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사외도와 불법>
우선 불교에서 말하는 6사외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푸라나 캇사파Purana kassapa로 도덕부정론자입니다. 그는 선악의 구별도 없고,
선행과 악행의 구별도 없어 어떤 일에 대한 과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당연히 인과도 없고 업도 없고, 세상은 우연에 의해 좌우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건 지금
생각해도 대부분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두 번째, 막카리 고사라Makkhali Gosala로 숙명론자입니다. 불교에서는 흔히 사명외도
邪命外道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은 12가지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을
하며, 영혼도 그 구성요소 중의 하나라는 유물론을 말합니다. 그가 숙명론자로 분류되는
까닭은 불교의 인因과 연緣에 의한 과보果報를 철저히 부정하며, 인과 이전에 이미 일체는
결정되어진대로 갈 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이 의지작용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이미 결정되어진 대로 움직여진다는 의지意志 작용까지 부정한
사상가였습니다. (불교의 업業을 이런 개념으로 인식하는 신도들도 사실상 많습니다.)
세 번째, 아지타 케사캄바리Ajita Kesakambalin로 단멸론적斷滅論的 유물론자입니다.
불교에서도 인정하는 물질의 구성 요소인 사대四大 라고 불리는 지地·수水·화火·풍風만이
상주하는 유일한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존재나 삶은 이 지·수·화·풍이 일시 결합하였다 다시
제자리로 흩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니 영혼이나 사후의 세계, 윤회 등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삶이 처음이자 끝이니, 인생을 즐겨라, 과보도 없다는
시원한(?) 주장을 폈습니다. (이런 철학을 알아서가 아니라, 태생적으로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네 번째, 파쿠다 캇차야나Pakudha Kaccayana로 칠요소설七要素說론 자입니다. 그는
세상과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를 지수화풍 4대에, 고락苦樂·생명生命·영혼靈魂의 3가지를
더해 7요소라고 주장했습니 다. 따져보면 물질적인 4대 외에 감각이나 느낌 등 정신적인
것(영혼) 3가지를 더한 것입니다. 없어지지 않는 요소라고 주장하는 3가 지가 고락·생명·
영혼이니, 자연스럽게 나고 죽음이 따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대략
이 시대에 서양철학의 시조라 불리는 탈레스Thales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창했으니,
당시 인도의 철학과 사상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산자야 벨라티풋타Sanjaya Belatthiputta로 회의론자입니다. 산자야는 사물과
현상의 이해에 100% 부합되는 타당성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설령 그런 논리에 부합되는
진리가 있다 해도, 그것을 이해하고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 다.
그래서, 회의론자 혹은 불가지론不可知論의 사상가라고 말합니다. 이런 산자야의 사상을
‘미꾸라지처럼 미끄러워 잡기 어려운 논의’ 라고 비유하기도 합니다. 산자야는 사후의 세계,
선악의 과보같은 현재의 불교신도들에게는 너무나 뻔한 사안에 대해서도 답변을
보류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산자야의 태도를 ‘이런 무책임한 사람이 어찌 수행자의 대장일 수 있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의 결론 없는 결론이 잘못된 것일까요? 사후의
세계에 관한 것은 접어두고, 선악의 과보에 대해 여러분은 현세에 선인선과 악인악과가
실현되고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현재 처한 어떤 상황이 스님들이 말하듯 전생의 과보인지,
내생의 인因으로 작용할지, 아니면 그저 현생에 내가 행한 과거에 대한 결과물일지, 어찌
단정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근원적 접근은 ‘우주가 어떻게 형성 되었으며, 그 후 150억
년쯤에 어떻게 인간이 만들어지고, 인간의 최초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라는 궁극적인
명제로 전개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그것을 설명할 때가 아니니, 더 멀리 나가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붓다께서
공개적으로 누누이 밝히신 최고의 제자들인 사리불과 목건련이, 바로 산자야의 제자로서
250명을 이끌고 붓다의 가르침에 합류했다는 사실이, 산자야가 그리 녹록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여겨지는 근거입니다. 그렇다면, 사리불과 목건련은 산자야에게서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을 붓다에게서 발견한 것일까요? 같이 고민해 보시지요.
(신도들에게 평소의 신행信行에 고민거리를 주지 못하는 한국의 불교는, 붓다를 신神으로
숭배하게 조장한 과보를 받아야 합니다.)
여섯 번째, 니간타 나타풋타Nigantha Nataputta라는 자이나 교주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6사외도란 붓다의 가르침에서 볼 때, 6가지 대표적인 그릇된 견해라는 말입니다.
당시에는 반 바라문주의를 주창하는 자유사상가들이 상당수 출현한 시기였고, 62가지의
견해들 중 대표적인 6가지를 추려 6사외도라 부르는 것입니다. 2,50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냉정히 살펴보면, 자이나교를 무조건 외도外道 즉, 사도邪道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자이나교는 아직도 인도에서는 건재하기
때문입니다.
자이나교의 교리를 설명드릴 테니, 그 교리가 외도가 아닌 독립된 종교로 받아들이시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데, 자이나 교리를 설명한 후
한국불교의 교리와 비교를 하려는 저의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이나교는 일체의 존재를 영혼, 혹은 생명력을 가진 명아命我와, 그 둘이 전혀 없는
비명아非命我로 분류합니다. 불교에서 유정有情(감 각이 있는 존재)과 무정無情(감각이
없는 것)으로 구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구별이 불교에서는 이원론화까지는
도달하지 않지만, 즉 정신과 육체를 불교에서는 전혀 다른 두 개의 것으로 보지 않지만,
자이나교에서는 명확하게 두 가지로 구별하는 이원론을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자이나교 교리로 설명을 하자면, 인간은 정신(jiva)과 육체(ajiva)의 결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들지 않은 명아命我(jiva)에 도달하는 것이 수행의 완성인
깨달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순수한 지바가 업業이라는 ‘실재’에 더럽혀지거나
발목이 잡혀, 윤회에 말려든다고 말합니다. 곧 업에서 해방되는 것이 윤회 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참회와 고행의 수도修道를 아주 엄격히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불살생과 무소유 등의 계율이 매우 철저히 지켜야
할, 업에서 벗어나는 수행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불살생의 계를 지키기 위해 물도 미생물을 살리려고 걸러먹고(그렇다고
다 걸러지지는 않겠지만), 무소유를 실천하기 위해서 아예 발가벗은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정도라면 불교의 입장에서는 계戒를 지켜야 하는 수준이 아니라, 생활
자체가 일거수 일투족 모두 대단히 엄격한 계라고 말할 것입니다. 실제로 불교의 5계는
외형상 자이나교의 5계와 똑같습니다만, 붓다는 고행주의를 반대했고 보시물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관대했습니다. 데바닷다가 붓다께 갖고 있던 불만이 바로 이 수행의
‘느슨함’에 대한 반발이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