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
내시(內侍)와 환관(宦官)은 원론적으로 사내 노릇 못 하는 것은 같으나 내시는 내부(內部)에서 활동하는 시종, 즉 왕의 시종을 가리키는 말이며, 환관은 거세된 남자로, 궁에서 일하는 직책이었다. 본래 내시직(內侍直)에 재예와 용모가 뛰어난 세족자제(世族子弟) 또는 시문(詩文), 경문(經文)에 능한 문신을 임명했으나 고려 의종(毅宗) 이후 점차 환관을 임명하였다.
환관은 신체 특성상 여성들의 숙소에서 경호원이나 하인 등으로 일했으며 이들 중 왕의 측근에서 보좌하던 직책을 내시라고 불렀다. 환관이 되는 길은 선천적인 불구의 경우, 고용을 조건으로 거세당하는 경우, 형벌을 받고 거세되는 경우 등이 있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환관은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이다. 사관이던 사마천은 흉노족에게 항복한 장수(將帥)‘이릉’을 변호하다 거세형을 받았고, 이후 사면되어 궁에 돌아와 “사기”를 완성했다.
서양에도 페르시아와 로마 시대에 환관이 궁정에서 활약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탈리아에서는 환관은 아니지만 카스트라토(castrato)라고 불리는 여성 음역을 노래하는 남성 가수를 만들기 위해 사내아이들이 사춘기를 맞이하기 전에 거세하는 관습이 있었다.(여성들이 교회에서 노래하는 것이 금지되었던 시대의 산물) 그 외에도 성적인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 스스로 거세하는 성직자들도 있었고, 3세기 무렵에는 거세한 자들로만 이루어진 종파가 존재하기도 했다.
우리역사에서 환관은 신라시대의 환수라는 기록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며 고려 후기와 조선시대에는 내시로 통칭되었다. 고려의 환관은 부곡(部曲)출신자, 관노(官奴), 가노(家奴)출신자 및 천예(賤隷)계 무녀(巫女), 관비(官婢)의 소생들로서 대부분 천민 출신이었다. 이들은 관직을 가질 수 없고 녹봉도 없었으며, 다만 의식상의 편의만 제공되었다.
조선시대 내시는 내시부(內侍府)의 거세된 남자관원으로, 궁궐에서 왕이나 왕비, 세자를 모시던 내관(內官)을 말한다. 감선(監膳 :궐내 음식물감독), 전명(傳命:왕명의 전달), 궐문의 수직(守直), 청소, 궁중의 각종 제사, 시릉관(侍陵官)으로서 왕릉의 시묘살이, 진상품 관리, 도성 밖 왕실전용 잠실(蠶室)에 파견되어 누에치는 일의 감독 등, 임무를 맡았다.
관계상 일반 관직과 구별되고 엄격히 규제되었고, 자질향상을 위해 사서(四書),소학(小學),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을 교육받았고 매달 시험을 치러야 했다. 성적평가는 특별근무일수로 환산되어 정상적인 근무일수와 함께 고과(考課)의 기준이 되었으며, 1년에 네 번 근무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교육과 성적평가는 한편으로 이들의 통제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정원은 140명에 이르렀는데 종2품 상선(尙膳:임금의 수라상 감독)이하 상온(尙醞),상다(尙茶),상약(尙藥),상전(尙傳),상책(尙冊),상호(尙弧),상탕(尙帑),상세(尙洗),상촉(尙燭),상훤(尙烜),상설(尙設),상제(尙除),상문(尙門),상경(尙更) 및 종9품상원(尙苑:정원관리 담당)에 이르기까지 모두 15품계가 있었으며, 이속(吏屬)으로 서원(書員) 2인과 사령(使令) 1인이 있었다.
※ 이속 : 고려, 조선 시대 품관(品官=벼슬아치) 이외의 하급 관리직으로 중앙과 지방의 모든 관아에서 기록, 문서, 전곡(錢穀)을 관장하던 말단행정에 종사자(구실아치)
※ 사령 : 중앙과 지방 관청에서 심부름 등 천한 일을 맡고, 군관(軍官),포교(捕校) 밑에 있으면서 죄인에게 곤장을 치는 등 하는 일이 여러 가지여서, 그 일에 따라 조례(皁隷),문졸(門卒),일수(日守),나장(羅將),군노(軍奴) 등으로 달리 불렸다.
내시는 궁 밖 출입을 하지 않고 궁에서 먹고 자는 장번(長番)내시와 근무가 있는 날만 들어와 근무하는 출입번(出入番) 내시가 있었다. 출입번은 대전출입번 42명, 왕비전 출입번 12명, 세자궁 출입번 12명, 빈궁 출입번 8명이 있었으며, 각 빈궁(嬪宮)에는 별도로 상직(上直)하는 어린 환관 90명이 있었다. 임금이 묵는 건물인 대전에 근무하는 대전장번은 정원(定員)이 없었으며, 세자궁(世子宮) 장번도 정원이 없었으나 대전장번이 겸하였다.
내시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으나 환처(宦妻) 또는 동정녀(童貞女)라 불리던 부인과 자녀를 두고 생활했다. 내시의 부인도 사대부의 부인과 같이 정1품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작(封爵)되었고 자녀를 입양(入養)해 대를 이었다. 양자로 갔더라도 양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성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돌림자를 따라 이름을 지었다. 내시들의 족보(族譜) <양세계보(養世系普)>가 있고 양자에 의해 이어진 내시 종파(宗派)는 계림파(桂林派), 판곡파(板谷派), 강동파(江東派), 장동파(壯洞派), 과천파(果川派),서산파(西山派) 등이 있었다.
내시 중에는 공신(功臣)에 책록 되어 많은 토지를 조정으로부터 하사받은 자도 많았으며, 왕의 권력을 등에 업고 비리를 조성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연산군 때에 김자원(金子猿)은 왕의 총애를 믿고 횡포를 일삼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때에 죽음을 맞기도 하였다. 이때 김처선(金處善)은 왕에게 바른 말로 직언(直言)을 하다가 죽음을 맞았듯이 대부분의 내관은 왕실을 위해 충성을 다한 충직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출입번(出入番) 내시들은 궁궐 가까이 종로구 봉익동과 효자동에 집단 거주하였고, 왕을 근시하는 장번환관은 대전 장번내시로 대감 호칭을 받을 만큼 부귀영화를 누리기도 하였다. 모시던 왕이 세상을 떠나면 궁궐 밖에 나와 살았으며, 죽을 때까지 소복하였다고 한다. 내시는 죽어서도 집단적으로 묻혔는데, 도봉구 쌍문동, 파주시 교하면, 양주군 장흥면 등에 묘지군이 있다. 이 내시제도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