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맹(성경 문맹)
문맹이란 글자를 읽을 능력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문맹자란 글자를 읽고 해독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소위 ‘낫 놓고 기역 자를 모르는 사람’이다.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게 된 종교개혁 이후와 아는 것이 힘이라는 패러다임이 지배하던 과학 혁명의 시대 그리고 계몽주의 시대에 문맹률을 퇴치하는 것은 시민교육의 기본 과제였다. 건전한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기 위한 조건이 바로 문자 해독 능력이었다는 말이다. 문자 해독 능력이 있어야만 지식을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맹률에 빗대어 사용된 “성경맹(‘성경 문맹’을 줄인 말)”이란 표현은 성경의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문자 해독 능력은 있어도 성경을 읽지 않아 성경의 내용을 알지 못할 때 성경맹이라 말한다면 그런 상태의 사람을 성경맹자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성경을 읽어도 그 기본적인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켜서도 성경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인데, 읽어도 그 기본적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과 다르지 않으니 성경맹이라 볼 수 있다.
성경맹을 초래하는 이유는 매우 다양하다. 중세에는 교회가 라틴어 성경(불가타)를 공인 성경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수사와 사제 그리고 인문주의자들처럼 지식층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고, 또한 교회 미사에 사용되는 언어는 라틴어였기에 성도들은 미사때 봉독되는 성경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미 영국에서는 14세기에 교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위클리프(John Wycliffe)가 성경을 영어로 완역하려는 시도를 했고, 틴들(William Tyndale)은 박해를 피해 독일에서 루터의 독일어 번역을 참조하여 성경의 일부(신약성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출간했고 구약성경을 번역하다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교회를 포함해서 귀족들이 성경 번역을 방해한 주요 이유는 일반 평민들이 성경을 읽게 되면 교회와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을 국가 및 교회지도자들이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성경 전체를 자국어로 번역한 사람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다. 역사가들이 종교개혁의 성공 요인 가운데 하나로 성경의 독일어 번역을 꼽을 정도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또한 구텐베르크 인쇄술 개발에 힘입어 광범위하게 보급하여 사람들이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게 한 것은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매우 획기적인 일이었다.
성경을 읽는 일이 역사적으로 이토록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고 또 실제로 성경을 읽는 일을 신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다시금 ‘성경맹’을 말하게 되는 첫째 이유는 성경을 가르치지도 않고 또한 배우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의 영상문화로 사람들은 성경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집에서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고 있다면 사정이 다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배 후에 학원으로 향하기 바쁜 청소년들이 무거운 책가방에 성경을 들고 교회에 오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성경을 한 번이라도 통독한 청소년을 찾기란 더욱 힘들다. 이것은 성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인데, 비록 성경을 읽는다 해도 묵상집 형태로 매우 단편적으로 또 간헐적으로 읽기 때문에 성경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 상당히 떨어져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지적인 수준이 높아진 시대에 독해능력이 없다고 말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오히려 성경을 단편적으로 읽는 관습과 방식에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이유는 공적인 교육기관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독교 학교는 선교 차원에서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매우 중시해왔는데, 자유주의 이념에 근거한 방침에 따라 정부는 학교 교육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을 내세워 공공 기관에서 특정 종교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결국 기독교 학교에서조차 더 이상 성경교육이 아니라 종교교육의 일부로 성경을 가르칠 수 있을 뿐이다. 성경은 단지 여러 종교 경전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며 그리스도인에게만 의미 있는 책으로 여겨진다. 학생들은 성경을 알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설령 성경을 읽는다 해도 인문학적인 교양을 함양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지 않으니 비록 성경을 읽어도 성경이 본래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해독하지 못한다. 삶의 지혜나 윤리적인 의미에 머무는 정도다. 그러나 성경은 성경이 원하는 방식, 곧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읽어야 참 의미가 드러난다.
셋째 이유는 교회에서조차 성경은 가치 경쟁에서 밀려나고 있다. 성경은 더는 삶의 문제에 있어서 권위가 있는 책으로 여겨지지 않고 있다. 자유주의 이념이 지배적인 사회에 적응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성도들마저도 성경의 권위보다 자유와 인권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런 경향에 힘입어 성도들은 성경을 공부하기보다 신학이나 인문학 강좌에 더 많은 열정을 기울이고 있으며, 목회자의 설교 역시 성경 내용을 설명하기보다는 교훈과 감동을 주는 다른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성경을 인문학적으로 읽는다는 말은 인문학적인 교양으로 읽는다는 말인데, 이런 성경읽기방식으로는 성경의 본래 의미를 충분히 맛볼 수가 없다. 성경을 읽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서 성경의 내용에 관한 설명을 들을 기회도 점점 줄어들다 보니 성경의 내용을 아는 일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신학교에서도 신학생들의 성경읽기는 매우 우려할 만한 상태이다. 여러 신학교에서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듣고 확인한 사실이지만, 신학생들은 교회 사역에 쫓기고 또 학과 공부와 리포트 제출을 위한 책들을 읽는 시간마저 부족하게 여길 정도라 성경을 읽을 시간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졸업 전에 치러야 하는 성경시험을 위해 성경을 읽을 뿐, 학기 중에 성경을 계시의 말씀으로 묵상하면서 날마다 성경을 읽는 학생들은 매우 소수에 불과하다. 신학생들의 상태가 이러하니 학생 때보다 더 바쁜 시간을 보내는 졸업 후의 사역을 감당할 때에는 어떠하겠으며, 그들의 양육을 받는 성도들은 어떠하겠는가?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듯 읽긴 해도 설교가 없는 때에도 성경을 꾸준히 읽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오늘날 자라나는 세대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성경맹 현상은 자연스런 결과이다.
오늘날 성경맹은 바로 이런 몇 가지 연유로 현실이 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이며, 성경을 읽어도 그 내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독해능력을 습득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성경을 설교하는 일에서 성경에게 그저 부수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관행도 적지 않은 문제다. 성경을 본문으로 삼아 설교한다 해도 더 중요한 포인트는 현실 문제를 이해하고 또 해결하는 것에 둔다.
성경맹의 문제는 이미 성경에서도 심각하게 여겨졌다. 대표적으로 사사기와 아모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사사기는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더는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들의 삶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폭로하는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알지 못하고 또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 그분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알려주고 또한 그분이 장차 행하실 일들에 대한 약속을 담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모른다 함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그분이 어떤 일을 행하셨고 또 장차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를 알지 못한다 함이다. 성경 문맹자는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한 기대도 가질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사사기 시대 사람들의 성경맹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성경맹을 가리키는 현상이라고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아모스 선지자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상태를 기근을 빗대어 말하고 있는데, 곧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때가 올 것을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암8:11~13)
읽을 말씀도 없고 또 들을 말씀도 없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게 된 까닭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살았고 또한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져 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경맹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징계로 나타난다. 이사야 선지자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라는 무거운 사명을 하나님에게서 받았다. 다시 말해서 성경맹은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 중 하나일 수 있다 함이다. 성경맹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적인 현실을 진단하는 현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리스도인의 관건은 성경을 읽는 것에 달려 있다.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온전한 신앙을 보장받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일단은 성경을 읽어 성경의 내용을 아는 것이 중요하고, 더 나아가 그 가운데 기록된 것을 지켜 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 그리고 행위를 세상 가운데 나타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읽을 것이 많고 또 배울 것이 많은 시대라고 해서 그리스도인마저 성경을 읽지 않아 성경 문맹자가 된다면, 그것은 단순히 노력해서 개선될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먼저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 있도록 깨어있는 것이 관건이다. 사도 바울의 권고대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고, 그 후에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먼저 영적인 각성이 있고 성경맹을 극복하는 노력은 그 후에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깨어있는 신앙을 회복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는 성경을 통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굳이 순서에 매이지 말아야 할 것이나 성경맹의 문제 해결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성경을 꾸준히 읽으며 묵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