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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창조주 신의 판결문
'창조주신'을 하나님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이라고
부르면서 자기들만의 신인줄 알면 큰 코 다친다.
기독교가 창조주신에게 하나님아버지나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라고 이름을 부여해주고 자기종교만의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 이름의 신이 성경에 나오는 하늘의 신(창조주신)과
같은 분이라고 주장하려면 창세기부터 시작된 온갖
부족 신들의 이름도 같은 분이라고 주장해줘야 한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각 부족들의 신들의 이름=그들의 창조주신의 이름
*여호와= 유대인이 부르는 창조주신의 이름
*하나님=기독교가 부르는 창조주신의 이름
*하느님=천주교가 부르는 창조주신의 이름
*알라=이스람교가 부르는 창조주신의 이름
*하늘의신=다니엘, 느헤미야, 에스더, 에스라, 예레미야
등의 인물이 기도드렸던 대상
옛날에는 '유대인'만 사랑했을 것 같고,
현대에 와서는 '기독교인'만 사랑할 것 같이
착각하면 정말 큰 코 다친다.
'성경'을 자신들이 썼다는 우월감과, 창조주 신을
여호와, 야훼, 엘로힘 등으로 부르면서 자기들만의
신인줄 알고 떵떵거렸다가 큰 코 다친게 유대인이다.
성경은 사람이 쓴 것으로 신의 영역이 아니라고 하고,
성경 그때 당시의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사건
이라고 생각하고, 현대에 와서는 이스라엘이나 유대인
말고 다른 나라들은 적용이 안 된다고 떵떵거렸다가는
큰 코 다친다.
'창조주 신'은 온 우주와 온갖 피조물들과 전 인류의
창조주 신이시며, '성경'은 온 우주와 온갖 피조물들,
특히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내가 죽을 때까지,
앞으로 태어나 죽을 전 인류에게 말씀하시는
창조주 신의 법전이시다.
말씀으로 창조하신 창조주 본체께서는 모든 것을 말씀으로 하신다.
그러면 그 말씀에 대한 형상(창조주의 능력)이 실행을 하신다.
성경에서 “하라” “하지마라” 가 있는데 그 것은 사람으로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들을 말씀하신다.
또 “하라” “하지마라” 가 있는데 이 것은 창조주께서 사람들의
축복거리와 징계거리를 계산하시고 판결을 내리신 심판의 명령이신데
그런 말씀도 “하라!”고 하신다.
그런데 그런 ‘하라’는 사람인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창조주신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씀이신데도
“그렇게 하라!” 라고 하신다.
영의세계에서는 창조주 신의 판결문 말씀이시고
육의세계에서는 내가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이 “네가 그렇게 된다” 라는 것은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 불교인이나 이슬람교인이나 흰두교인이나
이단이나 삼단이나 불신자들이나 몽땅, 사람이라고 하는 자들은
몽땅 해당된다.
성경을 읽을 때 “너는”을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에게”
“기독교인만” “기독교인에 의하여” “기독교인을 위하여”
라고 읽으면 큰 코 다친다.
‘성경’을 기독교의 경전 정도로 알면 안 된다.
게다가 “나쁜 용도의 너는” 타 종파나 불신자들이고,
“좋은 용도의 너는” 기독교인이라고 홀랑 읽어버리면
안 된다.
그냥 사람이라고 하는 “누구나” 라고 읽어야 한다.
♥회개
(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아멘.
‘회개’ 라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창조주신께서 해주시는 것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회개라는 것은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했냐” 이다.
부모에게는 어떻게 했냐?
잘 했냐 못했냐? 그 나라 법대로이다.
부부지간에는 어떻게 했냐?
남편에게 주께 하듯 했냐? 남의 남자에게 하듯 했냐?
머슴에게 하듯 했냐?
아내를 내 몸 같이 예뻐하고 사랑하냐?
소 닭 보듯이 보고 사냐?
억지로 사냐? 정으로 할 수 없이 사냐?
내 아내는 무수리 같고 남의 아내는 공주 같으냐?
자식을 내 몸 같이 사랑하고 예뻐하냐? 진심으로.
자식이니까 할 수 없이 데리고 사냐?
애물단지 취급하냐.
이웃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귀하게 여기고 사냐?
필요 없는데 그냥 있으니까 사냐? 원수 같이 여기고 사냐?
등등 그야말로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잘 행하고 사냐이다.
도덕법을 잘 지키고 사냐? 남의 흉허물을 용서했냐?
정직하냐? 성실하냐? 착하냐? 생각이 바르냐?
나쁜 짓을 안 하냐? 나쁜 눈길을 보냈냐? 속으로 비웃었냐?
속으로 무시했냐? 저울을 속였냐? 재판을 그르치게 했냐?
편애를 했냐? 편법을 썼냐? 사기를 쳤냐?
나라 법을 잘 지키고 사냐? 양심도 바르냐? 등
이런 것들은 잘 잘못을 가려서 그때 그때 깨달아지는 대로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이키기까지 하고 살아야 한다.
이런 회개를 잘 한다고 해서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서 좋은 구역으로 옮겨 주시는데,
몸이 아프거나 재정이 바닥을 치는 지옥의 삶에서
건강한 몸으로 재정이 풍성한 천국 같은 삶으로 옮겨 주신다.
*창조주신께서 해주시는 회개가 있는데
이것은 각 사람마다 다르다.
어느 날 언제 어떻게 주실지 모른다.
내가 그런 회개를 하게 해달라고 조른다고 주시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사람답게 바르게 살면 주시는 것인지, 악하게 나쁘게 살 때
회개시키시느라고 주시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에 관련된 것이 아닌, 신에 관련되고 영의세계와 관련되는
것들에 대해 잘 못 알고 있고, 그래서 잘 못 가르치고 그래도 바로
바로 죽이시지 않으신다.
이 회개는 창조주께서 일방적으로 시키시는 것일지라도
이 때도 사람에게 잘못한 것에 대한 것을 회개시키신다.
이런 회개를 시키셨다고 해서 그 사람만 꼭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 어떤 일을 맡기시기 위해
영적인 어떤 일을 감당하기 위해 크게 회개시키시는데
이 때는 통회자복하고 뱃속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 콧물의
회개를 하게 된다.
"내가 울면서 회개를 해야지"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때는 ‘죄 성’을 회개하는 것도 하게 하신다.
이 ‘죄 성’을 회개하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너무 힘들다.
그냥 미치는 것이 낫고 죽는 것이 낫다.
이 죄 성을 느끼는 것은, 우리 삶에서 따지자면
그 까짓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데, 상대방도
“그 정도쯤이야 뭐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아요"
라고 할 그런 것들인데,
주께서 죄 성으로 느끼게 하시면 미치는 것이 낫고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만큼 괴롭다.
이런 회개는 내가 스스로 못한다.
주께서 직접 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불바다
(마태복음 3: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아멘.
우리는 해도 있고 달도 있고 나무도 있고 하늘도 있고 땅도 있고
바다도 있고 사람도 많고 꽃도 있고 산도 있고 동물들도 있고
각종 모든 것이 다 있고 해외 여행도 다니고 하니까
이 땅이 천국처럼 보이려나 모르겠지만 신께서 영의세계에서
보실 때 이 지구는 불바다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
불이 꺼지지 않는 불바다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이 선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법’ 세계가 형성이 되면 그나마
그 모습은 천국 같은 모습으로 볼 수 있지만 교인이든 누구든
선하게 살지 못해서 주께서 ‘죄의 법’으로 계산하시면
그 모든 사람들의 행위 값은 ‘불 속’에서 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우리가 그런 영의세계의 모습을 보면 불바다에서 괴롭게 있는
것으로 본다.
아예 아담에게 형벌을 내리셨을 때 이 지구는 불바다에 있는 것이다.
육의세계 우리는 안 타고 있어서 모를 뿐이다.
그래서 그렇게 지옥을 보고 왔다고 하면 계속 불에서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사람이라는 사람은 누구든지 태어나면 무조건 ‘죄의 법’ 세계로
계산된다. 영의세계에서 그를 볼 때는 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스가랴 3: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아멘.
누구든지 태어날 때는 ‘죄의 법’ 사람으로 계산이 된다.
무속이든, 무슨 종교인이든, 모태신앙이든 무엇이든
개인 죄의법 세계가 모여 나라 죄의법 세계도 형성된다.
그런 것이 ‘바사 군주’ 이기도 하고 ‘헬라 군주’ 이기도 한다.
나라 적으로 ‘죄의 법’ 세계로 계산된 이름이다.
로마 군주, 미국 군주, 영국 군주, 중국 군주, 일본 군주,
한국 군주, 인도 군주 이런 식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연예인이나 문화인이나 스포츠인이나 정치인이나 일반인이나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이나 모태신앙이나 누구나 태어날 때는
무조건 ‘죄의 법’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이 무슨 일을 하던 창조주신을 찬양하는 것이
아닌 것들은 다 불에서 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불신자 가수들이나 창조주신을 믿는 가수일지라도 신을 직접적으로
찬양하는 것이 아닌 노래들은 ‘죄의 법’ 세계에 있는 것으로 계산된다.
그렇다고 그 노래가 사탄을 찬양하는 노래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계산되는 것일 뿐이다.
우리도 그런 노래 부르거나 듣게 되면 기분 좋아지고 즐거워지고
흥겨워지고 춤을 추고 싶어지는 노래 많다.
신을 직접적으로 찬양하는 노래가 아닐지라도 클래식이라도
좋은 노래를 들으면 눈물도 나고 부부가 서로 껴안고 자녀와도
껴안고 더 사랑이 가고 사이가 좋아지는 음악회도 많다.
그냥 노래를 들을 뿐인데 눈물을 흘리고 서로 손을 잡고
안아주고 뽀뽀하는 모습들을 본다.
하지만 이 모습을 영의세계에서 보면 불에서 괴로워 하면서 부르는
모습으로 보여 진다. 그렇다고 그런 것을 없애면 안 된다.
사회가 삭막해지고 음악 치료라는 것도 없어진다.
영의세계법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더 장려해야 되는 문화이다.
합창이라는 문화는 그것이 신을 찬양하는 것이든
일반 노래든 참으로 좋은 문화이다.
누구나 다 창조주신을 직접적으로 찬양하라고 부름 받지 않는다.
신을 직접적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무조건 다
'창조주신 '법으로 계산되는 것도 아니다.
자기 노래 잘하는 잘난 맛에 부르는 찬양자들도 있을 것이니까.
(고린도전서 3:13~15)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아멘.
그냥 살면서 그 일로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일이 망치게 되고
자녀도 안 되고 가정의 일도 안 되고, 울게 되고, 싸우게 되고,
서럽게 되고, 욕 먹고 살고, 손가락질 당하고 살고, 사고도 나고,
억울한 일도 당하고, 악한 일도 당하고, 죽을 만큼 아프게 되고,
재정이 바닥을 치고, 죽기까지 하는 그런 다양한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태복음 3: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아멘.
성경 말씀은 죽어서 창조주신께 오면 이렇게 해주시겠다
저렇게 해주시겠다가 아니라 이 땅에서다.
그것을 영의세계 법으로 말씀하셔서
우리가 잘 못 알아 들었을 뿐이다.
신께서 사람들의 말과 생각과 마음과 양심과 도리법 경우법
나라법 행함을 항상 계산하시는데 그 계산에 의해 누구는 좋은
구역으로 옮겨지고 누구는 나쁜 구역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이 땅에서 이런 계산이 없고 오직 죽어서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이면 이 땅에서 누구는 잘 살고 누구는 못 살고 누구는
아프고 누구는 건강하고 누구는 재수가 좋고 누구는 재수가
없고 그러지 말아야 한다.
이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은 그런 계산이 있었다는 것이다.
누가 알곡이 되어서 곳간 안에서 있었어도 그가 쭉정이
짓을 하면 쭉정이가 되가지고 불에 태워지고,
태워진다고 재가되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불에 태워지다가도 알곡이 되면
다시 곳간 안으로 들어가고 하는 것이다.
한번 알곡 영원한 알곡, 한번 쭉정이 영원한 쭉정이 아니다.
돌짝 밭, 길가 밭, 가시밭, 좋은 밭 이 네 가지 밭 이야기도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이 그런 식으로 계산이 되어서
이곳으로 갔다가 저곳으로 갔다가 그곳으로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왔다가 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지옥
(마태복음 5:21~22)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아멘.
(마태복음 5:27~28)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아멘.
남의 아내와 직접적으로 간통하는 것도 간음이라고 하고
마음으로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하신다.
그러면 남자들 다 죽었다. 여자들도 같겠지만.
남의 배우자를, 아니면 연예인일지라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도 한번 같이 잠을 자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하고 살까? 포르노 동영상들을 그렇게 보고
즐기고 사는데? 다 죽어야지.
이런 것은 어떻게 계산되는지 모르겠지만 성경에서
그렇게 살면 불에 던져져 불살라진다,
그렇게 하면 심판을 받는다,
그렇게 하면 지옥 불에 들어간다 하신다.
이런 죄들은 모아 놨다가 죽어서 지옥 가서 판결받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살면서 육체의 고통으로든
생활의 찌듦으로든, 악한 일로든, 죽음으로든 받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행위 값이 영의세계 법으로 비춰지는
‘죄의 법 세계’를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지옥 불’ ‘눈을 빼버려라’ ‘손을 잘라버려라’
‘바다에 빠져 죽어라’ ‘열매 없는 나무 잘라서 불에
던져버린다’ ‘예복을 안 입었구나 너는 나가라.
어두운데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라는 말씀들로.
성경은 이 땅에서의 법이지 죽어서 영의세계로
들어가서의 법이 아니다. 죽으면 이 육체도 끝이고
형벌도 끝이고 성경의 법도 끝이다.
아담의 육체는 땀흘리고 살다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형벌을 받은 것이다. 죽어서 또 지옥 가는 것이 아니다.
죽어서 꼭 지옥에 가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개나 소나 다 가게 되어 있다.
아담이 가면 그 뿌리들은 통째로 가게 되어 있다.
인간이라면 죽어서 스스로 천국에 갈수가 없는데
성경 어디 한군데라도 안 걸리는 곳이 없을 만큼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이 죄로 다 엮어놓으셨다.
그러니 종교믿음 하나가지고 ‘나 만큼’ 은 이라는
자만을 버려라. 개나 소나 다 지옥 간다.
♥"해버려라!"
(마태복음 5: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아멘.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지만 내 오른 쪽 눈이 잘못했다고
내가 눈을 빼지는 않는다. 창조주께서 나의 눈에 징계를
내리신다는 것이다.
눈 하나 아프고 마는 것이 낫지 온 몸이 아픈 징계를
받는 것은 더 지옥이다.
(마태복음 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아멘.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지만 내 오른 쪽 손이 잘못했다고
내가 손을 자르지는 않는다. 신께서 나의 손에 징계를
내리신다는 것이다.
손가락이든 손이든 팔이든 하나 아프고 마는 것이 낫지
온 몸이 아픈 징계를 받는 것은 더 지옥이다.
“손을 찍어 내버리라!” “눈을 빼버려라!”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뜨림을 당해라!”
얼마나 무서운 판결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손으로 무슨 잘못을 할 때마다 손이
짤려짐을 당하고, 눈이 잘못할 때마다 눈이 빠져버림을
당하고, 발이 잘못했을 때마다 발이 짤려짐을 당하고,
잘못하고 용서 안해주고 했다고 바다에 빠뜨려짐을
당한다면 이 땅에 살아남을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다들 병신들이 되어서 죽기 직전의 모습으로
살든지 죄다 죽든지 할 것이다.
그러면 누구는 눈을 다치고 누구는 손을 다치고
누구는 발을 다치고 누구는 바다에 빠지고 할까?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른데,
누구는 말을 할 때도 그냥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사용하고 얼굴 표정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누구는 말은 많이 안 해도 눈짓을 많이 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는 손으로 글을 쓰고.
과거 같으면 상소를 올리고, 그림을 그리고,
지금 같으면 문자를 날리고, 뎃글을 달고 하면서
잘못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무슨 일에 손을 사용했는지 어디 가지 말라는 곳에
발이 달려갔는지 우리는 잘 모르고 살고 있다.
하지만 내가 잘 못한 부위만큼 죄 값이 쌓이는데,
그 사람은 거의 그 같은 잘못을 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손이 한번 잘못했다고 자르지는 않으신다.
인생은 믿든지 말든지 ‘자기 죄가 자기를 때리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내가 잘 못하는 것을 고치지 않고 계속적으로 짓고
산다면 그에 따른 결과가 나타나는데, 눈이 다치고 손이
다치고 발이 다치고 물에 빠지고 사고 나고 병들고 죽고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전쟁으로 많이 눈을 다치고 손을 다치고 발을 다치고
몸을 다치고 바다에 빠지고 죽기까지 했지만 지금은 거의
교통사고로 해양사고로 항공사고로 이런 일을 당한다.
무슨 계산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
‘재수가 있고 없고’로 알거나 ‘우연히’라고 알고 ‘그냥’이라고
알아도 할 수 없지만 그 모든 것은 창조주의 계산에 의해서
된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
“때리는 이가 나 창조주신줄 알라!” 이시다.
(에스겔 7: 9)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능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창조주신이 때리는 이임을 네가 알리라" 아멘.
♥크기의 차이
그런데 창조주신은 영의세계에 계시는 분으로,
판결을 말씀하실 때도 육의세계의 크기로 말씀하시지를
않고 영의세계의 크기로 말씀하신다.
이 영의세계의 크기를 비유적으로 한다면
내가 손으로 ‘그림자 놀이’를 한다고 할 때,
나의 손가락 모습은 별거 아닌 토끼를 만들고
주먹을 쥐고 펴고 했을 뿐인데 그림자에
비쳐지는 모습은 무서울 수 있다.
육의세계의 크기로 보았을 때 손가락으로 잘 못된
글을 썼다든지 악플을 달았든지 했을 때, 형제에게
‘라가’ 라고 욕을 했을 때, 눈으로 흘기고 이기죽
거리고 눈으로 남을 판단하고 나쁜 눈짓을 보내고
했을 때, 신께서 판결을 말씀하실 때는 영의세계의
크기로 말씀하시는데
“네 오른 손을 찍어 내버리라” “네 눈을 빼버려라”
“지옥 불에 던져 진다” “열매 없는 나무는 찍어 불에
던져 태워버려라” 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죄 값이 계산되고 있는 영의세계를 자기가
보고 온다고 하면 손이 짤려져 나가고, 발이 짤려져 나가고,
눈이 빠져버리고, 혀가 잘리고, 유황불에 빠뜨려지고,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지고 하는 형벌을 당하는 것을
보고 오는 것이다.
그것이 영의세계에서 보는 사람의 죄의 크기이다.
계속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고 회개하고 돌이키고 형벌의
기간이 끝났다든지 해서 신께 사함을 받으면 그 형벌에서
놓임을 받고 회복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알지도 못하고 반복적으로 짓고 있는
죄 속에서 살기 때문에 항상 그렇게 고통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육체만 모를 뿐이다.
이 영의세계에서 보는 사람의 죄의 크기 세계를 신께서
보지 못하도록 해주셔서 그렇지 만약 육의 눈으로 보고
살도록 하셨다면 우리는 무섭고 두렵고 힘들어서 하루도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지옥은 정말 있어요!” “천국은 정말 있어요!”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다.
우리가 '있다' '없다' 아무리 논쟁을 벌인다해도
정말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다.
창조주신의 주권에 있지 인간의 주장과 외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영의세계로 들어가서 지옥을 보고 왔어요"
"지옥은 정말 있어요" 라고 울고 불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 자기 죄 값의 세계를 보고 오는 것이다.
남의 것도 볼 수 있다.
같은 죄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므로.
동화로 보자면 개과천선한 스쿠루지 할아버지가 자기의
죄 값의 영의세계를 꿈으로라도 겪고 나서 새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라고 하는 것들은 그 누구든지 아무도
예외 없이 그런 지옥의 고통의 ‘죄 값의 세계’와 천국
같은 ‘상 값의 세계’로 계산당하면서 계속적으로
이리갔다 저리갔다 살고들 있는 것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믿든지 말든지 말이다.
♥믿음대로
그 이후로 죽어서도 지옥에 가고 싶으면 가던지
본인들 믿음대로 가면 되는 것이고 천국에 가고
싶으면 본인들 믿음대로 가면 되는 것이다.
목사가 천국가라고 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목사가 지옥가라고 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스님이 천국가라고 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스님이 지옥가라고 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신부가 천국가라고 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신부가 지옥가라고 해서 가른 것도 아니고
인간주제에 천국 가라 지옥 가라 해서 가는 것도
아니니 네 믿음대로 가면 된다.
내가 지금은 한국사람이지만 성경에 아브라함한테
간다고 했으니 나는 아브라함테 가야지 하면 가면
된다.
나는 한국 사람이니 단군에게 갈란다 하면
단군에게 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 죽음 후의 영의세계는 내가 어디 가고 싶다고
가는 것도 아니고, 가고 싶지 않다고 안 가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여기 가고 싶다고 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거기 가고 싶다고 가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자동으로 되는 창조주신의 시스템일 뿐인데,
지금 내가 이 땅에 살면서 아무리 내 뜻을 소리치고
주장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재판장 앞에서 재판 받는 주제에 내가 나에게
판결을 내리는 꼴의 상황이다. 나는 무죄!
♥아는 예수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아멘.
우리가 어떻게 창조주 같이 온전해질 수가 있을까?
그 앞 절에 예수를 믿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셨다.
(마태복음 46~47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아멘.
예수를 믿으나 안 믿으나 이 말씀처럼 살면
‘법 없이도 살 사람’ 이라고 ‘훌륭한 사람’ 이라고
존경받고 칭찬을 받는다.
하지만 기독교인이 행함도 없이 예수 이름만 들먹이면서
자랑 질을 일삼으니 욕을 배터지게 먹게 된다.
두 사람이 똑 같은 삶을 산다고 칠때,
‘예수’ 이름이 빠지면 그나마 똑 같은 사람이라도 욕을 덜 먹는데
‘예수’ 이름이 들어가면 남들과 똑 같이 살아도 욕을 먹는다.
그러니 내가 남들과 똑 같이 살던 더 못살고 싶거들랑
나에게서 ‘예수’ 이름을 빼버리고, 곧 죽어도 예수 이름을
못 빼겠다고 할 것 같으면 남보다 더 잘하면서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많은 무리들 앞에서 하셨다.
그 무리들 앞으로 있는 제자들에게 하셨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산상수훈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너희는 나가서 소금도 되고 빛도 되라고 하셨다.
그리고 또 용서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계속해서 너희는 원수도 사랑하고 누가 오리를
가 달라고 하면 10리를 가주고, 누가 네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주라고 하셨고, 너한테 누가 돈을 꾸어
달라고 하면 거절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런 말씀들은 형이상학적인 것도 아니고
추상적인 것도 아니고 우리가 능히 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산상수훈’ 이라고 알고 ‘8복’ 이라고 알고 있는
말씀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추상적인 것이다.
이런 추상적인 말씀들은 창조주께서 너희들의 행함을 보시고
영적으로 복을 그렇게 주실 것이라는 것인데 우리는 모른다.
그런 말씀 붙들고 쓰고 외우고 늘어져 봐야 소용이 없다.
밑에 말씀하시는 말씀들을 행하고 살아야 그런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5장 마지막 부분에 세리 같이 사랑하지도 말고 ‘더’ 하고,
아는 사람에게만 문안하지 말고 ‘더’ 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분명 그 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굳이 기독교인들도 예수의 제자라고 한다면,
예수를 아는 자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
예수를 사랑한다고 하는 자들, 예수에게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고 울고 불고 하는 자들은, 남들보다 한 단계
더 높이 선을 베풀며 살아야 한다.
“남들과 같은 정도로 살면 되겠냐?” “남보다 못하면 되겠냐?”
“네가 그렇게 살 것 같으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외치는 이 예수라는 내 이름이 뭐가 되고 사랑의 하나님
이라고 하는 내가 뭐가 되겠냐? 너 때문에!”
“차라리 나를 모른다고 해라!” 그러신다.
예수님께서 그 무리들이 ‘기독교인’ 이라고 하지 않으셨고,
그 앞에 있었던 제자들이 기독교 수장인 ‘목사’ 들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기독교가 성경을 갖고 교리를 만들고, 자기네는 예수를
아는 자들이고, 예수를 믿는 자들이고,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이고, 예수께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는 자라고
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이 남보다 더 잘해야 욕을
먹지 않게 되는 이 말씀이 크게 적용이 되는 것이다.
"어째! 쟤나 너나 같냐?"
"어째 쟤보다 네가 더 못하냐?"
사탄이나 마귀가 그저 예수 믿는 것들을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라고 가르치지 말라.
예수가 “나를 아는 자들은 그러면 안 된다!” 하시는 것이다.
남에게 욕먹지 말고 손가락질 당하지 말고, 남에게 스트레스
주지 말고, 남들이 싫다고 하면 자중하면서, 혼자 떠들지 말고,
혼자 잘하는 척 하지 말고, 혼자 예수 잘 믿는 것처럼 떠들지
말고, 혼자 은혜는 다 받은 양 떠들지 말고,
그냥 착한 행실을 보이면서 조용히 살아라.
내 입으로 내 칭찬하지 말고, 남들이 나를 칭찬하도록.
개떡 같이 살면서
“나는 천국 간다, 예수 믿기 때문에!” 라고 떠들지 말고,
존경받고 칭찬받도록 살아서
“내가 생각해도 당신 같은 사람은 천국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라는 말을 타인에게 들어야 한다. 그것도 강제로 유발시키지 말고.
(잠언 27:2)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 아멘.
♥온전
우리는 창조주신처럼 온전할 수가 없다.
그럴지라도 사람들을 볼 때 세리 같이 세금을 걷어야 하는
이익성으로 사랑하지 말고, 이익이 생기면 좀 친하게 지내고,
그렇지 않으면 언제봤냐?는 식으로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심이 들어간 것은 사랑이 아니다.
나와 이익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을
창조주신 같이 온전하다고 보아 주신다는 것이다.
돈이 되는 관계가 아니더라도, 내게 있는 돈이 들어갈지라도,
돈이 생기는 관계가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할 때
창조주신 같이 온전하다고 보아주신다는 것이다.
'문안' 이라는 것이 그냥 “안녕하세요?” “안녕히 계세요”
라고 형식적으로 하는 말일까?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어떻게 살고 있을까? 회사가 망했다는데 밥은 잘 먹고 있을까?”
“몇 년을 놀았다는데 먹을 거나 있을까?”
“부모가 돌아가셨다는데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전에 아프다고 하더니 지금은 쾌차했을까?”
형제든 이웃이든 누가 가난하다 먹을 것이 없다 춥다 라는
소리가 들려올 때, 접하게 됐을 때, 손을 잡아주는 것이
문안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창조주신께서는 우리를 창조주신처럼 온전하다
라고 보아주신다는 것이다.
‘창조주의 온전하심’ 이라는 것이 오직 예수 이름만 거들먹
거리면 되는 것 같으면 예수쟁이에게 욕을 하면 그는 예수에게
죽임을 당해야 한다.
형제에게 ‘라가’라 하면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했다.
하지만 창조주의 온전하심 이라는 것은 ‘예수 이름’이 아니라
‘예수의 성품, 신의 성품’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신의 성품'은 없이 예수 이름만 팔고 다니는 자에게는
미움이 오고 핍박이 오고 박해가 오고 죽음까지 올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이 정말 예수 이름만 팔고 다니는 자를 미워한다.
‘인격’과 ‘성품’적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이 예수를 안 믿는
자들보다 못하게 살면 그것은 말 할 것도 없이 욕과 손가락질과
핍박과 박해가 따라오는 것이다.
“어떻게 예수를 믿는 것들이 안 믿는 것들보다도 더 나빠!”
예수를 믿는 자들이 예수를 안 믿는 자들과 같은 수준으로
살아도 욕을 먹게 되어 있다.
“어떻게 예수를 믿으나 안 믿으나 똑 같아!”
예수를 믿는 자들은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살아야 된다.
남보다 더 욕도 하지 말아야 하고, 남보다 더 싸우지 말아야 하고,
남보다 더 화를 내지 말아야 하고, 남보다 더 용서 잘해야 하고,
남보다 더 정직해야 하고, 남보다 더 성실해야 하고, 남보다 더
진실해야 하고, 남보다 더 남들을 더 신경 쓰고 위해주고 생각해주고
스트레스 받지 않게 해주고 안부를 묻고 챙겨주고 위해주고
격려해주고 칭찬해주고 웃어주고 좋아해주고 살아야 한다.
"당신 같은 좋은 기독교인도 있습니까?" 칭찬받아야
그래야 욕을 먹지 않는다.
“세리도 그 같이 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 정도는 다 한다”
정도로 살면 욕을 먹는다.
그것은 창조주께서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신의 온전하심으로 계산해 주시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창조주의 온전하신 계산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
마구잡이 공격에 마구잡이 미움에 마구잡이 핍박에 박해에
죽음? 그런거 없다.
이런 계산을 ‘사탄’ 이 하는 것처럼 가르쳐서 그렇다.
사탄이 계산한 것 뚝심으로 버텨야 한다고 해서 더 그렇다.
"욕을 먹던지 말던지, 핍박이 오면 오히려 상이라는데
웬 떡이냐?" 천만의 말씀이다.
예수가 그렇게 계산하시는 것이다.
“어떻게 예수를 믿는 것들이 예수를 안 믿는 것들보다 더 나빠”
“예수를 믿으나 안 믿으나 똑 같아!”
…
“예수 라는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냐?”
“내가 그 정도 인격밖에 안 되냐?”
“너는 나를 욕 먹게 하고 살고 있구나” 이시다.
“너 같은 좋은 예수쟁이도 있냐?”
…
“그래, 그래도 너는 나 ‘예수’ 의 성품을 좀 발휘하고 사는구나!”
“나를 욕먹지 않게 하고 사는구나"
라고 예수가 계산하시는 것이다.
♥복음
(고린도전서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아멘.
‘복음’ 이라는 것이 무조건 예수 이름을 팔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예수 이름을 전하기 위해서나 창조주신을 전하기 위해서
먼저 신의 뜻대로 사는 삶을 전도자가 먼저 살아야 한다.
그리고 창조주신께서 원하시는 뜻을 보여주고 알려주고
그대로 살게 해주면서 예수 이름을 전해야 한다.
가난한 나라에 가서는 그들을 구제해 주면서 전해야 하고,
그래도 먹고 살 만한 사람들에게는 진심으로 좋은 성품을
보여주면서 전해야 한다. 사심이 들어가면 역효과가 난다.
그리고 무조건 말로만 떠들고 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신께서
어떻게 나를 통해 일을 이루셨는지, 이루시고 계시는 지를
확실하게 거짓이 없이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무조건 교회만 오면 구원 받는다든지, 교회만 오면 온갖
복을 받는 것처럼, 기도만 드리면 재깍재깍 응답을 받는
것처럼, 만사형통인 것처럼 떠들지 말아야 한다.
(마태복음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아멘.
교회에 와도 행실이 바르지 않으면 복이 없다.
그렇게 복을 주시는 분이 교회가 아니라
‘창조주신’ 이시기 때문이다.
자기를 바꾸지 않으면 온갖 말을 듣고 산다.
욕도 먹고 손가락질도 당하고 산다.
행실이 꼭 바뀌어야 한다. 속과 겉이 같아야 한다.
남의 말을 전하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면 입을 다무는 것으로
바꾸고, 험담과 이간질을 일삼고 싸움을 일삼고 살았다면
그런 것을 멈추어야 한다.
도둑질을 했다면 그것을 멈추고, 화를 많이 내고 분을 많이
내고 살았다면 그것을 멈추고,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방관하고 살았다면 남이 잘되도록 도와주고,
그들이 나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해주고,
나를 좀 바꿔달라고 조언이 들어오면 참고하고 바꾸고,
욕을 많이 했다면 욕을 멈추고, 몸에 좋지도 않은 술 담배를
중독처럼 했다면 멈추고,
변덕이 죽 끓듯 했다면 좀 자중하고, 거짓말 하지 말고,
돈 떼 먹지 말고, 꾼 돈은 갚고, 동물도 학대했다면 멈추고,
법을 어기는 것을 밥 먹듯이 했다면 법도 잘 지키고,
약속을 잘 어기는 사람이었다면 약속을 철저하게 잘 지키는
사람으로 바꾸고 등 수 많은 것들이 있는데 나를 좀 잘 살피고
남들이 이구동성으로 싫다고 외치는 것들을 바꿔야 한다.
“그거? 내 성격이야! 나의 타고난 성품이야 어쩔래!”
“그러려면 예수 이름을 버려!”
교회만 오게 하기 위해서 편법을 쓴다든지, 기도 응답도
제대로 못 받아 봤으면서 전도하라니까 그냥 마구잡이로
끌고 온다든지 하지 말아야 한다.
부득불 할 일이라 전도할지라도 억지로 하지도 말고,
마구잡이로 하지도 말고, 그냥 너의 신의 정직하고 선하신
성품을 보여주고, 칭찬받고, 존경받고, 잘 따르고, 같이 살고
싶어 하고, 같이 놀고 싶어 하고,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좋은 성품을 보여 주면 전도는 자동으로 된다.
'복음'은 복된 소식이라고 한다. 과연 복될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은 무엇일까?
"돈 있으면 빵 사먹어!"
"너는 배고프면 밥을 먹지 왜그러니"
"내가 돈좀 줄께 내일 우리집으로 와!"
"그나저나 예수 안믿으면 지옥가!"
아픈 자들에게 복음은 무엇일까?
"돈 있으면 병원에 가봐" "약 좀 사먹어"
"니가 몰 잘못했으니 아프지"
"그나저나 예수 안믿으면 지옥가!"
외로운 자들에게 복음은 무엇일까?
"잘 놀면 되지 왜 외롭지?"
"밖에 나가 친구도 만나고 놀아!"
"문화생활도 좀 하고, 쇼핑도 하고!"
"그나저나 예수 안믿으면 지옥가!"
우울한 자들에게 복음은 무엇일까?
"병원에 가서 우울증 약좀 먹어봐"
"무엇때메 우울하지? 난 괜찮은데!"
"밖에 나가 친구도 만나고 놀아!"
"문화생활도 좀 하고, 쇼핑도 하고!"
"그나저나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가!"
그게 복음이니?
내가 누구 죽일 힘이 있으면 너부터 죽이겠다.
복음과 전도는 다르다.
힘들고 괴로운 나를 도와주는 것은 '복음'이 될수 있지만
'전도'는 그냥 교회 교인 늘리기 위해 끌고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를 수십 년 다녀도 기독교신을 만나지도 못하고
예수를 경험하지 못하고, 기도응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무생각 없이 다니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그냥 교회에서 지내는 것이 좋은 사람도 있다.
억지로 끌려가서 한 번 들여놓은 교회 문턱,
나가면 지옥 간다고 배워서 못 나가는 사람도 있다.
♥보물
(마태복음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둟고 도둑질 하느니라” 아멘.
(마태복음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 하느니라” 아멘.
우리가 살면서 “저축하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 땅에서 저축하는
것이야 현찰을 은행에 갖고 가서 통장에 넣으면 되는 것이고,
땅에 묻어 놓을 수도 있고, 금고나 창고에 넣어둘 수도 있고,
나만 아는 곳에 숨겨 놓을 수도 있다.
각 사람들에게 있어서 ‘보물’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보물’ 이라는 것은
“돈으로 값어치가 나간다”는 것이다. 돈으로 계산이 안 되는 것은
그냥 자기에게는 보물일지 모르지만 남들이 훔쳐 갈만한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은 객관적으로 보물이 아니다.
남들이 훔쳐가서 돈으로 환산이 되는 것이 ‘보물’ 이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는 말씀은
꼭 기독교인들에게 향한 말씀이 아니다.
성경이 기독교인들을 위해서 쓰여졌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고 큰 착각이다. 기독교가 성경을 갖고
기독교 교리를 만들고 기독교를 만든 것이다.
성경은 창조주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에서 쓰여졌지만,
그렇다고 유대인만을 위한 것도 아니고, 전 인류적이다.
이스라엘에서 쓰여 졌기 때문에 이스라엘 문화 법으로 쓰여 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도 아니고, 이제는 자칭 영적 레위인,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하면서 기독교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기독교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과, 어떤 것을 토대로 해서
기독교를 만든 것은 엄연히 다르다.
여호와나 예수나 성경이 전 인류적이 아니라고 한다면 무조건
‘이스라엘 것’이고, 대표성 이라고 한다면 '전 인류적'인 것이다.
내가 갖고 가서 나의 교리를 만들고 나의 종교를 만들면 안 된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나 이 땅에서의 좋은 삶으로
좋은 구역으로 옮겨지는 구원도 전부 오직 창조주신께서 하시는
주권이시지,
이 땅에서 사람이 교리를 만들고 종교를 만든 그 어떤 것으로도
그런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성경을 갖고 가서 교리를 만들고 종교를 만들었어도 마찬가지다.
안 된다.
“그러면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야?
그러면 이스람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야?
그러면 천주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야?
그러면 흰두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야?
그러면 몰몬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야?
그러면 다른 이단이라는 곳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야?
그러면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이야?
그러면 다원주의라는 것이야?”
그런 질문조차도 웃기는 것이고 해도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은 ‘구원’ 이라는 단어를 지껄이면 안 된다.
이 땅의 종교를 창조주신이 만들도록 허락하셔서 만들었든
사람이 만들었든 상관없다. 그런 종교들은 서로 뭉쳐서 나눠먹고
사이좋게 지내고 착하게 좀 살고 싸우지 말고 뺏지 말고 죽이지 말고
살라고 종교로 묶어 놓으신 것이지,
자기네 종교로 천국에 가냐 못가냐를 논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고 교회에만 와야 구원이 있다고 우기는 것도
잘못하는 것이다.
네가 어떻든 간에, 네가 어떤 종교에 있든 간에
창조주신은 그냥 너를 티끌 같이 보신다.
너는 그냥 인간일 뿐이다.
창조주신께 네가 선하냐? 선하지 않느냐? 라는
계산을 당해야 하는 그냥 인간일 뿐이다.
‘구원’ 이라는 것은 여기든 저기든 상관없이 오직
창조주신께서 결정하시는 것이다.
어느 종교든 어느 종교의 수장이든 대장이든 불신자든
사람인 너는 ‘구원’ 이나 받을 수 있도록 ‘선’을 행하고
살 '의무'만 있을 뿐이다.
남이 선하냐? 선하지 않냐?를 네가 계산해도 안 된다.
(누가복음 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창조주신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아멘.
사람으로 오신 예수조차도 “나에게 선하다 하지 말라!”고 하셨다.
(예레미야 9:23~2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아멘.
이스라엘이, 유대인이 창조주께 선택받았다고, 우리는 할례를 행하는
자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심판은 똑 같이 받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먼저 창조주신을 알게 되거나 찾게 되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오직 창조주께서 신을 알게 해주시면 알게 되고 믿게 해주시면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냥 알고만 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신의 성품은
‘사랑’ 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냥 알고만 있고 외우고 쓰고 하라고 하시는 것일까?
절대 아니다.
신의 올바르시고 좋으신 성품을 행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날이 이르면”… 모든 사람에게는 이 '날'이 이르는데
물론 축복을 받는 날도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이라는 것이
조금만 잘나면 잘났다고 자랑하고 떠들고 얼마나 들까부는지
혼나는 날이 더 많은데 이런 징계의 날은 누구나 다 온다.
“내가 다 벌하리니”…
종교신을 알고 믿는 자들은 예외?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예외?
교회를 다니는 자들은 예외? 이스라엘이나 유대인은 예외?
교회 안에서만 사는 교역자들은 예외? 절에서 수행하고 있는
스님들은 예외?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들으면서 죄를 사해주고
있는 신부들은 예외? 신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예외?
교회에서만 사는데 무슨 죄를 많이 지을까?
절에서만 사는데 무슨 죄를 많이 지을까?
성당에서만 사는데 무슨 죄를 많이 지을까?
그것은 우리의 착각일 뿐이다.
그것은 그가 그렇게 내가 살고 싶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신께서 들어가서 살라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의로
생각하면 큰 코 다친다.
다들 제 살 깎아먹고 살고 있다.
누구든 얄짤없다. “다” “all"
전 인류적으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주신을 믿든 믿지 않든, 자기 행실에 의한
‘죄의 법 세계(선하지 않음)’가 있고 ‘창조주신의 법 세계(선함)’가
있는데, 어느 정도의 선하고 선하지 않음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먼지만한 것 한 개라도 다 선함의 법으로나, 선하지 않음의
법으로 계산이 되는데, 선하지 않음의 법이라는 것이 땅에다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다.
이 땅에다 보물을 쌓아 두는 것은 도둑에게 빼앗기는 것이라고
하시는데, 그런 ‘죄의 법 세계(선하지 않음)’가 큰 사람은 삶에서
무언가 빼앗기는 삶을 살게 된다.
작게는 실수하고, 부끄럼 당하고, 들키고, 일이 안 되고, 엉키고,
크게는 망하고, 무너지고, 사기당하고, 쓰리당하고, 도둑당하고,
강도당하고, 질병으로 시달리고, 사고 나고, 죽기까지 한다.
하늘에 보물을 어떻게 쌓을까?
나중에 죽어서 창조주께 손 벌리는 것? "아니다"
내가 선함 행위의 값이 또 영의세계에서는 ‘창조주신의 법
세계(선함)’로 형성이 되는데 이것은 누가 빼앗아 가지 못한다.
신께서 그 사람의 축복의 값으로 계산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다 쌓아둔 보물과 하늘에 쌓아둔 보물과 서로 상계시키시고
나머지를 가지고 실시간으로 사람들에게 심판을 하시는 것이다.
선함이 더 크면 큰 축복으로, 선하지 않음이 더 크면 징계로,
그렇게 신을 믿으나 믿지 않으나 계산당하고 사는 것은 똑 같다.
신을 믿는다고, 신을 찬양하다고 특별히 더 봐주시는 것은 없다.
내가 교회에서 무언가를 했다면 그것은 그냥 신께서 그런 삶을 살라고
하신 것을 한 것 뿐이다.
그리고 목숨을 살려주실 수는 있으시다.
창조주신을 섬기는 자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은,
신께 너의 죄와 다른 사람들의 죄와 이 지역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나라와 조상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두 손 모아 비는 일을 하는 것이다.
(레위기 16:32~33) “기름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자기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는 제사장은
속죄하되 세마포 옷 곧 거룩한 옷을 입고 지성소를
속죄하며 회막과 제단을 속죄하고 또 제사장들과
백성의 회중을 위하여 속지할지니” 아멘.
그런데 빌기만 하고 성품이 개떡 같으면 같이 혼난다.
♥두 주인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창조주신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아멘.
이 말씀을 잘 못 알면 ‘창조주 주인’과 ‘재물주인’이 따로 있는데
너희는 두 주인을 섬기지 말고 창조주 주인만 섬겨야 한다고 오해할
수가 있다.
창조주신은 영의세계에서는 ‘창조주신’으로 말씀하시고,
육의세계에서는 ‘돈’으로 말씀하신다.
‘창조주 주인’ 이라는 존재도 ‘창조주신’ 이시고
‘재물주인’ 이라는 존재도 ‘창조주신’ 이시다.
창조주신을 믿는다고 돈을 펑펑 주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신을 믿으나 믿지 않으나 창조주신의 성품을 많이
발휘하고 사는 사람 성품 수준대로 재물을 주신다.
사람들이 살면서 물물교환만으로 산다고 해도 창조주신께서
복을 안 주시면 물물교환 할 물건이 없는 것이다.
이제는 ‘화폐’로 말을 한다.
돈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돈이야 없으면 없는 대로 살고 있으면
있는 대로 살죠머”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정말 돈이 한 푼도 없고
공과금도 밀리고 융자금도 밀리고 현찰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미칠 노릇인 것이고 죽을 노릇인 것이다.
돈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돈의 주인이 창조주신이시라는 것을 잘 모른다.
알아도 말로만 안다고 떠들 뿐이다.
창조주신을 믿는 자들은 창조주신께서 돈을 주시고,
불신자들은 사탄이 돈을 준다고 가르치지 말라.
돈의 주인도 창조주신이시며 온 세상의 주인도 창조주신이시며
다른 것들이 창조주신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한 개도 없다.
창조주신의 지시사항에 따를 뿐이다.
그리고 돈을 사랑하면 지옥 갈 것처럼 가르치고,
돈은 일만 악의 뿌리라고만 가르쳐서 돈이 무슨 마귀라고 생각하든지,
아니면 마귀가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돈을 거절하게 만드는데
그러면 안 된다.
돈은 창조주신께서 주시는 것으로서 창조주신을 믿는다고
잘 주시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다고 잘 주시는 것도 아니고,
창조주신의 ‘정직하시고 선하시고 공평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하시고 공의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좋으신 성품’을
발휘하는 %대로 주신다고 잘 가르쳐 주어야 한다.
‘창조주신의 성품’은 사람이 생각해도 ‘옳은 성품’이고 ‘바른 성품’을
말하는 것이지, 하루 종일 교회에 가서 무조건 살기만 하고 기도만
한다고 창조주신의 성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창조주신의 성품이라고
계산해 주시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착각하면 교회에 가면 창조주신께 상 받는다고 오해할 수가 있다.
한마디로 사람답게 사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 돈이다.
♥걱정
(마태복음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아멘.
이 말씀만 보면 아무 걱정 없이 살아야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점심은 무엇을 먹고
저녁은 무엇을 먹을까? 고민한다.
주부는 오늘은 또 무슨 반찬을 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산다.
똑 같은 반찬 두 번 올라오면 안 먹기도 한다.
배 부른 것인지 행복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런 삶도 창조주신께서 나에게 재정의 넉넉함을 주시면
무엇을 먹을까? 고민할 것도 없이 사다가 해먹든 나가서
사 먹든 즐기면서 먹고 살면 된다.
창조주신께서 나에게 재정의 넉넉함을 주시면 무엇을 입을까?
고민할 것도 없이 백화점 가서 예쁘고 맘에 드는 것,
명품이니 메이커니 해가면서 사 입으면 된다.
그런데 창조주신께서 나에게 재정의 넉넉함을 주시지 않으시면
무엇을 먹을까? 가 아니라 먹을 것이 없어 죽을 것 같다.
창조주신께서 나에게 재정의 넉넉함을 주시지 않으시면
무엇을 입을까?가 아니라 입을 것이 없어 추운데 얼어
죽을 수도 있다.
너희들더러 걱정하라 마라가 아니라
"걱정하지 않게 하시고" "걱정하게 하시고"
그 모든 것의 주권자가 창조주신이시다.
그렇게 되게 하신다 이시다.
그러니 내가 가난한 것이 복이 아니니,
내가 먹을 것이 없어 걱정하는 것이 복이 아니니,
내가 돈이 없어 쩔쩔 매는 것이 복이 아니니
나의 성품이 어때서 창조주신께 복을 못 받는 것인지
빨리 자기의 성품을 뒤져봐라. 옳지 않은 것이 있는지.
♥그의 의
(마태복음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아멘.
‘성경’은 전 인류적으로 온 세상 적으로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내리시는 주권자의 법의 말씀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 ‘그의 의’
라고 했다고 하늘나라나 천국이나로만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만 해도 안 된다.
게다가 ‘교회’ 라고만 해도 안 된다.
교회 일이 먼저고 주의 종이 시키는 것이 먼저라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인 교회 일을 하고 그러면
하나님은 또 전적으로 우리 세상 일을 해주시고 하는 것 아니다.
교회 일을 전적으로 해야 하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하고,
세상에 나가서 학교도 다녀야 하고, 직장도 다녀야 하고,
사업도 해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가정에서 주부의 일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자기 처소에서 자기 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교회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세상의 일은 사탄의 일이 절대적으로
아니다. 그 어느 일이든 오직 창조주신의 일이다.
교회 일도 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지만
그것도 창조주신께서 시키신다.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도록.
창조주신의 일을 해도 교회 일을 해도 내가 시끄럽고
내 몸이 시끄럽고 내 가정이 시끄러운 것은 잘못된
것이다. 잘못한 것이다.
내가 교회 일을 하느라고 남편을 분노하게 하지 말라.
주권이 무너진 것이다.
그것이 교회에 나와야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고, 교회 일을 해야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고, 주의 종이 시키는 것을 순종해야 복을 받고
구원도 받고 천국도 가고 하는 것처럼 가르쳐서 그런 것이다.
가정이 시끄러우면 안 된다.
‘구원’은 이 땅에서의 나의 어떤 믿음과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창조주신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이므로 교회의 어떤
목적으로 쓰이면 안 된다.
정말 창조주신을 믿어야 하는 것이라면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것이므로, 꼭 교회에 나와야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가정이 시끄럽더라도 남편이 분노하더라도 무시하고 나와서 울고 불고
기도드려야 제대로 된 신앙생활이라고 가르치면 안 된다.
그가 천천히 나오더라도, 그가 한 달에 한번 밖에 나오지 못하더라도
조용히 기다려주면 남편과 같이 나올 수도 있는데, 잘못된 교회 정치를
하다보면 교회도 시끄럽고 가정도 시끄럽게 된다.
이런 것이 교회 일을 시킬 사람이 없고 예배를 드릴 사람이 없고
헌금을 낼 사람이 없고 나의 설교를 들을 사람이 없고, 무슨 프로그램도
돌려야 하고, 나의 교인 수가 모자란다는 생각에서 끌어다 앉히려고
하는데 그것은 좋은 목회 정치는 아니다.
교회 가서 몇 시간이고 기도만 하는 삶보다 창조주신의 성품을 발휘하고
사는 삶이 축복을 받는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를 가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가정의 주권은 남편이다. 아버지다.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가정이 시끄럽고 싸우고
파탄 나고 별거하고 이혼한다.
아무리 교회 일을 해도 남편의 주권, 아버지의 주권을 무너뜨리면
그 가정도 시끄럽고 싸우고 이혼하고 죽고 한다.
‘창조주신’ 이라는 단어는 창조주신 본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신의 올바르신 ‘성품’을 말하는 것이며,
사람은 그 창조주신의 좋으신 성품을 발휘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며,
창조주신의 성품을 나타내고 사는 것이 결국엔 사람답게 사는 것이며,
사람들에게 칭찬 받고 존경받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사는 자에게는 육의세계에서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신다는 것이다.
먹을 것 걱정하지 않고 입을 것 걱정하지 않고 목숨이 끊어질까
걱정하지 않게 해주신다. 그래서 이 땅에서 너도 천국 같은 삶을
살게 하시고 너로 인해 남도 천국 같은 삶을 살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염려
(마태복음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아멘.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 …
사람들의 인생은 기쁨과 즐거움보다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더 많다.
그런데 창조주신을 믿으니 창조주신께 염려를 다 맡겨
버리고 염려를 안 하려고 한다고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염려도 되고 걱정도 되고 근심도 된다.
왜냐하면 그 염려 근심 걱정? 창조주신께서 너에게 하라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어떤 행위에 대해서 “하라” “하지 마라” 하는 것은
내가 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되고, 내가 사기를 치지 않으면
되고, 내가 싸우지 않으면 되고,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되고, 내가 악한 일을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뜬금없이 돈이 없다든지, 그래서 먹을 것이 없다든지,
자녀까지 배고프다고 울고 있으면 근심 걱정에 꽉 차 있을
수밖에 없다.
당장 지금 돈이 들어온 것도 아니고 나올지 말지 모르는 월급을
기다리고 있다면 더욱 걱정이 된다. “월급이 나와야 할텐데…”,
남편이 차를 몰고 어디 멀리 갔다고 하면 사고가 나지 않을까
염려가 될 것이고 하는 내가 어쩌지 못하는 근심 걱정 염려가
있는데 이런 것은 내가 한다고, 내가 하지 않는다고 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도 창조주신께서 나에게 해주시는 계산이시다.
염려를 하지 않게 해주시는 것, 근심을 하지 않게 해주시는 것,
걱정을 하지 않게 해주시는 것, 그날 그렇게 걱정스러운 문제가
해결되어서 내일을 근심으로 맞지 않게 해주시는 것,
그런 모든 것을 창조주신께서 계산하신다는 것이다.
♥생각대로 팅
(마태복음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아멘.
광고카피가 생각난다. 완전 ‘생각대로 팅’ 이다.
구할 때 구해지고, 찾을 때 찾아지고, 문을 두드릴 때마다 열려지고,
구하는 사람마다 다 받을 것이고 찾는 사람마다 다 찾을 것이고,
두드리는 사람마다 다 문이 열릴 것이니 말이다.
이 말씀만 붙들고 쓰고 외우고 늘어지면 안 된다.
무조건 기도한 대로 다 된다가 아니다. 무조건 기도만 하면 응답을
다 받는다도 아니다. 창조주신은 우리가 기도한 대로 무조건
응답하시고 축복해 주신다고 하면 안 된다.
너는 너의 할 일을 잘 해라.
너는 너의 올바른 성품을 많이 발휘하고 살아라.
그러면 창조주신께서 구해주시고 찾아주시고 문을 열어 주실 것이다.
무언가 찾아지면 찾고, 구해지면 구하고, 두들겨지면 두들기고,
기다려야 하면 기다리고.
이 말씀도 하나님의 판결문이신데, 내게 무언가를 주실 때
창조주신께서 구하게 하시고 주시는 것이다.
‘구하는 것’ 이라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도’ 라는 것을
통해서 할 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창조주신께 기도를 드리고 사는 것이
아니므로 구할 수 있는 다른 매개체가 있는데 나의 입에서
나오는 ‘소원의 말’들이다.
창조주신을 믿으나 믿지 않으나 각종 소원을 이루기도 하고
이루지 못하기도 하고 사는 것이다.
창조주신께서 누군가 특정 인물만 다스리신다고 생각하면 정말
큰 오산이다. 창조주신은 전 인류적 온 인류적으로 다스리신다.
창조주신 외에 사람을 다스리시는 존재는 그 어떤 것도 없다.
사람이 그 사실을 믿냐 안 믿냐 이지만 창조주신은 상관하시지
않으신다.
사람이 소원이 생기는 것은 어떤 정보를 통해서 알 수도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들을 수가 있으며, 나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을 때는 나의 입으로 시인하게 하신다.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어” “무엇이 생겼으면 좋겠어”
“어떻게 됐으면 좋겠어” “그 직장에 들어갔으면 좋겠어”
“무엇을 샀으면 좋겠어” “무엇을 먹었으면 좋겠어” 라는
온갖 소원들이 있는데 이런 것은 어떤 ‘남북통일’ 같은
큰 소원은 아닐지라도 나의 생활에 필요한 소원인 것이다.
그런 다양한 삶 속에서 각 사람에게 필요한 것들을 듣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마음이 가게 하시고 추진되게 하시고 만나게
하시고 하시면서 살 길을 인도해 주신 것이다.
“나는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어” “나는 국회의원이 됐으면 좋겠어”
“나는 교수가 됐으면 좋겠어” “나는 의사가 됐으면 좋겠어”
“나는 판사가, 검사가, 변호사가 됐으면 좋겠어” 라는 소원이나
꿈들이 있는데,
학교에서도 보면 “너는 이 다음에 무엇이 되고 싶으냐?” 라는
질문을 아이들에게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동안 보고 듣고
부모들의 말을 듣고 있었던 대로 무엇이 되고 싶다고 쓰기도
하고 발표도 한다.
큰 꿈을 발표하면 대단하다고 하고 칭찬하지만,
작은 꿈을 발표하면 실망하고 꾸중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다 그렇게 어릴 때 발표한 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크면서 바뀔 수도 있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 하고
싶어서 방향을 180도로 틀어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신께서 그렇게 구하게 하시고 주신다.
교회에서만 구해야 대박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내가 구하지 않았는데 알게 해주시고 주시는 경우도 있으시다.
내 주변에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정보가 하나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하게 하시는 경우도 있으시다.
정말 창조주신께서 하게 하신다.
직장이라는 것을 구할 때나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을 구할 때나 무언가
갖고 싶은 것을 구할 때, 내가 직접 구하러 다니기도 하고, 직접 찾으러
다니기도 하고,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기도 하고, 그런 수고를 하고 나서
결과물을 얻는 경우가 다반사다.
기독교인들은 말은 그렇게 한다.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하게 하셨죠”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죠” 라고.
그런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래도 자기가 그것을 얻기 위해
형제에게 전화를 했고, 친척에게 전화를 했고, 친구에게 전화를 했고,
직장 상사에게도 전화를 했고, 구하러 다녔고, 찾으러 다녔고,
문도 두드려 봤고, 이리저리 찾아다녔다. 그리고 얻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구해주셨다” 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창조주신께서 주셨다.
그런데 찾지 않았어도 일방적으로 오셔서 주시는 경우도 있으시다.
그런 것도 기독교인 중에 ‘기도’ 라는 것을 하는 자를 고르시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골라진 것이 ‘나’ 인지, 일반인 중에서도 골라짐을 당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보니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신께서 일방적으로 골라서
주시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겠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신을
안 믿는 사람들은 재수가 좋다고 할 것이다.
나는 구하러 다니고 찾으러 다니고 문을 두드리고 해서 얻은 것은
거의 없는 것 같고, 기도를 하게 하시고, 기다리면서 얻은 경우다.
나는 그랬다. 돌맹이 같았는데 모든 것을 내 뜻과 의지와 상관없이
창조주신께서 전적으로 하셨다.
(예레미야 24:7) "내가 창조주신인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창조주신이 되리라" 아멘.
제사를 지내던 무신론 집에서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는 어린 시절에
8살짜리가 무엇을 안다고 ‘제사’를 지내지 않게 하시고, ‘제사음식’을
먹지 않게 하시고,
창조주신이 누군지 성경이 무엇인지 모르는 시절에 ‘진화론’은 잘못된
것이라고 알게 하시고,
노래도 제일 못했던 내가 ‘성가대’에 충성하게 하시고,
어느 날 오른 손으로 지휘를 하게 하시고 그 일로 지휘 공부를 하고
이제는 성가대 지휘자로 있게 하시고,
신문사라는 정보에 대해 제로인 나에게 “신문사에 들어가서 편집을
배우면 되지 않겠니?” 라는 생각을 주시고, 일단은 총무과를 통해
신문사로 들어가게 하시고, 화상 편집을 처음 시작하는 때라 누구한테
배울 수도 없는데 이리 저리 돌아다니게 하시고, 장돌뱅이처럼 굴리시더니
지금은 편집국장 일을 하게 하셨다.
내가 지금까지 편집 일을 하기 위해서 처음 총무과로 들어가면서
이력서 써들고 간 외에 지금까지 누구에게 전화를 했다거나 부탁을
하거나 이력서를 써들고 다녔다거나를 하지 않아도 정말 기도만
전적으로 드리게 하시고, 기다리게 하시고, 창조주신께서 사람들을
통해 전화가 오게 하시고, 일거리를 지금까지도 연결해 주신다.
지난 2011년 8월 29일에는 갑자기 일방적으로 방언을 주시고
일방적으로 처절하게 죄성까지 회개시키시고, 가족이 동원된
무슨 훈련을 일방적으로 치루게 하시고, 지금은 또 글짓기도
최고로 못했던 나에게 몇 년에 걸쳐서 글을 쓰게 하신다.
나의 잘못된 기독교 우등생을 낱낱이 지적하신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나의 몸에 함께 계신다.
창조주신은 아주 무대포로 일방적이시다.
그렇게 누구에게 부탁하지 않았던 마인드가 ‘기독교 우등생’ 기질로
그랬던 것이다. “내가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에게 전화를 하고 부탁을 하고 청원을 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한다”
“내가 그래도 썩어도 준치인데 누구에게 손을 비비나!”
그런 것이 나쁜 성격인지 좋은 성격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나의 성격으로
봐주신 것인지 창조주신께서 직접 연결해 주신다. 그 대신 그 일의 수명이
길지는 않다. 그리고 돈을 그렇게도 넉넉하게 잘 안 주신다.
가늘고 길게 간다고나 할까.
그렇게 창조주신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와 담벼락을 쌓는 것이
좋지 않은 것인데 그동안 나는 깨닫지를 못했다.
기독교 우등생으로 사느라고.
♥때
(마태복음 9: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아멘.
창조주신께서 그 사람에게 어떤 상황을 응답해 주시려고 하실 때
그 사람의 마음에 생각을 주시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다" 라는
생각을 주신다.
각 사람마다 응답을 받는 상황이 다양하다. 다 똑같지가 않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것도 그냥 “눈을 떠라” 하실 때가 있으시고,
침을 뱉어 진흙 같이 만들어 눈에 붙여주실 때가 있으시고 그냥
만지실 때가 있으시다.
혈루증 여인도 12년 동안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나을 때가 되어
예수님을 만났는데, 창조주신께서 먼저 영의세계에서
“너는 그 예수의 옷 가에 손을 대거라 그리하면 나을 것이다”
라고 명령하신 것을 그 여인의 영의 듣고 행하게 되었는데,
이런 것이 “성령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여인은 12년 형벌을 받은 것이다. 어떤 계산에 의해서.
(마태복음 9:28~29)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아멘.
예수께서 맹인에게 질문하실 때 그냥 보이니까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벌써 그에게 나을 것 같은 믿음을 주신 것이다.
그들이 맥없이 그냥 있는데 무조건 고처주신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창조주신께서는 그 사람의 행위 값을 계산하셔서 때리시는 때가 있으시고,
그 때리신 것이 끝나는 싸매시는 때가 있으신데 그 싸매신다는 것이
그 사람의 징계가 끝나는 것이다.
그런 때는 나을 것 같은 믿음을 주신다.
무언가 될 것 같은 믿음을 주신다.
예수 생존 당시야 예수를 직접 만나는 것으로 말씀하셨지만,
지금은 예수님은 안 계시는데 어디 가서 예수를 만날까?
꼭 교회에? 아니면 이스라엘에?
예수신은 영의세계에나 육의세계에나 온 인류적으로
전 인류적으로 어느 공간이든 상관없이 계시므로 내가 있는
장소에서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
나을 것 같은 믿음과, 잘 될 것 같은 믿음과,
응답 받을 것 같은 믿음과 함께.
창조주신을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다.
♥실족
(누가복음 17:1~4)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아멘.
성경은 전 인류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실족하게 하는 것을
기독교인이 기독교인에게 시험 들게 해서 실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누군가이다.
누군가 나를 실족하게 하고 너를 실족하게 한다는 것이다.
‘실족’이 무엇인가 보니 “네가 나에게 잘못을 하는 것” 이라고 한다.
너는 나에게 잘 못하는 일이 없을 수가 없다.
반대로 나는 너에게 잘 못하는 일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서로가 서로에게 잘못을 저지르면서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의 잘못을 ‘경고’하거나 ‘책망’하거나 할 의인들이
아니다.
경고하라고 했다고 마구 경고해댔다가는 경고한 자가
더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책망하랬다고 마구 책망해댔다가는 책망한 자가
더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자기가 더 나쁜 일을 당하게 된다.
우리는 경고하거나 책망할 자격이 없다.
그냥 “그의 잘못을 안다” 정도일 뿐이고,
그가 나에게 정말 잘못 했을 때는 호통 쳐도 될 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호통 치면 오히려 안 된다.
어느 정도 잘 타이르고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용서해주면,
나중에 내가 누군가에 잘 못했을 때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용서함을 받게 된다.
그런데 누군가 나에게 잘못했다고 했을 때 내가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에게 실족죄가 쌓이게 하는 것으로, 그 잘못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2: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아멘
예수님께서는 그 사실을 아시기 때문에, 그 상황을 아시기 때문에,
용서 하지 않는 잘못의 화가 얼마나 큰지 아시기 때문에
누가 나에게 잘못을 하고 돌아와서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하거든 하루에 일곱 번을 잘못했을지라도 용서해
주라시는 것이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다 용서 안하면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져 죽을
만한 화가 나에게 임한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가 살면서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는다.
예수님께서 70번씩 7번을 잘못했어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쟤가 나에게 70번씩 7번을 잘못하고 산다면,
나도 쟤에게 70번씩 7번을 잘못하고 산다는 것이다.
상대성으로 생각해야지 나만 70번씩 7번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서로 똑 같이 살기 때문에 서로 상계되어야 한다.
서로 상계되어야 하기 때문에 용서를 안 해주고 꿍하고 묶어놓고
있는 자가 혼나는 것이다.
정말 ‘용서’를 잘해주게 되면…
‘미워할 마음’이 생기지를 않는다. 싫다는 마음이 생기지를 않는다.
‘큰 소리’를 내지 않게 된다. 그러면 험담할 마음과 이간질 할 마음이
생기지를 않는다. 이상한 눈짓과 이상한 표정을 짓지 않게 된다.
‘화’를 낼 일이 없어진다. ‘분’까지 낼 일이 없어진다.
‘싸움’까지 갈 일이 없어진다. ‘폭력’까지 갈 일이 없어진다.
‘살인’까지 갈 일이 없어진다.
용서를 잘 해주면 사랑할 마음만 생긴다.
그래서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원수라고 해도 나도 누군가의 원수이기 때문에.
70번식 7번은 무조건인 것이다. 숫자를 세지 말라.
(마가복음 11:25)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아멘.
“우리가 우리에게 잘 못한 것을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이 '주기도문' 이라는 것을 회의가 끝나거나 예배가 끝났을 때
형식적으로 해버리고 마는데,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내가 누군가 잘못한 것을 용서해 주지도 않아놓고 매번 형식적으로
“제가 저에게 잘 못한 사람을 용서해 준 것 같이 저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라는 기도인데, 정말 내가 용서해 주면서 사는지, 뒤끝조차 없는지
떳떳한지 살펴야 한다.
주기도문을 습관적으로 하지 말라.
자신 없으면 목사도 하지 말고 성도도 시키지 말라.
염불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주기도문을 염불 외우듯이 하지 말라.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배웠지만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하지만 이 이웃의 흉허물을 ‘용서’만 잘해줘도
‘사랑’이 싹트게 된다.
흉허물을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를 해주다보니,
흉 볼일이 없어지고, 미움도 없어지고, 논쟁도 없어지고,
다툼도 없어지고, 싸움도 없어지고, 폭력도 없어지고,
살인도 없어지는 것이지, 이런 것들을 내가 안 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은 더 힘들다.
용서하자 그리고 나의 잘못도 용서를 받자.
용서를 잘 해주면 ‘사랑’의 결과물이 나오게 되고,
용서를 안 해주면 ‘악’의 결과물이 나오게 된다.
♥자랑
(야고보서 4:14~17)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아멘.
우리는 창조주신을 향하여서 무언가 해야 한다 하면 안 된다.
우리는 내가 창조주신을 향하여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창조주신께서 하라고 하셔서 하는 것이다.
내가 사명이 없다고 죄스러울 것이 아니다.
내가 은혜가 없어서 죄스러울 것이 아니다.
내가 믿음이 없어서 죄스러울 것이 아니다.
내가 은사가 없어서 죄스러울 것이 아니다.
내가 성령 충만하지 못해서 죄스러울 것이 아니다.
“불 받아라” “성령 받아라” 라고 외쳐서 받는 것이 아니다.
무슨 공을 던지면 받고 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신에 관련해서는 신께서 주시는 대로 하는 것이다.
믿음을 주시면 주시는 만큼, 은혜를 주시면 주시는 만큼,
은사를 주시면 주시는 만큼, 사명을 주시면 주시는 만큼,
성령을 주시면 주시는 만큼 나는 발휘하고 살면 되는 것이다.
창조주신을 믿으나 믿지 않으나 전부 신께서 관리하시고
다스리시는데, 신을 믿으나 믿지 않으나 자기들의 선함과
선하지 않음으로 ‘상 값’과 ‘죄 값’이 계산된다.
그런데 신을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 라는 것을 주시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고, ‘은사’를 주시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고, ‘믿음’을 주시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고, ‘사명’을
주시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고, ‘성령’을 주시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고, ‘능력’을 주시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신다.
좋은밭, 돌짝밭, 길가밭, 가시덤불밭으로 돌리신다.
그런데 교인들 편에서는 내가 ‘은혜’를 잃어 버린 것 같고,
내가 ‘믿음’을 잃어 버린 것 같고, 내가 ‘은사’를 잃어 버린 것 같고,
내가 ‘능력’을 잃어 버린 것 같고, 내가 ‘사명’을 잃어 버린 것 같고,
내가 ‘성령’을 잃어 버린 것 같다.
교회는 교회로서의 복이 있다. 그 목사의 복도 있다.
그 교회의 값으로 계산된 것들이 그런 식으로 나타난다.
창조주신께 향하여서는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창조주신께 ‘안개’ 정도에 불과하다.
안개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가 없다.
그래서 신께서는 그런 것은 죄로 묻지 아니 하신다.
신께 하는 것은 신께서 주시는 만큼만 하는 것이지,
내가 받은 것도 없는데 해야 된다고 교육받아서 했다가는
시험 들고 잘못되기도 한다. 내가 난척하고 들고 뛰면
오히려 눈총도 받고 미움 받고 핍박도 받는다.
자랑죄에 다 걸려든다.
창조주신은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물으신다.
이 ‘선’ 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행하는 것이지,
사람이 신께 ‘선’을 행하고 안하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신께 선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오만불손이다.
종교는 종교주들의 복에 의해 그 교인들의 경제, 은혜,
은사, 사명, 능력, 성령, 사랑, 믿음 이런 것들을 빼앗긴다.
♥긍휼
(이사야 40: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아멘.
왕과 티끌 같은 백성관계에서 대통령과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을 수 있는 수평관계로, 선진국과 노예 족과의 관계에서
같은 사람의 수평관계로, 주종관계에서 수평관계로.
그렇다고 무작정 막무가내로 수평관계라고 방종하면 안 된다.
가정을 이끌어가고 어떤 단체를 이끌어가고 기관을 이끌어가고
회사를 이끌어가고 나라를 이끌어 갈 때 상하관계는 형성된다.
창조주신께서도 "상전에게 이렇게 하라" "종에게 이렇게 하라"
하셨다. 무조건 맞 먹어라가 아니다.
그런데 ‘예수’ 이름을 잘 못 거들먹거렸다가는 ‘검’이 일어나는데,
분쟁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고 단절이 일어나고 질병도 일어나고
가난도 일어나고 통곡이 일어나고 사고도 일어나고 전쟁도 일어나고
죽음도 일어난다.
예수가 원하시는 ‘좋은 성품’을 드러내고 사는 것은 칭찬을 듣지만,
‘예수 이름’을 잘 믿고 있다는 것을 자랑 삼으면 오히려 매를 맞는다.
내가 ‘의인’ 이라고 착각하면 ‘정죄’를 일삼지만,
내가 ‘죄인’ 임을 깨달으면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정죄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불쌍히 여기게 된다.
(마태복음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아멘.
(마태복음 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아멘.
예수신께서 원하시는 ‘긍휼’의 성품을 발휘하고 살면
이런 ‘검’ 들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화평’ 이 일어난다.
창조주신께서 성경에 사람이 사람에게 대하여 ‘이렇게 하라’
‘그렇게 하지 말라’ 하시는 말씀들은 아주 평범한 말씀일지라도
그렇게 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가 아니라,
그렇게 하고 안 하고의 대가가 반드시 따라온다.
축복이든 징계든.
모세가 가나안땅에 못 들어간 것이 신께 대들어서가 아니다.
사람에게 소리치고 잘 못해서이다.
예수는 창조주신께 대한 ‘목숨 걸고 믿음을 증명’
‘목숨 걸고 예수를 시인’ 해야 하는 고차원적인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것을 원하신다.
사람이 신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용서함을 받는다.
신께서 아예 모르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신자들이나 종교인들이나 그냥 그대로 사는 것이다.
예수님도 사람이 창조주신이신 예수께 잘 못하는 것은
‘몰라서 그러는 것’ 이라고 아예 용서해 버리고 가셨다.
(누가복음 23:34) “이예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 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 새” 아멘.
창조주께서 전 인류적으로 알게 하실 수가 없으셔서 그럴까?
아니다.
신께서 일방적으로 모르게 하시고 가시는 인생이라서 그렇다.
알게 하셔도 일방적으로 일부 사람에게만 알게 하신다.
왕 시대에도 보면 그 왕의 백성이라도 누구는 왕의 얼굴도 뵙고
누구는 왕의 이름도 알고 누구는 왕과 대면하여 얘기도 하고
토론도 하고 정치도 했지만,
누구는 왕의 얼굴도 모르고 왕의 이름도 모르고 왕을 대면하여
본 적도 없지만 그냥 그 왕의 백성으로서 일방적으로 다스림을
받았을 뿐이다.
창조주 신이 일방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창조주신은 일방적이시다.
현대의 사람이 로봇을 일방적으로 만들어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비유하면 될까?
신은 일방적이시지만 사람이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는
‘긍휼’ ‘서로 불쌍히 여김’ 이다 … 사랑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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