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동무들〉이란 글로 권정생 선생님 15주기를 추모합니다.
이 글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동무들》란 책에 실린 글입니다.
21명의 글쓴이가 어릴 적 이야기를 한 편 씩 쓴 책인데
표제작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동무들〉이 권정생의 글입니다.
권정생은 어린 시절 일본에서 살 때 딱지치기를 하며 놀던 이야기를 썼습니다.
이 글을 보니 권정생 선생님의 일본식 이름이 "마사쨩"이었군요.
전쟁은 오늘도 끝나지 않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끔찍한 공포와 아픔만 주고 있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이 시간에도 전쟁 때문에 죽음과 공포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합니다.
평화를 생각합니다.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동무들
권정생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토쿄에 B-29비행기가 폭격을 하던 것은 내 나이 여덟 살 때였다.
우리가 세 들어 살던 ‘나가야’라고 불리던 함석 지붕의 기다란 집도 폭격으로 불타 버렸다.
어둡고 가난한 동네 골목길 이웃엔 그래도 우리들의 착한 동무들이 살고 있었다. 한국 아이들도 있고, 일본 아이들도 있고, 행길 저쪽엔 중국 아이도 있었다.
저녁 때가 되면 동네 빈터에 모여 공놀이, 구슬치기, 딱지치기, 술래잡기, 숨바꼭질 등, 뭐 한없이 많은 놀이들을 하면서 해가 지는 줄을 몰랐다. 사이좋게 놀다가는 금방 싸움을 하고, 어느새 또 사이좋게 되고, 영원히 그렇게 함께 어울려 놓았으면 했다.
우리 집 왼쪽 언덕 위에 살고 있던 에이쨩이라 불렀던, 나하고 동갑인 한국 아이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울려 놓았다.
한 번은 나와 에이쨩이 딱지 따먹기를 했다. 내가 가진 딱지는 한 30장이 되었고, 에이쨩은 50장쯤 되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서로 몇 장씩 주고받으며 별로 잃지도 따지도 못했었다. 그러다가 한참 뒤부터 서로 열을 내면서 딱지를 넘기는데, 운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내가 딱지치기 솜씨가 좋아서인지 에이쨩 손의 딱지가 나한데 자꾸 건너왔다.
에이쨩이 딱지를 아주 잘 오므려 옴팍한 구덩이에 대놓아도 내가 치기만 하면 홀랑홀랑 넘어가 버렸다. 에이쨩은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씩씩대더니 그만 50장이나 되는 딱지를 내게 다 넘겨주고 말았다.
“마사쨩, 너 여기서 기다려. 나, 집에 가서 딱지 더 갖고 와서 계속해!”
마사쨩은 내 일본식 이름이다. 에이쨩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눈을 부라려 놓고는 얼른 자기의 집으로 달려 갔다.
나는 호주머니에다 에이쨩한테서 딴 딱지를 불룩하게 넣고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딱지를 많이 따서 기분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은근히 겁도 났다. 아무리 정정 당당하게 따먹은 것이지만 자꾸 미안한 생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껏 딴 딱지를 에이쨩에게 돌려주기는 싫었다. 돌려주기는커녕 어떻게 이걸 고스란히 잘 보관할 수 있을까. 한쪽 머리로는 그런 궁리를 하느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골목길로 달려간 에이쨩은 한참 지나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때 건넛집 아저씨가 우리들의 딱지 따먹기를 구경하고 있었는지 나한테 은근하게 말했다.
“마사쨩, 얼른 달아나거라. 에이쨩이 저의 엄마 데리고 와서 따먹힌 딱지 내놓으라면 어쩌겠니?”
아저씨가 재미삼아 나한테 꾀는 말을 나는 곧이들어 버렸다. 그래서 덜컥 겁이 났다. 일껏 힘들여 딴 것을 빼앗기면 아까워서 못 견딜 것 같아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쳤다.
일부러 행길 쪽으로 돌아서 뒷문으로 집에 들어가 신발까지 감추어 놓고 숨어 있었다. 어두컴컴한 방한구석에 숨어 있자니까 가슴이 온통 쿵쾅거리면서 뛰었다. 숨쉬기도 거북하게 씨근대며 옴쭉달싹하지 않고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에이쨩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마사쨩, 이 똥도둑놈아. 어서 나와라! 딱지치기 하자아!”
나는 못 들은 체 가만히 있었다.
“왜 안 나오는 거야? 나한테 죽고 싶니?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나는 더 이상 버티고 앉아 있을 용기가 없어 두근대는 가슴을 억누르며 밖으로 나갔다.
에이쨩은 그 사이 저의 어머니한테 돈을 얻어 어른 손바닥만한 커다란 딱지를 손아귀에 꽉 차게 사서 들고 있었다. 나는 그만 기가 질려 버렸다. 여태까지 우리가 치던 딱지는 통조림 깡통 둘레만한 작은 딱지뿐이기 때문이다. 에이쨩이 새로 사온 커다란 딱지한테 아무래도 이기지 못할 것이 뻔한 것이다.
에이쨩은 뭐 큰 원수라도 갚으려는 듯, 그 커다란 딱지를 땅바닥에 쾅 두들겨 내 놓고 나보고 얼른 넘기라고 한다. 나는 할 수 없이 작고 얄팍한 딱지로 힘껏 쳤다. 역시 커다란 딱지는 꼼짝도 안 했다.
에이쨩은 씩 웃더니 그 큰 딱지를 들고 내 조그만 딱지를 홀랑 넘겨 버린다. 한 장 두 장…… 내 손의 딱지가 에이쨩한테 건너가기 시작했다.
나는 억울하고 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정말 묘한 일이 일어났다. 에이쨩의 그 커다란 딱지가 땅바닥의 툭 불거진 돌멩이에 비스듬히 걸려 버린 것이다. 에이쨩의 가슴도 덜컥 했을 게다.
나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성껏 내 작은 딱지로 팽이를 치듯이 옆으로 내려쳤다.
에이쨩의 그 두껍고 커다란 딱지는 기우뚱 일어서더니 가까스로 넘어가 버렸다. 나는 숨이 콱 막히듯이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이제 나도 신바람이 났다. 에이쨩이 커다란 딱지를 대놓은 걸 금방 딴 큰 딱지로 마구 두들겨 넘겨 버렸다.
에이쨩의 딱지가 한 장 한 장 나한테 건너왔다. 결국 30분쯤 지난 뒤, 나는 에이쨩의 딱지를 다 따버렸다.
마지막 한 장이 넘어가자 에이쨩은 두 손으로 와락 달려들어 넘어간 딱지를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왜 넘어간 걸 빼앗아 가니?”
내가 따지니까 에이쨩은 얼굴이 빨개져 가지고 씨근대더니, 그만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으왕! 마사쨩이 엉터리로 내 딱지를 다 따갔다!”
에이쨩은 털썩 주저앉아 두 다리를 버르적거리며 골목길이 떠나갈 듯이 큰 소리로 우는 것이었다. 옆집 앞집 아주머니들이 다 내다보고, 언덕 위 에이쨩네 집에서 에이쨩 어머니도 달려왔다.
거의 함께 우리 집 어머니도 뛰쳐나왔다. 어머니들은 울고 있는 에이쨩을 달래며 내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꾸짖기 시작했다.
결국 나도 함께 울어 버렸다.
“아니야, 나 엉터리로 안 따고 진짜로 넘겨 따 먹었다아!”
어머니들은 어이가 없어 얼르고 달래며 내가 딴 딱지를 똑같이 반으로 나눠 가지라고 한다.
나는 아깝지만 다 빼앗기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기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런데 에이쨩은 안 된다고 한다. 쩨쩨하게 자기한테 더 많이 주어야 된다고 떼를 쓰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반으로 똑같이 나눈 데다가 10장을 더 세어서 에이쨩에게 주었다. 딱지를 건네주면서, 나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에이쨩과는 놀지도 않고 말도 안 하리라 결심을 했다. 그러나 그 맹세는 하룻밤이 지나자 말끔히 잊어버리고 우리는 어울려 놀았다.
이듬해 에이쨩과 나는 그 곳 혼마치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얼마 있지 않아 폭격으로 집이 불타 버렸다.
혼마치의 동무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한국 아이지만 나라를 빼앗겨 일본 이름을 가진 우리들, 에이쨩, 게이보쨩, 쑈쨩, 쥰쨩, 그리고 여자 아이들은 기미꼬쨩, 스미쨩, 미찌꼬쨩, 노리꼬쟝…….
지금도 이 아이들의 이름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더워지며 목이 메인다.
어른들이 저질러 놓은 전쟁으로 한 골목길에서 정답게 살던 이웃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슬픔을 겪어야 했던 가슴 아픈 어린 시절의 추억은 가슴에 맺힌 채 풀어 볼 길이 없다.
에이쨩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면서 살고 있을까? 나처럼 딱지치기하던 그 때를 기억하고 있을까?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동무들이 한없이 그립다.
-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동무들》 햇빛출판사, 1985.1.25.
첫댓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면서 살고 있을까…” 가슴을 울리는 문장이에요..
'지금도 이 아이들의 이름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더워지며 목이 메인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도 목이 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