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碑石)
고인(故人)의 사적(事蹟)을 칭송하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문장을 새겨 넣은 돌로 새겨 넣은 글은 금석문(金石文)이라 하여 귀중한 사료(史料)가 된다.
비석의 시초는 옛날 중국에서 묘문(廟門) 안에 세워 제례(祭禮) 때 희생으로 바칠 동물을 매어 두던 돌 말뚝에서 비롯되었다 하며, 또 장례식 때 귀인(貴人)의 관을 매달아 광내(壙內)에 공손히 내려놓기 위하여 묘광(墓壙) 사방에 세우던 돌을 말하기도 한다.
그 돌을 다듬고 비면(碑面)에 공덕을 기입하여 묘소에 세우게 된 것은 훨씬 후세의 일이며, 당시는 비석이라 하지 않고 각석(刻石)이라 하다가 전한(前漢) 말기나 후한 초부터 비석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국은 고구려 때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가 세워진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종류의 비석이 성행하여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묘비(墓碑)
무덤의 상석(床石) 우측에 세우는 비로, 아래에 농대(籠臺) 또는 반석(盤石), 그 위에 비신(碑身), 맨 위에 가첨석(加檐石)을 얹고, 특별한 경우에는 귀부(龜趺) 위에 비신을 얹고 이수(螭首:뿔없는용, 새끼용)를 얹는다. 비신에는 사자(死者)의 관직, 본관, 성명, 행적, 자손, 생몰연월일, 장지 등을 기록한다. 요즈음은 가첨석이 없고 본관 ·성명, 생몰연월일, 자손의 이름만 기록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묘표(墓表)
무덤앞에 세우는 푯돌(표석(表石) 문체가 비갈(碑碣)과 비슷하다. 천표(阡表),빈표(殯表),영표(靈表)는 모두 뜻이 다르지만 명대(明代) 이후로는 모두 합쳐 묘표라 부른다. 천표는 무덤 앞에 세우는 표석이고, 빈표는 장사지내지 않았을 때 세우는 표석이며, 영표는 처음 사람이 죽었을 때 세우는 표석을 이르는 말이다.
후한 안제(安帝) 원년(114)에 처음 세워졌고 비갈처럼 신분이나 계급에 따른 제한을 받지 않아 누구나 세울 수가 있다. 신도(神道)에 세우는 신도표(神道表)도 성격은 묘표와 같다. 우리나라에서 묘표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기이며 조선조에 접어들면서 점차 성행해오다가 송시열(宋時烈)에 이르러 묘표의 체재가 정착을 되어 후일 문인들의 금석문의 정례(定例)가 되었다.
서민의 경우 그 크기가 두 자(尺])로 한정되었고 만약 이를 어기거나 허위 사실을 기재할 경우 강력한 처벌을 받았다. 묘표의 특징은 비부(碑趺:비석의 받침돌)에 있어 귀부(龜趺)를 사용하지 않고 방부(方趺:네모로 깍은 받침돌)를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정조 대 이후의 비좌(碑座)는 거의 문양을 새기지 않았으며, 모양도 장방형에서 사다리꼴로 변모하였다.
중요내용으로는 죽은 이의 성명, 자호, 관향, 선조, 현조(顯祖), 부모, 생졸연월일, 처, 자녀, 손증의 선계 손록과 죽은 이의 행적, 찬자의 송사(頌辭), 묘소, 찬자의 성명 등이 수록된다. 그러나 찬자에 따라서 기술하는 순서가 다르다. 한정적 공간에 글을 새겨 넣어야 하기 때문에 쓰고자 하는 내용의 골자만을 수용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내용면에서는 자료적 가치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묘갈(墓碣)
‘묘갈’과 ‘묘비(墓碑)’는 본래 묘소 앞에 세우는 비석으로 묘갈은 형태가 둥글고 묘주(墓主)의 품계가 5품 이하로 본래는 구분되었으나 후대에 와서 서로 통용되었다. <후한서 後漢書> 주(注)에 “네모진 것이 비(碑), 둥근 것이 갈(碣)이다.” 하였다. 비의 체재(體裁)는 기운차고 원숙하며 고상함하고, 갈의 체재는 소박하고 고상하다.
당대(唐代)에는 관직이 4품 이상은 귀부이수(龜趺螭首 : 거북모양을 새긴 비석의 받침돌과 용모양을 새긴 비석의 머릿돌)인 비를 세울 수 있고, 5품 이하는 방부원수(方趺圓首)인 갈을 세우도록 규제하였지만 후대에는 비와 갈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우리나라의 갈은 고려시대에도 있었으나 조선조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움트기 시작하다가 중엽 이후에 성행하게 된다.
묘갈은 엄정한 시비선악(是非善惡)을 판단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죽은이의 방명(芳名 : 이름, 좋은 평판)을 후세에 유전시키려는 것이 사명이므로, 객관적 시각에서 한 개인의 진실 된 삶의 모습을 제시하려는 사가의 열전(列傳)과는 다르게, 나쁜 것은 빼고 좋은 점만을 기록하는 속성이 있어 내용면에서 재료적 가치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事蹟)을 기리는 비석. 신도(神道)라는 말은 사자(死者)의 묘로(墓路), 즉 신령의 길이라는 뜻으로 풍수지리상 묘의 동남쪽을 귀신이 다니는 길, 즉 신도(神道)라고 하여 대개 무덤 남동쪽에 남쪽을 향하여 세운다. 중국 한나라 때 처음 세웠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에 한하여 세우는 것으로 제도화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신도비가 태조의 건원릉신도비와 세종의 영릉신도비등 초기 왕릉에만 있으며, 이후 국왕의 사적은 실록에 기록된다는 주장에 따라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 반면 많은 사대부들은 신도비를 세웠는데, 실제 관직이나 사후에 추증된 관직(증직, 贈職)으로 정2품 이상인 경우에 세울 수 있었다. 비의 크기를 보면 높이가 네 척 정도부터 일고여덟 척되는 큰 비까지 있어 웅장한 자태를 보이고 있다.
조선 후기로 가면 신도비의 비제(碑題)도 길어지고 비문도 장황하게 길어져서, 비양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측면을 지나 비음까지 이어진 경우도 곧잘 나타난다. 이는 조선 후기 가문의 성세를 돋보이고자 하던 추세에서 나타난 결과이다. 게다가 비문의 내용 가운데에는 과장된 것들이 흔해 역사적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