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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과 윤회의 논리>
불자라면 그 의미가 너무나도 심각하게 들리는 업(karma)은 불교가 만들어 낸 용어가 아니라, 수 천년 동안
인도사상을 지배한 핵심적인 단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윤회(samsara) 또한 업과 더불어 같은 위력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환생으로 요약될 수 있는 윤회사상은 생각보다 뿌리가 깊습니다. 베다시대의 인도대륙뿐만 아니라
그 북쪽 지역 넓게, 심지어 유럽에 이르기까지 이미 고대 문명의 흔적 속에 환생의 개념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미라도 결국은 환생을 염두에 둔 것이 라는 데 이견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초기
기독교에서도 윤회를 종교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헬레니즘시대(기원전 330년대)의 기독교 종파인 그노시스파(Gnosticism) 등에서 윤회를 정식 교리로
이해했다고 하는데, 역시 구원 사상과의 불화로 4세기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성서 속에 실려 있던 윤회에 대한 언급들을 삭제하기로 결정했으며, 이후 니케아Nicaea에서 열린 공의회
이후 모든 복음서에서 환생에 대한 내용을 완전히 삭제해 버렸다고 합니다. 이 사실에 대한 연구는 꽤
진전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환생을 뜻하는 윤회는 고대의 사후문제에 대한 비교적 보편적 사상의 하나였습니다.
윤회를 가정하면 현생의 앞과 뒤로 전생과 내생이 뒤따르게 되고, 다시 윤회의 원동력이 되는 업이라는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가 어렵습니다. 이 책이 탐구하고자 하는 목표인 붓다 가르침의 바른 해석과 종교로서 불교의
정체성에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는 모든 주제에 내재되어 있는 문제의식의 기조이기도 합니다. 어떤 논쟁이든
‘주장’을 하는 논리에 대한 증명과 설득의 책임은 주장을 하는 쪽에 있지, 납득하지 못하는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UFO의 존재에 대한 증명은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 있듯이, 윤회전생輪廻轉生을
주장하는 쪽이 확신을 유보하는 사람에게 윤회의 실재를 내 보여야 이치에 맞는다는 말입니다. 마치
불교가 기독교에 창조주 신에 대해 증명하라고 요구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실이니 믿어라’라는 식의 신앙적인 믿음에 호소를 한다면,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
역시 무조건 신앙성만 강요하는 다른 종교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붓다께서는 우주와 일체 존재에 대한 보편적 진리인 연기를 깨달으시고 그것을
중생들에게 일깨워 주신 것이지, 윤회가 절대적 진리이니 그 사실만은 ‘의심하면 안 된다’라고
강조하시기 위해 고귀한 삶을 바치신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더욱 붓다께서 질문에 침묵하신 12무기無記를 분석하면, 영혼과 사후의 세계에 대한 질문에 ‘있다’라는
답을 하시지 않은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럼, 지금의 불교는 업과 윤회에 있어, 왜 ‘이 지경’이 되었나 하는 의문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자
이토록 동분서주하는 것입니다. 칼 융에게 물어본다면 고대로부터 환생에 대한 집단 무의식에 빠진
결과라고 답해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주장의 요체는 붓다의 윤회관은 달랐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
불교(Buddhism)와 자이나교(Jainism)의 차이를 밝히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한국불교의 누구도 불교를 자이나교나 힌두교와 다르게 해석하는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불교의 업과 윤회는 물론 현재의 불교가 얼마나 다양하고 심각하게 오염되었는지를
실감해야 합니다.
<자이나교와의 비교를 통해 불교의 정체성을 찾다.>
어떤 이는 “신앙도 변할 수 있다”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 말이 틀리지는 않습니다. 부파불교를 넘어
대승불교를 개시한 것도‘변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 역시 붓다의 바른 가르침을 찾아간
‘진화’이지, 지금의 한국불교처럼 힌두교에 더 가깝게 오염되는 것을 ‘신앙의 변화’라고 받아줄 수는
없습니다.
자이나교와의 비교를 통해 불교의 정체성에 접근하려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자이나교는
근세에 서양학자들도 불교와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불교와 쌍둥이와 같은 사상과 틀을 갖추고 있는
종교입니다.
앞서 제가 빔비사라 왕이 자이나교의 교주가 아닌 코살라 출신의 붓다를 후원하기로 한 것은 매우 특별한
사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듯이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지나’ 역시 반바라문을 표방하며 출가주의를
지향한 신흥 사상가였으며, 붓다와 사상은 물론 생몰 연대까지도 거의 비슷합니다.
서양인들이 동양의 한국인과 일본인, 중국인을 구별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 겁니다. 우리가 미국인과
영국인, 유럽인을 명확히 구별하기 힘든 것과 유사합니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이런 구별 이상으로 차이를
느끼기 아주 힘든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불교와 자이나교의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면,
불교의 정체성을 단박에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동안 제가 찾아 검토한 자료 중 아래의 것보다, 두 종교를 명석하게 분석한 책이나 논문이 없습니다.
전문적인 글이기에 딱딱하지만 차분히 보시면 이해하기 쉽도록 제가 주註를 달았습니다. 충북대 정세근
교수의 ‘윤회와 반윤회’ 중 해당 부분만 추렸습니다.
석존의 시대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그 둘(불교와 자이나교)은 이론상· 실천상 유사성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 둘에게 모두 세계는 고통스럽고 우리는 업을 소멸해야 한다. 그들도 불교도처럼 108염주를
돌린다. 그 둘은 오늘날의 많은 연구에 의해 각기 독립적인 것으로 정립되고 있지만, 불살생, 업 그리고
열반 등의 이론상의 비슷함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불교를 이야기하면서
자이나교와의 유사성을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불교는 자이나교의 무엇이 불만족스러웠을까? 마찬가지로 자이나교는 불교의 무엇이 만족스럽지
않았을까? 바르트Karl Barth가 말하듯이 이론적인 체계화 면에서 훨씬 정교하다면 불교가 자이나교에
앞서고, 콜브록Colebrooke이 말하듯이 영혼을 인정한다는 점을 부각한다면 자이나교가 불교에 앞선다.
여기서 나는 서술의 편의상 자이나교를 불교에 앞세웠다. 티르탕카라〔필자 주: 자이나교에서 영적인
깨달음에 도달한 자〕를 일컬으면서 자신들의 종주宗主를 지나치게 앞세운다는 점이 오히려 자이나 교의
이론화가 불교보다 뒤늦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하지만, 불경에서 니간타를 말함은 이미 그들이 불교에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면서 체계화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필자 주: “마하나마여, 내가 전에 라자가하에서 고행을 닦고 있는 니간타 수행자들을 만났었다. 그들은
몸을 극도로 괴롭게 하는 고행을 통해 과거의 업을 소멸시키고 말과 행위와 생각을 조심스럽게 하여 미래의
업을 짓지 않아 번뇌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아함경에 있는 대목 중 한 단락입니다.
붓다께서 자이나교 교주 니간타를 직접 거론하신 것인데, 이외에도 자이나교를 고행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하는 장면들이 경전에는 꽤 자주 등장합니다. 불교 쪽에서는 자이나교를 외도라고 하며 경계시한 것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그 두 종교 간의 차이점이다. 그 차이점으로 불교 이론의
독자성을 말할 필요가 있다.
하나 더 욕심을 내서, 자이나교와 상키야Samkhya 학파〔필자 주: 인도의 육파철학 중 가장 먼저 성립된
학파로, 붓다 입멸 직후인 기원전 3~4세기에 형성.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주장했다 합니다〕의 차이,
불교와 상키야 학파의 차이가 자이나교와 불교의 차이와 더불어 밝혀진다면 불교가 훨씬 더 분명한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셋 다 무신론적이지만, 자이나교는 영혼에, 불교는 연기에, 상키야는 무가 아닌 유에 더욱 관심을 기울인다.
라다크리슈난〔필자 주: Radhakrishnan, 1888~1975, 인도의 철학자이며 정치가로 인도 대통령까지
지냈습니다〕은 “업과 윤회의 문제에서 보이는 불교와 자이나교 간의 유사성은 큰 의미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도의 모든 철학에서 공통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면 인도의 종교 사상들이 다를 바가 없이 대동소이하게 되기 쉽다. 인도철학으로부터
불교를 구해 내려는 시도도 무의미해지고 만다. 자이나교와의 차별성에서 불교의 독자성을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해 진다. 인도의 많은 경전이 그러하듯이, 자이나교와 불교는 구별되어 왔고 오늘날도 불교도와
자이나교도는 구별 된다.
첫째, 자이나교는 물질과 구별되는 영혼· 순수성· 불멸성을 말하지만, 불교는 영혼의 부재를 말한다.
자이나교는 이원론에 충실하다. 그것은 영혼을 비영혼과 구별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비영혼의 것들이
영혼을 구속한다. 그들에 따르면 업도 물질적인 것이라서 우리의 영혼에 미세하게 달라붙는다.
우리의 몸도 그래서 업신業身 곧 업 덩어리이다. 업의 최소화가 우리의 지상명령이고 그를 달성하기 위해
불살생의 원칙을 지킨다. 업을 짓지 않고 영혼의 순수함을 이루었을 때 그는 승자로서 자이나교의
숭배대상이 된다. 〔필자 주: 자이나교의 업과 영혼에 대한 설명인데, “우리의 몸도 그래서 업신 곧 업
덩어리이다.” 이 말은 현재 스님들이 하는 내용과 똑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불교는 영혼을 말하지 않는다. 영혼이란 자아의 불멸성을 말하는 것이다. 자아는 고정적이지 않은
변화 속의 것이다. 만물과 마찬가지로 나도 일정함이 없이 흐른다. 항상성도 없고 고정성도 없다.
무아無我를 바탕으로 삶도 삶의 원칙도 무상無常하고 무주無住하다. 불교에서 영혼이 없음은 정신의
부재를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살아 있는 나도 정체성이 없는데, 죽은 내가 정체성이 있을 리 없다.
자이나교는 영혼의 해탈을 위해서 철저한 이원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불교는 후기로 갈수록 정신과
물질의 연관성에 집중하여 ‘마음’의 일원론을 제기한다. 물건은 내 정신을 흔들리게 하지만, 나의 정신은
물욕을 참아내게 만든다. 그 사이에 마음이 있고, 그것은 정신과 물질을 통틀어 가장 근본적인 요소이다.
〔필자 주: 이것이 바로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둘째, 자이나교는 원자론적 사고를 갖는 반면, 불교는 그러한 물질을 운동의 중심으로 보는 실체관에
인색하다. 이원론적인 사고는 여느 철학과 마찬가지로 그 둘의 관계 설정이 가장 큰 문제로 제기 된다.
자이나교는 원자가 미세하게 달라붙는다는 설정으로 영혼과 비영혼의 교섭을 설정한다. 그 원자는
오늘날처럼 다원적이지 않고 일원적(정확히는 단원적)이기에 데모크리토스적이지 않고
라이프니츠적이다. 〔필자 주: 데모크리토스적 이원론은 물질과 정신을 확연히 구별하는 이원론이고,
라이프니츠적이라는 의미는 정신과 물질,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닌 조화와 합일을 지향하는 사유라는
뜻입니다.〕
거꾸로 그 원자는 관념적이지 않고 물질세계의 근본이기 때문에 라이프니츠적이지 않고
레우키포스적이다. 한마디로 자이나교의 원질은 단일 형태의 물질적 원자로, 소재素材는 그리스적
원자론을 닮았고 기능과 역할은 독일의 관념론을 닮았다. 〔필자 주: 참 복잡한 말입니다. 결국 자이나교의
업을 이루는 단위인 물질의 성격이 현대의 양자론적이지 않고, 크기는 알 수 없지만 알갱이가 실체하듯
존재하지만, 그것이 업으로 작용하는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사실적이 아니라, 인식만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관념론에 따르는 자이나교의 이원론의 모순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물질을 과연 세계의
근원으로 보는가? 불교도 인도의 전통에서 세계의 요소로 지·수·화·풍을 말하고 그것에 기반한 감각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지만, 물질로서의 실재에 대한 관심은 자이나교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 그것이 바로
실체(dravya)에 대한 이해 방식의 차이이다.
자이나교를 위시해서, 바이셰시카Vaisheshika(인도 육파철학의 하나) 학파와 차르바카Carvaka(인도의
대표적 유물론자) 학파는 모두 실체를 중시했다. 그 실체는 물건들(things)로서, 서구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본질(essence)의 의미와 매우 다르다. 서양철학에서 실체는 플라톤 이후 본질적인 것이라서 현상적이지
않다.
그러나 인도인들이 말하는 실체는 그야말로 우리의 감각에 주어진 그런 것들이다. 불교는 물질의 근원이
서로 기대어 만들어지기 때문에 무아無我라 하고, 이 물질이 저 물질로 변화하기 때문에 무상無常하다고
한다. 만들어지고 이어 나가고 무너지고 없어지는 것, 전통적인 용법에서 말하는‘성주괴공成住壞空’이
물질의 본질이다. 따라서 실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감수感受체계에 더욱
관심이 많다. 이른바 ‘오온(사람을 이루는 다섯 가지 혼성물)’이 그것으로 물질의 세계인 색色과 우리의
인식작용인 명名이라는 대별大別아래, 명을 다시 수受·상想·행行·식識으로 분류한다.
이렇듯 불교는 사람 쪽으로 와서 분석하길 좋아하며, 급기야 현상세계 그 자체를 오온으로 일컫기도 한다.
우리 식으로 번역하면 감각, 지각, 구성, 의식에 해당된다. 〔필자 주: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 이
오온을 모두 공하다고 관찰하여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난다”는 이 내용을 아예 시작으로 삼고 있습니다.〕
여기에 외재물이 자리할 구석은 많지 않다. 자이나교는 업을 만드는 물질에 신경을 많이 쓰지만, 불교는
사물에 항상성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관 작용에 더욱 관심을 쏟는 것이다. 오온이라는 표현
자체는 감각적 유물론의 영향이 강하지만, 불교가 후대로 갈수록 물질론과 거리를 두면서 오온은
현상세계 전체를 의미하게 된다. 이를테면, 불교 해석학으로서의 아비달마 학파에 따르면, 오온 가운데
식이 ‘마음의 왕(心王)’으로서 세계 이해의 중심에 서고 나머지 셋인 수·상·행은 ‘마음에 딸린 것
(심소心所 또는 심소유心 所有; belongings)’으로 설명된다. 〔필자 주: 아비달마학파란 부파불교를 말하는
데 그 중에서 ‘설일체유부’의 이론을 계승한 세친의 구사론이 이 문제를 다룬 최초의 논서입니다.〕
셋째, 자이나교는 윤회를 말하면서 그것에서 벗어나는 방도로서 실천적 행위의 중요성을 부각하지만,
불교는 연기를 말함으로써 신에 의해 결정된 윤회가 아닌 인간 행위의 윤리적 인과성을 강조한다. 인도
사유 가운데 가장 ‘윤리적’인 학파는 자이나교와 불교를 꼽을 수 있다.
여기서 ‘윤리적’이라 함은 인간의 도덕적 행위로 인간과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다. 신이
개입하지 않고도 인간 스스로 윤리적 상황을 창조하며, 개혁하고, 실현한다. 선악의 규율을 정하고 그
기준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인간으로서 범하는 죄악을 씻고 마침내 삶의 질곡에서 해방된다. 여기까지는
자이나교와 불교가 같다. 그러나 자이나교도는 전통종교 사상의 하나인 윤회를 받아들이지만, 불교는
그 윤회를 연기라는 인과율로 재해석한다. 자이나교도에게 윤회는 신이 개입되지 않는 자연의 진정한
모습으로, 일종의 자연법칙과도 유사하다. 영혼은 무수히 많고 무한한 공간을 점유하기 때문에 돌고 또
돌며,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도 보통 행운이 아니다. 그러나 나의 윤회에 절대자가 개입하는 것은
아니다.
윤회라는 영혼의 현상이 있고 내가 쌓은 업에 의해 윤회가 결정될 뿐이다. 윤회는 사실이지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내가 수행함으로써 나는 윤회에서 벗어날 수도,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필자 주: 출· 재가를
막론하고 한국불교는 윤회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엿보이는, 정통 자이나교의 윤회나 업의 무덤에서
탈출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느 세월에 윤회를 연기로 포섭해 진정한 붓다의 가르침에 다가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불교는 윤회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 영혼이 없고, 나의 정체성도 없는데, 어떻게
윤회할 수 있는가? 한마디로 윤회의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세계의 온갖 현상을 윤회가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나의 고통과 부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내가 없으니 업이 쌓일 곳도 없고,
업이 쌓이더라도 없앨 수도 없지 않는가?
불교는 모든 것은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연기는 업의 완전한 도덕적 이해를 가능하게 해
준다. 나도, 나의 고통도, 나의 미래도 업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나와 나를 둘러 싸고 있는
모든 것이며, 나의 고통은 내가 알게 모르게 저지르고 있는 행위의 결과물이고, 나의 미래는 결국 이런 모든
것들이 합쳐져 이루어진다.
이 때 카르마karma(業)는 인간적 행위에 다름 아니다. 만물에 대한, 사회에 대한, 자기에 대한 행위의 쌓임,
곧 성업成業이고 패업敗業이며 총괄적인 업적業績이다.
자이나교에서 업은 신의 손으로부터 떠났지만 윤회의 신화를 벗어나진 못했다. 그러나 불교의 업은
초인격적이고 초자연적인 굴레도 없다. 인간과 사회의 굴레만이 윤리적 주체를 중심으로 남을 뿐이다.
불교는 이처럼 자이나교와 다른 점이 확연히 있다. 불교는 영혼의 불멸을 믿지도 않고, 세계가 물질적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도 믿지 않고, 윤회가 신에 의해서 주어진다고 믿지도 않는다. 자이나교는
물질과 대비되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영혼이 떠돌다 돌아갈 물질세계를 상정했다. 죽으면 영혼으로
남고, 그 영혼은 그곳에서만 노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로 다시 태어나며, 영혼이 덕업德業 또는 죄업
덕분에 어떤 세상으로 환생할 것인지 결정되며, 그런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 영혼에서 물질적
카르마를 없애기 위해 수행하며, 마침내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윤회에서 벗어나서 해탈한다.
영혼이 있기 때문에 그 영혼이 갈 곳을 찾는 것은 추론의 과정상 자연스러워 보인다. 보통의 영혼은
돌고 돌지만, 수행을 통해 업을 모두 떼어내면 드디어 윤회에서 벗어나 해방을 얻는다. 〔필자 주: 이
내용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 교리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바로 자이나교의 교리라는 점을
상기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영혼을 부정하면서도 불변하는 물질적 실체도 긍정하지 않았다. 이 세계로
돌아왔으면서도 이 세계 속 사물의 영속적인 실체성을 부인한 것이다. 신이 세계를 창조하지도 않았고,
인간은 숙명에 의해 결정되지도 않았다. 자아도, 실체도, 업도 연기에 의한 것이므로 허구이다-차후에
개념화된 용어로 하자면, 공空하다. 아울러, 실천적인 면에서, 자이나교는 혹독한 고행과 철저한 살생
금지를 제안하지만, 불교는 고행이 반드시 깨달음을 가져다 줄 것 이라고 믿지도 않았고, 내가
죽이거나 나를 위해 죽이지 않은 고기는 먹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불교는 자이나교처럼 원칙적이기보다는 상황을 이해하려 했다. 남의 제사상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수 없는 것처럼, 얻어먹는 탁발승이 “고기를 넣어라, 빼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필자 주: 실제로
붓다께서도 그랬지만 현재의 남방불교 스님들은 탁발할 때 육식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은
남방 불교에서도 신도들이 ‘알아서’ 육식을 제한하는 경우는 있습니다.〕불교와 자이나교는 모두
전통의 술어인 업과 윤회를 받아들였다.
자이나교는 업을 물질화시켰고 윤회에서 신의 역할을 배제시켰다.
여러 학자들이 그랬듯이, 우리가 자이나교를 보면서 불교와 너무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런 점이다. 만일 윤회조차 불교가 받아들였다면, 불교는 자이나교와의 정체성 시비에서 자유로워
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역사를 통해 학파 간· 인물 간의 차이를 세부적으로 토론해야 할 것이지만, 자이나교와 불교를
단순하게 대립시키면, 이원론 대 일원론, 영혼불멸 대 영혼소멸, 윤회 대 반윤회라는 구조 아래 논의를
진행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거친 구별은 문제점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여기서 불교와 대비되는
것이 결코 중국철학도 아니고, 서양철학도 아니고, 베다나 베단타 철학도 아니고, 유식불교나
대승불교도 아니고, 오직 자이나교라는 점이다. 특히 불교 내부의 이론끼리 비교한다면, 위와 같은
대립구조는 각 학파와 그 비판자들에게 모두 적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심하게 말하면, 우리가 만나고 있는 불교의 모습이 외견상으로는 힌두교를 닮고 있고, 내용상으로는
자이나교를 닮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절마다 만나는 수많은 신상神像은 힌두교를 닮고
있고, 신비하고 신화적인 윤회이론은 자이나교를 닮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 주: 이 뼈아픈 지적에
동의할 수 없다면, 처음부터 한 번 더 이 글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종교라는 것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서로 교섭하고 변통하는 것이지만, 한국의 불교인들이 불교라는 정체성을 진정 갖고 싶어
한다면 불교와 힌두교나 자이나교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차이에 주목해야만 한다.
위의 논의에서 업을 신의 힘이 아닌 자신의 피와 땀으로 이룬다는 점에서, 자이나교의 윤회에서의
탈출〔모크샤moksa; 정신의 해탈을 의미하는 말〕을 불교와 마찬가지로 ‘해탈’이라는 용어로 쓴 것도
그들의 유사함 때문이었다. 우리가 아는 해탈이란 자신의 공력으로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자이나교와 불교에 똑같이 적용될 필요가 있었다. 다른 종파에서의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해방
(liberation), 방면(release), 구원(relief)으로 쓸 수 있지만, 불교와 자이나교의 그것만은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것이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아 보였다.
불교는 인격신의 요소를 없애고 업과 윤회를 설명해 낸 자이나교의 이론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불교가 영혼설과 윤회의 문제에 있어 자이나교와 같다면 문제는 심각해 진다. 한마디로, 영혼과
윤회를 말하는 불교는 자이나교와 다르지 않게 되고 만다.
티베트의 정치, 종교 수장인 달라이 라마는 환생에 대한 많은 시험을 통과해야 인정을 받습니다.
현재 인도에 망명 중인 달라이 라마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곧 환생과 윤회를
증명한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최근의 대담을 보면 윤회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비불교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티칸은 거의 모든 학문에 특정 수사와 신부들을 수학시키고 있습니다. 목적은 교회의 논리를
방어하기 위함입니다. 심지어 천문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적설계론> 같은 방어 논리가 아무런
노력 없이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방어’와 ‘선교’를 동시에 해내고
있습니다. 불교는 본래 ‘자기 것’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