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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연법
1.1. 인연법은 다음의 네 가지 명제로 이루어진다. (잡아함경_335.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앞의 두 명제는 ‘있음과 없음’[유무]에 관한 것이고, 뒤의 두 명제는 ‘생겨남과 없어짐’[생멸]에 관한 것이다.
이것과 저것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이것과 저것은 상호의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저것의 인이 되며, 저것은 이것의 인이 된다.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함께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순서가 없다.
이것 없이는 저것도 없고, 저것 없이는 이것도 없다.
이것과 저것은 어떤 사물이거나 어떤 일일 수도 있다.
또는 어떤 사물들과 일들로 구쉉되는 어떤 세계일 수도 있다.
1.2. 인연은 무엇에 의존하여 일어나는가?
관찰자이다. 관찰자는 지각 기능이 있는 모든 유정물이다. 관찰자가 없으면 인연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어떤 사물들과 일들의 분별이 일어난다.
이것과 저것이 있다는 것은 다른 사물과 구별되는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과 저것이 서로서로 구별되는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것과 저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식되는가는 관찰자에 따라 다르다. 이에 대하여 대강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먼저 관찰자의 종이 다르면 이것과 저것이 달리 인식된다.
서로 다른 종들은 생존의 방식, 몸의 모양과 크기, 수명, 지각 기관 등이 다르다. 예컨대 새와 물고기와 길짐승, 개미의 몸과 인간의 몸, 하루살이의 수명과 인간의 수명, 박쥐의 지각능력과 개의 지각능력과 인간의 지각능력 등에서 다르다. 그러한 차이로 말미암아 다른 종들은 사물들을 구별하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종이라면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므로 많은 점에시 유사한 방식으로 분별한다. 그렇지만 또 자연의 환경적 요인이나 사회적 개인적 요인 등의 여러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여러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예컨대 같은 종이라 할지라도 마음과 몸의 성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의 경우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먼저 몸의 성질은 지리적 환경, 성별, 나이 등과 색명 등의 건강 상태 등의 차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마음의 성질은 인식의 능력ㆍ느낌ㆍ생각ㆍ의도 등의 차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평정한 마음과 탐욕ㆍ어리석음ㆍ성냄이 있는 마음의 차이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도 있다. 비유하면 맑고 고요한 물에는 사물이 비교적 선명하게 비치지만, 흐리거나 출렁거리거나 끓는 물에는 사물이 제대로 비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잘못된 소견을 생각하다(2): 세계의 형성>을 참고하시오.)
이런 점을 고러한다면, 인간이 알고 있는 세계의 모습은 갖가지 인간들이 인식한 세계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인간들은 그들의 세상을 창조하여 그 속에서 제 각각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 모든 인간들을 동시에 고러하여 세상을 생각해 본다면, 인간 세상은 갖가지 세상들이 서로 겹쳐 있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1.3. 여기서 유의할 것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관찰자에 관한 것이다. 어떤 관찰자도 인연법에 따라 다른 관찰자에 의존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인식한 대상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인식한 대상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인식한 대상은 우리의 관할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찰자의 인식한 결과물이다.
우리는 보통 본래부터 어떤 이름과 성질을 가진 사물이 존재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컨대 우리 인간의 오랜 관습으로 이루어진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그런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이제까지 보아 왔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바라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1.4. 간추리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호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그러한 관계는 관찰자의 몸과 마음에 의존하여 이루어진다. 곧 일체는 관찰자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고 살아가는 세계는 가능세계들 가운데 하나의 세계이다.
2. 공
2.1. <잡아함경_335.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에서는 가장 공한 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것을 제일의공경이라고 하는가?
모든 비구들아, 눈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소멸할 때에도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눈은 진실이 아니건만 생겨나고, 그렇게 생겼다가는 다시 다 소멸하고 마나니,
업보는 있지만 짓는 이는 없느니라.
이 음이 소멸하고 나면 다른 음이 이어진다.
다만 세속의 수법[인연법]은 제외된다.
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뜻]도 또한 이와 같다고 말하겠으나,
단 세속의 수법은 제외된다.”
인연법으로 보면 눈은 ‘저것에 대응하는 이것’이거나 ‘이것에 대응하는 저것’이다. 그리고 이것과 저것은 인연법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며, 어떤 관찰자가 그것을 관찰하기 이전에는 분별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어떤 관찰자가 무엇인가를 인식하기 이전에는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 곧 관찰자가 없으면 인연법에서 말하는 이것과 저것이 분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예를 생각할 수 있겠다.
“이것은 높은가 낮은가? 이것은 큰가 작은가? 이것은 부드러운가 거친가?”
만약 어떤 관찰자를 가정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제대로 대답할 수 없다. 관찰자가 무엇인지 누구인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여기 (인간이 보기에) 20cm 높이의 흘무더기가 있다고 하자. 이 돌은 개미에게는 아주 높은 언덕이다. 그러나 코끼리에게는 조금 울퉁불퉁한 땅일 뿐이다. 몸이 산만한 어떤 존재가 있다면 그에게는 눈에 띄지도 않을 아주 작은 흑더미일 뿐이다. 한 대야의 물을 땅에 쏟았을 때, 개미에게는 큰 물이다. 인간이 개미집을 지나갈 때 개미에게는 인간은 엄청나게 몸집이 큰 괴물이다. 아주 깊은 바다가 있지만, 바닷물이 허리께에 오는 거인이 있을 수도 있다.
‘높고 낮음’ 등은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니까 조금 이해하기 쉽다. 그러면 이런 질문은 어떤가?
“이것은 의자인가? 이것은 사과인가? 이것은 산인가? 이것은 물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의자, 사과, 산, 물’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런 질문을 받은 사람은 그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런데 과연 그것들은 어떤 관찰자가 없어도 그런 사물들이 존재하는 것일까? 어떤 관찰자가 없어도 그런 모양과 그런 성질을 가진 독립적인 사물로 존재하는 것일까?
인간은 그렇게 생각한다고 치자. 그런데 고양이나 비둘기도 그렇게 볼까? 물고기나 개구리도 그렇게 볼까? 파리나 벌 등의 곤총이나 기생충은 어떻게 볼까? 적어도 인간이 보는 방식으로는 그것들을 그렇게 분별하고 인식하지는 않을 것이다.
‘의자, 사과, 산, 물’뿐 아니라, 인간이 어떤 성질을 가진 것으로 분별하고 이름을 붙인 모든 사물들도 다 그러하다.
이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어떤 관찰자가 무엇인가를 인식하기 이전에는 일정한 모양과 성질을 가진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2.2. 고타마 붓다는 ‘있음과 없음, 생겨남과 없어짐’의 분별을 일으키는 인연법을 ‘세속의 법’이라 하고, 인연법을 벗어나서 분별이 없는 법을 ‘가장 공한 법’이라 하였다.
세속의 법은 5음과 12처와 18계 등을 포함한다. 이것들은 12연기법의 구성요소이기도 하다. 아함경에서는 이것들이 모두 공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잡아함경_232. 공경(空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눈이 공하고, 항상하여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법도 공하며, 내 것이란 것도 공하다. 왜냐 하면 그 성질이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빛깔ㆍ안식ㆍ인촉과 안촉을 인연하여 생기는 느낌인, 괴롭거나 즐겁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또한 공하고,
영원하여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다는 법도 공하며, 내 것이라고 하는 것도 공하다.
왜냐 하면 그 성질이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귀ㆍ코 ㆍ혀ㆍ몸ㆍ뜻도 또한 그와 같나니,
이것을 공한 세간이라고 하느니라.”
그런데 아함경에서는 ‘가장 공한 법’의 성품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가장 공한 법은 그것에 대비되는 인연법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인연법의 부정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공한 법은 인연법의 명제에 대한 부정으로 표현될 수 있다. 분별이 없으므로, 분별함으로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이 부정된다. 또 어떤 겻에 대한 부정도 분별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에, 부정된 것들도 다시 부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가장 공한 법은 다음과 같은 형식들로 표현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이것이 아닌 것도 아니고 저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다.
생겨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다.”
그리고 가장 공한 법에서는 5음ㆍ12처ㆍ18계도 모두 부정될 수밖에 없다.
“눈은 눈이 아니고, 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도 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이 아니다.
빛깔은 빛깔이 아니고, 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도 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이 아니다.
눈의 인식은 눈의 인식아 아니고, 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의 인식도 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의 인식이 아니다.
눈의 경계는 눈의 경계가 아니고, (....) 마음의 인식의 경계도 마읍의 인식의 경계가 아니다.
빛깔은 밫깔이 아니고, 느낌ㆍ생각ㆍ의도ㆍ인식도 느낌ㆍ생각ㆍ의도ㆍ인식이 아니다.
눈도 없고, 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도 없다.
빛깔도 없고, 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도 업다.
눈의 인식도 없고, 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의 안삭도 없다.
뉸의 경계 내지 마음의 인식[의식]의 경계도 없다.
빛깔도 업고, 느낌ㆍ생각ㆍ의도ㆍ인식도 없다.”
그리고 불법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모든 법들도 모두 분별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모두 부정될 수밖에 없다.
[반야바라밀 계통의 경전에서는 공한 법에 대해서 모두 이러한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2.3. 이제 관찰자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관찰자의 문제의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 무엇을 ‘나’라고 하는가?
어떤 관찰자도 여러 다른 관찰제에 의존하여 그 성질이 달리 결정된다. 이때 다른 관찰자는 나 아닌 남일 수도 있지만, 나 자신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관찰자인 나도 인연법에 따라 생겨나고 없어지며, 그 성질도 인연법에 따라 결정된다.
예컨대 나는 갖가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진다. 그리고 만남도 잠깐 동안 이루어지기도 하고 비교적 오랜 기간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그들은 나를 그 만난 시간 만믐 기억한다. 나는 그거한 갖가지 관찰자에 따라서 갖가지로 인식된다. 그 관찰자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는가를 생각해 보면 나의 정체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나라는 존재도 고유한 성질을 가진 것으로 결정된 존재가 아니다. 결국 나라는 존재도 공일 수밖에 없다.
나라는 존재는 말하는 이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일 뿐이다.
공도 ‘나’와 마찬가지로 어떤 관찷자의 관찰의 결과로 인식된 것이다. 따라서 공의 성품을 분별하여 말할 수 없다. 공은 어떠한 성질을 가진 것라고 말한다면 바로 그 순간에 분별에 떨어지기 때문에, 공은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따라서 공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밖에 없다.
“공도 공하다. 또한 공은 공이 아니며, 공이 아닌 것도 아니다.”
3. 12연기법
3.1. <잡아함경_285. 불박경(佛縛經)>에서는 중생이 연기법에 따라 고통받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과거 아직 정각을 이루지 못하였을 때를 기억하고 있는데, 홀로 어느 고요한 곳에서 골똘히 정밀하게 선정에 들어 사유하다가 이렇게 생각하였다.
‘이 세상은 고난 속에 빠져있다. 말하자면 혹은 태어나고 혹은 늙으며, 혹은 병들고 혹은 죽으며, 혹은 옮겨가고 혹은 다시 태어남을 받는다.
그런데도 모든 중생들은 태어남ㆍ늙음ㆍ병듦ㆍ죽음과 그것이 의지하는 바를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괴로움ㆍ괴로움의 발생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는 <중아함경_031. 분별성제경(分別聖諦經)>에서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3.2. 12연기법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있음과 생겨남이고, 다른 하나는 없음과 없어짐이다.
‘있음과 생겨남’의 부분은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발생하고 일어나는 과정을 말하고 있고,
‘없음과 없어짐’의 부분은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있음과 생겨남’은 부처님깨서 바라본, 중생들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과 그 세상에서 중생들이살아가는 모습이다.
12연기법은 ‘<무영, 의도>, <의도, 인식>, ... <태어남, 늙고 죽음>’의 짝들의 집합으로 구성딘다. 이 짝들에서 앞의 것은 연기법의 ‘이것'이고 뒤의 것은 연기법의 ‘저것’이다. (잡아함경_298. 법설의설경)
그런데 12연기법의 각 구성요소들을 다음과 같은 순환적 구조로 보면, ‘이것’과 ‘저것’의 순서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12연기법의 순서, 순환의 관점에서 보다)
12연기법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은 중생들의 세계와 삶의 총체이다.
중생들은 이런저런 상태의 무명에 빠져 있다.
중생들은 이런저런 의지나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다.
중생들은 이런저런 사물과 일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인식한다.
중생들은 이런저런 종류의 명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생들은 이런저런 상태의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을 가지고 있다.
중생들은 이런저런 몸과 마음의 감각 기관으로 이런저런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현상]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지각한다.
중생들은 이런저런 종류의 느낌을 받는다.
중생들은 이런저런 욕망과 이런저런 존재와 존재없음에 대한 애욕를 갖는다.
중생들은 이런저런 탐욕과 견해와 계율, 그리고 이런저런 나에 대하여 집착한다.
중생들은 이런저런 섀계들, 곧 욕계에서 살아가거나 색계나 무색게에서 살아간다.
중생들은 이런저런 시간과 공간, 이런저런 환경에서 이런저런 형태로 태어난다.
중생들은 이런저런 형태로 늙고 죽는다.
중생들은 이런저런 태어남과 이런저런 죽음의 사이에 있다. 그리고 태어남과 죽음의 사이에 있는 12연기법의 요소들에 묶인 채로 살아간다.
고타마 붓다께서 보시기에, 중생들은 이러한 12연기법에 따라 이런저런 괴로움을 받으면서 살아가지만, 중생들은 이 12연기법의 요소들을 보통의 경우에는 잘 인식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중생들도 비교적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없음과 없어짐’은 있음과 생겨남의 반대의 과정이다.
인연의 끈을 끊어없앰으로써 괴로움의 무더기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들은 보통 이러한 것은 잘 모른다.
3.3. 이러한 12연기법은 세속의 법이다.
그런데 <잡아함경_11. 인연경(因緣經) ①>에서는 ‘인과 연도 공하다’고 하였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가장 공한 법에서 보면 12연기법의 모든 구성요소들도 공한 것이다.
따라서 12연기법의 구성요소들도 다음과 같이 부정된다.
“무명도 없고 의도도 없으며, 인식도 없고 명색도 없으며, 6입도 없고 접촉도 없다.
느낌도 없고 애욕도 없으며, 취함도 없고 존재도 없으며, 태어남도 없고 늙음과 죽음도 없다.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도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12연기법과 가장 공한 법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공한 법으로 올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4념처와 8정도를 포함한 37도품을 수행해야 한다.
수행법에는 4등심과 6념처도 있고, 10일체처도 있다.
[이른바 대승 경전에서는 6바라밀다 또는 10바라밀다가 있다.]
2015. 05. 14, 수정함.
[덧붙임]
1. 카를로 로벨리의 ‘양자역학의 관계론적 해석’
2024. 5. 5.
안녕하세요.
오늘은 물리학자이자 철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책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내용 일부를 전달드려봤습니다.
시간과 실재, 본질 등에 관해 생각해 보게 되네요.
2. 존재에 대한 관점을 뒤엎는 '천재 철학자'의 최신 이론 (feat. 마르쿠스 가브리엘 '허구의 철학')
2024. 10. 18.
안녕하세요.
오늘은 요즘 활발히 활동하는, 독일의 천재 철학자로 유명한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책 '허구의 철학'에 나온 내용을 다뤄봤습니다.
당연히 이 영상에서는 이론의 일부만을, 그것도 아주 단순화해서 다룰 수밖에 없었고요.
이 시대 서양철학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지시는 분들은 한번 독서에 도전해보시는 것도 추천드립니다. (참고로 어려운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