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배반도 연기緣起로 해결>
‘이율배반’의 유명한 예를 먼저 들겠습니다.
‘모든 크레타 인은 거짓말쟁이다’라는 크레타 출신의 철학자 에피메니데스의 말이다. 이 크레타인 철학자의
말이 참이라면 그는 거짓말쟁이여야 한다. 만약 에피메니데스가 거짓말을 했다면―그래서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이 거짓이라면―그렇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의 반대가 ‘모든 크레타인은 진실을 말한다’라면, 거짓을 말할 때
에피메니데스는 실제로는 진실을 말한 것이 된다.
이런 이율배반의 예(말 자체에서 발생하는 논리적 모순을 극복해야 하는 표현들)는 흔치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말장난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무상과 무아가 불법의 요체이고 우주의 실체적 진리인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불법(붓다의
가르침, 불교) 자체도 무상과 무아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말이어야 합니까? 아니면 불법 자체는 무상과
무아를 ‘만들어 낸’ 진리이니까, 무상과 무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까?
‘불법이 무상無常·무아無我에 해당이 되는가’라는 의문입니다.
저는 해당이 된다는 견해입니다. 무상은 제행무상의 줄임이고, 무아는 제법무아의 줄임입니다. 제행무상은
연기를 사事의 논리로 표출한 것이고, 제법무아는 연기를 이理의 논리로 표출한 것입니다. 이 구별은 사실
삼법인三法印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 이理와 사事가 원융되고 다시 진아眞我와 합일되는 안팎 세계의 불이不二가 바로 궁극적 깨달음입니다.
당연히 이것은 모조리 연기緣起자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불법도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이기에, 시공을
초월한 각기 다른 듯한 가르침으로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연기는 존재 자체이기에 부정과
긍정의 밖에 있습니다.
어떤 이론과 어떤 사상을 논해도 혹은 어떤 원자와 어떤 새로운 물질을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도 그것은
긍정·부정의 문제가 아니라 이理와 사事의 문제, 즉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에서 벗어날 수 없고,
연기緣起라는 것이고 곧 불법 그 자체라는 말씀입니다.
과거불과 미래불이 추정될 수 있는 요인도 연기緣起를 깨닫는 사람은 과거 혹은 미래와 관계없이
‘붓다’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기를 깨달은 이들은 제행무상과 제법무아,
반복되는 설명이지만 삼라만상과 법계의 이理와 사事의 근본적 원리를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혹,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우주, 예를 들어 기체로 이루어진 몸통에 황산을 혈액으로 삼는 고등생명체가
있다 하더라도 연기緣起로 접근하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생명체에 대해 현재 갖는
‘비과학적이라거나 불가능하다’라는 생각은 특정 ‘잣대’가 있는 ‘논리’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연기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현재 모르지만 그럴 만한 인과 연이 있기에 그런 생명체인 과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