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회] 2019-03-23 토
문명화 과정Ⅰ
by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박미애 옮김) / 한길그레이트북스
인본주의자들은 교회의 전통과 교회집단에만 국한되어 사용되던 라틴어를 해방시켜 세속사회, 적어도 세속 상류층의 언어로 만들고자 하던 운동의 대변인들이었다. 인본주의자들은 이 변화의 집행자들이었고, 세속 상류층의 이런 욕구를 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저서들 내용은 다시금 세속의 사회생활에 근접한다. 즉 이 생활로부터 얻은 경험들은 직접 학자들의 문헌 속으로 유입된다. 이것 역시 ‘문명화’의 커다란 흐름 속의 한 지류이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대화록을 방어하면서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천상에서 지상으로 끌고 내려왔듯이 나는 철학을 유희와 연회로 인도하였다”라고 표현한다. 바로 이점 때문에 그의 저서 대화록은 제대로 고찰한다면, 세속적⋅사회적 행동수준의 증거로서 유용하다.
에라스무스는 대화록의 유용성에 관하여 앞서 설명한 ‘귀공자와 소녀’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남성들은 내가 금방 묘사하였던 그 청년처럼 행동하고 반드시 그런 대화를 나눈 후 결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당시 실제 상황에 비추어볼 때도 그 대화는 가장 적합한 하나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남편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여자에게 자신의 행동을 고치면 남편의 태도도 따라 변할 것이라고 일러준다. 한 청년과 창녀의 대화는 그녀가 부도덕한 품행을 고치는 것으로 끝난다.
그들이 자신들의 불쾌감의 문턱과 자신의 감정모형이 과거로부터 형성되어온 것으로, 그리고 어느 특정한 질서 내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한 그들은 그런 대화를 교과서에 수록하고 게다가 의식적으로 어린이들을 위한 읽을거리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거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수준과 어린이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역사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의 요점이다.
청년과 창녀와의 대화에 관해 에라스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청년의 정신이 바른 행실을 추구하게 하고 그 소녀를 그렇게 위험하고 치욕적인 집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기 위해서 내가 이보다 더 효과적인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분명 그는 자신의 교육적 목적을 도외시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가진 수치감의 수준이 달랐을 뿐이다. 그는 젊은이에게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세상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그에게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정숙한 삶이 무엇을 가져다주는지 가르쳐주고 싶었다. 특히 여기에서는 아이들을 생활로 인도하기 위해 어른들의 올바른 행동방식을 그들에게 보여준다. 차이는 거기에 있다. 사람들이 이론적인 성찰에서 여기에서는 이런 식으로, 저기에서는 저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에라스무스와 그의 동시대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설사 소년들이 복종해야 하고 사회적으로 종속적인 처지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일찍부터 어른들과 같은 사회적 공간에서 생활하였다. 어른들도 성생활과 관련하여 말이나 행동에서 나중처럼 그렇게 조심하지는 않았다.
인간의 생물학적 발달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커다란 차이 없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사회적 변화의 맥락에서만 오늘날 표출되는 ‘어른 존재’의 일반적인 문제점, 그리고 그와 더불어 어른의 정신구조에 남아 있는 ‘유아적 잔재’라는 특수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다.
창녀들은 중세 도시의 공적인 삶에서 특정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축제날 창녀에게 달리기 경주를 시키는 도시들도 있었다. 종종 귀한 손님들을 맞이하는 데 창녀들을 보내기도 했다. “창녀들을 위한 포도주에 96크로이처. 왕을 만나러 간 여자들을 위한 포도주에 96크로이처.” 시장이나 시의원들은 높은 관직의 손님들을 유곽에서 대접하곤 했다. 황제는 1434년 베른시의 시장에게 그가 자신의 수행원들에게 3일 동안 공짜로 유곽을 제공해준 데 대해 공식적으로 감사하고 있다. 이것은 식사 대접처럼 귀한 손님들을 접대하는 방식이었다.
매춘녀들, 또는 독일에서 흔히 부르듯이 ‘아름다운 여자들’은 다른 직업들과 마찬가지로 시 조직 내에서 특정한 권리와 의무를 수반하는 조합을 결성했다. 창녀들도 때때로 다른 직업단체들처럼 부정한 경쟁에 대해 집단으로 대항했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한마디로 망나니의 지위처럼 비천하고 낮았지만, 공적으로 인정받았고, 비밀스럽지도 않았다. 남녀 간의 이러한 형태의 혼외관계는 아직 ‘무대 뒤’로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결혼식이 끝난 후, 모든 들러리들이 신방행렬의 선두에 선다. 신부의 들러리들이 신부의 옷을 벗기고, 모든 장신구를 떼어놓는다. 증인들이 모두 배석한 자리에서 신랑과 신부가 잠자리에 들어가면, 그 혼인은 유효한 것으로 인정된다. 사람들이 “두 사람을 함께 눕게 한다.” “침대에 들어가면 권리는 획득된다.” 라는 것이다.
프랑스의 절대주의적 궁정사회에서도 신랑, 신부는 하례객들에 의해 침대로 끌려갔으며, 그들 앞에서 옷을 벗었고, 손님들이 그들에게 잠옷을 건네주었다. 이 모든 것은 이성 관계에 대해 다른 수준의 수치감이 전용되었음을 말해주는 징후들이다.
궁정귀족사회에서 성생활은 훨씬 더 은폐된다. 자신의 수준을 나머지 다른 수준을 평가하는 잣대로 삼기 때문이다.
17세기 궁정에 여섯 살 난 부이용이라는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다. 궁정의 귀부인들이 그녀와 얘기를 나누곤 했는데, 어느 날 그들은 그녀에게 농담을 한다. 그들은 그 꼬마 아가씨가 임신했다고 우긴다. 그 꼬마 숙녀는 물론 그 사실을 부인하면서 스스로를 변호한다. 그녀는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가 잠에서 깼을 때, 자신의 침대에 한 갓난아이가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고 무척 놀란다. 그녀는 순진한 마음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일이 일어난 사람은 성모 마리아와 나밖에 없구나, 왜냐하면 나는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았으니까.” 그 말은 돌고 돌아, 이제 이 조그만 에피소드는 전체 궁정의 이야깃거리가 되어버린다.
[23회]
첫댓글 함께 나누는 좋은글로 의 소통이야 말로 즐거움 가득 입니다. 근황을 짐작케 하는 참여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봄날 향기 가득한 시골 의 일상, 신나게 맞이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