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개야 스님>
단하천연(丹霞天然. 736∼824)스님은 속가에서 유학(儒學)을 공부했다. 유학공부가 어느 정도 되어 누구나 보는 과거를 보러 가다가 주막에서 한 선승을 만났다.
선승 “유생은 어디로 가는가?”
유생 단하 “과거를 보러 가는 길입니다.”
선승 “과거에 급제해서 무엇을 하겠느냐? 과거급제보다는 공문(空門)으로 들어가야지 .
유생 단하 “공문이 무슨 말씀인지요?”
선승 “유교에는 없으나 불교에서 도를 깨우쳐야 볼 수 있는 빌 공(空)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공문으로 들어가 공(空)을 깨쳐서 스스로 도인이 되는 것이다.”
유생 단하 “스님! 공, 공하시는데, 공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선승 공은 "‘텅 비어 가득 찼으며 가득차서 텅 비었다’고 부처가 말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因緣)화합으로 생멸한다. 세상 일체 만물은 원인과 결과로서 상호의존 하되 영구불변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이것이 무아(無我)이자 곧 공(空)이다. 공은 괴로움과 즐거움, 있음과 없음 양극단을 떠난 중도(中道)다. 내 몸과 함께하는 공(空)사상을 깨달음을 얻으면 세상에 얽어 매인 종으로 살지 않고, 세상 주인으로 영원히 산단다.
유생 단하 "공문으로 가려면 어디를 가야 합니까?"
선승 "마조(馬祖)선사를 찾아 가거라.”
유생 단하는 과거 발걸음을 돌려 마조선사를 찾아갔다. 유생 단하는 마조선사께 큰 절 인사도 올리기 전에 큰방으로 들어가서 나한상을 옆으로 눕혀 깔고 앉은 체 마조스님을 기다렸다.
그러자 이를 알게 된 대중들이 경악하여 급히 마조스님께 아뢰었다.
마조스님은 “야~ 이 무슨 물건인지, 천연(天然)스럽구나?”
유생 단하는 나한상에서 일어나 마조스님께 큰절하면서 말하였다. “이름을 지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후로 유생 단하는 ‘천연(天然)’이라는 법호(法號)를 얻어 ‘단하천연’이 되었다.
공부를 많이 한 단하천연 선사는 만행(무전여행)을 떠난 어느 날, 강추위가 몰아닥친 늦은 겨울밤 혜림사(慧林寺)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혜림사 객승을 접대하는 스님이 공양(밥)도 주지 않고 불도 때지 않은 냉방을 주었다. 굶주림에 추위를 이기지 못해 여기저기 땔감을 찾아 돌아다녔으나 땔감은 찾지 못했다. 법당에 혹시나 장작이라도 없을까? 올라갔다. 법당 난로 주변은 깨끗하게 치워 졌을 뿐 때감은 없었다. ‘얼어 죽을 순 없다’를 화두로 한창을 뇌이고 또 뇌이다가 번뜩 눈에 보이는 목불(木佛나무불상)이었다. 단하천연스님은 목불을 껴안고 내려와 도끼로 패서 방에 군불을 지폈다.
늦은 밤에 장작 패는 소리에 놀란 주지스님을 비롯한 스님들이 달려 왔다. 불꽃이 이글거리는 아궁이 앞에는 나무불상이 조각이 뒹굴었다. 격노한 주지스님은 사찰이 떠날 정도 큰 소리로
"부처님을 패서 불을 지피는 놈이 무슨 중이라고 당장 여기서 꺼져라. 땡초야"
단하천연스님은 천연덕스럽게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합장 예를 올리며 말했다.
“소승은 이 절의 부처님이 법력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주지스님 “그래서 땡초야”
단하천연스님 “사리를 얻어 볼까 하고 다비식을 거행했습니다.”
주지(住持)스님 “나무 불상에서 무슨 사리가 나온 다더냐?”
“사리도 나오지 않는 부처라면 불이나 피워 언 몸을 녹이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이후 ‘단하소불(丹霞燒佛)’ 이라는 유명한 화두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단하는 목불을 태우는 행위를 통해 중생과 부처는 둘이 아닌 하나다. 외적인 권위와 군림보다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평등사상을 실천해 보였다. 절대 권위인 부처도 우리와 똑 같은 사람으로 격하시켰다. ‘불교 경전의 신성한 지위’를 평등, 보통에 방편(用)으로 펼쳐 보였다. 오늘날 우리에게 선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불교는 살아 있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최고이자 보통인 불교철학 사상을 설파했다.
출처 : 시니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