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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이라는 것에 대해
'창조주신'을 하나님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이라고
부르면서 자기들만의 신인줄 알면 큰 코 다친다.
기독교가 창조주신에게 하나님아버지나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라고 이름을 부여해주고 자기종교만의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 이름의 신이 성경에 나오는 하늘의 신(창조주신)과
같은 분이라고 주장하려면 창세기부터 시작된 온갖
부족 신들의 이름도 같은 분이라고 주장해줘야 한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각 부족들의 신들의 이름=그들의 창조주신의 이름
*여호와= 유대인이 부르는 창조주신의 이름
*하나님=기독교가 부르는 창조주신의 이름
*하느님=천주교가 부르는 창조주신의 이름
*알라=이스람교가 부르는 창조주신의 이름
*하늘의신=다니엘, 느헤미야, 에스더, 에스라, 예레미야
등의 인물이 기도드렸던 대상
옛날에는 '유대인'만 사랑했을 것 같고,
현대에 와서는 '기독교인'만 사랑할 것 같이
착각하면 정말 큰 코 다친다.
'성경'을 자신들이 썼다는 우월감과, 창조주 신을
여호와, 야훼, 엘로힘 등으로 부르면서 자기들만의
신인줄 알고 떵떵거렸다가 큰 코 다친게 유대인이다.
성경은 사람이 쓴 것으로 신의 영역이 아니라고 하고,
성경 그때 당시의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사건
이라고 생각하고, 현대에 와서는 이스라엘이나 유대인
말고 다른 나라들은 적용이 안 된다고 떵떵거렸다가는
큰 코 다친다.
'창조주 신'은 온 우주와 온갖 피조물들과 전 인류의
창조주 신이시며, '성경'은 온 우주와 온갖 피조물들,
특히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내가 죽을 때까지,
앞으로 태어나 죽을 전 인류에게 말씀하시는
창조주 신의 법전이시다.
선한데 악하고, 악한데 선한 것
이 세상의 삶은 ‘선’과 ‘악’으로 갈라진다. 그렇다고 모든 삶이 ‘선’이냐
‘악’ 이냐로 딱 부러지게 갈라지냐? 하면 그렇지 않다. ‘선’인 것 같으면서
‘악’인 것이 있고 ‘악’인 것 같으면서 ‘선’인 것이 있다.
그래서 ‘선’과 ‘악’도 사람의 기준에서 가르면 안 된다. 착하고 바르고
정직하고 성실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정도에서 분별은 할 수 있다.
“저 사람은 ‘선’하냐? ‘악’하냐?” 딱 부러지게 정할 수 있나?
없다.
그 사람의 성품 중에 선이 몇 %냐? 악이 몇 %이냐? 이다.
이 %를 계산하는 것도 사람이 못한다.
오직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하실 수가 있으신데,
그것은 느낌이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나 마음이나 삶에서
모든 것을 통 털어서 계산하시는 창조주의 계산법을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고
흉내를 낼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떠냐?”는 사람이 계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보여지지 않는 거짓 '~척'
사람은 내 앞에서는 ‘척’ 하는 데 뒤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사람은 내 앞에서는 좋은 말을 하는데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는데 본인도 본인을 모를 때가 많다.
"내가 설교를 잘하냐?" "나의 설교에 은혜를 받았냐?"고 물어보면
그 앞에서야 당연히 잘한다고 하지 못한다고 하고, 은혜를 못 받았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가 없다.
속과 겉이 달라진다.
하지만 정말 설교를 잘했고, 정말 은혜를 받았으면 물어보지 않아도
잘했다고 할 것이고 은혜를 받았다고 할 것이다.
자동으로 정직해진다.
그런데 다른 일반적인 '강의' 같은 것은 잘하려고 해야 하고,
자료 준비도 철저하게 해야 하고, 훌륭한 제스쳐도 있어야 하고,
유머와 위트도 있어야 하고, 많은 지식과 학식을 갖춰야 하는데,
'설교'는 그런 것도 있어야 하지만 "내가 그 말씀을 경험해서
정말 살아있는 내용이냐?"가 중요한 것 같고,
"창조주께서 그 말씀으로 듣는이로 하여금 감동을 받게
골수와 심령을 찔러 쪼개셨냐?"가 문제인 것 같다.
창조주께서 쪼개신다는데 설교자가 쪼개려하고 하니
역효과가 난다.
창조주의 일을 주의 종이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유지만
창조주께서 하실 부분을 사람이 하면 안 된다.
창주주께서 '마음'을 관리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아멘.
이런 구절도 기독교의 설교에만 적용된다고 생각해서 써먹으면 안된다.
성경을 기독교에만 해당된다고 생각하고, 특별히 설교에 해당된다고
오산해서 자신이 설교할 때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그 말씀으로 교인들의 심령과 골수를 쪼개려고 한다.
착각일 뿐이다.
누가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때의 모든 상황에서
다 적용되는 것인데, 그 말의 필요성에 따라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시는 것도 창조주께서 하신다.
"나는 그 사람이 내 말을 듣고 그렇게 좋게 나올지 몰랐어"
라고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그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신 분이 창조주라는 것이다.
내가 진심을 담아 이야기 했을 때의 상황이다.
진심인척 해도 소용없는 것이, 영의세계는 우리 육의세계의
모든 것을 안다. 느낌도 알고, 생각도 알고, 뜻도 알고,
목적도 알고, 동기도 알고, 눈길도 알고, 손짓 발짓도 알고.
모르는 것이 '無' 일 정도로 다 안다. 퍼펙트하게.
창조주의 '사람 계산법'
창조주께서는 사람의 속과 겉을 정확하게 아신다.
사람은 사람의 ‘앞’을 계산하는데,
창조주는 사람의 ‘앞’ ‘뒤’ '옆' '위' '아래' '속'을 다 계산하신다.
사람은 밖으로 느껴지고 보여 지는 ‘느낌’이나 ‘행동’이나 ‘척’ 하는 것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가지고 “저 사람은 절대적으로 좋은 사람이야”
“저 사람은 절대적으로 나쁜 사람이야” 할 수가 없다.
아무리 ‘악인’ 일지라도 선한 구석이 한 구석이라도 있기 때문이고,
아무리 ‘선인’ 일지라도 나쁜 구석이 한 구석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끼리 “저 사람은 천국 갈 것이다” “저 사람은 지옥 갈 것이다”
할 수가 절대로 없다.
창조주께서는
절대로 사람은 창조주의 뜻과 길과 방법과 계산에 대해,
자신의 앞 일에 대해 알지를 못하게 하셨다.
창조주를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어도 그것은 아주 기본적인 틀일 뿐이지
그것이 다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주 먼지만한 것 1개 정도에 불과하다.
(욥기 11:7)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아멘.
(욥기 38:18)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 할 수 있느냐?
네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 아멘.
'인생' 앞의 '두 길'
창조주께서는 사람의 모든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두 느낌,
두 마음, 두 생각, 두 말, 두 행동, 두 선택권, 두 삶을 놓으셨기
때문에 본인도 본인의 길이 어떤 길로 가는지 잘 모르고 산다.
주의 종일지도, 성도라 할지라도, 불신자라 할지라도.
너무 모르겠어서 불신자는 ‘점쟁이’ 에게 물어보러 가는 것이고,
종교인들은 '종교대장'에게 물어보러 가는 것이다.
자기들 것이 의로운 것 같지만 똑 같은 것이다.
그것도 창조주께서 허락하신 삶이다.
그렇지만 성경에 ‘좋은 길’ ‘나쁜 길’을 다 써 놓으셨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면서 찾아도 되고 찾지를 못하겠거든 그냥 읽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을 하면 하나님께서
찾아주시면서 길을 인도해 주신다.
안 들리고 안 보이고 안 느껴져서 그렇지.
이런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교육되어지는 기도법이다.
나도 과거에 그렇게 살았다. 성경을 기도문 삼아.
하지만 "남들은 올무에 걸리게 하시고 나만 쏙 빼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했던 다윗의 기도를 성스러운양 가져다 써 먹으면
내가 올무에 걸린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게 해주신다" 라는 기도법을 써먹으려면
'이렇게 하면'이 무엇인지 깨달아서 그 것부터 실천해야
이렇게 되게 해주신다. 잘 찾아서 써먹어야 한다.
"성령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전신갑주를 입고"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라" 라는 식의
신비적이고 영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문구는
나도 그렇게 되게 해달라고 아무리 기도해봤자 소용 없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어떻게 잘 해야 하는지를 실천하도록 해야한다.
그러면서 기도도 올바른 성품과 인품을 갖추는 기도를 해야 한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마태복음 5:46~48)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창조주신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아멘.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문안하는 것도, 이웃으로써 행하는
것들도 남 보다 더 잘해야 한다.
(에베소서 4:23~24)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창조주신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아멘.
이런 영의세계값을 외우고 기도제목으로 써먹은들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즉 이후에 나오는 말들을 실천해야 한다.
(엡 4:25~27)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아멘.
사람이 살다보면 분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음날로 넘어가지 않도록 오늘 풀어야 한다.
내 속에 있는 분을 내려는 죄성 마귀는 그것을 풀 생각이
없을 수 있다. 자존심이 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다.
하루를 넘기지 말라는 창조주 신의 뜻을 따라야 한다.
자존심을 세우며 풀지 않고 계속 날을 넘겨가면
나에게 손해가 된다.
(엡 4:28~29)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아멘.
(엡 4:30) "창조주신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아멘.
창조주신의 성령께 근심을 끼쳐드리게 하지 않기 위한
인생들의 실천 덕목들이 있다. 도둑질 하지 말고,
선한 일을 하고, 더러운 말들도 하지말고, 선한 말을 하고
은혜를 끼쳐라,
이런 덕목을 실천하지 않을 때 성령이 근심하시기
때문에 나만 손해다.
(엡 4:31~32)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아멘.
인생은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빙하는 것
등 악의를 버리고 서로 친절하고 불쌍히 여기고 서로 용서하며
살아야 성령이 근심하시지 않으신다. 나에게 복이 된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올바른 인성교육과 전인교육,
바른생활 교육, 도덕교육으로 ‘선’으로 가는 길, ‘복’으로
가는 길을 갈 수 있도록 하셨다.
이 교육은 종교인도 해당된다.
종교인들은 종교교육이나 종교교리만 해당되는 것 같지만
인생은 그렇지가 않다. 그 나라법의 올바른 사회생활이다.
창조주의 “선악과를 먹지마라” 하신 명령을 어겨 죄를 범한
인간에게 그런 삶을 살도록 시스템화 하셔서 그런 것이다.
오직 전능하신 창조주의 ‘주권’ 이시다.
한 길은 '복' 한 길은 '화'
(신명기 20: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아멘.
창조주께서 매순간 무슨 일이나 무슨 생각이나 무슨 느낌이나
무슨 행동에서든 두 갈래로 길을 놓으셨는데, 한 길은 '선'으로
가는 길, 한 길은 '죄'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그 길은 '복'으로 가는 길이 되고,
그 길은 '화'로 가는 길이 된다.
그 길을 내가 선택해서 가야 하는 것도 있고,
그 길로 들어서야만 하는 것도 있는데 이런 것은
창조주 신의 계산법에 의해 이끌려져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한 길은 창조주께서 놓으시고
부르시고, 한 길은 사탄이 놓고 부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종교인들은 사탄이 창조주를 믿는 믿음의 길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까부르고 방해하고 꼬시고 해서,
지옥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니다.
사탄은 함정을 파 놓는 것이고,
창조주는 건지시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께서 "오늘 내가 두 길을 놓았다" 라고
성경에 말씀하셔도 안 믿는다.
두 길 모두 창조주께서 놓으셨는데 오늘 놓으셨다.
매순간 초 단위로 놓으신다. 생각에서부터.
우리가 직접 선택해서 가야 하는 길도 있다.
싸울 것이냐 말 것이냐, 훔칠 것이냐 관둘 것이냐,
때릴 것이냐 말 것이냐, 거짓말 할 것이냐 말 것이냐,
게으를 것이냐 부지런할 것이냐, 청소를 할 것이나 말 것이냐,
법을 지킬 것이냐 말 것이냐, 도울 것이냐 말 것이냐
라는 분명한 것도 있다.
'선'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면 '복'을 받을 것이고,
'죄'로 가는 길을 선택하면 '벌' '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매 상황마다 '선'과 '죄'라고 알 수 있게 상황이
정확한 것도 있지만 정확하지 않아 모를 때가 더 많다.
그저 내가 인생을 살면서 이것 저것을 하고 사는데
그것이 '복'이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화’가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잘 모른다. 그냥 사는 것이다.
그 길에서 죽기도 살기도
그냥 화장실을 간 것인데, 그 일로 인해 살 수도 있고,
그 일로 인해 죽을 수도 있는 길이 있다.
비행기 탈 시간에 화장실이 급해서 갔다. 그래서 비행기를
놓쳤는데 그 비행기가 공중에서 사고로 폭파 되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 화장실에 간 그 일로 내가 살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화장실 가는 것이 ‘복’인가?
이 사람은 아직 더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남편이랑 아내랑 아들이랑 식당에 들어가서 음식을 시키고
남편은 화장실을 갔다. 그런데 그 시간에 주방에서 도시가스가
터졌다. 주방과 화장실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내와 아들은 출구를 찾아 나와서 살았지만 화장실에 간 남편은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 남편이 없으면 무엇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남편을 의지했던 그 아내는 남편을 잃고 그 후로 후레쉬 제품을
만드는 사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사고에도 후레쉬가 있었으면 비취면서 나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으로....하지만 후레쉬를 비출 수 있는 상황이었는지가
문제일 것이다.
그러면 화장실 가는 것이 ‘화’인가?
이 사람은 더 살지 못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져야 하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렇게 착한 사람이 왜 그렇게 일찍 죽어야 하는지
모르겠는 것은 우리 생각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은 어디서든지 죽게 되어있지만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화장실에서 많이 죽는다.
물론 길거리에서 교통사고로도 수도 없이 죽지만
그런 거야 위험의 요소가 곳곳에 있다고 치더라도
왜 화장실에 가서 죽는 일이 비일비재한지는 모르겠다.
기독인들은 어디서든지 기도해야 하지만 화장실을 가는 것도
기도를 드리는 습관을 기르자.
영적으로 볼 때 화장실은 집 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집 밖으로 본다고 하신다. 집 밖에서 죽은 것으로 계산되는
것이라고.
집 밖에서 죽는 것이 영적으로 어떤 뜻인지는 모른다.
죽어도 집 안에서 자는 듯이 복 되게 죽자. 기도로.
창조주는 절대적으로 불의하시지 않으시고 좌우로 치우치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 미물 같은 참새가 떨어져 죽는 것도 창조주의
뜻에 의해서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 거대한 사람이 죽는 것은 더더욱
창조주의 뜻에 의해서이지 우연히 죽고 살고 하지 않는다.
인간의 ‘탄생의 분별 법’은 오직 창조주께 있다.
인간의 ‘죽음의 분별 법’도 오직 창조주께 있다.
인간의 '축복의 분별 법'도 오직 창조주께 있다.
인간의 '징계의 분별 법'도 오직 창조주께 있다.
절대로.
내 주변과의 엮임?
(시편 16편 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아멘.
누구는 ‘축복’과 ‘생명’의 구역으로 들어가서 살게 되고,
누구는 ‘화’와 ‘죽음’의 구역으로 들어가서 죽게 되고,
중상을 입고, 경상을 입고, 타박상을 입고,
다친데도 별로 없고,
차는 폐차 시켰지만 몸에는 상처 하나 없고
똑 같은 사고 현장에서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고 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인간은 전혀 알 수 없지만,
불의의 법으로, 불공평의 법으로, 막무가내 법으로,
우연의 법으로, 그냥 법으로, 재수없는 법으로 처리되지 않는다.
내가 어떤 나라에 태어나는 것도, 내가 어떤 부모 밑에 태어나는 것도,
내가 누구랑 결혼하는 것도, 내가 어떤 자녀를 낳는 것도, 어떤 친구를
만나게 되고, 어떤 형제 친척으로 형성이 되는 것도, 이웃을 만나는 것도,
어느 지역에 가서 살게 되는 것도, 어떤 교회를 들어가게 되는 것도,
어떤 종교를 가지게 되는 것도 가지지 않게 되는 것도,
내가 어떤 직장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도, 내가 어떤 사업을 하게 되는 것도,
그래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도, 그래서 어떻게 지지고 볶고 살던,
평화롭게 살게 되던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기가 막힌 창조주의 계산대로 되는 것이다.
우연히, 그냥, 재수가 있고, 재수가 없어서, 그냥 부자가 되어서,
그냥 가난하게 되어서 이사를 가게 되고, 어느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고
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로 퍼펙트하게 공평하신 창조주의 계산법으로 처리된다.
아름다운 구역?
창조주께서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답다고 하셨다.
하지만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아름답지 않은 구역도 있다.
창조주 신을 믿는 종교자들은 아름다운 구역으로 들어가고
비종교자들은 더러운 구역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누구는 정말 살기 좋은 세상으로 들어갈 수도 있지만
누구는 험한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
창조주께서 '아름답다'고 하신 것은
우리로 볼 때는 '마땅하다'의 뜻이다.
정말로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계산된 것이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 라는 속담이 있는데
꼭 만나야 할 사람은 꼭 만난다. 우연스럽게.
하지만 창조주신의 뜻에 따라 필연적인 것이다.
얼기설기 내가 어떤 구역으로 들어가서 창조주께서 줄로 재어준
구역에 있든 그것은 영의세계에서 계산된 합법적인 것이다.
영의세계로 가 보아야만 알 수 있는 일이다.
죽으면 모든 상황을 알 수가 있다.
(잠언 10:29~30) “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요
‘행악’ 하는 자에게는 ‘멸망’ 이니라, ‘의인’은 영영히 이동되지
아니하여도 ‘악인’은 땅에 거하지 못하게 되느니라” 아멘.
(잠언 14:12)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아멘.
(레위기 18: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아멘
(레위기 20:22)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주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아멘.
내가 더러우니 나를 토한다
내가 더러우므로 그 땅이 나를 토하여 낸다.
그러면 나는 더 나쁜 곳으로 이사를 가던지 죽던지 하게 된다.
창조주 신의 규례와 법도는 그 나라와 그 사회와
그 지역과 그 가정의 법도를 말한다.
게다가 창조주 신의 선하신 성품을 발휘하지 못하고 살면
창조주께서 나를 인도하여 어느 곳에 거주하게 되었어도
그 땅이 나를 토하여버린다.
그러면 나는 나쁜 곳으로 이사를 가던지 죽던지 하게 된다.
이 길은 나의 '성품'과 '인격'에 의해서 많이 좌우되는 길이다.
착하고 도덕적이고 바르고 정직하고 성실하고 믿음직스럽고,
책임감이 강하고, 남이 잘되기를 바라고, 남 무시하지 않고 등
좋은 성격이 강할수록 ‘복’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게 되어있고,
남이 잘 되는 것이 배 아프고, 남 무시하고, 교만하고 잘난 척이
심하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고 사기성, 거짓말이 심하다는
등 나쁜 죄성 성격이 강할수록 ‘저주’로 가는 길을 선택하게
되어있다.
좋은 선택 vs 나쁜 선택
그런 '좋은 선택'으로 이 땅에서 화를 많이 안 당하고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면서 사는 인생과,
'나쁜 선택'으로 인해 싸우고 잡혀가고 사업이 망하고
재정이 바닥을 치고, 돈을 벌어도 밑 빠진 독처럼 새고,
일은 해줘도 돈을 못 받아 뜯기고, 사기 당하고,
도둑당하고 설상가상으로 일이 엉키고,
자살하고 싶은 만큼 인생이 어려움을 당하고 산다.
(전도서 5:18~20)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 이로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는 자기의 생명의 날을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기뻐하는 것으로 응답하심이니라” 아멘.
이 ‘나쁜 선택’ 이라는 것은 우리가 늘 하는 ‘말’에서 많이 파생된다.
말은 ‘생각’에서 오고 ‘마음’에서 온다(잠언 12:5; 15:28).
쓸데없는 말로 죽는다
성경 잠언에 말씀하신다.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며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사람은 벌을 받을 것이다" 라고.
세상에 살면서 말을 안하고 살 수는 없다.
그렇지만 굳이 안해도 되는 말이 있다.
이런 쓸데 없는 말들을 많이 하면 가난이 온다는 것이다.
(잠언 10: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아멘.
(잠언 13:2)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마음이 궤사한 자는 강포를 당하느니라” 아멘.
(잠언 14:23)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 아멘.
(잠언 15:23)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아멘.
(잠언 19:19)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 아멘.
(잠언 26:25)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니라” 아멘.
(전도서 5:7)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아멘.
쓸데없는 말은 생각으로도 말라
그러면 말을 많이 안하는 대신 생각으로 말하고 욕하고
하는 것은 괜찮을까?
우리 속담에 "없는데서는 나라 임금도 욕한다"는 말이 있다.
어쩌다 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남에 대한 험담을, 욕지거리를 생각일지라도
노상 해대는 것은, 입으로 지껄이다 당장 코 앞에서
상대에게 화를 당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결국에는
나에게 나쁜 일이 닥친다.
영의세계에서는 내가 하는 말이나 생각이나 느낌이나
눈길이나 뜻이나 목적이나 동기나 과정이나 손짓 발짓 등
모든 것을 본다. 영체들이. 특히 욕 먹고 있는 상대가.
아무도 없어도 영체들이 보고 있다.
게다가 창조주께서 세우신 상전들을 욕하는 것은
창조주를 욕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창조주를 비방하는 것이다.
일반인을 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형제에게 '라가'라고 욕하면 지옥불에 던져지리라.
결국은 나에게 나쁜 일이 닥친다는 것이다.
그를 만드시고 세우신 창조주를 욕하고 비방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영의세계에서 계산되는 법이다.
정말 억울하면 없는데서 상대를 욕할 수도 있다.
마구 소리지르면서 혼자 따질 수도 있다.
이때는 내가 창조주신 앞에서도 당당해야 되는데,
그 상대의 영체가 와서 들었어도 본인이 잘못했다고
인정되는 상황이어야 욕한 내가 혼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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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심'이 없는 '좋은 말'
'사심'이 없는 좋은 말만 하자.
사실이지만 그 사실 대로 말하면 부정적인 세력이 올 것인지를
생각하고, 사실 대로 말하면 다른 가정이 파탄 날 것인지를
생각하고, 사실 대로 말하면 상대방이 자존심이 상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사실 대로 말하면 상대방이 상처 입을 것인지 생각하고,
사실 대로 말하면 타인이 그 대상을 멸시하게 될지를 생각하고,
내가 무슨 말을 했을 때 상대방이 열등감이 일어나며
나를 상대로
시기와 질투가 일어날지를 생각하고,
'나는 이게 무언가' 하고 기
죽을 것인지를 생각하고,
그래서 쓸데없는 내 자랑은 금해야 하며,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려서 하자.
'사심'이 없는 좋은 말만 하자.
사랑의 말을 해주고, 위로의 말을 해주고, 격려의 말을 해주고,
칭찬의 말을 해주고, 참고하면 좋겠다는 조언을 해주고,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경험한 것을 조심히 전해주고,
이쁘다, 사랑해, 잘한다, 좋다, 된다. 나는 할 수 있다.
너는 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잘 할 것이다 라는
기대감을 불러 일으키고, 힘을 불러 일으키는 좋은 말만 하자.
긍정적인 세력을 불러오는 좋은 말만 하자.
진심으로는 그 사람이 떨어졌으면 좋겠고
안 됐으면 좋겠는데, 겉으로는 할 수 없이
붙었으면 좋겠다 잘 됐으면 좋겠다 하지 말자.
그런 진심 자신없으면 입을 다물고 있자.
상대의 험담이나 욕이나
나쁜 생각들도 빨리 빨리 털어버리자.
생각에 자리잡지 않게,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지 않게.
'욕심' → '죄' → '사망'
창조주께 징계를 받는 것은 내가 매를 주주 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말로 매를 주주 했고, 쓸데없는 행위로 매를 주주 했고,
쓸데없는 생각으로 매를 주주 했고, 쓸데없는 눈길로 매를 주주 했고,
쓸데없는 무시와 업신여김과 손짓 발짓으로 매를 주주 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일에도 입에 침을 튀며 욕하고 흉을 보고
쉴새 없이 지껄였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에
그 행위에 따른 벌이 자동으로 온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
물질에 대한 욕심, 예뻐지고 싶은 욕심, 지식이 더 많았으면
하는 욕심, 날씬해지고 싶은 욕심, 먹고 싶은 욕심, 내것이
남의 것보다 더 컸으면 좋겠는 욕심, 더 상석에 앉고 싶은
욕심, 더 부자가 되고 싶은 욕심 등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어떤 욕심이 생기면
그 욕심의 종류에 맞는
사기나 잘못된
것들이 내게로 온다.
아주 빨리 아무도 모르게 도둑같이.
그래서 사기를 당하게 되고, 돈을 더 뜯기게 되고,
얼굴이 망가지게 되고, 날씬은 커녕 더 거대해지고,
거식증에 걸리게 되고, 폭식을 하게 되고, 말석으로
내려가게 되고, 안 되는 길로 내려가다 죽기도 한다.
종교적인 '함정'과 '올무'
사람으로서의 노력도 없이 신께 제사지내고 기도 드리는
것으로 잘 되려고 하고, 신의 직접적인 부름이 아닌
친구따라 강남갔는데 잘 못 간 사람들, 특히 인성은
상관없이 신비를 따르게 되면 그에 맞는 신비의 올무에
빠지게 되는데 본인은 절대 모른다.
허무맹랑한 교주에 걸려 돈도 뜯기고, 매도 맞고,
벽에도 달라 붙어야 하고, 불에도 데어 봐야 하고,
독물도 마셔봐야 하고, 몸도 뜯기고,
가정도 뜯기고,
성경에 있는 것들을 테스트당해야 해서 인생이 뜯기게
되는 상황이 온다.
어떤 종교생활이든 신께서 직접 부르시는 경우는
싫다고 도망가고, 안 한다고 떼쓰게 되는 것 같지만,
친구 따라 강남가는 것(전도)은 조심해야 하는데,
종교생활 열심이 특심으로 하다가 부부관계가 깨지고,
부모 자식간이 깨지게 되고, 가정이 깨지게 되고,
이웃관계가 깨지고, 나라 관계가 깨지는 상황이
오는 것은 친구따라 강남 잘 못간 것이다.
그리고는 폐가가 되고 폐인이 되고, 죽기도 하고,
말거리에 오르락 내리락 하게 되고, 이제는 뉴스거리에,
오르락 내리락 하게 된다. 쯔쯔쯔 왜 그런데 빠질까…
그런 곳은 신의 이름과 능력을 팔기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고, 세뇌까지 되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인간은 신과 싸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꼼짝 못한다.
창조주신의 올무에 빠졌기 때문에
창조주신께서 건져주셔야 나올 수 있다.
(마태복음 23:15)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 아멘.
성경에 나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지 않았다.
현재의 종교자들은 바다도 건너고 육지를 두루 다닌다.
그렇게 전도해서 인생을 힘들게 살게 만들어 놓는다.
천국은 종교자들이 보내는 것이 아니므로 조심해야 한다.
이 땅에서 살기 좋을 때 "천국이 따로 없어"
이 땅에서 고통스러울때 "지옥이 따로 없어"
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이 땅에서 힘들게, 괴롭게, 고통스럽게 살지 않는
방법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바르고 정직하게.
내가 세운 계획?
(시편 127:1~2)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아멘.
이 땅에서 하는 모든 일들이 사람이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물에 대해서는 신의 심판이 있다.
그래서 내가 계획한대로 실행되는 사람이 있고
내가 생각한대로 실행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이나 뜻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달려 억지로 할수 없다"
삼국지연의 호로곡 전투에서 나온 '제갈량'의 말이다.
성경을 모르던 시절에도 인생에서 깨달아진다.
제갈량이 북벌을 위해 출정, 이후 '사마의'를 '호로곡'이라는
협곡으로 유인해 '화공'을 퍼부어 사지로 내몰았으나,
하필 이때 소나기가 내려 사마의는 목숨을 구했다.
제갈량이 거의 다 이겼다고 생각했을 때 일어난
하늘의 상황이다. 영의세계의 법으로.
달아나는 사마의를 보며 제갈량이 한탄했다.
내가 생각한대로 일이 처리가 안돼서 끙끙대느라
잠을 설치는 사람이 허다하다.
내가 생각한대로 일 처리가 잘 돼서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자는 사람도 있다.
창조주 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다고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에게만 잠을 주신다고 착각하면
큰 오산이다.
잠을 잘 자고 못자고 우울하고 등은 일상다반사로
개나 소나 다 해당된다.
사람답게 제대로 사냐 제대로 못 사냐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불면증이 있었고 결혼 후 몸이
약해지자 불면증이 더 심했다.
그냥 자면 그나마 두어시간이라도 자건만
수면제를 사먹으면 정말 그날은 오히려
한숨도 못자고 꼬박샌다.
나는 무슨 잘못을 그렇게 많이 했을까?
얼마나 안사랑하셨으면 어려서부터 잠을
못잤을까? 기독교로 입문하고도 정말
우등생처럼 살려고 노력했는데.
잠을 안 자려고 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매를 주주
내가 불러 온 것이다 징계는. 그러나 나는 모른다.
‘욥기’에서 “까닭 없이 나를 충동질하여” 라는 것은
창조주와 맞먹을 만큼,
맞짱 뜨는 거대한
‘루시퍼 사탄’이라는 존재가 창조주를 까닭없이
충동질했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 라는 '사탄'이라는 것이
창조주를 충동질 하여
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는 것이다.
‘나의 죄가 매를 주주' 했다.
나의 죄가 그 죄의 값에 따른 징계를
나에게 불러오는 것이다.
육의 세계시스템은
나의 잘못으로 부모님께 직접 매를 맞던지
선생님께 직접 매를 맞던지 하지만
영의세계시스템은
나의 잘못에 대해 창조주가 나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잘못' 자체가 나를 때리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죄 자체가 나를 때리는 시스템을
창조주께서 합법화 하신 것이기 때문에
창조주께서 손을 직접 안대신 것일뿐이지
창조주께서 때리신 것이나 마찬가지다.
"창조주를 충동질 하여"
국문을 왕이 직접 하지만 징계를 하는 입장에서는
신하들이 하지 왕이 직접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매의 강도나 깊이나 넓이나 높이는
왕의 뜻과 같다. 그것은 왕이 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인생이 악화되던지 바닥을 치던지 망가지는 삶으로
진행되는 것은 나의 죄가 현재 나를 때리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나의 하락하는 인생의 고난에 대해
창조주께서 나를 훈련시키기 위해,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이유도 없는 고난을 주신다고 좋아하고 있으면 큰 코 다친다.
창조주께서는 사람들이 무엇을 잘못했으니까 때리시지,
사랑해서 의로워서 훈련용으로 시험용으로 때리는 것 없다.
never.
육신의 부모도 자녀가 무언가 잘못했으니까 말로 혼내다 못해
때리는 것이지, 자녀를 사랑해서 의로워서 훈련용으로 시험용으로
때리지 않는 것과 똑 같다.
'잠언'을 읽으면서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점검하고
회개하고 돌이키고 개과천선해야 한다.
https://cafe.daum.net/mizzkwon/KdtU/172
잠언의 생활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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