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바위 전설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신라 지증왕(500-513)때 초동 못이 있는 북쪽 마을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을 일찍 여읜 며느리가 어린 3남매를 데리고 시아버지와 함께 사는 집이다. 그 해 가뭄이 계속되더니 늦여름에 때아닌 큰 홍수가 났다. 낙동강물의 범람으로 인해 넓은 초동 들판은 말할 것도 없고 봉황 골짝까지 물에 잠기었다. 마을마다 굶어 죽는 일이 허다했다. 날만 새면 부잣집 앞에는 바가지를 들고 동냥하는 이가 많았으나 인색한 주인은 아예 모르는 척 하며 동냥은 주지 않고 욕만 해댔다. 하루는 소구령 마을 뒤 덕대산 암자에 있던 스님이 자루를 들고 쌀 한 되 보시를 하라며 집주인에게 고했더니 쌀은커녕 소똥을 자루 속에 넣어주자 이것을 본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처사를 나무라며 몰래 쌀을 치마폭에 싸서 스님에게 드렸다. "嘉祥(가상)한지고" 이렇게 중얼거리며 "이런 집엔 아까운 며느리로다. 부처님의 자비로고" 하고는 "내일 이 집에 이변이 일어날 테니 집을 떠나되, 떠난 다음 어떤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당부하며 떠났다. 며느리는 평소 시댁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던 그녀는 다음날 스님 말대로 멀리 창녕으로 가리라 마음을 먹고 아이 둘은 걸리고 젖먹이는 업고 오방동 갈고개 *江東邱(강동구)가 있는 고갯길 가운데 이르자 갑자기 천지를 진동하는 요란한 소리에 놀라 그만 뒤를 돌아보는 순간 자기 집은 낙뢰(落雷)에 맞아 날아가 버리고 그 자리에는 지금의 초동 못이 되어버렸고, 여인은 아기를 업은 채로, 두 남매는 길 양옆에 선 채로 오방마을 한가운데 있는 신작로에 떨어져 바위로 굳어 버렸다.
그 후 500년쯤 지나 고려 목종(998-1010)때 금강산을 세계 제일의 산을 만들고자 전국 고을 수령에게 진귀한 모양의 바위들을 응모하게 했다. 이때 오방 마을 앞길에 있던 애기 바위가 원님으로부터 소식을 접한 이 바위는 금강산으로 가려 했으나 몸은 무겁고 아기까지 업은 데다 두 남매 바위까지 데리고 가는 것은 무리라 생각하며 하얀 밤을 지새는데 꿈에 호랑이가 나타나 현몽하기를 "오방동 윗마을 뒤 백성(百姓)골에 있는 칡덩굴을 걷어 애기와 함께 동여매어 있으면 아무 날 아무 시에 구름이 내려와 너희를 데려 갈 것이다. 그리고 두 아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라. 젖먹이만 업고 있되 금강산에 도착하기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 하고는 사라졌다. 그 날이 되자 시킨 그대로 애기를 업고 오방 뒷산으로 구름을 타고 가는데 두고 온 두 남매 바위가 애처롭게 엄마를 불러대자 엄마 바위는 자기도 모르게 "이내 올 테니 싸우지 말고 있거라" 하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만 날아가던 바위가 쿵하며 지금의 함박산(芍藥山) 정상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 바위 모양이 엄마가 아기를 업고있는 모양이기에 애기 바위라 부른다.
오방리 앞 한길 가운데 담배집에서 고개쪽 20M 지점에 길 남측엔 누이 바위로 마치 직육면체의 옷장을 세운 형상으로 한길과 나란히 서있어 목동들이 말이라고 하며 올라타기도 하고, 그 위에서 연을 날리기도 했다. 반대편 마을 쪽에 있는 동생 바위는 번데기 모양의 바위가 세로로 서있어 아무도 오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남매 바위를 들바위라고도 부른다. 이유인 즉 농경사회에선 곧 힘이 자산이었다. 명절날이 되어 마을 머슴이나 장가갈 나이가 든 장정이 되면 응당 마을 앞 들바위 앞에 모여 힘자랑을 겨루었다. 자신의 몸통만 한 들바위를 들어올려 일곱을 세 번 헤아릴 때까지 버티지 못하면 나이 들어도 반말을 들어야 했고, 품을 팔아도 반품밖에 받지 못했다 한다. 지금도 애기바위가 있는 함박산 근동 마을 사람들은 전설 속의 3남매가 애기바위 엄마의 후광으로 위대한 큰 인물이 되어 자기네들 마을에서 너더댓 명이 환생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큰 인물이 많이 나올 것으로 믿고들 있다. 어쨌든 그런 사연이 있던 이 애기 바위는 오방 뿐만 아니고 무안면의 고사동, 연상리까지 수호신으로 널리 추앙 받고 있다. 그러나 마을 앞에 있던 남매 바위, 돌바위는 70년대 초 부곡 온천 개발로 인해 포장도로를 만들면서 길 양쪽에 있던 것이 오늘날 보이지 않고 애기바위만이 세월과는 담을 쌓은 채 옛날 그대로 인근 마을의 작은 일 큰 일의 비밀을 간직한 채 오늘도 근동 마을들을 묵묵히 지키고 서 있다.
밀양 초동면 오방리 마을 뒷산인 함박산에 있는 애기바위는 생김새도 어머니가 애기를 업은 형국(形局)이요, 거기다 산 정상에 우람스레 솟아있어 근동(近洞)은 물론이요, 타처에서도 때 좋은 춘삼월이나 가을이면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산 높이는 해발 450M 정도이다. 마을 회관 앞에 차를 세워두고 정면에 보이는 광제암이 있는 곳으로 해서 한 시간이면 오를 수 있다. 애기바위 위에서 보는 조망(眺望)은 남쪽으로 낙동강이 서에서 동으로 누운 양편에 밀양 초동 하남 넓은 들판은 물론이요, 창녕 학포, 창원 주남저수지, 정병산 천주산 무학산. 불모산이 가슴에 와닫고, 김해 무척산이 일망무제로 들어온다. 동북으로 눈을 돌리면 덕대산 종남산이, 그리고 경남북의 경계산이요, 밀양의 진산(鎭山)인 화악산이, 10시에서 12시 방향까지 뻗어있고 그 아래 청도면 내진 무안의 마을들이 옹기종기 눌러 앉았다. 서쪽으로 창녕의 화왕산의 등자락이 밀양과 창녕으로 가로막아 중산 서가정 어릉동이 자리하고 있다. 내려올때는 애기바위 좌측 능선으로 해서 굴바윗등 옆으로 장갑을 끼고 로프를 잡고 200M정도 내려오면 등산의 묘미도 맛보리라. 철따라 꽃이 피고 5월이면 애기바위 우측 봉우리는 고사리가 지천(至賤)으로 널려 있다.
거기다 내려와서는 애기바위가 있는 산 이름을 따서 지은 함박가든에 들러 보면 주인의 친절은 물론 정갈하고 맛깔스런 음식, 특히 고사리 등을 넣은 산채 비빔밥 또한 별미다. 등산화와 면장갑만 준비하고 넉넉잡아 왕복 두 시간이면 충분하니 부곡온천도 좋지만 애기바위 구경은 또 하나 덤으로 얻은 볼거리임에는 틀림없다.
이제 애기바위 구경과 요기를 했으니 선조들이 남긴 산 교육장인 강동구와 오봉서원을 둘러보면서 자라나는 신세대들에게 '유적의 주인공이 유한했던 생애를 어떻게 살았기에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이해시키는 계기가 된다면 一石三鳥의 값진 여행체험이 되리라? 둘러보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대략 2-3시간이면 충분하다. 시간있으면 미리내 민속박물관(종전 범평초등학교)에 들러 선대들의 지혜가 담긴 가구나 연장들을 보여주고는 국내 최대 유황온천인 부곡온천에 들러 온천욕으로 휴일 나들이를 가족과 함께 충분히 즐기다가 돌아올 수 있는 매우 유익한 코스다.
지역마다 지방자치제로 인해 자기 고장의 유형 무형의 문화재를 찾아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고장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고전 소설이나 전설 속의 주인공이나 유명 작가의 고향을 '태어난 곳으로 해야한다. 자란 곳이어야 맞다.' 하면서 인접 市郡간의 송사(訟事)까지 가는 것을 보았다. 내 고향 뒷산의 애기바위를 그냥 두기에는 아까워 "애기바위 전설" 이라 허구(虛構)로 꾸며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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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마비도 그치고 아침 햇살이 빛추이니 고향 생각에 젖어봅니다 좋은 사진 보여주시고 흘러나오는 음악에 ,,,,, 그만 마음이 뭉클하는군요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엣친구가 보고싶은데요 ?????? -푸른산
안녕하세요. 저의고향 영산에도 님의 글과 비슷한 전설이 있읍니다. 부곡과 영산사이의 부처고개가 있지요. 그곳이 바로 전설의 현장이지요 감사합니다. -청산리
고향을 기리는 마음 그윽하시군요.마을도 참 정갈합니다. -도련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