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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일본 평화발자국
“나가사키 평화발자국”
2025년 7월 10일(목)~13일(일) (3박4일)
2014년부터 평화발자국을 시작한 부산평통사는 2016년부터 일본 평화발자국에 나섰다. 한미일동맹, 한반도와 동북아 비핵화를 위한 일본 평화운동과의 연대이며, 자주와 평화, 통일 실현을 위한 보폭을 확대한 과정이다.
2016년에는 나가사키와 사세보를, 2017년에는 나가사키, 사세보, 이와쿠니, 히로시마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2020년에는 고베 평화발자국을 진행했다.
2016년 일본 평화발자국 기록 : https://m.cafe.daum.net/bsspark/k2ar/39?searchView=Y
2017년 일본 평화발자국 기록 : https://m.cafe.daum.net/bsspark/k2ar/58
2020년 일본 평화발자국 기록 : https://m.cafe.daum.net/bsspark/k2ar/107
일본으로의 네 번째 평화발자국은 원폭 80년을 맞아 나가사키로 진행했다. 7월 일본지진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상황에서, 40도를 넘는 폭염이 시작된 악조건을 딛고 청년 네 사람을 포함하여 아홉명이 참가했다.
7월 10일(목) 저녁 국제여객선을 타고 출발하여 11일에는 군함도와 노모반도 해난사고 희생자 비와 오카 마사하루 자료관을, 12일에는 폭심지와 나가사키 평화공원, 기념관, 추모관을 돌아보았다.
2025 나가사키 평화발자국 취지
올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지 80년이 됩니다. 미국은 소련이 참전하게 되면 2차 대전의 성과를 독차지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소련이 일본에 상륙하기 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했습니다.
핵무기는 재래식무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 피해가 엄청납니다. 모든 것을 녹이고 파괴하는 열과 폭풍 뿐 아니라 방사선에 의한 피해는 대를 이어 유전됩니다. 인류를 ‘멸종위기종’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핵무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위협하는 것은 국제법적으로 불법이며, 평화를 바라는 모든 인류는 핵무기 사용과 위협에 반대합니다.
1945년 핵무기 투하는 일본 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지민으로 일본에 강제동원된 조선인에게도 참혹한 피해를 안겼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폭당한 사상자는 약 70만 명으로 알려져있는데, 이 중 10만명이 조선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실이 유엔에 알려진 것은 2015년이며,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인” 중에도 피폭자가 있다고 최초로 언급한 것은 2016년이었습니다.
한국인 피폭자들은 피폭 당시에도 식민지민이라는 이유로 차별당하여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고, 해방이 되어 고국에 돌아온 뒤에도 정부의 외면, 사회적 냉대와 차별 속에서 자신이 피폭당한 사실조차 숨기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한국인 피폭자들을 지원하고 돕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평통사는 원자폭탄을 투하한 미국에게 사죄와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피폭자들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2026년 뉴욕에서 국제민중법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 평화발자국은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문제를 원자폭탄이 떨어진 나가사키 현지에 가서 실감하고, 미국이 원폭 투하에 대한 사죄와 배상에 나서도록 하는 활동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일정으로 마련했습니다.
당시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나가사키에서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고,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도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80년 전 원폭투하로 인한 희생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입니다.
북한이 미국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자신도 핵무력을 강화하고 있는 데다가, 한국은 미국과 함께 동맹을 맺고 미국의 핵자산으로 북한을 위협하는데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북 대결을 중단하고 전쟁의 위기를 가시지 않으면 언제 다시 한반도에 핵전쟁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1950년 일어난 한국전쟁은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끝이 납니다.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핵위기, 핵전쟁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번 여정이 한반도의 평화를 이루는 소중한 발걸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군함도 이야기
나가사키는 미쓰비시 조선소를 비롯해 수많은 군수산업 기지들이 자리했던 곳입니다. 당시 세계 최대의 전함이었다는 ‘무사시’를 제조한 곳이 이곳 조선소였고, 이를 군함이나 함정이 사용한 어뢰를 제작한 곳도 미쓰비시의 병기 제작소였습니다. 미쓰비시 중공업사사(社史)에는 여기서 만들어진 어뢰가 진주만 공격에 사용되었고 7,343개의 어뢰가 만들어졌다고 적혀있습니다. 미국은 이곳에 1945년 8월 9일 원자폭탄을 투하합니다.
나가사키는 미쓰비시 조선소를 비롯해 수많은 군수산업 기지들이 자리했던 곳입니다. 미쓰비시 조선소, 제강소, 병기 제작소 등에서 노역을 착취당하던 조선인 징용자의 규모는 최대 8천명에 달하며 군함도에는 500~800명이 있었습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그 피해를 복구하는 일에도 동원되었습니다.
하시마는 지하 1km까지 파내려간 해저 탄광입니다. 10m 높이의 콘크리트 제방이 담장처럼 섬을 에워쌌는데, 일본 광부들에게는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를 제공받은 근대식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하시마 탄광은 최전성기인 1941년에는 41만 톤의 석탄을 캐냈다고 합니다. 1960년에는 총 거주자가 5,300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섬이었던 하시마. 조선인들에게 이곳은 처절한 감옥이었습니다. 이곳까지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은 소모품이었고, 노예였습니다.
하루 12~14시간, 가장 힘든 노동에 동원되어 지옥같은 생활을 하던 조선인들은 대부분 살아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철저히 은폐하고 “문화유산”으로 이 섬을 유엔에 등재시켰습니다. 일본인 해설사는 자신의 문명을 자랑스레 선전했습니다. 동아시아 민중들을 압살한 가해자로서의 모습을 감추고 역사를 왜곡한 일본의 생얼굴입니다. 일본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또다시 미국의 손을 잡고 아시아에서 패권을 휘두르기 위해 몰두하고 있습니다.
군함도에서는 일본 안내자들이 현수막을 들고 사진을 찍으려는 평통사 참가자들을 방해하여 이에 항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 7일 프랑스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한국 정부가 제안한 '2015년 메이지 산업근대화 시설 세계유산 등재 결정문 이후 후속조치에 대한 검토' 의제가 안건으로 다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일본은 10년 전인 2015년 7월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군함도 탄광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조선인 강제동원에 대해 설명하겠다고 공개 약속했지만 그 후속조치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오늘 군함도에서 벌어진 이 소동은, 일본 스스로 자신의 무책임한 처사를 의식한, 과도하고 민감한 대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재명 정부가 과거사 문제를 비롯한 한일관계를 자주적으로 올바르게 풀어나가기를 바랍니다.
노모반도 해난사고 희생자 비
나가사키현 노모반도 근처 남월명(南越名) 해안에 세워진 ‘해난자 무연불(無縁仏) 비’는 강제 동원된 조선인 탄광 노동자들이 도망치다 바다에 빠져 익사한 뒤 시신이 떠내려와 묻힌 것을 기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시마(군함도) 탄광으로 끌려간 조선인들로, 압박과 폭력을 견디다 결국 섬을 탈출하려다 바다에서 익사 등으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1986년 발굴 조사에서는 4구의 유해가 확인되었으며, 이들은 화장 후 비 아래에 다시 묻혔습니다. 이 사례는 개인 단위로 소규모이지만, 일제 강제동원과 그로 인한 인권 유린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강제노동 조선인 희생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됩니다.
기무라 선생이 제공한, 이 비에 관한 글을 소개합니다.
이 비석은 하시마에서 깊은 밤 바다를 헤엄쳐 필사의 탈출을 꾀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도중에 힘이 다해 결국 익사했는데, 그들의 떠내려온 시신을 이곳에 묻고 묘비를 세운 것으로밖에는 생각하기 어렵다. ... 시신을 인수할 사람이 없어 '연고자가 없는 사망자'로 처리된 것으로 볼 때도, 매장된 사람들이 하시마에서 강제 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들을 증명해준다고 생각한다... 깜깜한 밤 바다에 생사를 걸었을 그들의 고통, 그들의 소식과 귀국을 애태게 기다렸을 부모와 형제자매의 기도를 생각하면, 미쓰비시 광업의 인명 무시, 행정당국의 무사 안일주의를 불문에 부칠 수 없다. (다카자네 야스노리,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 209~210쪽.
오카 마사하루 자료관
이 자료관은 ‘나가사키 재일 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만든 오카 마사하루 목사를 기념하여 세운 곳입니다. 오카 마사하루 목사는 조선인 강제징용 실태와 원폭피해를 조사하고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옹호하는 데 평생을 바친 분으로, 나가사키 평화공원 안에 한국인 피폭자 추모비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셨습니다.
일본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고 운영되는 이 자료관에는 한국 사람도 잘 모르는 재일조선인들의 징용과 위안부, 그리고 피폭의 역사가 상세히, 구체적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오카 마사하루 목사님의 조선인들에 대한 책임과 애정은 우리를 부끄럽게 할 정도입니다. 앞서 돌아보았던 해난사고 유골이 발견되었을 때도 주민들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오카 목사님부터 찾았다고 합니다. 이 자료관에는 조선인 강제동원 상황과 나가사키에서 피폭된 조선노동자들의 명단 등 귀중한 자료들이 전시, 보관되어 있습니다.
기무라 선생은, 자료관에 전시된 인물 중에서 각별히 고 박민규 선생과 고 서정우 선생을 소개했습니다. 고 박민규 선생은 강제동원 되었다가 피폭되어 <나가사키 조선인 피폭자 협의회>를 결성해 활동한 분입니다. 피폭된 조선인들을 돕고, 증언을 수집하는 활동을 했는데, 그 증언 기록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이미 머리카락은 모두 불타버리고 없었고 몸 전체는 화성투성이였고 이미 구더기가 끓고 있기도 하고, 눈은 새빨개져서 반 정도 튀어나와 있었지요... 정말로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그래서 그를 교정에 옮겨 태우는 거죠.... 불꽃에서 뭔가 소리가 들려요. 소리를 내며, 그 소리가 보통 소리로 들리지 않아요. 불꽃의 소리가 다른 소리로 들립니다. "나를 죽인 것은 누구인가?" "나를 이런 곳으로 데려온 것은 누구인가!"....
고 서정우 선생은, 나가사키 피폭 한국인 존재를 사회적으로 처음 알리고 운동을 조직적으로 펼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기무라 선생은, 2023년에 한국 작가 김숨이 이 서정우 선생을 모델로 하여 <누구도 빼앗지 마라>는 소설을 썼다며 일독을 권했습니다. 그 소설 한 대목을 적어봅니다.
"그렇지만 말이야. 평화롭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건 너희들 미래 세대에 달려있어. 이게 내가 가장 하고싶은 말이야. 너희들이 희망이야."
나가사키 평화공원과 자료관
나가사키 평화공원은 우라카미 폭심지 북쪽 언덕, 형무소가 있던 곳에 위치해 있으며, 1955년 4월 1일 개장했습니다.
공원의 주요 시설로는 평화의 동상, 평화의 분수, 폭심지 공원,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들의 추모관과 평화기념관 등이 있습니다.
평화동상은 높이 9.7m, 무게 약 30톤, 조각가 기타무라 세이보(北村誠甫) 작품으로 1955년 공원 개장과 동시에 설치되었습니다. 하늘을 향한 오른손은 원폭의 무서움을, 옆으로 뻗은 왼손은 평화 향한 염원을, 감은 두눈은 피폭자들을 추모하는 의미를 담은 이 동상은 세울 때부터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 동상이 의미하는 것이 힘으로 평화를 지키려는, 즉 핵억지력으로 평화를 지켜려는 역설적인 의미의 동상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핵 피해국이라 하면서도 침략적 행보를 하나씩 준비하는 일본의 이중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상징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평화의 분수는 1969년 세워진 직경 18m 분수로, 물 한 방울마저 갈망하며 희생된 이들을 기립니다. 원자폭탄에 의해 화상을 당해 물을 달라고 외치다 죽어간 피폭자들의 명복을 빌고, 세계평화와 핵무기 폐기의 소망을 담은 비둘기 날개 모양의 분수가 춤추는 평화의 샘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나가사키 형무소가 있던 곳으로, 1933년에는 항일운동을 했던 백정기 선생이 수감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분수 주변에는 당시 9세 소녀 야마구치 사치코의 시적 묘사가 새겨진 비석이 있습니다.
폭심지 공원은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점 표식을 위한 흑색 화강암 기념비와 한때 흔적만 남았던 우라카미 성당 파벽이 남아 있어 과거의 상흔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폭심지는 나가사키 우라카미라는 곳입니다. 원래 계획은 우라카미 성당을 돌아보는 것이었는데, 폭염에 엄두가 나지않아 포기하고 사진만 찍었습니다. 폭심지로 가는 길에 우라카미 성당이 보이는 언덕 작은 공터에 올라 성당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라카미 성당은 원폭투하로 붕괴되었는데, 이는 원폭투하가 명백한 전쟁법ㅡ국제인도법 위반임을 보여줍니다.
국제인도법은 민간인과 전투원을 구별하지 않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종교시설에 대한 공격 또한 불법입니다.
이것을 의식한 미국은 붕괴된 채 보존하려던 나가사키 시를 압박하여 이 성당을 새로 지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성당에는 무너진 종탑과 두상이 없어진 성모마리아상이 남아있습니다.
일본시민들이 만든 조선인 위령비와 한국교포들이 만든 한국인 위령비
나가사키 평화공원에서 기념관으로 가는 길목에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가 서있습니다. 자칫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칠 정도로 비석은 조용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비석에는 ‘추도’라는 두 글자가 크게 써있습니다. 이 위령비는 오카 마사하루 목사의 주도로 일본 시민사회의 모금을 통해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 위령비 옆에는 나가사키에서 북한으로 돌아간 동포들을 기념하여 철쭉나무를 심은 작은 기념석이 놓여있는데, 재특회 등 혐한론자들이 철거를 요구하는 등 수모를 당한다고 합니다. 또한 재일교포들이 단결하여 추모행사를 치르지 못하는 등, 분단의 비극은 이곳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한국인이 세운 위령비는 재일동포사회가 약 30년의 노력 끝에 2021년에 세웠습니다. 높이 약 3m의 돌 비석이 원폭자료관 앞 평화공원 일각에 설치되었습니다. 한국 민단계 시민들의 요청으로 1990년대 초부터 일본 시민단체, 의회가 협력하여 세웠다고 합니다. 위령비에는 한글·일본어·영어로 “강제연행 및 징용되어 중노동에 시달리다 원폭에 희생된 조선인과 그 가족을 위하여”라는 명문이 새겨졌습니다.
부산평통사 청년들이 할아버지, 할머님들이 한을 풀고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드는데 나설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투하와 억제정책의 문제점
미국은 인류 사상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시작으로 핵 억제(deterrence) 정책을 펼치며 패권적으로 국제질서를 운영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개요
개요 | 희생자 수 | 피해 특징 | |
히로시마 |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군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가 우라늄 폭탄 ‘리틀보이’ 투하 | 약 14만명 (한국인 5~7만명) | 고열·폭풍·방사능에 의한 즉사와 장기적 고통 (피폭 후유증, 유전적 영향 등) |
나가사키 |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복스카’ B-29가 플루토늄 폭탄 ‘팻맨’ 투하 | 약 7만명 (한국인 2~3만명) |
미국은 원자폭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땅에 떨어트린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약 500미터 상공에서 원자폭탄을 터뜨렸습니다. 폭심지는 엄청난 고열로 순식간에 사람과 건물이 재로 변해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며 폭심지 주변은 폭풍과 열선과 방사선으로 시가지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핵 억제정책(Deterrence Policy)은 “상대방이 나를 공격하면 파괴될 것임을 알면, 누구도 핵전쟁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억제정책은 인류를 절멸시키는 무기인 핵으로, 파괴와 파국을 담보로 평화를 실현한다는 정책이라는 점에서 결코 허용할 수 없습니다.
핵무기는 그 특성상 전투원과 민간인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무차별적인 살상-대량학살을 정당화합니다. 핵무기는 사용 뿐 아니라 보유 자체가 위협이기 때문에 유엔헌장을 위반합니다. 유엔헌장 2조 4항은, 무력의 사용 뿐 아니라 무력의 위협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핵이 평화를 보장한다는 억제정책은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이 핵 개발을 정당화 할 수 있는 논리를 허용함으로서 핵 확산을 조장하고 군비경쟁을 부추기며 평화가 아니라 인류의 파괴를 부를 뿐입니다.
참가자들은 평화공원 옆에 있는 원폭 자료관(Atomic Bomb Museum)과 원폭 사망자 추도 평화기념관(Peace Memorial Hall)을 둘러보며 핵무기는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실하게 인식했습니다.
자료관에는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팻맨) 모형을 비롯하여 원폭 투하 순간부터의 피해 자료, 피폭 참상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에 징용되어 원폭 피해까지 입은 한국인도 언급되어 있었습니다. (히로시마 평화자료관에는 한국인에 관한 언급이 없습니다!)
한국 정부는 어떤가요! 한국인 원폭 피해자에 관한 변변한 자료관 하나 없이 80년을 맞고 있는 현실은 피폭을 당했다는 사실만큼이나 분통터지는 일입니다. 그나마 한국인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에서 2017년 합천에 자료관을 설치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자료관 건립을 약속했지만 아무 진척도 없는 상황입니다.
작년 부산 청년평화아카데미 후속으로 진행한 나가사키 평화발자국은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을 둘러보는 것으로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습니다. 살인적인 폭염때문에 일정을 축소하고, 청년들은 저녁식사를 한 후 자체적으로 정리모임을 갖고 영화모임을 잘 진행해보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모쪼록 이번 여정이 특히 청년들에게 평화와 핵없는 세상을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성원하고 격려해주신 회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기무라 선생의 인사를 전합니다. "더운 날씨 속에 고생 많았습니다. 여러분과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몸 조심하여 활동하세요. 모두에게 파이팅!!"
김천에서 참가한, 박석민 회원의 글을 마지막으로 첨부합니다.
부산 "평발".
누구는 "과거에만 매달려서는 미래가 없다"고 말하지만, 현재의 우리는 과거에 기반하고 있기에 과거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건 지금, 현재의 우리 몫이라 생각합니다.... 더불어 그 오랜 기간을 우리 역사와 함께 하시는 기무라 선생님을 특별히 기억합니다.
강제징용 현장, 나가사키 역사 기행에 부산평통사 회원들과 함께 하게 돼 고마웠습니다. 감사드려요.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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