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1918년 보천교(법정사) 항일운동, 1919년 조천만세운동, 1923년 해녀항일운동을 뭉뚱그려 '제주3대 항일운동'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명칭으로 불려지고 있다. 도지사, 교육감 등 기관장들은 제주항일운동에 별반 관심이 없다가 항일운동 기념일에 항일운동에 문외한 부하직원이 인터넷 검색해서 나름대로 명문이라고 자찬하면서 써준걸 읽어내리는데 단골 멘트로 나불대지곤 한다.
이에 관해 제주도청 공보관이 작성하여 제주도청 홈페이지에 버젓히 올린 제주 3대 항일운동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3.1운동 100주념 기념 제주의 3대 항일운동 제주에 3대 항일운동을 질의 조천만세운동은 1919년 3월21일부터 24일까지 조천지역에서 시작된 항일운동 1차에는 150여명 참여 주민도500여명참여 4차에는 1,500여명 참여 해녀항일운동은 1932년 1월 7일 세화리 장날에 시위전개, 1월14일 대규모 시위 전개 해녀항일운동은 총 1만 7천여명이 궐기한 운동으로 어민항쟁으로는 최대규모, 여성이 주도함 스님들이 참여한 법정사 항일운동은 3.1운동 이전 최대규모의 제주 항일운동 3.1운동보다 빠른 1918년 10월에 승려,불교도,선교도, 지역주민등 약400여명의 항일운동투쟁 법정사항일운동은 이틀만에 제압되고 일본순사들에 의해 법정사가 불태워짐 태극기는 깃봉과 깃면사이에 딱 붙여야고 집밖에서 볼때 대문,베란다의 중앙,왼쪽에 게양 3월1일11시에 조천체육관에서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이 열림 태극기도 달고 3.1운동 100주년기념식에도 참여 유도
이와 같이 제주 최초 최대 항일항쟁이었던 기유제주의병항쟁은 퇴락되는데 제주도청이 앞장서고 있는 현실을 항일 연구자로서 심대한 자괴감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제주3대 항일운동'이라는 해괴한 정명은 과연 누가 했을까? 나는 알고 있으나 지금은 고인이 된지도 오래되었고 그간 제주 역사 발전에 공이 지대한 선배제현을 욕돼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는 차원에서 이런 글 쓰면서 굳이 밝히지는 않겠다.
제주항일항쟁의 효시는 1909년 고승천 장군과 김석윤 참모가 주도하여 의병 병력 2000여 명으로 일으킨 기유제주의병항쟁이 제주 최초이며 최대 규모의 항일항쟁이었다.
1918년 보천교 항일운동은 일제 기록인 고등경찰요사(폭도에 대한 편책)에 200여 명이 가담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또 당시 신문보도에 400명에 이른다고 하고 있는데, 어떤 이가 이를 근거로 논문에 400명이라고 극구 주장함에 따라 400명으로 단정되고 있다. 이 항일운동은 보천교(선도교)가 주도했다는 사실이 정통한 사료와 증언으로 확인데는데 이를 외면한 일부 연구자의 주장으로 언제부터인가 "법정사항일운동"으로 명명되면서 불교계가 주도한 항일운동으로 둔갑되고 논문으로 여러편 작성되면서 완전히 불교계의 항일운동으로만 왜곡되고 있다.
1919년 조천만세운동도 그 시작일인 3월 21일 주도자 24명과 서당생도 160여 명으로 시작 되었으며 4차에 걸쳐 시위가 전개되면서 연인원 1,500명으로 추산되고있다.
1923년 해녀항일운동도 시작은 주도자가 수십명에 불과하였고 시위가 계속되면서 연인원으로 17,000여 명이 참여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당시 구좌면의 인구가 도대체 얼마인데 이러한 민중이 가담한 것일까?
이에 반해 기유제주의병항쟁은 정통한 사료에 의하면 제주 전도에 걸처 600여명이 일거에 봉기하였다는 사실이 논문 "한말제주의병항쟁의 재조명"으로 밝혀졌으며 당시 일제 신문보도에 의하면 제주도민 2,000여명이 봉기한 제주 최초 최대 규모의 항일 항쟁이라는 사실이 명명백백한데도 이를 외면한 기존 연구자와 관료들에 의해 "제주3대항일운동"이라는 얼토당토 해괴한 정명에 매몰되어 망가진 역사만을 제주도민은 사실로 알고 있는 형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