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산은 산 물은 물>
1. 산은 산, 물은 물-통상적인 산과 물.
2.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산은 시명산是名山(이름하 여 산이라고 할 뿐-금강경식 표현), 물은
시명수是名水(이름하여 물일 뿐) 실은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3. 그래도 산은 역시 산이고, 그래도 역시 물은 물이다-산을 분해해 흙덩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 산山이
아닌 무엇으로 부르랴, 물도 물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니 산은 역시 산 이고, 물은 역시 물일
수밖에 없다.
깨달음을 얻은 후의 붓다 역시 세상을 허망하다거나, 세상의 경계가 없다〔無境〕라고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불멸 후 대략 7~800백 년 후 세친이라는 논사가 주장한 오직 식識만이 있을 뿐 밖의 경계인
물질은 없다(예를 들면 달은 내가 볼 때는 존재하지만 내가 보지 않을 때는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은 저로서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또한 현재에도 유식무경에서 식識을 ‘일체유심조의 마음’ 심 心과 동의어로 풀이하고, 무경無境을 공空의
개념으로 세친의 유식사상을 이해시키려는 학자들의 풀이를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식의
해석은 세친이 비판한 중관中觀 사상과 공空의 개념을 통해 세친의 유식 사상을 이해시키는 엄청난
모순입니다.
붓다는 자신이 태어난 코살라Kosala 국이 침략당하여 마가다 Magadha 국으로 종속되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교를 허망론으로 몰고 가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붓다는 정신이든 물질이든
상호관계를 일으키고 결과를 맺어가는 연기緣起라는 관계 성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네가 보고 느끼고
얻으려는 것은 순간의 가치이지 영원성이 없다”고 말하며, 인간의 집착과 욕망을 경계한 것일 뿐입니다.
세상의 시공의 변화와 관계없는 영원한 가치는 오직 연기緣起를 체득하여 세상의 고苦와 낙樂, 생과 사를
무상으로 인식하며, 집착과 오욕五慾을 일으키는 자신의 마음이 실은 무아無我(空我)라는 진리라고
‘느끼라’고 한 것이 붓다의 가르침의 전부입니다. 이 ‘느끼라’의 방법론(수행법)이 다양하게 해석되고
발생하게 되니 지금과 같이 불교가 아주 번잡스러워진 것입니다.
‘번잡’이라는 것은 문화적·시대적 다양성으로 이해해 줄 수도 있지만, 지금의 한국불교는 단순히 수행론의
번잡만이 아닌,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인 연기는 망각하고 오직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로 퇴락해 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불교가 신앙성을 배제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신앙성 즉, ‘믿음’은 연기라는 진리에 나 자신도
한 축을 담당하고 있어 법계의 일원이라는 믿음, 법계에 편재한 곧 붓다께서 깨달음을 이룬 후 느낀,
바로 그 마음의 파장에 나도 하나 가 되어 같은 파장을 이룰 수 있다는, 법신불法身佛에 대한 귀의와 발원이
불교의 종교성이 되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