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생칠재를 봉행하고
2023년 8월 26일 ‘생전에 나의 사십구재(칠재)를 스스로 올리는’ 신편 생칠재(단독설판)를 가양동 홍원사에서 11분의 스님을 모시고 봉행하였다. 기존의 생칠재가 의례 중심이라면 신편 생칠재는 승보공양과 스님들의 경전 염송(우리말 금강경 염송)이 중심이다. 조상님들에게 간단히 제사를 올리고, 무주고혼에 게 시식하며, 저승 돈을 관리하는 고사단의식, 저승으로 명부전을 옮기는 신마공양, 등으로 진행되었다. 생칠재를 올리고 보니 아직도 고민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았다. 공양을 올리는 주체와 받는 주체, 재회를 진행하는 주체가 분명한데 분명하지 못하고 뒤엉켜 있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경계와 역할이 분명해야 하는데, 붓다의 자리, 회수와 재자의 자리가 잘 구분되지 않고, 오로지 재자의 자리에서, 외부에서 올 분을 청하는 말까지 상단에 고백하는 모습으로 진행되는 점은 개선되어야 할 것 같다. 스님들은 붓다를 대신하는 분들인데 우리 불교에서는 오로지 재자를 대신해 (법문 때만 빼고) 진행을 한다. 그러다 보니 입향(立向, 서는 방향)이나 좌립(坐立, 앉고 섬), 소청(불러서 오라고 청함)과 봉송(보내 드림)에 혼란이 일어났다. 국가불교 혹은 왕실불교 시대에는 오랫동안 재자가 없이 왕실 의례를 스님들이 진행하면서 일어난 현상이 아닌가 한다. 해서 회수(會首, 회의 주인 곧 주지스님)와 재자(齋者)는 피동적인 존재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신편 생칠재는 조금 개선되었지만 향후 적지 않게 개선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가령 예경이나 소청은 계신 곳으로 가서 하거나 그곳을 향해서 하는 것이 옳고, 법당 내에서 봉송을 할 때는 인로자와 봉송의 대상(혼령의 위패), 재자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관상을 하는 것이 적의할 것 같았다. 또 인도자 이외의 어산 스님들은 연이나 혼령의 뒤에서 옹호하거나 염불하는 것이 옳아 보인다. 전통의 시련(연을 모시는) 절차 어디를 봐도 어산 스님들이 혼령을 앞서는 경우는 볼 수 없다. 인로왕 취타대 등이 앞서고 혼령의 뒤에 스님들이 서고 그 뒤에 동참자들이 서는 것이 옳다. 불교의례 중에는 소청과 영혼, 봉송은 거동(움직임)이 있는 의례인데, 질서가 없으면 재장이 난장판이 된다. 의례는 예의 표현이다. 질서 없이 우왕좌왕하거나 오합지졸이 되면 재자의 정성이나 스님들의 기도가 마지막에 빛바랠 수 있다. 우리가 불교를 하니 의례에서의 행동은 불교적이어야 한다. 의례에서 자비와 지혜를 닦지 못하면 그것은 불교와 십만 팔 천리 멀어진다. 우리 불교의례하면서 비불교적인 의례를 하지 않는지 늘 반문해야 한다. 재자는 재보시하고 스님들은 법보시를 통해 다 함께 깨달음을 얻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의례가 될 때 불교가 바로 선다. 신편 생칠재를 통해 보시를 완성하고 깨달음을 완성하는 바웃다가 많이 나오기를 기원한다.
빠라미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