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풀 아버지는 키가 작으시다. 낮은 데로만 다니고 밑자리만 찾으신다. 꿈이 소박하니 이루기 쉽고 바라는 게 단순해서 얻기가 수월하다. 베풀 자 가리지 않으니 수치가 비집을 틈이 없고 절망이라는 무늬가 번져도 멈추지 않고 펴 가시다. 무릎 꿇고, 허리 굽혀 고개 숙여야 뵈옵느니,
어머니 - 참나리 사람 사는 어디나 없어서는 안 되는 꽃. 작열하는 태양과 맞서 솟구치는 정한을 위로 뻗어 새빨간 입술에 자줏빛 호랑 반점으로 오직 한 분 섬기시던 천하절색이여! 반짝이는 구슬눈(珠芽) 업어 가문을 잇고 자자손손 튼실하게 알뿌리를 갈무리한다. 시장에도 먼저 드시지 않고 졸려도 먼저 자리하지 않으시다, 그 많은 구박과 소박 못 이기랴, 장독에 절인 애간장을 마시면서 소문처럼 떠도는 낭군님 바라기. 생각과 거동이 참하시니 온 천지 개나리 판에 나리라고 다 참나리며 어미라고 다 어머니이리. 만고에 홀로 청아한 꽃 중 꽃이시여!
저요! - 싹
발, 눈길, 아예 끊고.. 거름은커녕 물뿌리개조차 인색을 떨었건만 그게 연단 아니냐며 내가 알아서 할 일이라 묻지도 않은 교실에 아무 소리 없이 웃음 머금고, 치켜드는 참한 팔.
동글이 - 둥굴레 동생은 앞뒤 꼭지 삼천리 차돌이고 누나는 낳자마자 생긴 대로 동글이라 그 집 식구들 넘어져도 도르르 구르지요. 꽃망울이 서두르는 거 보았소, 바쁘다고 바늘허리 매고 급하다고 콩나물 모가지 늘이리오. 얼마나 산다고들 아웅다웅하시오, 소낙비 두들겨 패도 끄덕끄덕 마른하늘 빈 구름에도 하늘하늘 부나비 찾지 않고 따돌려 살아도 차근차근 가다듬어 구수합니다. 어두울 녘 노점상 동글이 노파는 주머니 속 가벼운 푼돈보다 헐값에 주는 기쁨이 백배나 크다며 둥굴레, 둥굴레 살갑게 외칩니다.
출처 : 한장춘 시집 향 시린 잔치, 도서출판 정미문화, 2020. <약력> 여수 출생 고려대 교육대학원 석사 여수고 교장 퇴임 『문학과비평』 신인상 광주문협 회원 시집 『노을 건너는 소리』
| | 푼수데기 -클로버
내게는 '그루'라는 말이 없지, 여럿이나 혼자나 한 무리이니까.
내게는 '소유'라는 말이 없지, 텃밭이나 들에나 뻗으면 집이니까.
내게는 '갈래'라는 말이 없지, 셋이나 넷이나 한 잎자루이니까.
유치원 땅따먹기 다툼도 꽃대궁 둘 묶어 가락지 끼면 두 몸 한 삭신 내외 아니던가.
세 잎은 토끼우리에 넣어주고 네 잎은 복권 가게 보내고 사심도 탐심도 다 내려놓고 이래도 응, 저래도 응! 푼수처럼 산다.
다시 찾은 행복 -은방울꽃
다 가진다 해도 없는 듯 비우고 사는 게 행복이다.
소리는 못 내도 이름은 은방울이니 모두 얻은 거지. 옥 피리 노래는 과욕이다.
소리보다 묵직한 은빛 가슴이면 그만 아닌가.
일할 생존율이라는 중환 끝에 그 많은 울림을 나귀한테 주고 그 흔한 가락을 쇠 북에 넘기고 청력을 기계에 의지해도 글로 족하다.
여섯 시간 반의 심야 수술대가 불행으로 가는 말 등이 아니더라, 차바퀴에 치이어 절어도 두 번 사니 어느 독한 벌레인들 범접이나 하랴.
여기저기 당장 기회라도 생기면 복대 두르고 한 자씩 적어간 성서가 다시 찾은 행복의 징표라고 은구슬 굴려 말로 글로 간증이다.
고개 숙이면 소리 없는 기도요, 바람 스치면 띄우는 향내뿐이니 아침에 펴고 저녁에 접는 이승이지만 아울러 산 세월 걸낭에 담아두고 손짓으로 읽고 눈으로 들으니 그도 복이다.
작은 불 - 푸성귀
좌와 우는 인간 세상 관념일 뿐, 우리는 하나지요.
잎채소와 뿌리채소는 잇속 찾아 따로 묶은 세상 사람 다발일 뿐, 우리는 하나지요.
꽃 꼬아 비틀어 피지 않고 몸 잘려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누구는 좋아서 죽는다지만 우리는 죽어서 좋습니다.
사람 사는 어디인들 가려 서며 어느 까다로운 입인들 사절하리오, 입맛은 변해도 식탁은 영원하니 작은 불 큰 불꽃으로 타오릅니다.
묵나물 비빔밥 한 사발에 곰취, 곤드레, 오가피, 둥굴레, 달래, 참나물, 머위, 고비, 망초, 고사리, 쥐오줌풀, 분주, 박, 호박, 오이, 가지, 무, 토란, 우거지, 시래기, 당근, 상추, 부추, 차조기….
이파리 하나 안 남기고 모두 비운 그릇.
온통 풀밭이라 투정치 마오.
어느 놈 들여다 비벼도 다 제집, 즐거운 입, 누리에 화평이 다 우리 차지지요.
흙먼지 폐허를 죄다 다독이다가 뜯기어 지지고 볶이어도 탓할 입 대신,』 그대 향해 노래할 꽃이 있음을 기뻐하며 우리네 귀한 몸 몽땅 내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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