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화사관(慕華史觀)으로 기록된 삼국사기, 김부식(金富軾)은 철저하게 중국의 입장에서 삼국사기를 편찬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많은 부분을 폄하하고 누락시켰다. 철저한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이며, 현실에 안주하는 성향의 수구권신자(守舊權臣者)” 라 평가되는 김부식에 대해 일말의 단서(但書)로 세설(世說)을 변명하고자 한다. *김부식
물론 그의 생애 곳곳에 묻어나는 흔적, 사대주의자이자 권력지향주의자이며 수구주의자였다는 평가는 잠시 미루어 보자. 우선 삼국사기 기록이 절대 권력자와 수구 세력의 야합에 의해 수정(修訂), 삭제(削除)되었다는 역사적 진실 앞에 서면 모골이 송연할 수밖에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현전하는 대표적 역사서이다. 잊혀져가는 우리 고대사를 반추할 수 있게 하는 역사서이다. 고려가 만든 정사(正史)요, 관찬사서(官撰史書)였다. 그러나 이 관찬사서는 짓이겨지고, 뭉개져 왜곡되었다는 사실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 사실적 기록을 보자. “하윤(河崙)ㆍ이첨(李詹)ㆍ권근(權近) 등이 《삼국사기》에 수정을 가하여 속된 것과 번잡스러운 것을 삭제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54권) 앙엽기(盎葉記)에 삼국사략(三國史略)을 설명하면서 기록한 부분이다.
수정은 기존의 잘못된 것을 고쳐서 바로잡거나 그 내용을 변경하는 것이며, 삭제는 깍아서 없애거나 지워버림을 말한다. 황제국 관찬사서를 뜯어 고쳤고, 깍아 내고 지워버렸다고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속된 것과 번잡스러운 것”이라 한 바, 삼국사기의 ‘속되고 번잡한 문구’는 어느 부분이었을까?.
‘속된 것’은 부정적 개념으로 정(淨)하지 못해 더러운 것이다. 가증스러운 일, 또는 거짓말이다. ‘번잡한 것’은 뒤숭숭하고 어수선하며, 사람이나 사물이 번거롭게 뒤섞여 복잡함을 나타낸다. 종교적 개념(槪念)까지 담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정하지 못해 더럽고 거짓말 투성이며, 뒤숭숭하고 복잡하다는 의미일 게다. 김부식을 매개로 하여 의도적으로 재 편찬, 위조했다는 의미이다.
참으로 난해하고, 확인할 방법은 없다. 다만, 신생 조선의 국시(國是)인 숭유(崇儒)를 정착시키기 위해 종래의 관습, 제도 등을 단번에 깨뜨리고 새롭게 한다는 개혁(改革)의 뜻이 담겨있다。 심사(深思)할 만큼 심사했고, 숙고(熟考)할 만큼 숙고했다는 뜻의 변명일 터이다. *삼국사 <출처: 민족문화대백과>
가히 기존의 체제(體制)를 변혁(變革)하기 위하여 이제까지 권력을 장악하였던 계층을 대신하여 그 권력을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탈취하는 혁명적(革命的) 권력 교체의 형식을 빌려왔음을 알 수 있다. 이 거대한 권력의 비호 아래 저질러진 분탕(焚蕩)의 역사가 주는 교훈을 새겨 볼 일이다.
조선은 결코 고려를 승계(承繼)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한 나라의 관찬사서를 수정, 삭제하여 망신주고 때리고 부수었다. 김부식의 일부 유교사관(儒敎史觀)을 볼모삼아 사대(事大)에 편승한 사서로 변조(變造)했다는 뜻이 담겨있다.
서긍(徐兢)이 부러워했던 수많은 고려사서 중, 삼국사기가 분서(焚書)를 면하고 어렵사리 살아남은 이유 중의 하나일 게다.
물갈이는 성공했는가?. 기득계층의 수구 보수 세력이 활개를 치고 새판 짜기를 시도한 지 600여 년, 아직도 고대사(古代史)가 늪에서 헤매고 있음을 보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음이다.
이덕무의 기록은 계속된다.
“서사가(徐四佳)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삼국사기》는 《통감(通鑑》ㆍ《삼국지(三國志)》ㆍ《남사(南史)》ㆍ《북사(北史)》ㆍ《수서(隋書)》ㆍ《당서(唐書)》의 내용을 거두어 모아서 전(傳)ㆍ기(紀)ㆍ표(表)ㆍ지(志)를 만든 책이니, 믿음직한 것이 못된다. 사실을 적은 대문에 있어서는 매번 다른 책을 인용하였으니, 더욱 사기를 쓰는 체모가 아니다. 또 침벌(侵伐)ㆍ회맹(會盟) 등의 일과 같은 것은 한 사건을 신라기ㆍ고구려기ㆍ백제기에 중첩으로 적되 문체를 조금도 변경하지 않았으니 취할 것이 못된다.’ 하였다.” 하여 삼국사기는 당연히 수정, 삭제될 수밖에 없었음을 당연시 했다.
위 서사가(徐四佳)는 서거정(徐居正 1420년∼1488년)이며, 필원잡기는 그의 저술집이다. 1444년(세종 26)경에 저술한 것으로 추측되며 초간본은 1487년(성종 18)에 간행되었다. 권근 등이 주동이 되어 삼국사기를 손질한 해가 1403년(태종 3)이니, 40년 후 기록이다.
대 문장가라 칭송되던 서거정, 참으로 방대한 사서 열독이 경이롭다. 평론 또한 거침이 없다. 뉘라서 감히 항명(抗命)을 했을까?. 상실(喪失)과 단절(斷絶)의 시대, 강자의 논리 앞에 서있던 민초들은 한없이 작아지지 않았을까?.
그는 왜 이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을까. 그의 외조부가 권근이다. 외조부의 명리(名利)를 위해 역사적 사실로 남겨 놓았을 개연성(蓋然性)이다. 행촌(杏村) 이암(李嵒)과 고려 좌정승 한종유(韓宗愈)와도 연계된다.
김부식은 철저하게 중국의 입장에서 삼국사기를 편찬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상당 부분을 폄하하고 누락시켰다고 했다. 요점을 정리해 보자.
첫째,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역사를 왜곡했으며, 둘째, 고구려, 백제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축소시켰다. 셋째, 고구려는 장수왕대로 부터 기록, 호태왕을 의도적으로 누락시켰으며, 넷째, 지역을 모호하게 하고, 바꿔 기록했다. 다섯째, 철저한 사대적, 유교적 사상의 기록이다.
사기(史記)가 위작(僞作)되지 않았다면, 위의 질책과 비난은 당연할 터이다. 단군조선이 엉망이 되고, 대륙과 한반도 지명이 혼선을 빚도록 만들었다. 신라 중심 사관이 되었다. 유교적 사관으로 무장되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전면 개편되어 날조된 이 역사서를 어디까지 수긍해야 할까?. 김부식이 편찬했으되, 이름만 빌려 왔을 뿐 그의 작품이 아니게 되었다.
후대를 위한 기록이 수정, 삭제되어 황폐화되었다. 역사에 대한 수구세력의 비상식적이고 무자비한 폭거(暴擧)요, 폭력이다. 진정한 역사에 대한 일말의 배려심도 없이 사라졌다.
수구세력이 휘두른 칼날에 베인 역사의 상처는 600백 여 년 동안 사대(事大)에 묻혀 지나는 줄 몰랐다. 이제 심장에서 핏물이 배 나오고 나서야 겨우 깨달음으로 다가오고 있음이다.
1174년 고려는 한 질의 삼국사기를 송나라에 보냈다. 왕응린(王應麟 1223~1296)은 그가 지은 옥해(玉海)에 합본했다하나 현존하지 않는다는 답변이다. 이 때의 책명이 해동삼국사기(海東三國史記)이다.
2차 판각은 성암본(誠庵本)으로 열전의 일부가 남아 있고, 일본 궁내청(宮內廳)에 소장되어 있다고 했다. 3차 판각은 1394년(태조 3)에 있었으며,
4차 판각은 1512년(중종 7)에 있었으며 이는 이계복(李繼福)의 발문으로 확인된다. 시기적으로 보아 송나라에 보낸 판본 외에 믿을 수 있는 삼국사기는 없지 아니한가.
*미확인 지명으로 처리한 360개 지명의 일부(삼국사기 후주).
*미확인 지명 중, 확인된 지명
1차 본(本)으로 보이는 삼국사기의 책명은 해동(海東)이 있되 분명 ‘삼국사기(三國史記)’이다. ‘삼국사(三國史)’라는 책명은 수정, 삭제되어 변조된 지 1백 년의 시차가 나는 4차 본 이후의 책명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일제가 삼국사를 ‘삼국사기’라 폄하했다는 논리는 지엽적(枝葉的)이지 않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들 사서가 진서(眞書)인양 이를 인용, ‘삼국사(三國史)’라 우기는 우(愚)는 삼가야 할 일이라 본다.
“十二月壬戌金富軾進所撰三國史”라는 기록은 고려사 인종 23년 조에 나온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도 ‘삼국사(三國史)’라 했다. 고려의 기록이라 항변하나 두 사서는 유교사관으로 왜곡되어 은폐된 조선의 작품이라 믿기 어렵다.
정가신(鄭可臣)의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 이인복(李仁復)과 이색(李穡)이 지은 고금금경록(古今金鏡錄),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을 모본(母本)으로 이를 인용, 고려사 편찬 후 없앴다.
*高麗史 <출처: 다음 백과사전>
다섯 차례의 수정과정을 거쳐 78년 만에 나온 사서이다. 그 편찬과정에서도 시시비비가 끊임없이 나왔다. 고려사에 단군 기록이 단 한 건 밖에 없다는 사실은 왜 간과하고 있는가?. 식민사관 만을 비판하고 그것에 분노하고 울분만 할뿐 해결책을 제시한 것은 무엇인가?.
식민사관은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외세(外勢)만을 탓하기 전, 고대사를 폐기시킨 선대(先代)에 대한 성찰(省察)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내 선대의 행위이니, 용서하고 포용해야 한다는 논리는 제고되어야 할 것이다.
노벨 문학 수상자 가오싱젠이 "한국이 역동적으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정서적 빈곤을 극복하지 못하면 희망이 없다"고 충고한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현전하지 않는 삼국사기로 찬, 반의 시시비비는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지속될게다. 유교사관으로 무장한 새 왕조의 입맛, 그 맛에 맞춰 사대주의 사서로 날조한 배반과 야합(野合)의 역사 기록 앞에 무릅을 꿇을 수밖에 없는 답답한 심정을 가누기가 힘든다.
우리 모두의 염원을 담아 1차 사료를 찾아 중앙아시아, 유럽 일대까지 추적 중이다. 가시거리에 근접해 가고 있다. 햇살을 기대해도 좋으리라고 본다.
김부식 가계는 손자 김군수(金君綏) 대(代)에서 끊겼다. 이 또한 누구의 소행일까?. 이 억울함을 전할 구전(口傳)마져 차단한 것은 아닐까?. 김부식, 그만 그를 놓아주면 어떨까?.
-한눌의 ‘고대사 메모’ 중에서. 조회 490.15.07.01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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