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의 개념이 안고 있는 업>
욕계欲界: 물질의 세계라서 자연히 물질의 가치에 욕심을 낼 수밖에 없는 세계.
색계色界: 물질의 몸은 아직 버리지 못했지만, 물질에 대한 욕망 은 제거된 세계.
무색계無色界: 물질의 몸도 벗어버리고, 오직 정신만으로 이뤄진 세계.
이 셋을 삼계三界라 하는데 우리는 이중에서 욕계에 속해 있으니, 욕계의 속성은 비교적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색계·무색계는 정신적으로는 정교한 분류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인간이 유추하고 사유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수준의 세계로 구성된 삼계三界는 윤회의 범주에 속합니다.
아프리카 오지의 개미의 한 무리는 수십 만 년을 인간과 공존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 개미는 인간의
존재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럼 인간은 그 낯선 개미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가능합니다.
다만, 우리는 같은 개미류를 통해 그들의 무리가 우리가 알고 있는 개미의 특성을 상당 부분 공유한다는
확고한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 개미는 수십 만 년간 인간이 확인을 하지 않았어도, 땅 속에 개미집을
짓고, 우리 앞마당의 개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생존해 왔을 것입니다. 그 개미가 공중에 줄을
쳐서 산다면, 그 사실로 개미가 아닌 ‘거미’에 가깝지 않은가를 의심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논리적 추론법은 고도로 지적이고 기술적인 것입니다. 지적 기술력이 없는 개미가 인간을
이렇게 분석하지는 못할 것 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충분한 지적 능력으로 이런 기술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점차 발전시켜, 인간의 사유의 범주를 극도로 넓혀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유의 범주를 넓히는 방법을 가능하게 하는 1등 공신이 바로 과학과 과학적 사고입니다. 사유와
직관이 과학에 비해 보잘 것 없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부터는 과학을 배제한 사유와 직관이 과거와 같은
권위를 누리지는 못한다는 뜻입니다.
붓다시대에는 달은 결코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이라고 단정했을 겁니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달에 인간의
발자국을 남기고, 화성에서는 로봇이 작동하며 엄청난 자료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달과 화성 탐사는 물론
1977년에 발사된 보이저 1호는 태양계 밖을 벗어나 광활한 우주의 정보를 우리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이 창조주로서의 절대 자격을 의심받고, 거부되기 시작한 것은 종교인의 ‘사유의 힘’이
아닙니다. ‘지구가 천체의 중심’이라는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천문학 수준에서 멀리 벗어난 지금의 과학적
분석으로는, 성경에서 말하는 그런 하나님은 인정하기 참 곤란하다는 것이 점점 명백해지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려면 인간의 지적 활동을 잠시 억제하고, 창조의 역사가 4,000년에 불과하다는
말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과 구원, 성경의 문자주의적 해석은 과학적 양식을 갖춘 목사나 신부라면 그대로
믿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 세상일의 모든 선·악 의 판별도 결국 신의 몫이라 단정 짓는다면, 조금
삐딱한 인간이라면 제멋대로 세상을 살면서 행여 비난을 받게 되면 “그건 너 같은 인간이 판단해선 안 될
문제야”라고 우겨도 될 듯싶습니다.
중세와 달리 발전된 현대 신학은 성경을 은유와 의미의 함축으로 풀이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이건 제 사견이 아닙니다. 세계적 과학자라면 신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자기 전공에서
동료들에게 인정받는 연구 성과를 낼 수 없습니다. 세이건과 호킹, 도킨스 등은 그런 수준을 넘어
노골적인 반기독교적으로 대표 되는 과학자들입니다.
붓다의 위대함은 절대적 권위를 유지하고 있던 힌두이즘의 수많은 신들을 부정하고, 인간 지성 최고의
가치인 ‘자비’와 ‘깨달음’을 역설하시며, 그것을 전법하여 어리석은 중생들을 무명에서 벗어나게하신
‘인연’에 있습니다. 실제 붓다의 출현으로 과거의 모든 사상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붓다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붓다의 비판의 대상 중 핵심은 인도 동북부로 이주해 온 아리아 인들이 토착민을 장악하고 지배하기
위해 4계급제를 만들고, 다시 계급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업’과 ‘윤회’의 논리를 적극 활용한
베다와 바라문을 겨냥했던 것입니다.
인도를 침공해 지배계급을 이룬 아리아인들은 전생에 이미 바라문이나 왕족으로 정해졌다고 윤회를
이용하고, 토착민들에게는 전생의 업으로 천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확고한 사상적 멍에를 씌어 버린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정복자이자 지배자인 그들에게 “바라문은 태어날 때 부터 바라문이 아니다, 자신의 언행이
바라문다울 때 바라문이라 한다”라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라문이라는 정해진 업業은 없다, 계급제의 최고 지위는 업業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실제 붓다의 교단에서는 출가전 세속의 직업이나 지위, 재산이나 명예 등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출가 순으로 서열을 삼으셨습니다. 계급과 순위를 만드는 업은 인정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전생과 내생, 붓다께서 타파하신 계급제도 등은 업業이라는 최고의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
있었기 때문에, 무지한 대중들에게 그 업의 힘을 확대하고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여, 계급제가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도록 무려 1,500여년 동안 주입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지금이나 그 당시나
중생들은 자신이 이해될 만한 수준의 범주를 넘어서는 논리나, 자신의 집단을 해체시키는 논리가
내재된 사상은 쉽게 수용하지 못하는게 시대와 관계없는 중생의 속성입니다.
붓다는 업을 진행되는 행위나 행동으로 파악하지 않으셨습니다. 경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업과 과보,
윤회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 중, 아함경에 “돌을 호수에 던지면 가라앉게 마련이다. 네가 돌이
가라앉지 말라고 염원을 해도 돌이 가라앉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돌의 업業은 물에서는 가라앉는 것이니,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다”로 이해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설명해야 맞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까지도 업을 힌두교와 같은 의미로
해석하고, 또 스스로 업의 속박으로 귀속하려는 근본적 오류는‘종교는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만 숨을 들이마시고 냉정하게 내면의 이성을 발동시키면 2,500여 년 전의 한 종족의 생각을
지금도 그대로 진리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미신이고 맹신 아니겠습니까? 이것뿐만이 아니라 숱한
신앙적 맹신에 빠진 한국불교의 뒤죽박죽인 ‘통불교’를 일직선으로 재정립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 뒤죽박죽의 큰 원인제공자 중 하나인 업業을 붓다께서 정의하신 업으로 돌려놓지 않는 한 어떤
공부나 수행도 붓다의 길을 간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붓다께서 힌두이즘을 타파하시고 밝히신 업의
개념은 “연기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돌이 물에 가라앉는 사실이
연기적이듯)”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