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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자 : 김창호
· 출판사 : 도서출판 예랑
· 발행일/ISBN/판형:
2024년 9월 20일/ISBN 978-89-88137-27-7(03230) /(150×225)mm/320쪽
· 가 격 : 22,000원
· 관련분류: 인문사회>종교>기독교
총판 : 하늘유통(031-947-9753)/시중 서점 판매 중
목회자의 필독서!
목회자가 읽고 성도에게 권하기가 난감한 책!
책 소개
이 책은 도마복음 서론에서부터 말씀 1-28번까지에 대한 해설서다. 국내 최초로 콥트어 원문을 직역하였고, 성서의 이야기 속에서 콥트어 도마복음 본문을 풀이하였다. 후속으로 114까지 풀이 글이 준비 중이다. S.J. Gathercole의 주석서에서 도마복음 관련 자료와 연관 성구를 참고하였지만 도마복음 해석과 관련해서는 콥트어 본문과 성서의 텍스트와 온전히 씨름하며 글을 썼다. 콥트어 텍스트를 놓고 각종 번역본과 비교하며 원문에 대한 이해를 모색했다. 그러면서 다소 매끄럽지 않고 어색하더라도 의역보다는 직역을 시도했다. 가능하면 원문의 분위기를 탐색해 보려는 의도 때문이다. 도마복음은 헬라어를 콥트어로 음역한 어휘가 많다. 예컨대 헬라어 코스모스(κόσμος)를 소리 나는(발음) 대로 콥트어 문자 코스모스(ⲕⲟⲥⲙⲟⲥ)라 표기한다. 그런 식의 어휘가 다수라는 것과 이미 연구자들에 의해 제공된 자료를 활용하여 콥트어 본문에 접근하였다. 동시에 콥트어 문자는 그 기반이 헬라어다. 24개 헬라어 알파벳을 그대로 빌리고, 고대 이집트의 민중 문자 6개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신약성서의 헬라어 문장에 친숙한 이들은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정경복음과 도마복음은 어록의 약 절반 정도가 일치하고 나머지는 정경복음에 없으니 불일치 하는 것일까.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문체와 서술방식과 이야기하는 내용이 전혀 다른데 왜 하나의 책으로 묶여 있을까. 둘은 같은 책인가 다른 책인가. 서로는 서로에게 적대적인 문서일까 아니면 서로를 보충하고 있는 것일까. 각자는 그 나름대로 문서의 완결성을 지닌다. 전혀 다른 성격의 문서이나 비평가에 의해서 수많은 비평이 이뤄질 수도 있지만, 독자에 의해서 둘은 서로를 증거로 제시하고 서로를 보충하는 문서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독자에 의해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매우 이질적인 문서가 하나의 책에 담겨 있는 불편하고 이상한 책이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도마복음과 정경복음의 차이와 같음은 마치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의 같음과 다름 정도로 이해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본서는 도마복음과 정경복음을 서로 대립시키지 않는다. 도마복음의 난해한 로기온은 성서의 찬란한 빛에 의해 해석되고, 성서의 난해한 구절 또한 도마복음의 아름다운 로기온이 되비쳐 주어 성서 이해의 깊이를 더 해준다. 도마복음이 어록의 모음집이라는 특성이 있지만, 모름지기 어떤 말씀이 말씀으로 드러나려면 그것의 전후 맥락과 서사가 있기 마련이다. 같은 사건이 아니라 하더라도 유형이 같은 다른 이야기에서 어록을 유추할 수 있다. 성서는 이야기 모음집이고, 성서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도마복음은 서사와 이야기가 없이 어록만을 모아놨다. 그렇다고 도마복음이 서사가 없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의 어록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이지 않는 서사 속에서 어록이 생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에 의해 어록의 이면에 있는 서사가 읽혀야 한다. 그때 수많은 서사가 담겨 있는 성서는 매우 훌륭하고도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 성서는 도마복음을 밝혀주는 보물 창고(寶庫)다. 동시에 도마복음의 어록은 수많은 서사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하는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종교 너머 더 깊은 인생의 길을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넉넉히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추천의 글
‘도마’가 쌍둥이란 의미를 갖고 있듯이, 성서와 도마복음도 쌍둥이로 이해될 수는 없을까? 마치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이 서로 직접 연관이 없지만, 그 둘이 성서의 시작과 끝을 이루면서 한 쌍둥이가 되었듯이 말이다. 히브리어와 콥트어를 비롯한 해박한 성서언어 연구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그런 상상력을 갖고 도마복음을 멋지게 해설해 주고 있다. 도마복음의 깊은 깨달음의 세계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일독을 권한다.
손원영╷서울기독대학교 교수 ∙ 도마복음연구회 회장
기존의 도마복음 연구는 동양 철학이나 다른 종교 전통의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반면 저자는 기독교 정경 복음서와 유대 신비주의 관점에서 도마복음에 접근한다. 이 책은 정경 복음서와 유대 신비주의 틀로 파헤친 본격적인 도마복음 연구서다. 移例, 가천노 박사 ∙ 종교개혁자
책 속으로
쿰란 문헌은 80% 이상이 히브리어로 작성된 문서들이고(일부 아람어와 코이네 그리스어 문서 포함), 나그함마디 문서는 콥트어로 기록된 문헌들이다. 옥시링쿠스에서 발굴된 문헌들은 헬라어(그리스어)로 기록되었고 신약성서와 관련한 문서들이 대부분이다. 3개의 언어로 기록된 고대 문헌들은 중근동의 이스라엘과 이집트 지역으로 각각 발굴된 장소는 다르지만, 다른 언어의 문헌이라는 것이 경이롭다. <pp. 6-7>
이런 때에 쌍둥이 복음은 진정 복음이 될 수 있을까. 도마복음 말씀의 서술 구조는 이항대립의 형태를 띠고 있다.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둘의 대립구조(쌍둥이)로 진술된다. 노인과 어린아이를 대립시키면 그 의미 전달이 쉽다. 산 자와 죽은 자, 영과 육, 선악과 생명, 사망과 생명, 안과 밖, 하늘과 땅, 먼저와 나중, 앞에 있는 것과 감추어진 것, 나타난 것과 숨어 있는 것, 축복과 저주, 큰 물고기와 작은 물고기 등등 서로 대조적인 구조 틀 거리로 114개의 말씀(말씀)을 진술하고 있다. <pp. 23-24>
생의 비밀은 이곳에 있다. 육신에 속한 인간에게 ‘얼’은 언제나 비밀이다. 영혼은 비밀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은밀한 것이다. 처음의 베드로는 예수를 따라다니며 목숨을 바쳐서 사랑한다고 했다. ‘사랑’은 그에게 비밀이다. 즉, 그가 목숨을 바쳐 사랑하겠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부정되는 베드로만의 사랑이었고 인생들이 좇아가는 사랑이다. 후에야 알게 되지만, 비밀이 드러나야 비로소 알게 되지만 그때까지 그가 아무리 사랑을 말하더라도 그에게 사랑은 감추어진 것이고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인생에게 사랑은 숨어 있는 것이고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p. 33>
자기가 부재한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타인을 끌어다가 타인을 부정함으로 자기 존재를 긍정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옳고 그름을 논함으로 자기 존재를 긍정하려고 한다. 옳고 그름은 타인의 그름을 증명하여야 하기에 타인을 살해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타인을 살해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살해한다는 뜻이다. 정신은 타인을 살해함으로 자신을 살리려 한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을 살게 하려는 유혹에 머무는 것, 그래서 언제나 선악에 집중한다. 마치 극장에서 무대의 공연에 집중하듯, 스크린만을 집중하듯 온통 선악에 집중한 채 그의 삶을 영위한다.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고가 그의 일상이다. <p. 39>
이 말씀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가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뜻은, 곧 선악을 넘어서 존재의 나를 발견하고 존재의 나가 존재를 드러내는 로고스를 발견하는 것, 자신의 소리와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것, 나의 말과 나의 소리를 간직하고 그를 살려내 나의 노래를 부르는 것, 그를 향해 서 있는 것이 도마복음의 어록 배후에 숨어 있는 웅장한 서사다. 나를 감추고 숨게 한 은폐물이 곧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되고 장애물을 치우는 것, 거기에 많은 서사가 있다. 도마복음은 114개 말씀의 구슬로 이뤄졌다. 그 중심 주제는 ‘나’이고 ‘신’이며. 비로소 ‘나’와 마침내 ‘나’에 대한 서술이다. <p. 44>
종교는 천국을 시공간에 매달아 놓고 사람들을 유혹한다. 도마복음은 이 점에서 매우 단호하다. 그런 천국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천국이 있다면, 하늘에 천국이 있다면 새들이 먼저 그곳에 있다는 것이다. 새들이 그대들보다 앞서서 천국에 들어가는 게 아니겠느냐?는 뜻이다. 만일 천국이 바다에 있다고 한다면 물고기가 너희에 앞서서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천국을 어떤 가상의 공간으로 상정한다면 역시 마찬가지다. 도마복음은 밖에 있는 천국에 대해 단호하게 메스를 가한다. 그런 천국은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은 복음서와도 일치한다. 천국은 여기 있거나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 복음서의 강력한 서술이다. <pp. 58-59>
종교가 타락하면 선악의 꼭대기에 서게 된다. 자신들은 택함 받은 선민이고 그 외의 사람들은 이방인이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힌다. 선민의식의 자긍심으로 행복이 충만해진다. 스스로의 선의식에 만족한다. 선의식은 그 반대의 경우를 반드시 악으로 규정한다. 선과 악은 같은 두 개의 레일이다. 하여 선민의식은 천민의식이 되어버린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만족해하는 행복은 불행과 같은 이름이 되고 만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전파하는 왕국은 하여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미명과 양의 옷을 입혀 선전하는 천박한 나라와 다르지 않다. <p. 81>
나그함마디에서 발굴된 그대로의 콥트어 원문은 ⲁⲩⲱ ⲡⲙⲟⲩⲉⲓ ⲛⲁϣⲱⲡⲉ ⲣ̅ⲣⲱⲙⲉ(그리고 사자는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주석가들이 수정한 원문은 ⲁⲩⲱ ⟨ⲡⲣⲱⲙⲉ⟩ⲛⲁϣⲱⲡⲉ ⟨ⲙ̄ⲙⲟⲩⲉⲓ⟩(그리고 사람은 사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다. 어순을 바꿔놓고 원문과 다름을 알리기 위해 중괄호< >로 표기하고 있다.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타당한가. <p. 85>
예수는 처음부터 베드로와 제자들을 부를 때,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그들을 불렀다. 그의 부름은 애초부터 사람이다. ‘사람’은 그물과 물고기로 비유하면 그물에 잡힌 큰 물고기가 ‘사람’을 비유한다. 그렇다면, 잔챙이 작은 물고기들은 무엇을 비유하는 걸까? 예수는 베드로를 어떻게 사람으로 낚아 올리고 있을까? 그리고 마침내 사람을 낚는 현명한(가슴이 있는) 어부로 만들었을까? 여기서 ‘현명한(wise)’은 본래, 마음의 사람을 일컫는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머리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의 남자(man of mind)를 일컫는다. <p. 98>
도마복음은 쌍둥이 복음서다. 큰 물고기와 작은 물고기도 서로 대조되는 쌍둥이 메타포가 담겨 있다. 작은 물고기도 물고기다. 어리석은 어부는 작은 물고기에 관심을 갖는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힌 작은 물고기를 놓고 이를 가르지 못한다. 숫자의 신에 매몰된다. 맘모니즘에 사로잡힌다. 누이도 좋고 매부도 좋아야 한단다. 가르고 나누지 못하면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힌 물고기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베드로의 충성 서약을 좋아하고 덥석 수납하는 그대는 현명한 어부일까? 어리석은 어부는 작은 물고기를 좋아한다. 다다익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한다. 작은 것에 발목 잡혀 큰 물고기를 잃는다. 작은 물고기 때문에 사람을 낚지 못한다. 그가 가진 소유를 충성 예물로 수납하기를 좋아하니 사람을 낚지 못한다. <pp. 101-102>
그러니까, 물리적 우주 창조론에 의하면 애굽과 가나안을 구분하는 것은 난센스다. 왜냐하면 애굽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가나안도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범재신론적 신관에 의하면 가나안과 애굽을 축복의 땅과 저주의 땅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그같이 구분한다면 천지 창조론적 창조주의 신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게 아닌가. <pp. 106-107>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에 떨어졌다고 한다. 가시나무는 콥트어로 숀테(ϣⲟⲛⲧⲉ), 헬라어로 아칸다스(ἀκάνθας), 히브리어로 코츠(קֹ֥וץ)라 불린다. 가시나무는 성서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적 장치로 사용된다. 창세기 3장 18절에 처음 등장하는 코츠는 구약성서에 단지 12회 정도만 등장하고, 신약성서의 아칸다스(ἀκάνθας)도 11회 사용된다. 물론 기타 동의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도마복음에서는 말씀 45의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따지 않는다고 할 때, 이 단어가 한 번 더 사용될 뿐이다. <pp. 120-121>
타인의 말이 그 의식에서 독버섯처럼 ‘양심’이라는 당의정을 입고 나타나 삶의 규칙을 제공하던 것에서 벗어나 비로소 제 말과 제소리를 내며 제 길을 뚜벅뚜벅 걷게 된다. 존재의 나무, 생명의 나무가 된다. 그는 나요, 나는 그가 된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비로소 내가 길이고 내가 진리고 내가 생명이라고 말하게 된다. 그가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처음 하늘이 지나가고, 사라지고 나니 비로소 그러한 사실이 자명하게 드러난다. <p. 161>
예수는 그 같은 유대교의 신과 절연한다. 그 같은 종교 패러다임의 사슬을 끊어버린다. 도마복음은 처음 하늘이 떠나가야 한다고 외친다. 죽음의 신을 잡아먹고 전쟁의 신, 살인의 신의 자리에 생명이 꽃피게 한다. 도마복음은 살신(殺神)복음서다. 살신(殺神)에서 생신(生神)이 이뤄진다. 신을 죽이고 그것을 먹는 날에 신은 비로소 다시 살아난다. 둘은 하나가 된다. 이때의 신은 죽은 신이 아니라 비로소 나와 그는 하나가 된다. I AM HE가 된다. 신을 죽여야 신이 살아난다. 이때 비로소 나도 살아난다. 죽음을 맛보는 삶에서 벗어나 생명의 삶을 살게 한다. 선악 나무를 베어내고 생명 나무가 된다.<p. 161>
따라서 하나와 둘은 잠자는 자가 잠을 깨어 길을 떠날 때 비로소 드러나는 둘이다. 정신이 독립하고 자기 존재와 자기 정신을 향하게 될 때 드러나는 둘이다. 둘은 주돈이의 말처럼 무극(無極, One)이 곧 태극(太極, Two)이다. 무극이 무극으로 있으면 그곳엔 생멸도 존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비로소 생명작용을 할 때 음극과 양극이 둘로 작동한다. <p. 165>
인간에게 진정한 의란, 각자의 각자다움이 꽃피는 것만을 ‘의로움’ 곧 옳다고 할 수 있다. 개나리는 개나리다워야 옳고, 장미는 장미다워야 옳다. 그대는 오로지 그 누구의 영향력 아래, 타자 지배 아래에 식민백성으로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그대 안의 신성, 곧 그대 안의 숨어 있던 하나님이 일깨워져 그대의 모습으로 꽃피는 것, 그것만이 그대에게 옳음이요, 의로움이다. 의로운(ⲇⲓⲕⲁⲓⲟⲥ) 야고보의 상징성은 모든 각 개인이 타자 지배를 벗어나, 신의 지배를 벗어나, 자신의 존재로 꽃피는 것, 그대 안에 있는 신성이 죽어 있지 않고 존재로 꽃피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의’요, 그대의 옳음이고 그대의 의로움이다. <p. 179>
이제부터는 누구나 타인이 전해주는 열 마디 혹은 수백 마디의 깨달은 말보다 자신 안에서 들려지는 세 마디의 깨달은 말씀이 자기 존재와 자기 생명을 이루게 한다. 존재의 나무로 자라가게 한다. <p. 186>
기도하지 말라. 너희가 기도할 때 너희는 정죄를 받을 것이다. 도마복음의 놀라운 가르침이다. 더구나 너희가 자선을 베풀 때, 너희는 너희의 정신을 해칠 것이라고 한다. 무슨 말인가. 자비와 긍휼로 구제와 자선을 베푸는 것은 종교인이 지향해야 할 최고의 덕목이 아닌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귀족의 사회에 대한 도덕적 책무가 아니던가. 갈수록 심화하는 양극화의 해소에 적극 권장해야 할 덕목인 자선과 구제가 정신을 해치는 행위라고 가르치는 도마복음은 현대 사회의 도덕률과도 충돌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 도마복음은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곧 귀족의 도덕적 책무라는 미명으로 자신의 온갖 부도덕을 덮는다. 자신의 오염된 정신을 감추는 위선과 가면이 거기에 있다. 구제와 자선이라는 행위가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할 기회조차 박탈하고 만다. 그러므로 자선과 구제는 자신의 정신을 심각하게 해친다. 다른 말로 하면 자선은 없다. 구제도 없다. 자선이라는 말은 위선이다. 구제도 위선이다. 자선과 구제는 선으로 위장하는 위장술이다. <pp. 191-192>
신은 모시는 게 아니다. 시천주(侍天主)는 시천주(侍天主)가 아니다. 시천주(侍天主)는 생천주(生天主)요 기천주(起天主)여야 한다. 모시는 신은 이제 신이 아니다. 신의 죽음을 알리는 부음(訃音)의 자리에서 여인이 낳지 않은 자를 다시 만난다. 갈릴리 해변에서 새벽에 다시 만난 예수는 베드로가 낳고 베드로가 상상하는 가상 세계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줄 세상 임금 예수가 아니다. 베드로가 낳고 물을 주고 키운 예수는 죽었다. 세상 임금의 흔적인 시체조차 찾을 수 없어 울고 있는 그에게 그가 낳은 적이 없는 다른 예수가 서 있다. 생천주(生天主)하니 신기(神起)요, 신기(神起)하니 신기(神氣)한다. <pp. 196-197>
말이 바뀌는 것은 방언에 비로소 복음이 전파될 때 이뤄진다. 손으로 만지고 마음에 들여야 말이 바뀐다. 제대로 소리를 낸다. 애굽에서 바로의 언어를 사용하다가 가나안에서 그(HE)와 하나 된 자신의 언어로 바뀐다. 광야는 언어가 바뀌는 과정이다.
가나안에서 바뀐 언어는 전혀 보지도 듣지도 말해 본 적이 없는 비로소 제 눈으로 보고 제소리를 듣고 제 언어로 말하게 됨이다. 이것이 존재의 언어요, 여인이 낳지 않은 자, 지성소의 그로부터 새로 낳음을 입고서야 새로운 혀를 선물 받는다. 그(HE)는 아버지요, 비로소 ‘나’이니 그와 나는 하나가 된다. 비로소 배운 언어, 큰 자의 언어, 식민 지배의 언어로부터 혀가 구원받는다. 민족(ἔθνος)이 바뀌고 족속(φυλὴν)과 백성(λαόν)과 방언(γλῶσσα)에게 전해지는 복음을 듣게 된다.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려면, 마침내 그 혀에까지 전파되어야 한다. <pp. 208-208>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는 뜻은, 나는 그 시작이 율법 세대를 살 때도, 그 주어가 ‘나’고 마침내 율법으로 사는 ‘나’가 죽고 율법이 마치고 생명으로 살게 되는 때가 찾아와도 그때의 주어는 ‘나’라고 하는 사실이다. 누구나 인생의 알파와 오메가는 그 자신이다. 제발, 그(HE)만이 알파요 오메가라는 깊은 수렁의 잠에서 깨어나자. <p. 218>
낙원의 다섯 나무에 대해, 이런 나의 해석은 도마복음과 카발라의 생명 나무가 내 순례의 여정에서 만나 서로서로 해석해줌으로 가능했다. 여기서 죽음을 맛보지 않는 생명의 세계가 펼쳐진다. 아직도 죽음을 맛보지 않는 것을 육체의 영생불사나 진시황의 욕망으로 보려는 이들에게는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의미를 전달할 방법이 없다. 이 글을 함께 읽는 이들이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것을, 여전히 내세에 예비 된 천국이 그대만을 위해 준비되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이글은 백해무익이고 무용지물이다. <p. 232>
영지주의를 앞세워 영적 지식이 구원인 양 사람을 유혹하게 되고 자신의 지식으로 타인을 현혹하여 지배하려는 속성이 발동하는 것은 정신이 유혹에 빠지는 것이고, 도적에게 탈취당하는 일이다. 진정한 생명 현상이 아니다. 생명을 다시 탈취하는 것이다. 깨달음과 영적 지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이다. 한 번 비췸을 맛보고 잠시 존재의 세계에 참여했다가 다시 타락하는 현상이다(히 6장 참조). 우후죽순 솟아나는 신흥종교는 이와 같은 현상의 표출이다. <p. 244>
갈수록 무한 경쟁으로 내모는 큰 자의 시대, 작은 자의 복음, 도마복음이 시대의 목탁과 경종(警鐘)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큰 자를 지향하는 삶에서 넋 아웃(soul out) 된 이들에게만 유효하고 또 그 소리가 들리리라. 도마복음은 탈종교 시대에 흩어져 존재 자아의 삶을 꿋꿋이 세워가는 이들이 곁에 두고 읽을 경전이다.<p. 254>
듣기(to hear)는 여성성이요, 말하기(to speak)는 남성성이다. 우리의 정신은 듣기와 말하기를 통해 그의 의식을 키워간다. 들어야 할 때는 들어야 한다. 아직 혀가 풀리지 않을 때, 그때는 듣기에 충실해야 한다. 정신의 형상이 여자로 있을 때다. 그에게서(자신 안에 있는 He) 듣기가 시작되면 말하기도 시작된다. 타자에게서 듣기를 멈추고 자신에게서 듣기 시작해야 자신의 말을 하게 된다. 여자가 남자가 되는 원리가 거기 숨어 있다. 생물학적 육체의 성전환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남녀의 우열을 말하는 성차별적 언어가 아니다. 남녀의 성(gender)을 비유로 정신의 성질과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pp. 259-260>
한 사람은 정직한 한 사람이며, 일천과 일만은 많은 꾀를 도모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상상계와 상징계에서 일어나는 천태만상(千態萬象)이다. 그러므로 천 명 중 하나, 만 명 중 둘은 천태만상의 나에게서 벗어나, 오직 홀로 하나인 실재계에 우뚝 서 있는 나와 마주하는 것을 일컫는다. <p. 269>
눈은 마음의 창이다. 모든 씨앗에는 생명의 씨눈(eyes of seed)이 있다. 우리 의식의 영역에서 존재, 곧 생명의 씨눈은 로고스에 의해 점화된 불꽃이자 눈동자며 새로 태어난 존재의 의식을 향해 서 있는 깨어있는 의식이고 겨자씨며 누룩이다. 눈은 지성의 영역과 감성의 영역을 지각하는 지혜의 눈이고 총명의 눈이다. 씨알이며 어머니의 자궁인 총명이 곧 눈이다. 이 눈을 지켜야(콥 ⲧⲏⲣⲉⲓ 테레이, 헬 τηρέω 테레오, 히 שָׁמַר 샤말)한다. 형제는 곧 새로 태어난 자기 자신이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사람 ‘셋’이다. <p. 286>
성서는 전기와 후기의 삶을 ‘형제’라는 이야기에 버무려 담는다. 전기와 후기는 명확히 나눌 수 없다. 전기에도 후기의 존재 유형이 꿈틀대고 후기에도 전기의 존재 유형이 잔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야기 속에는 뚜렷한 대전환의 계기가 있다. 그래야 이야기 속에 인생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소위 제대로 된 이야기 전개가 성립한다. 음악가 살리에리와 모차르트, 헤르만 헤세가 그의 소설 싯다르타에 담고 있는 고빈다와 싯다르타 두 정신의 유형이 형제 이야기에서 뚜렷하게 대비 된다. <pp. 290-291>
“누가 크냐”는 탐진치를 일으키는 삼독(三毒)의 근원이요, 그곳엔 안식이 없고 오직 상대적 비교에서 생성되는 불안, 자기 존재의 부재로 인한 존재의 불안이 죽음을 맛보며 사는 삶의 척추를 이루고 있고, 들보가 되어 있다. 그곳에는 단지 불의(자기 됨과는 상관이 없는 타자 자아)가 넘실댈 뿐이다. 따라서 금식은 “누가 크냐”의 양식을 끊게 되는 현상이다. <p. 298>
금식이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는 것을 멈추는 것이라면, 세상에 취해 있고, 이제 세상에 취해 있는 술을 끊는다는 것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실 것을 준비하는 것이다. 술 취하지 말라. 금식과 술 취하지 않음은 나란히 찾아온다. <p. 308>
저자 소개
김창호
총신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철학교육을 전공하였다. 수도침례신학교와 중부대학교에서 기독교철학과 헬라어, 히브리어를 강의하였다. 저서로는 『베드로의 고백 그 허와 실』(1994)『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냐』(1998)『예수의 믿음』(2018)『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2021)『유대신비주의 카발라와 생명나무』(2023) 등이 있다. 원어성서원 刊 『스테판 원어성경』 데이터 작업과 편집에 참여하였으며 격월간지 『형상과 글』을 창간하기도 했다.
현재 유튜브 방송 김창호TV(https://www.youtube.com/@biblelogos)를 운영하고 있으며, 원어 성경을 토대로 한 해설 요한계시록과 창세기, 산상수훈, 주기도문, 카발리즘, 도마복음, 로마서, 히브리서 등 동영상 약 620여 편이 업로드 중이다.
목 차
들어가는 말 • 5
도마복음 서론 • 도마복음 텍스트 구조 • 17
살아있는 예수 • 17
디두모스 유다스 토마스 • 19
쌍둥이 플러스 • 28
감추어져 있는, 신비의 말씀 • 31
말씀 1 해석을 발견하는 자 • 35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 37
‘죽음’ 개념에 대해 • 41
죽음을 맛보는(γεύσηται θανάτου) 또 다른 형태•45
말씀 2 찾음과 발견 그 경악스러움과 주권 • 52
말씀 3 너희 자신을 아는 것과 왕국 • 57
말씀 4 칠 일 된 어린아이와 생명의 장소 • 64
니체 ‘정신의 삼단계’와 말씀 4 • 69
말씀 5 앞에 있는 것을 알라 • 72
말씀 6 금식과 거짓 • 77
말씀 7 사자가 사람이 되려면 • 84
사람에게 먹히는 사자와 사람을 먹는 사자 • 86
사람과 사자, 사자와 사람 • 87
말씀 8 가슴을 갖고 있는 현명한 어부 • 96
말씀 9 씨 뿌리는 비유 • 104
씨 뿌리는 비유에서 길가 • 104
씨 뿌리는 비유에서 바위 • 110
씨 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덤불 • 120
씨 뿌리는 비유에서 좋은 땅 • 132
말씀 10 불과 태워져야 할 것 • 139
말씀 11 천지와 지천 • 149
천지(天地)와 지천(地天) • 149
죽은 자와 산 자 그리고 떠나가는 하늘 • 153
죽은 것을 산 것으로 • 158
하나(ⲟⲩⲁ)와 둘(ⲥⲛⲁⲩ) 이야기 • 162
말씀 12 야곱에게 가리라 • 169
누가 우리 위에 큰 자가 되겠습니까 • 170
의인 야고보에게 가리라 • 173
말씀 13 말할 수 없는 세 마디 • 180
말씀 14 금식과 위선 • 187
금식은 자신에게 짓는 죄 • 187
기도는 자신을 정죄하는 것 • 189
말씀 15 여인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자 • 194
말씀 16 가족 전쟁과 모나코스 • 199
불, 칼, 전쟁 • 199
말씀 17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것 • 206
말씀 18 근원과 궁극 • 210
말씀 19 존재하기 전에 존재하는 자 • 219
두 존재(Two Being) • 222
낙원(ⲡⲁⲣⲁⲇⲓⲥⲟⲥ 파라디소스)의 다섯 나무 • 227
1. 아칠루트 나무 • 228
2. 브리야의 나무 • 229
3. 예치라의 나무 • 230
4. 앗시야의 나무 • 231
5. 야웨의 나무 • 232
말씀 20 겨자씨와 왕국의 비유 • 233
흙갈이 된(ϩⲱⲃ 홉) 밭에 떨어지다(ϩⲉ 헤) • 234
말씀 21 집주인과 도적의 비유 • 239
남의 밭에 사는 어린아이 • 239
집주인과 도적의 비유 • 242
그에게서 듣게 하라 • 247
말씀 22 작은 자와 왕국 • 249
작은 자란 • 249
둘을 하나로 만드는 자 • 254
말씀 23 천에서 하나 만에서 둘 • 261
말씀 24 빛이 존재하는 빛나는 사람 • 271
말씀 25 형제 미움과 형제사랑 • 280
눈동자 • 286
말씀 26 들보와 티 • 288
말씀 27 금식과 안식 • 294
말씀 28 술 취하지 말라 • 301
참고문헌 • 309
부록 / 도마복음 콥트어 원문 직역(로기온 1~28) • 310
유대신비주의 카발라와 생명나무
· 저 자 : 김창호
· 출판사 : 도서출판 예랑
· 발행일/ISBN/판형:
2023년 10월 25일/ISBN 978-89-88137-25-3(03200) /(150×225)mm/320쪽
· 가 격 : 22,000원
· 관련분류: 인문사회>종교>기독교
총판 : 하늘유통(031-947-9753)/시중 서점 판매 중
책 소개
본서는 유대신비주의 카발라의 핵심 도해인 생명나무를 새로운 시각에서 풀이하고 있다. 퇴계 이황이 유학과 성리학을 전해오던 도해에 더해 10개의 그림으로 압축한 것이 성학십도다. 군주와 유학도, 그리고 후학들에게 성리학의 핵심을 전하기 위한 그 시대의 지혜다. 카발라에서 생명나무는 모세 오경을 압축하여 한 장의 그림으로 그린 매우 탁월한 도해다. 성서를 놓고도 서로 다른 관점의 해석으로 수많은 분파가 발생한다. 마찬가지로 생명나무의 도해를 놓고도 서로 다른 해석이 충돌한다. 서구 문명의 배면에 흐르고 있는 카발라를 이해하지 못하면 서구 철학의 이면은 물론이려니와 서구 사상사를 제대로 읽어내기 어렵다. 서구 사상의 저수지와 같은 카발라는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그 보이지 않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카발라 신비주의의 가장 중요한 본령은 ‘신’의 문제다. 신의 문제는 동시에 인간의 문제다. 신과의 합일과 일체는 신비주의 주제 중 주제라 할 수 있다. 도그마에서 설명하는 신의 문제가 아니라, 네 안에 타자가 아닌, 네 안에 그, 곧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신을 말해도, 신비의 영역에 있는 신과 신의 발현에 대해 카발라의 신비주의에서처럼 분명하게 말하기란 쉽지 않다.
카발라에서는 네가 곧 그다. 그와 하나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하나가 되는가를 설명한다. 카발라의 신비주의는 하나님과 하나(One with God), 곧 일체가 되는 과정을 주목하고 거기서 인간의 진정한 얼굴이 드러난다는 것을 천착한다. 카발라의 생명나무(The Tree of Life)는 신과의 온전한 합일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인간의 영적 창조의 단계를 설명하는 도해며, 동시에 이것의 완성이 신과 합일(single one)의 성취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카발라는 유대 신비주의 전통이다.
저자는 생명 나무의 토대인 아인, 아인 소프, 아인 소프 오르에 대한 개념을 헤겔의 변증법과 불교의 반야심경의 핵심, 공과 무를 차용하여 설명한다. 아울러 생명 나무의 핵심 개념인 10개의 세피라에 대해 그 배경이 되는 히브리어 성서에 등장하는 맥락을 좇아 개념을 파악하여 해석을 시도한다. 이 책은 카발라의 생명 나무를 바탕으로 현대적인 존재 문제와 연관하여 타자 자아(others-ego)와 존재 자아((εἶναι-ego)) 개념을 대두시켜 인생이 궁극적으로 지향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다. 성서의 수많은 이야기가 제시하려는 뜻이 각각이 홀로 존재 자아(εἶναι-ego)로 우뚝 서게 하는 데에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카발리스트가 안내하는 생명 나무도 결국 우리 내면에 세워져야 할 '존재의 왕국(그대 안의 왕국)'에 귀결된다는 점을 밝히 드러내려 한다.
추천의 글
신학은 인간학이다. 모든 신화는 인간의 이야기다. 성서는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비유와 은유를 통한 싱글원으로서 우뚝선 존재인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오도송의 복음이다. 비로소 사람의 아들로 돈오점수해 가는 천로역정을 그린 이 역동적이고도 웅장한 인류의 대서사시인 성경이, 원죄의식과 선악구도로 점철돼 자본과 권력의 파시즘이 된 지 오래다. 높은 장대에 올려진 신은 기관총을 손에 들고 동서남북을 난사하고 있다
저자는 오랜 시간 카발라와 원어성경 불경 동서양철학을 융합통섭하며, 생명나무의 비의를 밝혀낸다. 그 通觀의 해석이 명징하지 않은가. 인생의 마스터키를 얻은 느낌이다. 귀 있는 이는 들으리라. 김여옥 𝄀𝄀 시인
복음을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풀어내는 저자의 새로운 역작으로 유대 신비 전통인 카발라의 생명나무 코드를 명쾌하게 풀어준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서구신학의 틀에 갇혀 생명을 상실한 기독교의 도그마를 깨뜨리고 성경과 복음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놀라운 지혜의 눈을 뜨게 될 것이다.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누구라도 진리를 찾고 참 자아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고 큰 깨우침을 얻기 바란다. 심중식 𝄀𝄀 귀일연구소장
책 속으로
야웨란 ‘그가 존재다’이며, 신약의 방식으로 하면 ‘내가 나로 나아 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으니, 야웨 엘로힘이란 ‘나의 나 됨’을 이루는 하나님이라는 뜻이 명확하다. <20쪽>
의식은 처음에는 부득불 타자에 의해, 전통에 의해 의식활동이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활성화된다. 타자가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의식활동의 영토에 들어온다. 곧 전두엽과 후두엽, 좌뇌와 우뇌의 각종 신경망을 타자가 자극하여 활성화시킨다. 정보전달 체계의 우주가 반짝이고 뉴런과 뉴런 사이를 잇는 신경 전달 물질이 활성화된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의해 시작된다. 어머니와 아버지에 의해 자극된다는 것은 전통과 사회의 집약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통해 전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타자가 언어 감각을 일깨우고 대뇌피질에 각종 의식의 씨를 반복해서 뿌리며 자극한다. <32쪽>
카발라의 신비주의는 하나님과 하나(One with God), 곧 일체가 되는 과정을 주목하고 거기서 인간의 진정한 얼굴이 드러난다는 것을 천착한다. 카발라의 생명나무(The Tree of Life)는 신과의 온전한 합일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인간의 영적 창조의 단계를 설명하는 도해며, 동시에 이것의 완성이 신과 합일(single one)의 성취라고 본다. <38쪽>
깨달음이란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지극한 마음의 처소에 숨어있는 광대한 빛에 다가가기다. 성서는 그곳을 지성소(至聖所)라 일컫는다. 거기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 곧 밝고 원만하며 한량없는 광대함이 있다. 요한계시록의 수많은 상징어가 이를 은유한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오온의 버섯구름이 결국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챔이며, 무변 광대한 빛을 발산하는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44쪽>
히브리인들은 우주의 원초적 진동을 문자 요드(י, Yod)로 상징한다. 요드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가장 작은 문자이며, 운동의 한 점을 상징하고 그 자신의 주위를 움직인다. 요드의 움직임으로부터 다른 문자는 구조화되고 앞으로 나타난다. 문자 Yod는 근원적 점으로도 사용되고 알파벳 문자로도 사용된다. 원래 점으로서의 요드는 자연어에서 구두 문자보다도 더욱 명백한 최초의 진동과 유사하고, 한 줄기 번개와 같은 빛을 상징하기도 한다. <60쪽>
요드는 알레프를 구성하는 중요한 문자다. 대각선을 중심으로 오른쪽 상단과 왼쪽 하단에 요드 점을 찍어서 히브리어 첫 글자 알레프(א)를 구성한다. 상형으로는 황소를 본뜬 것이나, 그 의미는 정신이 새로 태어났을 때의 첫소리를 상징한다. ‘아래아 (ㆍ)ㅏ(א)’는 ‘아하!’의 원초적 제소리다. 하여 정신이 새로 태어날 때, 존재 자아가 내는 하늘 소리의 시원이라는 말이다. <61-62 쪽>
아칠루트 다음에는 브리야(בריה)가 등장한다. 브리야계란 흔히 창조계로 번역하지만 그 뜻은 ‘야웨의 창조’라는 뜻이다. 현대 카발리스트들의 설명이 이 부분에서 매우 빈약하다. 브리야계를 실존적으로 설명하는 이를 아직 찾지 못했다. 나는 브리야(בריה)라는 단어를 분석하면서 처음 이 단어를 만든 카발리스트의 창의력에 깊이 공감하고 탄복하였다. <73쪽>
모든 권세가 위로부터 왔다 하여 세상의 권력도 다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에 순복해야 한다는 허무맹랑한 도그마는 이제 그만하자. 민심은 천심이라는 세상의 속담도 예수는 보기 좋게 거부한다. 민심은 예수를 세상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 예수는 민심을 역행했다. 세상의 권력은 민심에서 나온다. 땅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말이다. 위에 있는 권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그것의 질서대로 유지되며 그 나름의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며 문명의 진화를 따라 끊임없이 역동하며 변화해간다. <85-86 쪽>
카발라에서는 생명나무에 10개의 세피라를 그리면서 그 각각의 자리마다 고유한 이름을 부여한다. 그러면서 세피라마다 개입하는 신의 이름, 혹은 천사의 이름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아니 개입하는 신의 이름이 아니라, 각각의 세피라를 형성하는 성질에 따라 ‘신의 이름’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사과, 배라고 존재자에게 이름을 부여하듯, 신성의 빛마다 그에 어울리는 이름을 부여하여 빛의 발산에 대한 몇 개의 범주로 나누고 있다. <91 쪽>
신명이 없는 작품은 위작이고 속임수요 짝퉁이다.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쿠트는 왕국이다. 이렇게 왕국을 이뤄간다. 왕국은 동시에 관계와 소통으로 나라를 넓혀간다. 케테르는 말쿠트를 향하고 말쿠트는 케테르를 향해 있다. 서로는 마치 음과 양이 하나로 있는 것처럼, 플러스(+)와 마이너스(−)처럼 결합하며 새로운 나 를 창조하고 만들어간다. 성서의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 나라 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다. 두 발과 다리는 온몸, 곧 머리와 가슴과 배를 그 다리에 싣고 어디든 다니며 활동한다. 온전한 왕국을 이룬다. 왕국은 여기 있거나 저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 안에 있고 그대를 이룬다. 신과의 온전한 합일은 말쿠트에서 완성된다. <120-121 쪽>
생명나무는 세 기둥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우측 기둥은 자비의 기둥이며 좌측은 의의 기둥이다. 가운데 기둥은 서로 균형을 잡아주는 중심의 기둥이다. 중심을 이루는 기둥은 케테르, 티페레트, 예소드, 말쿠트다. 인체의 척추와 같다고 하겠다. 의식의 기둥이다. 우측의 기둥은 자비의 기둥이면서 의식의 남성성이다. 코크마, 케세드, 네차가 남성성이며 플러스 에너지를 갖는다. 왼쪽 기둥은 비나와 게부라와 호드로 구성된다. 의식의 여성성이다. 아울러 마이너스 에너지다. 수용성이다. 받아들이고 이를 숙성하여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축적하여 내보낸다. <124 쪽>
나는 불교의 돈오(頓悟)를 카발라의 코크마와 상응한다고 여긴다. 코크마는 비나(이해, 총명)의 자궁에서 키워져야 하고 숙성되어야 한다. 순간의 깨달음, 그 직관은 단지 씨앗일 뿐 나무나 열매가 아니다. 의식 내부에는 이를 씨로 받아 발아시키고 싹틔워 나무로 혹은 열매로 키우는 마음의 자궁이 있다. 이를 카발라 신비주의자들은 ‘비나’라 한다. 불가의 점수(漸修)가 여기에 해당한다. 점수를 단지 수행이나 닦음으로만 여겨 돈오와 점수를 이항대립으로 여기는 것은 따라서 타당하지 않다. 돈오와 점수는 그런 점에서 하나다. <127쪽>
인생은 두 길을 간다. 존재의 길을 찾아가거나 비존재의 길에 서 있거나. 무(無)란 비존재의 길을 떠나 존재의 길로 가는 인터체인지다. 여기서 존재란 나의 있음을 의미한다. 육체의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이 자명하다. 문제는 정신에 관해서다. 물론 정신도 누구나 활성화되어 있다. 그 기능은 작동한다. 다만 자신의 존재로 활성화되어 있는가 타자로 인해 활성화되어 있는가. 정신이 비존재(타자의 정신)로 존재하는가 스스로의 정신(제 정신)으로 존재하는가. 제 정신인가 타인의 정신을 이식하고 있는 숙주에 불과한가. ‘존재하기’ 그것이 문제다. 모든 불안의 근원은 자신으로 ‘존재하기’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134 쪽>
야웨의 유래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도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하야(הָיָה)의 칼동사 완료형에서 유래했다는 견해와 히필동사(사역동사) 미완료형에서 유래했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칼동사 완료형과 미완료형의 합성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나는 이 중 칼동사의 완료형과 미완료형의 합성어에서 유래했다는 견해에 적극적으로 공감한다. 또한 하야 동사가 아니라 하바(הָוָא)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하바는 하와의 고대 표기법이고 모세 시대에 하바는 하와로 대체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한 관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하바는 아람어에서 비롯되었고 에덴 이야기에 등장하는 하와(산자의 어미)와 동일한 뜻이 있고 “비가 내리다. 번개가 친다”는 의미가 있다. <148 쪽>
존재 자아의 형성기에, 처음에는 왕관이 시작되며 왕관(케테르)에 이어 피어나는 두 개의 쌍떡잎은 지혜와 총명 곧 ‘코크마와 비나’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마른 뼈에 살이 붙고 잎이 피는 생명작용을 상징한다. 성서에는 매우 중요한 상징어가 등장하는데, 지성소(至聖所, קֹ֥דֶשׁ הַקֳּדָשִֽׁים, 코데쉬 하코다심)다. 영어로는 The most holy place라 한다. 지극한 마음의 자리다. 진공(眞空)의 자리며, 아무것도 없는 지극한 고요의 자리다. 이곳에 묘(妙)가 있(有) 으니 법궤다. 법궤에는 상징적 귀물 세 개가 있다. 감추인 만나,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증거판이다. ‘없이 계신 분’에 대해 기술하는 성서의 진술 방식이다. <187 쪽>
타자를 통해 우리 의식은 싹트고 태어난다. 어머니는 우리의 거울이고 아버지는 따라야 할 모범이다. 아버지는 관습이고 사회고 윤리고 도덕으로 확장되어 나타난다. 이것이 더욱 연장되어 종교화되면 아버지는 마침내 신의 얼굴로 확장되어 나타나니 하나님 아버지다. 소위 절대 타자, 대타자의 얼굴로 나타나 인생을 지배한다.
처음에는 그러하다. 그렇게 우리의 의식은 길러진다. 우리는 처음 우리 자신의 생존과 보존을 위해 그렇게 존재한다. 본능과 육체의 속성을 중심으로, 자아를 중심으로 의식의 세계가 형성된다. <197 쪽>
종교의 교주가 이처럼 발흥하는 것은 바로 자기 없음과 타자를 자아로 동일시하는 무기력한 대중이 있기 때문이다. 타자는 결코 자아와 동일시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없고 크게 다가오는 타자에 자신을 투영하며 타자 자아(others-ego)를 형성한다. 이게 인생이 걷게 되는 순례의 길이다. 그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정신의 초기 현상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그러므로 아직 정신의 원시 단계에 머물러 있다. <204 쪽>
엑소더스(ἔξοδος)는 엑스-오더스(Ex-others, 탈타자)요 엑스 파라오(Ex-Pharaoh)다. 출애굽이란 출(탈)타자 자아요, 출(탈)파라오다. 파라오는 풍요인 동시에 빈곤이다. 파라오가 제공하는 나일강의 삼각지 고센 평야의 풍요는 육체의 풍족한 먹거리로 생존을 보장해준다. 동시에 정신의 자리에는 파라오가 지배자로 들어와 있으니 타자 자아요 자기 부재의 빈곤이다. <218 쪽>
그러므로 만나는 불가의 화두다. 불가의 ‘간화선(看話禪)’의 히브리식 이야기다. 수행법이 아니다. 묻기 위한 물음이 아니다. 화두를 붙잡고자 해서 붙잡으려는 것은 가짜(?)다. 스승이 던져준 화두를 억지로 붙잡고 수행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무병(巫病)을 앓으며 지금까지의 삶터에서 광야로 내몰리는 속에서 묻고 또 묻게 되는 것이 화두라 하겠다. 물어야 하는 게 아니라 묻지 않을 수 없고 묻게 된다. 물음이 찾아오는 것이지 화두를 억지로 붙잡는 게 아니다. 타자 지배로부터, 타자가 전해 준 정답에 대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삶의 근본에 대해 묻는 물음 속에서 찾아오는 게 화두요, 만나다. <226-227 쪽>
내가 나일 때, 나는 나로 존재하게 된다. 이를 생명(ζωῇ 조에)이라 한다. 나라고 하지만 내가 아닌 타인이 내 의식을 지배하고 있으면 나라고 지칭한다 할지라도 나는 존재하지 않으니 이를 성서는 사망 아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수없이 일컫고 있는 생명이란 그러므로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 <234 쪽>
번개와 천둥은 하늘에서 시작된다. 지진과 화산과 해일은 땅에서 시작된다. 존재 자아는 하늘에서 번개와 천둥이 일어나며 시작된다. 나팔 소리와 함께 타자 자아의 와해가 시작되며 하늘에 뿌리를 뻗는다. 뿌리를 올리는 것이다. 거꾸로 서 있는 나무와 같다. 존재 자아 의식의 자기 발아가 시작된 것이다. <236 쪽>
존재 자아의 두 번째 특징은 빛이 비쳐 왔을 때 직관을 통해 개념으로 포착해가는 분화작업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타자 자아의 지배에 의한 지식활동이 아니라 오로지 스스로의 의식활동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이를 일컬어 지혜(חָכְמָ֑ה)라 이름한다. 존재 자아는 이렇게 점차 자기 존재를 확장해간다. 의식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세포분열이고 기관 형성이다. 태아가 모태에서 장기와 손발과 머리가 만들어져 가는 원리와 다르지 않다. <238 쪽>
요한복음은 신 존재를 ‘로고스’로 선포한다. 절대, 무한자, 우주 창조의 신이 아니라 ‘로고스’로 확언하는 책이다. 기독교는 신에 대해 유대교의 오류를 답습하고 많은 사상가는 요한복음의 로고스를 무한 실체, 절대자로 오해한다. 이는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절대 존재의 신으로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오해된 로고스를 중심으로 세계를 해석하려 한다. 거기서부터 서양 사유는 로고스를 중심에 놓고 선과 악을 나누고 흑과 백을 구분하려는 역사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242 쪽>
만물의 어머니라 일컫는 이해는 비로소 나의 꼴을 점차 넓혀가게 되는데 비로소 존재 자아의 심장을 낳는다. 케세드(자비심)는 존재 자아의 심장이다. <256 쪽>
정신은 그때그때 호흡의 종류가 다르다. 성서는 여러 형태의 개념을 동원해 이를 표현해준다. 애굽에서의 호흡이 다르고, 광야에서의 호흡이 다르고, 가나안에서의 호흡이 다르다. 바빌론에서의 호흡이 다르고 다시 가나안에서의 호흡이 다르다. 처음 가나안과 두 번째 가나안에서의 호흡은 같은 가나안이라 하더라도 전혀 다른 호흡으로 산다. 여기 등장하는 지역은 그가 머무는 정신의 거주지를 비유한다. <283 쪽>
비움은 채움을 위해 있고 채움은 비움을 위해 있다. 이를 반복할 때 수레는 비로소 수레다. 호와 흡은 이렇게 상생하며 유무 또한 그러하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 다른 둘의 세계가 아니다. 공과 색도 마찬가지다. 숨 쉼이다. 색즉시공이면 반드시 공즉시색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둘은 동어반복이 아니다. 색즉시공이 날숨이라면 공즉시색은 들숨이다.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300 쪽>
저자 소개
김창호
총신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철학교육을 전공하였다. 수도침례신학교와 중부대학에서 기독교철학과 헬라어, 히브리어를 강의한 바 있으며 저서로는 ‘베드로의 고백 그 허와 실’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냐’ ‘예수의 믿음’ ‘에덴의 뮈토스와 로고스’ 등이 있다. 원어성서원 刊 스테판원어성경 데이터 작업과 편집에 참여하였으며 격월간지‘형상과 글’을 창간하기도 했다.
현재 유튜브 방송 엔테비블로TV(https://www.youtube.com/@biblelogos) 운영자며, 원어성경을 토대로 한 해설 요한계시록과 창세기 1~5장, 산상수훈 중 팔복, 주기도문, 카발리즘, 도마복음 등 동영상 약 440여 편이 업로드 중이고 강연 영상이 지속적으로 올라가고 있다.
목 차
시작하는 말
Ⅰ. 신성 네 글자와 생명나무 • 17
신성 네 글자 • 18 생명나무 풀이에 앞서 • 27
신비주의란? • 35 생명나무의 토대 • 39
아인 • 40 아인 소프 • 45 아인 소프 오르 • 52
Ⅱ. 생명나무와 세피라 • 57
아칠루트계(발산의 세계)• 58
1. 케테르-왕관• 60인자의 임함과 번개 • 60
혼돈과 공허 • 64
2. 코크마-지혜• 65 3. 비나-이해, 총명• 69
브리야계(낳음의 세계) • 73
4. 케세드-야웨의 자비• 765. 게부라-권위 힘• 81
6. 티페레트-아름다움• 87
다윗의 육각별(hexagram) • 90
생명나무의 첫 번째 야웨와 두 번째 야웨 • 91
예치라계(지음의 세계) • 95
7. 네차크-인내, 승리, 영원• 97 8. 호드-존엄• 102
9. 예소드-기초, 토대• 107
아시야계(활동의 세계) • 115
10. 말쿠트-왕국• 117 의식의 세 기둥(pillars)• 124
메르카바 신비주의 • 125
Ⅲ. 야웨 신앙 여전히 유효한가• 133
비존재는 무가 아니다 • 134 파루시아 • 136
은폐와 탈은폐의 구조 • 139 의식의 감옥과 해방 • 144
야웨 엘로힘과 예흐예 • 147
엘샤다이 엘로힘과 야웨 엘로힘 • 153
예수와 야웨• 160요한계시록의 야웨• 166
인자(仁慈)와 진리(케세드 베에메트חֶ֣סֶד וֶאֱמֶ֑ת)리• 172
무(無)와 기름 부음 • 176 좋음(ט֑וֹב)의 근원 • 181 명랑 • 184
Ⅳ. 존재 자아와 타자 자아• 187
천국의 비밀(너희와 저희) • 188 의식의 기원 • 195
타자와 나 • 197 타자 자아(others ego) • 202
타자 자아(others-ego)의 연쇄 고리 • 205
타자 자아(others-ego)에서 존재 자아(εἶναι-ego)로 • 208
존재 자아(εἶναι-ego)와 위버멘쉬(Übermensch) • 212
Ⅴ. 존재 자아 그 빛나는 특성들 • 217
엑소더스(ἔξοδος)는 엑스-오더스(Ex-others 탈타자) • 218
존재 자아와 만나(מָּן)나• 223‘그게 아닌데’와 ‘아하!’• 231
의식의 하늘과 뿌리 올리기• 236 두물머리와 하나• 240
새로운 시선 • 248 이해를 토대로 한 긍휼 • 252
가브리엘과 권위 • 259 아름다움(美)• 262욥과 인내• 265
존엄 • 272 비로소 씨알, 그 토대 • 275 그대 안에 왕국 • 279
성서가 말하는 정신의 유형–숨에 대해 • 282
1. Gouph 구프(גּוּף, σῶμά, 쏘마)인체• 284
2. Nephesh 네페쉬(נֶפֶשׁ, ψυχὴ, 푸쉬케) • 285
3. Basar바살(בָּשָׂר, σὰρξ, 싸르크)• 286
4. Ruah 루아흐(ר֣וּחַ, πνεῦμα, 프뉴마) • 289
5. Neshamah 네샤마(נְשָׁמָה, πνοή, 프노에) • 294
6. Hayyah 하야(הָיָה, 에고 에이미, ἐγὼ εἰμί, 생명, 존재) • 295
7. Yechidah 예히다(יְחִידָה, ἓν, 헨, νους, 누스) • 297
하나의 숨결–비움과 채움 • 300
그 사람의 그 아들 • 303
부록 / 김창호TV 영상 목록 • 309
· 저 자 : 김창호
· 출판사 : 도서출판 예랑
· 발행일/ISBN/판형:
2021년 9월 1일/ISBN 978-89-88137-08-6 /(150×225)mm/288쪽
· 가 격 : 15,000원
· 관련분류: 인문사회>종교>기독교
총판 : 하늘유통(031-947-9753)/시중 서점 판매 중
책 소개
이 책은 서구신학의 틀을 의존하지 않는다. 한국인이 읽는 성서요, 유대 신화를 통해 인간의 보편을 읽어내려 한다. 기독교의 정형화된 교리적 시각을 벗어나 이야기가 갖는 참 의미를 탐색한다. 유기적영감설이나 축자영감설이 아닌, 이야기 그 자체가 갖는 힘이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야기를 통해 전하려는 옛사람의 방식에서 인류의 지혜와 인간의 실존, 존재에 대한 무궁한 힌트가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에덴의 이야기는 옛사람이 전해주는 오늘 지금 여기의 인간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다.
히브리어 원문을 바탕으로 에덴 이야기를 풀이하였다. 기존 서구신학과 기독교 교리의 틀에서 해석하기보다는 도리어 에덴 이야기를 통해 기존 신학의 여러 개념을 과감히 해체한다. 에덴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과 팩트로 읽어서는 안 되는 이유와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고 이야기를 통해 전하려는 옛사람의 지혜에 집중한다.
책 속으로
성서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βεβήλους καὶ γραώδεις μύθους)를 버리라’고 한다(딤전 4:7). 성서는 온통 이야기로 기록되었다. 바울의 신화를 버리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성서는 공교히(궤변을 꾸며) 만든 이야기일까? 신화에 매몰되면, 그러니까 이야기에서 로고스를 읽어내지 못하면, 신화에 빠진 거고 그럴 때 망령되고 허탄한 게(딛 1:14) 되고 만다. 신화는 봉한 샘이고 덮힌 우물이고 로고스를 함장하고 있는 판도라 상자다. 인을 떼어 봉함이 풀릴 때마다, 우물의 덮개가 열릴 때마다 로고스는 홍수를 이루고 심판을 완성하고 생명의 꽃을 피운다.<13-14 쪽>
우리가 귀담아 새겨들어야 할 말씀은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들려오는 존재의 소리 곧 호 로고스(ὁ Λόγος)다. 이를 통해 우리의 ‘존재하기’가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여 ‘로고스’는 거기서 창조의 주체가 된다. 존재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 로고스’와 ‘존재하기’는 상호 순환적이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다고 하겠다. 존재하기에 의해 말하기가 이뤄지고 말하기에 의해 ‘존재하기’가 이뤄진다. <32 쪽>
에덴의 이야기는 모든 이야기의 원형이다. 서구 문명의 밑뿌리에 있는 원형적 이야기다. 에덴의 이야기는 노아의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야기, 출애굽의 이야기, 신약의 수많은 이야기의 원형이다. 노아의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야기, 모세의 이야기는 에덴 이야기의 변주(變奏)에 지나지 않는다. <38 쪽>
에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담이 인류의 시조라고 해석하는 것은 마치 우리 민담 중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등장하는 호랑이가 호랑이의 시조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이야기를 이야기로, 메타포를 메타포로 읽지 않으면 빚어지는 현상이고 축자영감설이나 유기적영감설 등의 신학적 이론이 빚어내는 촌극이다.<44 쪽>
히브리인들에게 드러난, 모세에게 드러난 ‘야웨’ 하나님의 정체성은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수렴된다.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엄중한 계명은 야웨를 또다시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말과 다름이 없는데, 히브리인들은 야웨를 ‘아도나이’로 바꿔 부르고 만다. 기록은 ‘야웨 엘로힘’으로 되어있는데 읽기는 ‘아도나이 엘로힘’으로 읽는다. 아도나이 엘로힘은 ‘주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망령되이 부르지 않겠다는 그들의 충정이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참으로 망령된 이름으로 바꿔 부르고 만다. 여기서 ‘야웨’는 히브리인들에게 활자로만 남아버렸고, 그들의 언어 속에서 망실(亡失) 되었다. 모세에게 계시된 야웨 하나님이 자취를 감춰버렸다는 얘기다.<57 쪽>
성서 이야기의 제 이 원형은 에덴 이야기다. 이 역시 모든 성서 이야기의 서사구조에 어떤 형태로든 반영되어 있고 스며 있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의 무의식에 투영되어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창세기 1장과 2장을 이해하는 것은 성서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이해하는 첩경이기도 하다. 원형적 이야기를 이해하면 그것에 의한 변주된 이야기는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성서는 이야기로 구성된 이야기 모음집이다. 내러티브의 형식을 띠고 있는 이야기들의 모음이다.
성서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게 무슨 뜻일까? 인생들이 모여 있는 곳은 거기가 어디든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언어는 있되 문자와 종이가 없던 시절, 공동체의 전통을 유지하고 관습을 전승하는 가장 원형적인 방식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흥미롭고 재밌어야 전승 가능하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소멸되기 쉽상이다. 흥미롭지 않은 이야기는 이야기의 생명력이 없다. <62-63 쪽>
히브리 사상의 핵심은 He was 와 He will be 라면 헬라 사상의 핵심은 I was요 I am이며 I will be(is coming)다. 성서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절묘한 조화의 책이다. 요한복음에서 절정을 이룬다. He is I 와 I am HE 가 성립되는 장면이 모노게네스(독생 혹은 유일한 존재)다. 거기서 신학과 인간학은 접점을 맞이한다.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 독생)는 우뢰의 아들이다.<71 쪽>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서쪽 하늘에서도
동쪽 하늘에서도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영어 공부할 때의 ABC Song으로도 유명한 곡이지만, 우리말 번안 가사는 참으로 아름답다. 저 하늘의 별만을 바라보며 노래하지 말자. 누구나 그대의 가슴에 비치는 반짝거리는 작은 별, 이를 무시하지 말자. <76 쪽>
에덴의 이야기는 하늘과 땅의 ‘낳고 낳고’에 대한 계보 이야기다. 천지의 계보라는 말이 무슨 뜻일까? 개역개정본은 톨도트를 ‘내력’으로 번역하고 있다. 즉 천지의 ‘낳고 낳고’ 의 족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내력’이라 번역한다. 하늘이 하늘을 낳고 땅이 또 땅을 낳는다는 말은 메타포로 이해하기 전에는 결코 성립 가능한 문장이 아니다. 하늘이 하늘을 낳는다거나 땅이 또 땅을 낳는다는 말을 이해하기란 상식적으로 어렵다. 해서일까? 번역자는 도저히 족보라거나 계보라고 번역해내지 못한다. 고심 끝에 찾아낸 답이 ‘내력’이리라. 현대인의 성경은 ‘대충’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최악의 번역이다. <88 쪽>
성서의 ‘바라’는 낳다의 개념이다. ‘낳음(born)’은 곧 창조(create)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미는 젓을 물리며 양육한다. 사람의 꼴을 갖춰가도록 끊임없이 돌보며 무한 애정으로 아이를 아이답게 양육한다. 이를 ‘아사’(made)라 한다. 이미 태어난 아이는 사람이지만 더욱 사람답게 자라도록 돌본다. 창조의 연속성이다. 낳음의 연속성이다. 그런 점에서 양육도 낳음에 포괄된다는 말이다. 양육 또한 창조 행위에 속한다는 의미다. 사춘기가 되면 비로소 부모의 품으로부터 의식이 독립하려고 몸부림친다. 몸의 변화와 동시에 정신의 변혁기에 이르러 마침내 부모로부터 독립된 개체가 된다. 이것 역시 창조에 속하며 낳음에 속한다. 이때의 동사가 이를테면 히브리어로는 ‘야차르(form)’요, 조성됨이다. 따라서 크게 보면 아사와 야차르도 바라에 포괄된다는 점이다. 그 모든 과정을 압축하면 바라로 표현할 수 있다. 나누어 말하면 바라, 아사, 야차르로 세분할 수 있다. 사춘기를 거쳐 몸과 정신이 독립하고 마침내 부모를 떠나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때 부모의 창조 사역은 마무리된다.<100 쪽>
동방의 에덴동산이란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자라는 각종 나무들 역시 물리적 나무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인간의 그림을 그리는 이야기다. 미케뎀(동방으로부터)이라는 말은 성소가 지성소를 향하여 있듯 ‘네페쉬 하야’인 아담은 늘 지성소를 향하여(l]) 있는 존재임을 상징한다.<112 쪽>
창세기의 아담 이야기 역시 비록 그 이야기 구조가 신화적인 이야기 기법을 사용하고 있으나, 죄의 기원이나 인류의 기원에 대한 기록이 아닌 인간에 대한 원형적 통찰이 담긴 기록이다. 거기서 인류의 ‘죄의 기원’을 읽으려 할 때, 변질된 신학 이론이 창출되고 수많은 사변적인 논리가 생성된다. 아담 이야기는 인류 타락의 기원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아담 이야기는 특정 아담을 통해 인간의 보편을 말한다. 그런데 특정 아담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 모든 아담들에게 죄가 있게 되었다는 식의 성경 읽기가 수천 년 동안 되풀이되고 있다. 그것은 창세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전체 성경에 대한 읽기 방식이 그랬고 그 같은 인간관 아래에서 형성된 서구 문명의 역사가 왜곡의 역사요, 그러한 인간관에 의해 면면히 흘러온 종교이데올로기가 인간을 굴곡지게 했다. 인간을 해방하기는커녕 종교이데올로기로 족쇄를 채웠다. <114-115 쪽>
유대인들의 광야 이야기가 성서에서는 단순히 역사적 이야기로 채택된 것이 아니라, 영성의 순례기로 그려지고 있고,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바울에 의해서 역사적 사실 논증의 이야기가 아닌 영성의 순례기로 해석되고 있다는 점은 에덴의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 지에 대한 분명한 지침이고 힌트인 셈이다. 이야기는 이야기다. 역사적 팩트로 이야기를 읽으려 한다면 얼마나 이상해지는가. 내러티브는 내러티브로 읽어야 한다.<122 쪽>
기억력을 통해 쌓아지는 표면적 지식의 세계에 생명의 지렛점이 작동하여 기억 활동이 이루어진다면, 정보 집적의 세계에 있는 수많은 지식들이 자신의 이기적 자아를 위해, 경쟁과 정보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전하고 생명을 살리는데 집적된 기억의 지식이 활동하게 된다. 이것이 큰 강에서 물을 마시고 싶은 갈증이다. <142 쪽>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나는 각종 양식은 도외시한 채 타인에게서 먹을 양식을 취하려 한다. 상대의 기선을 제압한 후 기운을 빼앗아 취하려 한다. 흡혈귀가 달리 있을까. 그러나 이제껏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 땅이 새롭게 태어나고 하늘이 다시 열리고 난 이후에는 다시 타인의 밭에서 양식을 취하지 않는다. 에덴의 각종 나무로부터 반드시 먹으라는 것이 에덴의 이야기가 강조하는 바다. <156 쪽>
정원 한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운 줄 모르던 인생으로 하여금,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별처럼 아름다운 깨달음이 도리어 인생의 덫이고 무덤인 줄 알게하는 나무다. 마침내 생명 나무로 귀의하도록 안내하는 이정표라는 말이다. 지식의 껍질을 깨고 나면 거기 마음에서 솟아나는 생명의 샘물이 솟아난다. <165 쪽>
지식을 추구하고 율법에 머무는 것은 뼈다귀만 앙상한 에고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살도 없고 생기가 없는 그냥 마른 뼈다. 영지주의(그노티시즘)란 영적 지식, 영적 깨달음에 목매는 현상이다. 영적 지식과 깨달음에 사로잡히면 그 지식의 포로가 되고 만다. 영적 지식을 무기로 지배력을 확보하려는 미혹에 빠지게 되고 마침내 앙상한 뼈다귀만 남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살이 없고 근육이 없다. 그노티즘은 마른 뼈다귀에 불과 하지만 인생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고서야 고토인 가나안을 다시 그리워하게 된다. 영적 지식을 기준으로 선과 악을 나누고 분리한다. 두로 왕의 형상을 하고 북극에 좌정하는 모습에 사로잡힌다. 북방의 포로가 되는 자화상이다.<170 쪽>
이전에 타자로부터 배운 언어로부터 마침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스스로 세운 언어가 누군가에게는 들려지지 않는 새로운 방언이다. 겸손을 버리고 새로 겸손을 세우는 것, 인내를 버리고 인내를 새로 세우는 것을 일컬어 새로운 언어, 새로운 나라의 방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언어가 다르니 소통이 달라진다. 누군가에겐 겸손이 천사숭배와 같이 당위이지만, 새로 겸손을 세운 이들에게는 그것이 당위가 아니라 존재다. 율법에서 난 겸손은 무거운 짐이고 사망의 멍에요 도달할 수 없는 덕목이다. <186 쪽>
정신의 새로운 요구를 맞이하게 된다. 본래 정신은 숨어 있고 은폐되어 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야웨 하나님은 그에게 여자를 데리고 오신다. 이것이 둘이 하나 되게 하기 위한 결혼의 원리며 소통의 원리다. 그러나 번역하는 이들이나 신학자들이 흙을 사람을 만드는 재료로 오해하듯 갈빗대 역시 여자를 만드는 재료로 오해한다. 에덴 이야기에서 갈빗대는 여자를 만드는 재료가 아니다. 도리어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허는 휘장이고 여자를 향해 세워야 할 제단이고 제물이다.<196 쪽>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고 데라는 갈대아 우르를 떠났듯 아담도 떠나는 곳이 있었다. 여기서 아담은 아파르(흙가루) 아담이다. 아담 아파르는 하아다마에서 떠나온 존재(민하아다마)다. ‘민’은 전치사 from이고, ‘하’는 정관사이며, ‘아다마’는 earth 혹은 ground다. 안개만 올라오던 그 땅으로부터 떠나서 아담 아파르가 된다는 것이 에덴 이야기에 나오는 떠남이다. 그러므로 아담에게는 하아다마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이고 부모인 셈이다.<202-203 쪽>
에덴의 벌거벗음과 광인의 벌거벗음은 물론 전혀 다른 이야기로 읽을 수 있겠다.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에덴의 이야기나 거사라 광인의 이야기나 옷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를 게 없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무덤가에 머물고 있는 것이나 부끄러움을 모르더니 결국 뱀과 대화를 하는 것이나 그 구조가 다르지 않다. 예수께서 군대 귀신을 쫓아낸 것처럼, 에덴 이야기에서는 뱀의 씨를 쫓아내는 대하드라마가 전개된다. 마침내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거라사 광인은 옷을 입게 된다. 마침내 부끄러움을 알게 된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 나뭇잎을 입지만, 결국 서늘한 바람에 옷은 벗겨지고 만다. 가죽 옷으로 다시 옷입는다.<206-207 쪽>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말속에는 하나님은 선악의 신이라는 전제가 담겨 있다. 즉, 그렇게 규정하고 있는 신에 대한 뱀의 신관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신에 대한 뱀의 규정, 뱀의 신론(神論)이다. 이러한 뱀의 신론에 온 인류, 성서를 읽는 수많은 사람이 현혹되어 있다. 한 걸음도 뱀이 규정한 신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뱀이 규정한 신은 결국 뱀이다. 따라서 엘로힘으로 옷입고 아름다운 치장을 하고 나타난다 해도 붙어 있는 이름과 상관없이 뱀신이다. 옛뱀이요, 용이라는 말이다.<220 쪽>
아벨은 여자의 후손이다. 동정녀 탄생 신화는 육체의 이야기로는 터무니없고 믿을 수 없는 얘기나 정신의 세계에서는 허구일 수 없다. 정신의 세계에서는 결코 터무니 없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동정녀 탄생 설화는 남자를 알지 못하나 아들을 낳는다는 메타포다. 이때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뜻은 비록 남편 다섯이 있었더라도, 지금의 남편도 남편이 아니라는 의미일 뿐 육체의 순결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즉, 남편이 있지만 동침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여기서 ‘생명을 주는 자’의 의미로 산자의 어미 하와( אֵ֥ם כָּל־חָֽי׃)의 이름이 부여된다. <225 쪽>
에덴 이야기에서 “아파르(흙)가 되리라”는 예언은 순례의 고단한 길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이다. 아파르는 성서의 알파요 오메가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빚기 위해서는 아파르가 있어야 한다. 아파르는 누구든 각자의 자기 됨이 시작되는 비밀이다. 비로소 야웨의 손길이 미칠 수 있는 것이 아파르에 숨겨 있다. <243-244 쪽>
그룹(케루빔)이란 휘장을 걷어내고 지성소에 들어갔더라도 다시 마주치게 되는 법궤의 뚜껑에 조각된 두 천사다. 선악의 세계를 벗어나야 비로소 인생은 죄라는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룹을 마주하며 죄를 기억할 수 없게 된다. 왜냐면 선악의 세계가 아니기에 거기에는 옳음도 그름도 없기 때문이다. 하여 이곳을 구약성서는 속죄소라 부르는 것이다.<248 쪽>
에덴 이야기에서 이 두 자아의식 곧 가인과 아벨이라는 정체성이 비로소 창세기 4장에 가서야 뚜렷하고 선명하게 싹 튼다고 보면 된다. 처음 사람이 가인이라는 뜻은, 자신에 대한 인식이 오로지 소유(재물, 지식, 명예, 기타 인간이 탐닉하는 무엇이든)를 통해 강력한 자아의 상을 갖게 되는 현상이라 하겠다. 사람이 오랫동안 자신을 가인의 이미지로 인식하며 살았더라도 가인으로 만족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온다. 가인의 형상으로 구축된 자아 인식에 대해 회의하게 되고 가인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는 눈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 모든 게 헛되다는 인식의 바탕 위에서 새로운 자아가 태어난다. 이 존재가 바로 아벨이다. 하여 아벨은 ‘헛됨, 텅빔, 공(空)’이라는 의미를 그 이름에 담고 있다. <257 쪽>
각자의 이야기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은 오로지 ‘야웨’며 ‘자기 자신’이다. 이스마엘과 이삭, 하갈과 사래와 사라는 나를 둘러싼 수많은 또 다른 나의 이야기다. 바울은 그렇게 해석하고 있고 오늘 우리도 그렇게 에덴의 이야기를 읽어보자는 거다. 나를 둘러싼 그 밖의 모든 사람은 내 이야기에서는 적어도 조연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주인공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한다. 그대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그대 자신이요, 신성으로 드러난 ‘야웨’만이 주인공이라 하겠다. <266 쪽>
셋은 사람의 아들이며 인자, 곧 ‘벤 하아담(הבן האדם), 그 사람의 그 아들,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이 된다. ‘그 사람의 그 아들’은 곧 가인도 아니고 아벨도 아니고 ‘셋’이어야 하는 게 거기에 있다. 에덴 이야기에 담겨 있는 사람 창조 이야기. 창조 신화(창세기 1장 창조설화)의 에덴 버전이다. <273 쪽>
이것이 계보요 족보라는 말이다. 하늘과 땅의 계보는 결국 사람의 계보라는 걸, 그리고 사람의 아들의 계보라는 걸 창세기 5장은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도 땅의 ‘낳고 낳고’요, 하늘의 ‘낳고 낳음’이다. <285 쪽>
목 차
머리말 / 6
뮈토스에 대해 / 13
요한복음의 로고스 - 생각하기와 말하기 / 19
창세기 명칭과 에덴 이야기 / 33
창세기 1장과 2장은 / 42
엘로힘과 야웨 엘로힘 / 48
이야기의 원형(에덴) / 62
신화 속 그(HE)와 나(I) / 66
정신의 네 단계(네페쉬, 루아흐, 네샤마, 예흐예) / 72
창세기 2장
천지와 지천 / 85
비로소 사람(하아담 아파르) / 98
동방의 에덴 / 107
아담 / 114
강의 발원지 / 121
에덴의 네 강 / 129
1) 비손 2) 기혼 3) 힛데겔 4) 유브라데
경작과 지킴 / 143
동산 각종 나무 / 149
생명나무와 선악나무 / 159
돕는 배필 / 165
1)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
2)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하리라
3) 부모를 떠나
아담의 이름짓기 / 181
갈빗대로 / 189
알-켄의 용법과 부모를 떠나 / 198
벌거벗었으나 / 204
창세기 3장
뱀과 밈메누 / 215
여자의 후손 / 221
가시와 엉겅퀴 / 228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 233
그룹 / 243
창세기 4장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 251
아브라함의 이야기 구성 요소 / 258
에덴의 인물들과 생명의 계보 / 265
가인을 죽이는 자 / 272
가인과 라멕의 이야기 구조 / 278
그들의 이름은 사람 / 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