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 자신의 작품에 대한 비평을 접하고 고민에 빠진 후배 작곡가가 있었다. 나라고 별반 나을 것 없었기에 어쭙잖은 위로 대신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1949~)의 단편집 한 권을 별다른 말 없이 건넸다. 그중 ‘깊이에의 강요’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그 젊은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작품들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어느 평론가가 별다른 악의 없이 이렇게 툭 던진 비평 한 줄을 접하고 그 젊은 예술가는 고민에 빠진다. “왜 나는 깊이가 없을까?” ‘깊이가 없다’라는 수군거림에 고뇌하다 무너진 그녀는 더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한다.
그녀가 세상을 등진 며칠 후, 그 평론가는 그녀를 기리며 이렇게 썼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 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을 다 같이 지켜보아야 한다니…(중략),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이고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블로그를 검색해 보니 독자들은 대체로 막연하고 무책임한 비평에 분노하고 비평에 편승한 수군거림을 경멸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스러진 가여운 젊은 화가에게 자신을 이입한다. 그래서 ‘함부로 남을 비난하지 말자’, 아울러 ‘남의 말에 신경 쓰지 말고 살자’라고 다짐한다. 비평(또는 비난)의 대상뿐만 아니라 독자도 이해할 수 없는 현학적 비평과 그것을 옮기는 수군거림은 어느 때 어느 곳이든 있기 마련이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훨씬 전인 1980년대에 쓰인 이 단편소설에 오늘날의 ‘댓글 폐해’가 이렇게 등장할 만큼.
그런데 좀 엉뚱한 생각이 떠오른다. 여기에 옮기기 민망할 정도로 누구나 알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일화 하나. 그가 다비드상 조각을 마쳤을 때 피렌체 공화국의 수장 피에로 소데리니(1452~1522)가 “다비드의 코가 조금 크게 보인다”라고 하자 그는 비계(飛階)에 올라가 미리 준비한 대리석 가루를 흘러내리며 끌로 조금 깎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소데르니가 하는 말. “이제야 조각에 생생한 삶을 불어 넣었소.” 괜한 시비에 신묘(神妙)한 대응이다. 비평에 속절없이 무너진 화가(실제로 소설 속에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가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평가에서 찾다가 파멸한 반면, 미켈란젤로는 거부할 수 없는 부당한 평가를 재치있게 넘기며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기념비적 조각 작품을 남겼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타인의 평가에 대응하는 자세는 다양하다. 이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그에 연연하는 사람, 누가 무어라 하건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귀 기울이되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하는 사람. 연연하여 자신의 길을 잃는 것이 어리석음이라면 아랑곳하지 않는 것은 자신감을 넘어 오만과 독선이다. 타인의 입과 댓글을 제어할 근거도 방법도 없으니 타산지석(他山之石)과 선악개오사(善惡皆吾師)를 되뇌며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겸허히 구분하는 것이 당연지사다.
아주 오래전 TV 교양 프로그램에서 접한 프랑스 어느 무명 화가의 한마디. “저는 그림을 그릴 때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림 그리기를 다 마쳤을 때, 그때 저는 늘 가장 큰 불행을 느끼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 그림이 제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저 그냥 스쳐 갈 수도 있었던 그의 짧은 한마디가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는 것은 그때까지 갖고 있던 ‘예술가로서 사는 삶’에 대한 생각을 그가 뿌리째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산고(産苦) 끝의 희열(喜悅)’, 즉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전문가와 관객의 갈채를 바라며 고통 속에 몸부림칠 것인지, 아니면 작품을 구상하고 만드는 과정에서 행복할 것인지, 그것을 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작업 과정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어려움과 헛된 욕심에서 비롯한 ‘의미 없는 고통’을 구분하고 나니 어려울지언정 행복하다. 완성한 작품이 단 한 번도 맘에 들었던 적이 없었음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고통을 피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도 부족한 능력 때문이다. 결과는 절대로 내 능력 밖의 것일 수 없으므로. 그래서 늘 좌절을 거듭한다. 하지만 그 좌절이 더는 고통스럽지 않다. 오히려 언제나 또 다른 시작의 이유가 된다. 과정에서 행복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그리고 타인의 말은 겸허히 듣되 수용 여부는 스스로 결정하면 될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