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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침구(侵寇)로부터 보령의 백성과 땅을 지켜내 만세보령의 터전을 마련한 김성우 장군의 토왜행적을 연구한『김성우 평전』이 궁미디어(충남대출판문화원)에서 출간돼 세간의 화제다.
학계는 이 책이 왜구토벌사와 향토사를 새롭게 쓴 새로운 연구의 모범으로 충남의 왜구사와 역사를 재조명한 역작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보령의 일부 향토사가들을 중심으로 김성우 장군의 행적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본지는『김성우 평전』의 저자 김영모 교수와의 특별대담을 통해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를 집중 분석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1. 불사이군의 고려 충신 김성우 장군의 행적을 분석한 『김성우 평전』을 발간했는데, 김성우 장군은 어떤 사람인가?
-김성우(金成雨, 1327-1392) 장군은 고려 말 서해에 창궐한 왜구를 격퇴하고 이어서 보령지방의 왜구를 섬멸한 후 보령에 정착해 만세보령의 터전을 마련한 조선시대 수군절도사에 해당되는 도만호(都萬戶)로 이성계의 조선개창에 절의로 항거해 1392년 전적지인 보령 청라동에서 자결한 고려충신이다.
2. 그렇다면 일부 향토사가들을 중심으로 김성우 장군 행적의 부정적 견해에 대한 의견은?
-김성우 장군의 보령 토왜활동은 학계의 전문가들이 참여한 두 차례의 학술대회를 통해 학술적으로 이미 고증되었고, 장군의 묘비가 보령시 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령의 일부 향토사가들이 장군의 행적이 사서에 기록돼 있지 않다는 이유 하나로 장군을 계속하여 부정하고 있어 참으로 유감이다.
후대의 역사기록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오직 당대의 기록만을 고집하면서 여기에서 파생되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편협된 시각으로 시종일관 역사를 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그렇다면 사서가 모든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가? 이것은 역사에서 어불성설이다.
예컨대 우리나라 역사기록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삼국유사』나 서기 645년 90일간 당태종과 결투를 벌여 고구려의 안시성을 지켜낸 안시성 전투의 양만춘(楊萬春) 그리고 1374년 합포전투의 장장군처럼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기록이 당대기록에서 빠졌더라도 가까운 후대에 역사적 사실에 관한 객관적인 자료가 충분히 제시되고 있는 현상 또한 많다.
따라서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겐 사료비판을 통해 사실을 규명하려는 전향적 자세가 필요하다. 미시적 안목과 편견으로 역사를 보고 자신들의 주장을 여론화하는 일부 향토사가들의 역사관에 대하여 학계의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할 것이다.
3. 김성우 장군 행적이 사서에서 빠져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김성우 장군 행적의 이해를 위해서는『고려사』등 사서의 성격과 여말선초의 정치상황의 이해가 선결돼야한다.
『고려사』는 조선개창 후 59년 동안 5차례의 개수작업을 통해 1452년에 정인지의 이름으로 편간된 사서다. 그런데 이처럼 『고려사』가 오랜 시간 5차례의 개수작업을 거쳐 편간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개국공신들에게 혁명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고 고려멸망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사실의 왜곡이나 윤색, 폄하, 누락이 일어났고, 특히 공민왕 이후 고려 말 역사는 문제점이 많다는 것이『고려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개창세력들은 역성혁명에 반대되는 세력을 남겨두지 않았다. 예컨대 변안열 장군도 역성혁명에 반대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또 한 가지는 당시의 정치상황으로 1390년의 <윤이·이초사건>은 조선개창세력이 계획한 역성혁명반대파 숙청의 마지막 단계라고 학계는 평가한다.
그런데 이 사건의 주모자로 몰린 사람이 바로 김성우 장군의 6촌인 전라도 도원수 김종연(132?-1390) 장군이다.
이 사건으로 김종연 장군을 비롯해 측근인 목은 이색, 정지, 지용기 장군 등 30여 명이 유배되거나 옥에 갇혔다가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조선개창세력들은 그해 12월 김종연 장군의 사지를 찢어 각도에 조리를 돌린다.
이런 상황에서 김성우 장군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김성우 장군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선택하고 전적지인 보령 청라동에서 자결하여 고려에 대한 충성을 다한 것이다.
이처럼 김성우 장군이 사서의 기록에서 빠진 이유는 첫째, 『고려사』가 완전한 역사기록이 아니라는 점, 특히 혼란기 사서의 기록은 지방에서 일어난 모든 것을 다 수용하지 못한 영세함이 있고, 둘째, 김성우 장군의 가계가 조선개창세력과 대척점에 놓였던 정치적 입장, 셋째, 편찬과정에서의 고의적 누락이라고 본다.
4. 김성우 장군의 행적이 조선후기 지리지에서부터 구체화되는 것은 당시 광산김씨의 위세에 의한 조작이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이 또한 어불성설이다. 김성우 장군의 토왜행적은 현손인 김극성(1474-1540)이 1501년에 세운 증조 김남호 묘비(1501)에서 처음 확인된다.
김극성은 김남호의 묘비에서 장군의 토왜행적을 약술했고, 이후 건립되는 모든 묘비는 이 비문을 전거로 한다.
김남호 묘비는 ‘행적의 약술’이란 조선전기 비문기술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보령에서 가장 오래된 묘비로 사료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이다.
이후 지방지가 편찬되면서 보령현감을 지낸 정권(鄭權, 1629-1757)이 증보한『신안읍지』(1748)에 김성우 장군의 행적이 구체화된다.
말하자면 그동안 역사 속에 묻혀있던 김성우의 보령전적이 임진왜란 이후 자연스럽게 지역을 중심으로 공론화되었고, 지방지가 편찬되면서 구체화된 것이다.
그런데 김성우 장군의 행적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광산김씨가 이 읍지의 편간할 당시 위세를 이용하여 김성우 장군의 행적을 신격화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랬을까?
당시 보령현의 향권은 한산이씨가 주도했고, 『신안읍지』 편찬과정의 공정성과 내용의 객관성이 이미 밝혀졌기 때문에 이와 같은 주장은 한마디로 낭설에 불과하다.
이 읍지를 편간하면서 김성우 장군을 우상화하고 전적지명 등의 토왜행적을 인위적으로 동시에 만들어 장군을 신격화하는 것은 당시 보령현 향권의 구조상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대 사회는 선비로 불리는 사람들이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는 구조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후대의 기록에서 다소의 윤색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장군의‘보령토왜’라는 본질이 완전히 훼손되는 것은 아니며, 이를 검토하는 것이 역사학자 본연의 임무이다.
5. 현전하는 김성우 장군의 보령 전적지명의 특징은 무엇인가?
-지명은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형태의 그 지역 사실이 지명으로 표기된 것이다.
특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장군이 그 지역을 사패지(賜牌地)로 받아 정착한 경우는 역사적으로 비일비재하다.
김성우 장군의 전적지명의 특징은 왜구토벌과 관련된 지역으로 ‘군입리, 관암, 복병리, 불무골, 시루성, 의평리’ 등 해안선에서 청라동에 이르는 곳에 위치하며, 이 지역에 내외 후손들이 오늘날까지 세거해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왜구토벌과 관련된 사패지를 점유한 김성우 장군과 그 후손들이 전적지에 세거하게 되어 지명이 만들어진 것으로 이들 전적지명은 장군의 토왜활동에서 연원하는 것이다.
특히 관찬지리지인 『여지도서』와 『1872년 지방도』(「보령부지도」)에 표기된 이들 지명은 양란 이후 국방의 중요성을 국가에서 공인한 것이다.
이것은 현전하는 전적지명이 인위적으로 조작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한다.
6. 김성우 평전의 내용은 무엇인가?
-김성우 평전은 모두 4개의 장으로 구성돼있다.
1장은 장군의 왜구토벌에 관한 검토로 현전하는 각종 지리지, 금석문 등 사료를 분석하고 고려 말 정치상황이나 『고려사』를 검토하여 김성우 장군의 행적을 추적했다.
2장은 전라도 도만호 김성우 장군이 왜 보령으로 올라오게 됐는지, 내외후손들이 어떻게 보령에 세거하여 오늘에 이르게 됐는지를 연혼(緣婚)관계와 묘산(墓山)을 통해 분석했다.
3장은 보령왜구토벌에 관한 지리 지형학적 분석이고, 마지막장은 김성우 장군의 역사적 평가로 “김성우 장군이 왜구의 침구로부터 보령의 땅과 백성을 지켜내 만세보령의 터전을 마련한 불사이군의 고려충신”이라는 사실을 1,2,3장의 연구를 바탕으로 입증했다.
7. 김성우 장군의 보령 토왜 행적은 왜 누락되었는가?
-이것은 앞서 언급한 『고려사』등의 사서에 김성우 장군의 토왜행적이 빠진 이유와 연관된다.
사서엔 약 591회의 왜구침구가 확인되지만 이것이 완전한 왜구침구 기록이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견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경신년 왜구로 널리 알려진 1380년의 경우, 이 해에 왜구는 충남 서천의 진포, 비인, 보령과 이웃하고 있는 남포, 결성, 홍성, 심지어 청양까지 침구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보령만이 이 해의 왜구침구 기록에서 빠져있다.
잘 알려진 대로 보령은 고려시대 조운선이 개경으로 올라가는 중요한 길목으로 오늘날 중부화력발전소가 위치한 고만에 고려군의 수영이 있었다.
그런데 이 해에 서천에서 홍성, 청양에 이르는 보령 인근의 모든 지역이 왜구로부터 침탈당했는데 보령만이 유일하게 왜구침구에서 빠져있다.
그런데 1381년과 1383년에 대대적인 보령현의 왜구침구 기록이 확인된다.
이러한 모순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따라서 1380년 보령에도 왜구가 침구했고 김성우 장군이 청라 의평리 전투에서 왜구틀 토벌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오늘날 청라에 그토록 많은 전적지명이 전해져오는 이유이다.
하지만 이 해의 왜구침구 기록이 빠진 것은 앞서 설명한바와 같이 정치적인 이유로 인한 고의적 누락이나 삭제에 그 원인이 있다.
8. 『김성우 평전』은 그 동안 제기돼왔던 김성우 장군의 행적에 대한 의문이 하나씩 풀리게 된 결정적인 연구서로 향토사 연구의 모범이라고 학계는 평가한다. 『김성우 평전』발간의 의미를 어떻게 보는가?
-이 책은 그동안 논란이 돼온 김성우 장군 행적에 관한 제 문제를 1,2차 학술대회의 자료와 왜구토벌사, 고려사, 조선시대사상사, 민속학 등을 전공한 학계의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가며 집필하여 학술적으로 고증된 결과물이다.
왜 김성우 장군이 사서의 기록에 빠지게 됐는지, 왜 전라도 도만호 김성우 장군이 보령으로 올라오게 되었는지, 왜 조선전기 비문에 김성우 장군의 행적이 간략하게 기록돼있는지, 왜 김성우 장군 묘비가 그의 사후 160여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건립됐으며, 조선후기 지리지에 행적이 실리는지, 왜 김성우 장군이 불사이군의 고려충신으로 불리는지, 또한 21세기 보령에 살아가는 많은 성씨들이 어떻게 보령에 입향하여 오늘에 이르게 됐는지 등...
말하자면, 김성우 장군에 관한 모든 의문을 하나하나 사료, 금석문, 문집 등을 바탕으로 풀어낸 책이다.
예컨대, 왜 고만에 토정 이지함(가)의 묘소가 위치하는지, 왜 독정리에 천휴당 이몽규의 신도비와 묘소가 위치하는지, 왜 한양조씨, 원주원씨, 용인이씨, 능성구씨, 평산신씨, 안동김씨, 평강채씨, 용인이씨, 전주이씨, 함양여씨 등 많은 유력성씨가 보령 청라동에 입향하여 오늘날 보령에 살고 있는지의 전 과정이 이 책 속에 담겨있다.
9. 마지막으로 향후 『김성우 평전』이 어떻게 활용되기를 바라는가?
-이 책은 단순히 한 개인 또는 가문에 관한 평전이 아니다.
고려 말에 왜구를 토벌한 장군으로 만세보령의 터전을 마련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킨 한 충신(忠臣)의 행적을 고찰한 연구서이다.
말하자면 왜구토벌사와 향토사를 학술적인 토론을 거쳐 정리한 책이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국민들은 물론 특히 보령의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나라사랑 정신과 충절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이 책이 널리 읽혀져 왜구토벌사와 향토사 연구의 자료로 적극 활용됐으면 한다. |
첫댓글 보령 향토사를 한다는 사람들, 소위 향토사가들은 여전히 장군을 부정하고있습니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여론몰이를 하여 보령에서 장군에 대한 폄하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어찌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