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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책자 자료
부장공 충렬비 제막식 인사 말씀
이 자리에 참석하신 존경하는 이명흠 군수님을 비롯한 내외 귀빈
여러분께 충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참으로 뜻 깊은 날입니다.
우리 문중의 후예들로서는 부장공 할아버님께서 순국하신지 실로 456년
만에 이 분의 정신과 영혼을 현창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진작 부장공 할아버님의 정신을 기리는 이 일을 했어야 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실행하지 못하여 항상 죄송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일을 추진한 지 불과 1년여 만에 이렇게 훌륭한 충렬비를
건립하게 된 것은 우리 후손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성금을 아낌없이
쾌척해 주시고 부지를 희사해 주셔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특히 우리 역사의 여러 자료들을 검토하시어 손수 비문을 지어 주신
이명흠 군수님과 비석 전면에 예술적 필치로 글씨를 써 주신 화산 윤수옥
전 문화원장님께 후손들을 대표하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오늘날 풍요와 안녕 속에서 민족국가를 이루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 선현들이 애국 애족 정신으로
이 땅을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부장공 할아버님도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순국 선열 중 한 분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 어른의 애국애족 정신과 충혼을 기리고 따라야 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치신 희생정신,
왜구들의 침입에 분연히 달려 나가 싸우신 용맹정신,
적의 움직임과 전투력을 꿰뚫어 보신 예지력은 모두 평소에
닦으신 학문과 옛 선현들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늘 이 비석의 건립은 우리 장흥군민은 물론이고 모든 국민이
부장공 할아버님의 순국 사실을 기리고, 우리 모두가 이 훌륭한 정신을
길이 이어가야 한다는 교육적 취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뜻을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과 이 자리에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2011년 4월 30일
부장공충렬비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백낙홍
部將公 忠烈碑 除幕式 祝辭
시간이 가면 역사가 잊혀지기도 하지만 시간의 흐름 따라
잊어버리기엔 너무도 애석한 것들이 있습니다.
역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
시대적 소명을 실천하기 위한 그들의 몸부림이 바로 그것입니다.
선열들의 희생으로 지켜온 평화와 민주, 자유를 누리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질곡의 세월 속에 숱한 어려움과 간난을 이겨오면서
신명(身命) 을 바친 순국선열의 애국충정을 가슴에 되새기는 한편,
그들의 이야기를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전해줄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제막식은 더 의미가 깊습니다.
많은 분들의 노력과 정성에 힘입어 늦게나마 오늘 이렇게
우리고장의 충의열사인 부장공 충렬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갖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부장공은 서기 1555년 을묘왜변 당시 달량진(해남 남창)에서
장흥도호부 한온(韓蘊) 부사와 함께 왜적에 맞서 용감히 싸우다
순국하셨지만 공의 기개는 지역사회에 민족정신을 고취시켰고
이 지역을 의롭게 만들었습니다.
역사의 물줄기가 잘못 흘러갈 때마다 그것을 방관하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고 어떤 때는 목숨을 바치고
어떤 때는 감옥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물줄기를 바꾸어 온 지역이 바로 우리 장흥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이 땅을 의로운 땅이라 지칭합니다.
의향 장흥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 선현들과 후대의 튼튼한
징검다리가 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오늘 이 기념비에는 이러한 우리들의 다짐도 함께 담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의로운 땅의 군수로서 일시적이고 형식적인 행사나 예우에서 벗어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통해 역사의 고비때 보여준 순수한 열정,
치열한 의식이 높이 평가되는데 앞장서 노력하겠습니다.
끝으로, 부장공 충렬비를 세우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노력하여 주신
부장공충렬비 건립추진위원회원 및 성금 모금에 협조하여 주신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드리면서 오늘 이 자리를 통해
부장공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는 한편,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을
가늠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장 흥 군 수 이 명 흠
경과보고서
부장공 할아버님의 순국사실은 누대의 족보나 대동보, 그리고 전 향산군수
해평 윤영구님의 묘갈명 등에 실려 전해져 왔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후손들이
이 훌륭한 정신을 현창하기 위한 충렬비 건립을 감히 추진을 못했던 것은
충분한 자료를 찾지 못한 점도 있었지만 재정적 어려움이 더 컸었습니다.
2008년 기산팔문장전통문화마을 가꾸기 사업을 추진하신 당시 기산마을 이장이시던
종친 백광철님께서 금곡출신 김규정님과 조선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이신 백수인 종친님의
도움으로 부장공 할아버님의 충렬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국조오란록, 호남절의록,
장흥부지 등의 자료를 국립중앙도서관 등에서 찾아내심에 따라 백관인님 백성인님 백영식님 등
여러분의 제안으로 부장공충렬비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하게 되었었습니다.
2010년 2월 18일 안양에서 최초 예비모임을 갖고 발족한 추진위원회는 동년 3월 7일 장흥읍에서
종친들이 모여서 추진위원장에 백낙홍님, 고문에 백영식님 백성인님,
부위원장에 백낙순님 백태식님 백남송님 백도인님, 총무에는 저 백형권,
추진위원회 간사 겸 집전에 백광철님, 재무에 백남주님,
감사에 백관인님과 백진수님을 선정하고 그날 참석하신 회원님들이
솔선해서 추진위원 역할을 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충렬비를 세우는 데에 있어서 이명흠 군수님께서 흔쾌히 비문을 지어 주시었고,
윤수옥 전 장흥 문화원장님께서는 비문의 글씨를 써 주셔서
저희 가문으로서는 크나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라를 대신해서 부장공 할아버님의 충혼을 위로하는 숭고한 비문을 지어주신
이명흠 장흥 군수님과 충렬비에 글씨를 써 주신 윤수옥 전 장흥문화원장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인터넷 다음 기산마을카페 행사소식 코너에 격문을 써서 올리고,
종친님들에게 통문을 발송함과 동시에 모든 종친님들이 전화연락을 통해서
우리의 뜻을 밝힌 바, 현재 성금총액이 4,453만원이 답지하여 통장에 입금이 되었습니다
백남송님께서는 최초로 거금 일천만원을 쾌척해 주셨고,
백낙순님께서도 선뜻 오백만원을 쾌척해 주셨으며,
백도흠님은 본 부지 20평을 희사해 주시었습니다.
이 모두가 후손님들이 하나같은 열망으로 부장공 할아버님의 순국충렬사실의 현창을 바라는
심정이었기에 이루어진 결과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추진위원회 위원장님이신 백낙홍님께서 비석에 추진위원 명단을 일체 기록하지 말자고 발의하여
위원 만장일치로 결의 되었기에 경과 보고서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는 성금을 많이 내신분이나 적게 내신분이나 혹간 미쳐 못 내신 후손들 역시
조상님을 숭조하는 마음은 다 같은 데,
성금방명 이외의 이름을 새기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판단에서입니다.
특히
그동안 알게 모르게 애를 많이 쓰시고 고생해 오신 백낙홍 추진위원장님과 백광철 간사님
그리고 추진위원님들 또 성금을 보내주신 모든 종친님들께 대단히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리면서
경과보고의 말씀으로 갈음합니다.
2011년 4월 30일 부장공 충렬비 건립 추진위원회
총무 백 형권 올림
殉國烈士 部將公 白世禮 忠烈碑
수많은 충의열사가 우리나라의 반만년 역사를 이끌어 왔다. 나라가 외적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위급해 질 때 과감히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는 데 목숨을 불살랐던 선현들의 미덕은 높이 칭송하여 본받아 마땅하다. 그 중 우리 고장 장흥에는 부장공 백세례 열사가 계셔서 참으로 자랑스럽다.
부장공 백 열사는 서기 1505년 안양면 기산리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수원이며, 이름은 세례(世禮)요, 자는 화중(和仲)이다. 1555년(명종 10년) 을묘왜변 때에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순국하신 분이시다.
공의 아버지는 성균관진사를 지낸 문기(文麒)이며, 어머니는 광산(光山) 김(金) 씨 완(玩)의 따님이다. 할아버지는 진사 참봉 벼슬을 한 맹춘(孟春)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생원시에 합격하여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으로 사후에 호조참판(戶曹參判)의 직을 받은 회(繪)이며, 고조할아버지는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와 통훈대부(通訓大夫)를 지낸 녹수(祿守)이다. 5대조는 예빈부정(禮賓副正)을 지낸 운승(雲昇)으로 장수(長水)에서 장흥 기산으로 이주해 와 터를 잡으니 그 후손들이 여기에서 대대로 살아 왔다.
시조 우경(宇經)은 원래 당나라 소주(蘇州) 사람인데 신라로 건너와 벼슬이 광록대부좌복야(光祿大夫左僕射)에 이르렀다. 호는 송계(松溪)요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10대조 천장(天藏)은 고려 때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올라 수원백(水原伯)에 봉해지니 그로부터 후손들이 수원을 본관으로 삼았다. 7대조 장(莊)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에게 수학하였고 벼슬이 광정대부(匡靖大夫) 이부전서(吏部典書)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이른 성리학자였다. 그러나 조선 개국 후에 태조 이성계가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선비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하여 불응하자 충청도 해미(海美)로 귀양 보냈다. 이후 태종 이방원도 특명을 내려 조정으로 불렀으나 역시 나아가지 아니하자 이를 괘씸히 여겨 장수로 다시 유배를 보냈고, 14년 동안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하다 서거했다. 사후에 임금은 충숙(忠肅)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고 월강사(月崗祠)와 기양사(岐陽祠)에 배향되었다.
공의 부인인 숙인(淑人) 홍주(洪州) 송(宋) 씨는 사환(司環)의 따님으로 삼남 일녀를 낳았다. 장남 광성(光城)은 1561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사후에 기양사에 배향되었다. 차남과 삼남은 참봉 광위(光衛)와 광정(光晶)이요, 따님은 광산인 김충걸(金忠傑)에게 출가하였다. 후실 숙인(淑人) 진원(珍原) 박(朴) 씨는 감역관 유원(有遠)의 따님으로 세 아들을 낳았으니 광린(光麟), 광무(光茂), 광문(光門)이다.
공의 장손인 현남(峴南)은 정유란에 아버지를 잃고 너무 애통해 한 나머지 병을 얻었다. 2주기를 맞아 온 가족이 신위(神位)를 모시고 묘소에 가서 제물을 갖추어 곡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왜적의 무리가 나타나 먼저 현남의 장남을 죽이고 또 현남을 해쳤다. 이 때 그의 처 영광(靈光) 김(金) 씨는 칼을 두려워않고 시신을 껴안으며 스스로 자신을 은장도로 찌르니 왜적들이 깜짝 놀라 풀로 덮고 간지 사흘 만에 회생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임금이 정려(旌閭)를 내리도록 명하였다. 이 사연은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과 ‘장흥부지(長興府誌)’에 기록되어 후세에 전해 온다.
공은 날 때부터 건장하고 튼튼한 체격을 가졌으며 자라면서는 대담할 뿐만 아니라 지략까지도 뛰어났다. 항상 ‘소학(小學)’을 지니고 다니면서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 해야 한다.”는 도덕을 생활의 본으로 삼았다. 두 형과 함께 살면서 서로 화합하였고, 상을 당했을 때는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준행하였다. 묘막에서 시묘하면서도 ‘육도삼략(六韜三略)’을 독송하여 진법(陳法)을 깨쳤다. 그리하여 목사와 감사가 공을 지역의 장군 벼슬인 부장(部將)으로 천거하니 이를 기꺼이 받았다.
1555년(명종 10년)에 수십 척의 왜적선이 남해안의 여러 고을로 쳐들어오니 관군이 이들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역부족이어서 참패하였고 해남 남창은 적의 소굴이 되었다.
이때 전라병사(兵使) 원적(元績)이 “사태가 급하다. 백 부장이 아니면 남녘 백성이 모두 죽게 되었다.”고 장흥부에 알려 왔다. 그리하여 장흥부사 한온(韓蘊)이 공을 찾아가 전략을 의논하였다. 사태를 파악한 공은 급히 장흥부로 들어가 왜적의 정찰 행로를 끊고 적의 대세를 꺾기 위해 정예병 백여 명을 이끌고 전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미 광주목사 이모는 패하였고, 강진현감 홍모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릎을 꿇었고, 영암군수 이모는 도망쳤고 전라병사 원모는 옷을 벗고 항복하였다.
아아! 충렬이 어느 시대라고 없겠는가. 높은 벼슬에 올라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고서도 적 앞에 굴복하여 역사를 더럽힌 자는 지하에서라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인가. 공이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홀연히 나아가 맨손으로 왜적 수 백 명을 때려눕히니 적들이 감히 다시 나서지 못하였다. 공은 밤에 자지도 않고 병사들과 백성들을 위로하였는데, 그로부터 사흘 후에 또 왜적이 북을 치며 전투를 재촉하므로 또다시 나아가 용감히 싸웠다. 이 때 장흥부사 한온은 왜적의 창에 맞아 낙마하여 순절하였다. 공은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전진하다 화살에 맞았고 맞은 화살을 뽑아 적진에 쏘며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대파하니 마침내 왜적들은 불을 지르고 도망하였다.
그런데 아아! 이게 어찌된 일인가. 승전의 기쁨을 채 맛보기도 전에 그날 밤 공은 낮에 맞은 화살독이 몸에 퍼져 끝내 돌아가시니 5월 13일이었다. 공의 용맹함과 충렬 정신을 기리며 장흥군 장동면 두룡리 탑동 사기소에 장례하였다.
이 비문은 전 향산군수 해평(海平) 윤영구(尹寧求)의 묘갈명과
‘국조오난록(國朝五亂錄)’,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장흥부지(長興府誌)’에 의거하여 기록하였다. 윤 군수는 墓碣銘에서 “공은 무인이지만 학문을 좋아했고 공의 지극한 효도는 충성으로 이어졌다. 비록 벼슬은 낮았으나 큰 이름을 남겼으니 후세 사람들은 이를 깊이 숭상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공의 집안에 열부(烈婦)가 나서 기꺼이 삼종(三從)의 도를 다하였다. 이제라도 공의 훌륭함을 돌비에 새기지만 공과 사사로운 관계는 없다.”고 하였다.
공은 이처럼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순국했으나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의 국난이 겹쳐 그 공을 제대로 현창하지 못했던 일이 심히 아쉽다. 이제 와서 후손들의 성금으로 공의 충렬비를 세운다고 하니 대단한 광영이 아닐 수 없다. 후손들이 공의 행장을 갖추어 와서 글을 청하니 공의 충혼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감히 나라를 대신하여 이 글을 쓰지만 부족함이 있을까 두렵다.
서기 2011년 4 월 일 수원백씨 부장공 종중에서 세우고,
장흥군수 인천인 이명흠 삼가 글을 짓고,
전 장흥문화원장 해남인 화산 윤수옥 글씨를 쓰다.
忠烈碑 獻誠 芳名記
서기 1555年 을묘왜변 당시 달량진(해남 남창)에서 장흥부사 한 온(韓 蘊)
공과 함께 부장공(部將公) 백세례(白世禮) 할아버님께서 순국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국가와 후손들의 무성의로 현창해 드리지 못하고 있던 차에 ‘기산팔문장전통문화마을가꾸기사업’ 추진 과정에서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한국고전번역원 등에서 ‘국조오란록(國朝五亂錄)’,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장흥부지(長興府誌)’, 윤영구(尹寧求, 전 향산군수)의 묘갈명(墓碣銘), ‘수원백씨대동보(水原白氏大同譜)’ 등에서 부장공의 충렬 사실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 낼 수 있었습니다.
이에 後孫들이 충렬비 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도흠(道欽)님은 본 부지를 희사해 주셨으며 추진위원회의 통문과 인터넷 온라인 성금 모금을 통해 후손들의 정성으로 4,500여 만 원의 성금이 모아졌으므로 순국선조님의 충렬비 준공을 맞아 그 정성과 아름다운 마음을 후세에 오래도록 기리고자 헌성금 방명을 뒷면에 새깁니다.
서기 2011년 4월 30일
부장공충렬비건립추진위원회
後孫 光哲 謹記
獻誠金 芳名錄 명단
성 명 |
금 액 |
파 계 |
주 소 |
백남송 |
일 천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
백낙순 |
오백만원 |
선전공계 |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감초약국 |
백도흠 |
부지 20 평 |
죽촌공계 |
장흥군 안양면 동계리 |
백낙홍 |
일백삼십만원 |
죽촌공계 |
장흥군 안양면 동계리 |
백영식 |
일백만원 |
서호공계 |
보성군 회천면 봉강1구 |
백성인 |
일백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
백호인 |
일백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평면 양촌리 |
백호암 |
일백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목단리 |
백영우 |
일백만원 |
서호공계 |
보성군 회천면 모원리 |
백영길 |
일백만원 |
서호공계 |
장흥군 부산면 기동리 |
백관인 |
일백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
백형권 |
일백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흥읍 향양3구 |
백진수 |
일백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 |
백광철 |
일백만원 |
선전공계 |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
백도인 |
일백만원 |
죽촌공계 |
장흥군 장흥읍 월평리 백산건설대표 |
백인천 |
오십만원 |
선전공계 |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
백 현 |
오십만원 |
선전공계 |
장흥군 장동면 용곡리 |
백남곤 |
오십만원 |
서호공계 |
광주시 |
백형만 |
오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비동리 |
백형구 |
오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비동리 |
백남정 |
사십만원 |
동계공계 |
경기도 수원시 |
백출인 |
삼십삼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
백영환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
백만식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평면 우산리 |
백태식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
백남석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
백동인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수양리 |
백영동 |
삼십만원 |
서호공계 |
서울시 성북구 |
백영도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서울시 |
백정흠 |
삼십만원 |
선전공계 |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
백돈철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
백형정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수양리 |
백환주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읍 건산리 새마을금고 이사장 |
백선익 |
삼십만원 |
선전공계 |
부산시 사상구 학장동 |
백금철 |
삼십만원 |
선전공계 |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 |
백홍철 |
삼십만원 |
선전공계 |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 |
백석인 |
삼십만원 |
선전공계 |
경기도 남양주시 |
백헌명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서울시 은평구 갈현동 |
백남훈 |
삼십만원 |
동계공게 |
광주시 |
백 훈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보성군 보성읍 다향관 |
백 남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경기도 수원시 |
백남주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중앙소리사 |
백형기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흥읍 월평리 월평정미소 |
백형칠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흥읍 향양3구 탐진정미소 |
백학인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
백양인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
백천근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인천시 |
백남윤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광주시 금동 |
백한신 |
이십만원 |
선전공계 |
장흥군 장동면 진곡리 |
백영록 |
이십만원 |
선전공계 |
경기도 남양주시 |
백인혁 |
이십만원 |
선전공계 |
경기도 남양주시 |
백한욱 |
이십만원 |
선전공계 |
경기도 남양주시 |
백현범 |
이십만원 |
선전공계 |
인천시 |
백진휘 |
이십만원 |
선전공계 |
서울시 중곡동 |
백민휘 |
이십만원 |
선전공계 |
서울시 중곡동 |
백낙주 |
이십만원 |
죽촌공계 |
광주시 |
백낙훈 |
이십만원 |
죽촌공계 |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
백을인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경기도 |
백형정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경기도 |
백형춘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광주시 북구 운암동 |
백형순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경기도 |
백형언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경기도 송탄시 |
백형로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비동리 |
백종선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동계리 |
백영근 |
이십만원 |
서호공계 |
서울시 양천구 |
백진명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경기도 안양시 |
백홍선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울산시 |
백종천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삼보주택 |
백라대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광주시 |
백형주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보성군 옥암리 |
백형옥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광주시 |
백중근 |
이십만원 |
서호공계 |
광주시 |
백영국 |
이십만원 |
서호공계 |
부산시 |
백영회 |
이십만원 |
서호공계 |
보성군 회천면 |
백현인 |
이십만원 |
서호공계 |
부산시 |
백홍준 |
이십만원 |
서호공계 |
여수시 |
백강래 |
이십만원 |
서호공계 |
경기도 |
백동선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관산읍 |
백영삼 |
일십만원 |
서호공계 |
부산시 해운대구 |
백진선 |
일십만원 |
동계공계 |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
백용선 |
일십만원 |
동계공계 |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
백황선 |
일십만원 |
동계공계 |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
백유선 |
일십만원 |
동계공계 |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
백광훈 |
일십만원 |
동계공계 |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
현재총액 |
4,453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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部將公의 忠烈事實(十九세,長興 ) 참고자료 수원백씨 대동보 丁丑版 214쪽
公의 諱는 世禮요 字는 和仲이니 弘治 十八年 乙丑 1505년에 長興府 岐山里 本家에서 出生 하였다.
어려서 부터 체격이 큼직하고 담력과 계략이 보통에서 뛰어 났으며 나이 十歲가 못되어 이미 천만 병력이
달려와도 꼼짝하지 않는 기상이 있었다.
아버지 進士公께서 그 용맹 스러움을 항상 염려한 나머지 小學책을 주어 일평생 가지고 다니며 符節을
삼도록 하였다. 公께서는 晝夜로 小學을 읽는데 게을리 하지않아 학업에 나아가 뜻을 다졌다.
公께서는 小學에서 父母를 섬기는데 능히 그 힘을 다 하였고, 임금을 섬길때는 능히 자기의 몸을 바친다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말씀 하시기를 孔子 제자 子夏氏가 나의 마음을 먼저 말씀 하셨다며 이 구절을 두세번 반복하여 읽으면서
감탄하지 아니한 적이 없었다.
父母님을 섬길제 지극히 그 뜻을 따랐고 음식물을 충분히 갖추었으며 昏定晨省 과 冬溫夏淸 하는 절차에 있어
셋째 아들이지만 分居하지 않고 조금도 간격을 두지 않았다 .
두 형과 더불어 기뻐하고 즐거워 했으며 날마다 하는일이 小學에서 제시한 規矩에 벗어나지 않았다.
먼저 부친 초상을 당하고 뒤에 모친 초상을 당하였는데 그때마다 한결같이 家禮에 依해 비록 사소한 儀節에 있어서도
감히 放過하지 않았으므로 온 마을,온 군민,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순수한 孝子라고 하였다.
公께서는 三年복을 마친 뒤에도 홀로 시묘막(墳庵)에 거처하면서 텅빈 산천 비바람이 때리는 밤마다 太公望이 엮은
六韜와 黃石公이 쓴 三略 등 兵書를 큰 목성으로 읽고 孔明이 周易八卦를 응용해 만든 八陣圖法과 術書에서 밝힌
往亡日 즉 싸움의 승패 계책등을 또한 暗讀하여 마음속으로 해석 하였다.
아름답고 고상한 뜻을가진 公께서는 科擧에 응시할 학업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詩文調格 등 일체를 신경쓰지 않았다.
或者가 公에게 立身揚名 할 것을 권고 하였건만 公께서는 뜻이 없다고 하셨도다.
이보다 먼저 郡守 方伯 등이 公에게 將軍이 될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으며 그들의 권고에 의해 武士에 뽑혀 右部將 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이 모두 公의 뜻은 아니었다.
明宗임금 十年 乙卯 (1,555)년에 倭人賊船 수백척이 동남쪽 으로부터 바람의 힘을 이용하여 上陸 하였다.
바다에서 가까운 여러 고을이 屠戮 당하였고 강진과 해남땅인 梨津 達梁(현,해남군 북평면 남창리)등이 왜적의 소굴이 되었다.
당시 兵使인 元績이 본 고을 府使 韓蘊에게 보낸 通知文에 曰 이 때 왜적을 평정함에 있어 白部將이 아니면 남쪽지방
人民 모두가 魚肉이 된다고 하였다.
韓府使가 즉시 公을 찾아가 주선할것을 도모하자 公께서 의로운 膽力을 확실하게 내 보이며 드디어 府使의 간청을 허락하고
말을 달려 本府에 들어가 큰 활과 큰 칼을 손에쥐고 府使에게 병력을 일으켜 남북진을 지휘 하도록 부탁하였다.
公께서는 蒼龍津으로 卽行하여 침범해 오는 그들의 위세를 좌절 시키고 그들의 정찰하는 길목을 두절 시켰는데 수하
戰士들의 용맹은 모두가 一當百 아닌 병사가 없어 병사들의 함성은 크게 진동 하였다.
公께서 또 정예병 일백여명을 선발하여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인 達梁의 北營으로 달려갔다.
그 때 光州목사 李希孫은 적의 복병을 만나 패전 하였고 康津군수 洪彦誠은 적의 위세에 겁을먹고 도망질 했으며
영암군수 李德賢(堅)(역사 자료에는 이덕견 임) 은 죽음이 두려워 城 밖에 나가 그들을 환영 하는가 하면
兵使인 元績은 갑옷을 벗고 항복 하였다.
公께서 분개한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높여 曰 고을을 사수 하는것은 떳떳한 일인데 主將이 계책을 잃었으니
義當 軍法으로 다스려야 할것이다. 그러나 우리 군중에게 主將들의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싶지 않다 하시고
公은 韓府使와 더불어 힘을 같이하여 병사 수백명을 인솔, 진격 준비를 갖추고 있으니 왜적이 감히 공격해 오지 않았다.
公께서 밤이되면 손에 籌算을 쥐고 三綱五倫의 글귀를 口誦 함으로써 군중의 심정을 위로하는 한편 군중들의 뜻을
관찰 하기도 하며 잠 자리에 눕지 아니 하셨다. 韓府使께서 公과 더불어 술잔을 권하며 칭찬하여 曰 내가 우리 白部將이
아니면 君父를 섬겨야 하는 도리를 어찌 해 냈겠는가? 하니 그 말씀에 公께서는 죽기를 각오하고 옛날 伏波將軍 馬적
처럼 싸우다 죽으면 말 가죽에 나의 시체를 싸도록 할 것이요 祖士雅와 같이 중국을 평정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며
노를 두둘겼다는 말씀으로 답변 하셨다.
그러한지 三日 뒤에 왜적이 또 북을 울리며 싸울것을 청하자 싸움이 시작된지 반 나절이 못 되어 수십번을 진격 하였다.
韓府使는 장기전을 펴다가 상처를 입고 落馬 하여 전사하고 公께서는 옆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장대를 휘두르고
혀를 씹으며 조금도 후퇴하지 않고 진격중에 날아온 화살에 명중되자 그 활촉을 뽑아 적에게 쏘아 왜적을 대파 하였다.
적병들은 은신처를 무너뜨리며 주위 집을 불태우고 후퇴 하였다.
公께서는 개선장군으로 승전의 노래를 부르며 돌아 왔는데 그 날밤 화살의 독이 온 몸에 퍼져 잠을 자듯 저 세상으로
떠나 가셨으니 곧 五月 十三日 밤 二十時 경 이었다.
그리하여 왜적이 물러가니 이 어찌 南方民의 一大幸運이 아니겠는가?
아 ! 韓府使는 都護府使로서 의로운 사실이 알려져 조정으로 부터 贈職이 내렸는가하면 諡號도 내렸고 사당에서
제사를 모시는 영광을 누리지만 우리 部將公의 높고도 의로운 업적이 지금 까지도 묻혀져 있는것은
후손의 활동이 막혔다는 것을 이내 언급할 것도 없고 元績 , 洪彦誠 , 李希孫 , 李德賢 , 등이 조정에 돌아가 이 사실을
분명히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이 억울함을 어찌 가히 형언 하겠는가?
뒷날 千百世에 붓을 잡은 선비가 國朝五亂錄 , 湖南節義錄 , 및 장흥군지 등을 參酌해 주었으면 다행 이겠다.
水原白氏 大同譜 丁丑版 第一券 214~216쪽 部將公의 忠烈事實 에서 白 光哲 옮김
殉國先祖 部將公 諱 白 世 禮 忠 烈 碑 建立 發起文
부장공 종중 종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유난히도 추웠던 지난 겨울의 한파와 혹한 속에서도 봄은 질척이며 찾아와
매화가 어느새 만발 하였는가 싶더니, 노오란 개나리 꽃이 활짝 피고
하얀 속살을 드러낸 목련이 순백의 꽃 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합니다.
우리들의 사문중 파조이신 부장공 할아버님께서 을묘왜변(1,555년) 당시
장흥부사 한 온 과 함께 달량진 (현,해남 남창)에서 전사 하시어 순국 하셨지만
그동안 자손들의 무성의로 현창해 드리지 못해서 늘 안타까웠습니다,
가선대부, 해평, 윤영구님의 찬 으로 묘갈명과 족보에는 이미 실려 있고,
호남 절의록과 국조 오란록의 기록을 국립중앙 도서관에서 찾음으로 해서
할아버님의 훌륭하신 업적을 재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차제에 후손들의 헌성금을 모금하여 만시지탄 이지만
이제라도 할아버님의 업적을 기리고 충절과 공적을 현창 해 드리기로
2010년 3월 7일 종친 임시 총회를 개최하여 다음과 같이 결의 되었기에
알려 드리는 바입니다.
1) 부장공 할아버님의 충렬비 건립을 추진하기 위하여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고문 백영식,백성인, 추진위원장 백낙홍 부위원장 백태식,백낙순,백도인,백남송,
총무 백형권, 간사겸 집전 백광철 재무 백남주, 감사 백관인,백진수, 추진위원
백호인,백영길,백호암, 백형정,백진영,백영우, 백학인,백영환,백동인,백양인,백출인,)
2)각파 종친들에게 취지를 잘 알려서 후손중 모르고 성금록 비문에 빠지는일이
없도록 하자고 결의를 하였습니다,
3)부장공 할아버님 께서는 우리들에게 충국의 길을 가리켜 주셨습니다
우리들도 이번일에 서로 앞장 선 참여로 후손들에게 효의 길을 가르칩시다.
4)충렬비를 건립하고 준공식까지 행 하려면 최소 약3,000 만원의 자금이 필요한바,
20만원 이상의 성금을 내 주신분을 성금록 비문에 명단을 올려 드리기로 결정되어,
부장공 종중 명의로 법인통장을 개설하고 통장번호를 아래와같이 알려 드립니다.
끝으로 종친 여러분들의 가정에 건강과 행운이 충만 하시기를 기원 드리고
부장공 할아버님에 대한 자료를 첨부해 드리면서 인사 말씀에 갈음 합니다.
2010년 3월 일
부장공 충렬비 건립 추진위원장 백 낙 홍
연락처 : 백낙홍 061-863-4712 총무 백형권 핸드폰 : 016-684-5724
간사겸 집전 백광철 : 017-621-0043(010-4621-0043)
* 참고 : 다음카페, 기산마을 , 행사소식, 코너에 오시면 진행 과정을 보실수 있습니다.
온라인송금 : 농협 351-0173-5617-83 부장공 종중
2011년 7월30일 오전 11시 장흥읍 탐진회관에서 종친들이 모여서
부장공 충렬비 건립추진 과정의 최종 결산 보고 회의를 개최하고
감사 백관인,백진수님으로부터 감사보고를 그리고 총무 백형권님으로부터
최종 결산, 수입과 지출내역 결과 보고를 받았습니다.
보고결과,
총 수입 금액은 : 45,447,328원이고
지출 총액은 : 43,112,530원 이었으며
차감 잔액은 : 2,334,798원 이었습니다,..
지출 내역을 보면,
비석석물대금 2300만원 각자및 헌성비 제작비용과
마무리공사 작업비 700만원 포함 총 비석대금은 3,000만원이고
7번의 회의비용과 통문및 책자인쇄비용 그리고 준공식 행사비용
오신손님들 타성에게 거마비까지
그동안의 일체 지출비용이 13,112,530원 이라고 보고를 하셨습니다.
세세한 세부 지출내역은 생략합니다.
나머지 금액 2,334,798원은
오늘 회식비용 그리고 추가 각자비용과 백남송님의 헌성비 이면
기록비용을 제하고 부장공 제실 유지비용으로 유사에게 넘겨주기로
결의하고 본 추진위원회는 해산키로 결의되었습니다,..
(단, 백남송님 헌성비 이면기록은 본인이 원함에, 간단하게 성금을 내신 내용을 요약해서
추진위원회 명의로 총무님이 책임지고 기재키로 결의함)
끝으로 그동안 충렬비를 건립 하는데에 있어서
물심양면으로 협조해주신 종친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성금을 내신분이나 혹여 못 내신 종친들도
우리는 모두가 부장공 할아버님의 자손입니다,
할아버님을 숭상하는 마음은 하물며 다 같은 것이오며,
여러분들의 가정에 건강과 행운이 충만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이상으로 부장공 충렬비 건립 추진위원회 추진과정을 마무리하고
참고로 아래는 성금을 내 주신분들의 최종 기록을
함께 올려 드리는 바 입니다,..
추진위 간사 백광철 올림,...
獻誠金 芳名錄 명단
성 명 |
금 액 |
파 계 |
주 소 |
백남송 |
일천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
백낙순 |
오백만원 |
선전공계 |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감초약국 |
백도흠 |
부지 20 평 |
죽촌공계 |
장흥군 안양면 동계리 |
백낙홍 |
일백삼십만원 |
죽촌공계 |
장흥군 안양면 동계리 |
백영식 |
일백만원 |
서호공계 |
보성군 회천면 봉강1구 |
백성인 |
일백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
백호인 |
일백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평면 양촌리 |
백호암 |
일백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목단리 |
백영우 |
일백만원 |
서호공계 |
보성군 회천면 모원리 |
백영길 |
일백만원 |
서호공계 |
장흥군 부산면 기동리 |
백관인 |
일백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
백형권 |
일백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흥읍 향양3구 |
백진수 |
일백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 |
백광철 |
일백만원 |
선전공계 |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
백도인 |
일백만원 |
죽촌공계 |
장흥군 장흥읍 월평리 백산건설대표 |
백인천 |
오십만원 |
선전공계 |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
백 현 |
오십만원 |
선전공계 |
장흥군 장동면 용곡리 |
백남곤 |
오십만원 |
서호공계 |
광주시 |
백형만 |
오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비동리 |
백형구 |
오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비동리 |
백남정 |
사십만원 |
동계공계 |
경기도 수원시 |
백출인 |
삼십삼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
백영환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
백만식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평면 우산리 |
백태식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
백남석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
백동인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수양리 |
백영동 |
삼십만원 |
서호공계 |
서울시 성북구 |
백영도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서울시 |
백정흠 |
삼십만원 |
선전공계 |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
백돈철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
백형정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수양리 |
백환주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읍 건산리 새마을금고 이사장 |
백선익 |
삼십만원 |
선전공계 |
부산시 사상구 학장동 |
백금철 |
삼십만원 |
선전공계 |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 |
백홍철 |
삼십만원 |
선전공계 |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 |
백석인 |
삼십만원 |
선전공계 |
경기도 남양주시 |
백헌명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서울시 은평구 갈현동 |
백남훈 |
삼십만원 |
동계공게 |
광주시 |
백 훈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보성군 보성읍 다향관 |
백 남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경기도 수원시 |
백남주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중앙소리사 |
백형기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흥읍 월평리 월평정미소 |
백형칠 |
삼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흥읍 향양3구 탐진정미소 |
백학인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
백양인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
백천근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인천시 |
백남윤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광주시 금동 |
백한신 |
이십만원 |
선전공계 |
장흥군 장동면 진곡리 |
백영록 |
이십만원 |
선전공계 |
경기도 남양주시 |
백인혁 |
이십만원 |
선전공계 |
경기도 남양주시 |
백한욱 |
이십만원 |
선전공계 |
경기도 남양주시 |
백현범 |
이십만원 |
선전공계 |
인천시 |
백진휘 |
이십만원 |
선전공계 |
서울시 중곡동 |
백민휘 |
이십만원 |
선전공계 |
서울시 중곡동 |
백낙주 |
이십만원 |
죽촌공계 |
광주시 |
백낙훈 |
이십만원 |
죽촌공계 |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
백을인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경기도 |
백형정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경기도 |
백형춘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광주시 북구 운암동 |
백형순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경기도 |
백형언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경기도 송탄시 |
백형로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비동리 |
백종선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안양면 동계리 |
백영근 |
이십만원 |
서호공계 |
서울시 양천구 |
백진명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경기도 안양시 |
백홍선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울산시 |
백종천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삼보주택 |
백라대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광주시 |
백형주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보성군 옥암리 |
백형옥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광주시 |
백중근 |
이십만원 |
서호공계 |
광주시 |
백영국 |
이십만원 |
서호공계 |
부산시 |
백영회 |
이십만원 |
서호공계 |
보성군 회천면 |
백현인 |
이십만원 |
서호공계 |
부산시 |
백홍준 |
이십만원 |
서호공계 |
여수시 |
백강래 |
이십만원 |
서호공계 |
경기도 |
백동선 |
이십만원 |
동계공계 |
장흥군 관산읍 |
백영삼 |
일십만원 |
서호공계 |
부산시 해운대구 |
백진선 |
일십만원 |
동계공계 |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
백용선 |
일십만원 |
동계공계 |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
백황선 |
일십만원 |
동계공계 |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
백유선 |
일십만원 |
동계공계 |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
백광훈 |
일십만원 |
동계공계 |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
현재총액 |
4,453만원 |
||
백형갑 |
일십만원 |
동계공계 |
행사당일 협찬금 내역 |
백남수 |
일십만원 |
옥봉공파 |
대신체육사 행사당일 협찬금 |
시정공파종중 |
이십만원 |
대표백남식 |
행사당일 협찬금 |
이자소득 행사후 최종 정산함 |
488,028원 |
공병판매수익 = 29,300원 행사후 정산함 |
현재 수입총액
= 45,447,328원 |
첫댓글 기초 자료입니다 20일날 임원회의를갖고 최종 인쇄소에 의뢰할 계획이오며 임원회의에서 보충자료로 격문과 회의록 그리고 사실록등 증빙 자료들도 넣을지를 (스케너로 복사해서 넣을수있음) 최종 결정토록 할것입니다,..
그리고 25일경에 비가 세워진다고 하니 가능하면 책자의 표지면에 충렬비의 사진을 넣어 보도록 해 보겠습니다,..
20일 오전10시부터 장흥읍에있는 탐진회관에서 임원15분이 모여서 최종회의를 마치고 이상의 원문을 책자로 맡겼으며 책의 표지는 제막식몇일전에 비가 세워지면 사진을 담아서 칼라판으로 하기로 하였고 음식일체는 도시락으로 맡겼습니다 4월30일날 오전 11시에 제막식을 갖기로 합의했습니다 물론 선물도 대신체육사에 맡겼습니다,
준공식을 마치고 결산 보고를 해 올려야 할텐데 아직 총무님으로부터 소식이 없습니다, 아마 농번기라서 그랬던것같고, 하계수련회를 겸해서 하신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해가 가는것은 재무가 모든책무를 떠넘기고 소임을 다 하지않음으로 총무님이 혼자서 자금지출 일체를 관장하셨기로 어려움이 있으실걸로 이해합니다, 준공식때 거마비까지 지출하고 수입금4,453만원중 몇백만원은 남은걸로 알고있으며, 남은돈은 부장공 제실유사에게 넘겨서 제실관리수리비에 쓰여질수 있도록 하기로 결정 하였었기에 결산보고가 있으면 올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머지 금액 2,334,798원은
오늘 회식비용 그리고 추가 각자비용과 백남송님의 헌성비 이면
기록비용을 제하고 부장공 제실 유지비용으로 유사에게 넘겨주기로
결의하고 본 추진위원회는 해산키로 결의되었습니다,..
(단, 백남송님 헌성비 이면기록은 본인이 원함에, 간단하게 성금을 내신 내용을 요약해서
추진위원회 명의로 총무님이 책임지고 기재키로 결의함)
끝으로 그동안 충렬비를 건립 하는데에 있어서
물심양면으로 협조해주신 종친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