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조차 숨죽이는 겨울산.
아무 소리도 없다.
가만히 귀 기울인다.
그제사 세상이 들린다.
바람이었구나.
그리 실려온 눈이었구나.
설국에 들고 난 겨울의 하루,
내 마음도 그 처럼 하얗게 맑아졌기를.
<산에 들며>
은세계다. 아름답다.
하지만 그저 아름다워서는 안된다.
와중에 내 마음 한 켠,
오롯이 비워내거나 하얗게 덧칠하거나
![](https://t1.daumcdn.net/cfile/blog/133F4C114B2ECF85A8)
잘 말려진 고추가 소복하니 눈 옷 입었다.
저 옷 입으면 따뜻할까. 추울까.
일출식당서 황태버섯찌게로 속을 데우고
채비를 단단히 하여 산에 든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53F4C114B2ECF86A9)
된비알의 세걸동릉,
하얗게 그려진 고샅을 자분자분 걷는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53F4C114B2ECF87AB)
세걸산을 목전에 두고 트레버스 하여 세동치로 곧장 걸음한다.
묵묵한 걸음에 호흡도 이젠 가지런하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63F4C114B2ECF87AC)
눈이 내린다.
소설가 김훈 그랬다.
'숲'이라는 글자는 모양 조차 숲을 닮아
들여다보기만 하여도 숲에 든 것 같다고.
눈 내린 숲을 걷는다.
그 속, 나도 한그루 나무가 되는 듯.
아무렇게나 엉킨 숲도
하얗게 눈내린 날엔 건듯 마음 닿는다.
소설가 송기숙은 피아골의 최고 유물은 연곡사 부도가 아니라
층층이 산을 따라 오르내리는 계단식 논(다랭이논)이라 하였다.
그 마음이 절절하여 공감도 깊은데
그렇다면 서부능선의 보물은 때로 봉(峰)과 치(峙)가 아니라 무명의 숲.
![](https://t1.daumcdn.net/cfile/blog/193F4C114B2ECF88AE)
3시간 30여분의 거친 능선 산행이었지만
눈이며 숲이며 다음에 담느라 하나 힘들지 않게 야영지에 닿았다.
여전히 눈이 내린다.
차마 여유로운 은세계다.
밤 새워 눈 내리고 아침엔 맑아
능선 길 걷다 사방의 은빛 조망에 넋 놓았으면.
아니다. 그것은 욕심. 이토록 고적한 숲에서라면
오늘 하루 안분지족의 처사가 되어야 마땅하다.
눈 내리면 내리는대로
구름 낮으면 낮은대로
![](https://t1.daumcdn.net/cfile/blog/203F4C114B2ECF89B0)
은세계에 동화처럼 초막을 짓는다.
근사한 느낌.
내 삶의 하루도 저와 같이
흑백 세상의 노란 한 점 같았으면.
![](https://t1.daumcdn.net/cfile/blog/113F4C114B2ECF89B1)
공감한다는 것.
소주 한잔의 행복을 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어른들의 동화(童話)
추워 못간다 눈 핑계를 대는 것과
취하면 혹 머무를까 술 한잔 더 권하는 것은
그러므로 김삿갓의 시심만은 아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13F4C114B2ECF8AB3)
깊은 잠이었다.
밤 새워 눈이 내렸다.
토닥 토닥...
그 소리는 내 어메의 사랑.
유년의 어느 날,
열 오른 나를 어루어 밤을 새워 지켜내던 내 어메의 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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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밖으로 눈이 하염없다.
따뜻하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43F4C114B2ECF8BB5)
겨울 바람이 차가웠던 것일까.
나무가 눈 옷 두텁게 껴입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7704C104B2ED0A1B6)
눈의 꽃
눈
박용래
하늘과 언덕과 나무를 지우랴
눈이 뿌린다
푸른 젊음과 고요한 흥분이 서린
하루 하루 낡아가는 것 위에
눈이 뿌린다
스쳐가는 한점 바람도 없이
송이눈 찬란히 퍼붓는 날은
정말 하늘과 언덕과 나무의
한계(限界)는 없다
다만 가난한 마음도 없이 이루어지는
하얀 단층(斷層).
![](https://t1.daumcdn.net/cfile/blog/12704C104B2ED0A0B2)
봉긋 봉긋 눈아이스크림.
낼름 하나 집어 잎에 쏘옥 넣고 살살 녹여 먹을까보다.
아서라.
아까워 어이 먹을까. 아껴 똥된다 하여도 아서라.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04C104B2ED0A0B3)
이름도 희안한 약수는
추위도 잊은 채 졸졸졸 모진 목숨을 잇고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63F4C114B2ECF8BB7)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아무도 가지 않았으니 길 아니라 할텐가.
서산대사 뭐라하실라.
정성을 다해 걸어야지.
눈길 걸을 때 흐트러지게 걷지 마라
내가 걷는 발자국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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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길 가는 이 모두 즐겁게 걷길 기원하며
어귀, 눈사람을 두었다.
간혹 지나는 이 있어 눈길 두어주면
저도 외롭진 않겠지.
<산을 나며>
한치 앞도 못보는 주제가 섧다.
찬바람에 절로 고개 숙이고
흩날리는 눈발에 옷깃 여미어
산이 전하는 말을 보듬지 못한데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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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는 약간 숙이고
배는 불쑥 내어 놓고 터벅 터벅 걷는다.
두렵거나 자만하지 않는 걸음.
그래서 기운차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8704C104B2ED0A1B7)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러쎌하며 나아간다.
눈길과 인생은 그리 닮아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9704C104B2ED0A2BA)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이 있고
포근한 날이 있으면 고추바람의 날이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2704C104B2ED0A3BC)
이리갈까 저리갈까 고심의 갈래가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5704C104B2ED0A4BE)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한가지는 가야한다는 것.
길이든 길이 아니든 내가 선택한 그 길을 가야한다는 것.
![](https://t1.daumcdn.net/cfile/blog/16704C104B2ED0A4BF)
그 길의 위, 얼음장 아래 샘솟듯
살아있는, 살아야하는 분명한 이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https://t1.daumcdn.net/cfile/blog/16704C104B2ED0A5C0)
일상으로 가는 길,
눈이 여전하다.
조심조심 한발 한발 헤친다.
설국의 산이 내게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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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세계의 하루를 추억한다.
산의 위와 산의 아래 다름이 무언가.
그곳에도 애환이 있다.
선택은 오직 나의 몫.
날이 추운 만큼 체온은 더 따뜻했고
길이 험한 만큼 배려의 지혜 더했다.
그것 뿐.
그것이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