해서 누구든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음으로 인해 죄 사함 받음에 있게 하셨는데(막 1:8; 행 11:16),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속량 곧 죄 사함을 얻게 하셨기에(골 1:14), 우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을 압니다(요일 2:12).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자에게서 정작 있어야 할 것인 죄의 회개에는 있었으며 또한 죄의 회개에 있는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후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을 하신 것을 알고 그동안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채 세상 속에서 살았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함에 있는 회개에 있은 그를 죄 사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죄의 회개에 있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죄 사함을 주셨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이 죄 사함 받음에 있는 회개에 있는지, 그래서 성찬에 참여하기에 합당한지에 대해서 보도록 합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다고 믿고, 우리의 죄과가 말끔히 사라졌다고 여깁니다. 또한 우리의 죄가 말끔하게 치워졌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상에 나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죄 사함 받았기 때문에 성찬에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지요. 죄 사함 받음에 있는 죄의 회개에는 있었는지요. 죄의 회개에 있었다면 그 회개를 통해서 죄 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까지 주로 섬김에 있어왔는지요. 매주일 주께 나온 자리인 예배에서 죄의 고백에 있으며, 그 죄를 용서받음에 있는가요.
죄에 이해와 그 죄에 대해 갖는 태도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 삶 속에 죄의 권징을 집행하시어서 그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를 우리에게 각인시켜나가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아주 미워하셔서 우리 삶 속에 어떤 죄들을 고백하지 않은 채, 당신의 식탁에 나올 여지를 남겨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만찬에 참여하기 위해서 이번 주간을 준비해 왔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지은 자녀들의 삶 속에서 시행하시는 권징에 관심을 두고 죄를 고백하고 회개에 있어오게 하셨을 것입니다. 이를 시편 51편인 다윗의 회개에서 봅니다. 이곳 1-5절 중에서 다윗은 반복해서 “내가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라고 “내가 … 범죄하였습니다”라고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이 고백은 다윗이 밧세바와 지은 죄의 맥락에서 이해되어 왔습니다. 다윗이 저지른 죄는 대상자인 밧세바만 아니라 그의 남편인 우리야 장군에게도 저지른 죄이며, 이 죄는 십계명을 통해서 알려주신 바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엉뚱한 것을 저지른 것인데,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대항하여 범죄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 죄를 나단 선지자에 의해서 지적받으며 책망을 받지 않았을지라도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인식하고서 무릎을 꿇고 탄원하며 시인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인 대신에 “침묵하였습니다.” 다윗은 이 죄를 짓지 않은 체 했고, 또 이 죄악을 덮어 두었고,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하기를 전적으로 중단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정규적으로 제사들 드리는 것에는 속죄제와 번제로 희생 제사를 드려 자신과 온 백성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인정하며 죄 용서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침묵했습니다. 입술에 있은 죄의 고백과 죄 용서를 구함이 그가 저지른 죄에서는 고백되지 않았고 또한 죄 용서를 구함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다윗에게서는 죄용서의 기쁨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다윗에게 주야로 그를 짓누르시는 하나님의 무거운 손이 함께 했습니다. 그런 다윗의 몸은 종일 쇠약함에 있었습니다. 이 경험을 다윗은 시 32편 3-4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함으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혹자는 말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다윗과 같은 간음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의 아내를 탐내는 죄도 그 아내를 빼앗는 도적질도, 그의 죄를 숨기기 위하여 충신을 전쟁터에서 죽게 하여 그의 생명을 빼앗는 살인 죄도, 또한 그 죄를 숨김에 있는 거짓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헌데 말입니다. 다윗의 이 죄는 그가 ‘사망에 이르는 죄’에서 뻗어져 나온 한 가지에 붙은 한 잎에 불과한 아주 작고 일부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그가 마침내 죄 인식을 하고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회개에 있을 때에 그가 깨달은 것은 ‘사망에 이르는 죄’로부터 구원하실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다는 것입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3, 5). 자신의 죄의 뿌리를 뽑아 들어내서 회개에 있은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갖는 죄인식인 자신에게 있은 죄악된 행위는 태중에서부터 있는 죄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죄성을 띤 본성을 지닌 지닌 존재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이는 전적 타락한 전적 부패한 존재인 인식에 있은 것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의 본 모습은 말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므로 처음부터 ‘사망에 이르는 죄’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신 것은 그 ‘사망에 이르는 죄’를 놔두고 그것에서 나오는 죄의 비참한 현상의 하나를 놓고 그 죄의 고백과 죄의 용서에 있을 것을 구하는 회개에 있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며 믿지 않은 것과 함께 그 메시야 언약으로 있는 십계명에서 다루고 있는 단 열 가지 계명만 가지고서도 "나 외에 다른 신이 없으니 다른 신을 네 곁에 두지 말라"는 계명으로부터 시작하여 계명 구구절절이 하나님께 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자임을 알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하나님께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였습니다”라고 토설하게 합니다. 이 죄의 고백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의 짓누름이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권징이요 징벌입니다. 이것이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하여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인 ‘영단번의 효력’에 의해서 우리의 범죄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헛됨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죄 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죄의 도말(덮음/제거)에 있으십니다. 그 은혜가 죄의 고백과 용서를 구함에 있는 회개 없이 주어지며, 용서 없이 일어나는 일이겠습니까?
하여, 개혁교회의 예배에서는 매번 회개에 있는 기도가 있으며, 그 죄의 용서 받음에 있는 선언이 있습니다. 성찬은 이것 없이 참여하는 자에게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것 없이 참여하는 자에게서는 성찬의 떡과 음료를 마심이 주의 피와 주의 살을 먹고 마심에 있어 주의 죽으심을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기념함에 있는 것이 되지 못하고, 단지 집에서 떡을 먹고 음료를 마심에 있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 되어 죄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헌데, 이 병폐에 있어 자신의 몸이 썩고 있으며 주를 담고 있어야 할 마음이 심히 부패해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참여에 있는 우리에게서 예배의식의 순서에 의한 입술로 말하는 것에 있어도 마음에는 하나님을 공경함이 없는 것으로 보이니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하나님의 영과 진리를 따라서 드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참여에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한 주간 지내오며 육신의 정욕 속에 살아온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며 진노하시는 짓눌림으로부터 벗어나 자유하여 안식의 복을 누림에 있고자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기도 한 마디 없이 다른 사사로운 이야기 속에 있다가 마치 극장에서 영화 보듯이 하고, 강연이나 토크쇼를 관람하듯이 있다가 가는 분위기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어느 분이 하는 말을 얼핏 들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말씀 전하는 분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 해도 세상이 좋은 걸…. " 그래서 그런가요.
그러나 말입니다. 다윗에게서 있은 죄의 고백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의 짓누름이 우리에게서 있는 회개에도 동일하게 있습니다. 도대체 이것 없이 어떻게 회개에 있을 수 있었단 말입니까? 다윗이 밤잠을 설치며, 식욕이 뚝 떨어지고, 뼈와 살이 종일 신음함으로 인하여 쇠약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생기가 여름 가뭄처럼 말라들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동안에도 다윗이 모든 것이 정상적인 것처럼,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살아가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님의 짓누르시는 손에 의해서 하나님과 자신 간에 있은 긴장이 무시된 채로 지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죄의 해결이 없이는 살아도 기쁨이 없으며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죄가 죄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시고자 하셨기 때문에 다윗이 보는 앞에서 모든 것을 잃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죄에 대해서 활활 타오릅니다. 또 죄는 영원한 결말을 보게 됩니다. 이에 다윗은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하며 자신이 행한 바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반역이었음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으며, 그때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여시어 다윗에게 죄 사함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그 고백을 다윗은 시 32편 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하나님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나는 ‘내가 주께 내 허물을 고백할 것이라’ 말하였도다.”(NKJV) 시 19편 12절에서는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하였는데, 시 32편 1절에서는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말하는 것은 “복이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인하여 비난받지 않게끔 자신이 지은 죄가 깨끗하게 제거된 사람이다” 라고 말함에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이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죄의 짐을 제거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복 받은 사람을 어느 때에서야 볼 수 있게 되었는지요. 언제에서 비로소 죄 사함에 있는 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는지요.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며 베푼 주의 만찬을 통해서 약속을 받았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통해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 6:48)라고 하신 예수께서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죄 사함 받음에 의한 정죄로부터의 자유에 있음에서 먹고 마시는 것도 또한 모든 기동하며 온갖 일을 하며 사는 것도 비로소 주 안에서 갖는 생명이 누리는 안식의 복된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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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설교는 호주 켈름스콧 자유 개혁교회에서 시무하시는 바우만(Bouwman) 목사님께서 1997년 9월 14일에 하신 설교를 국내의 한 개혁교회 목사님께서 번역하신 것을 도움 받아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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