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2월, 고종은 아관파천에서 돌아와 조선의 자주독립을 강화하는 방법의 하나로 개화파와 수구파의 힘을 모아 ‘칭제건원(稱帝建元)’(중화적인 세계질서를 벗어남을 뜻하며, 중국과 대등한 관계임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것)을 추진한다.
이에 국왕과 정부는 우선 ‘건원(建元)’을 하기로 하여 8월 16일 조선 고종 연호(年號) ‘건양(建陽)’을 ‘광무(光武)’로 고쳐 ‘건양 2년’을 ‘광무 원년’으로 고쳤다. ‘건원’에 성공한 개화파와 수구파는 9월 27일부터 ‘칭제’를 위한 본격적 준비 작업을 시작하여, 의식장소인 원구단을 만들고 10월 12일 고종은 이곳에 나아가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가임을 국내외에 선포한다. 이것은 자주독립의 강화를 국내와 세계에 알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후 제국을 성립하기까지 서로 연합하였던 독립협회와 수구파는 정체(국가의 통치 형태) 문제로 대립하여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로 개혁을 주장한 반면, 수구파는 전제 군주제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대립은 1898년 절영도(현 부산광역시 영도)를 러시아에 조차(합의에 따라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영토의 일부를 빌려 일정한 기간 동안 통치하는 일)하는 문제로 심화된다. 독립협회는 조차를 외국이 침략하는 첫 단계라고 판단하고 만민공동회를 열어 절영도 조차 요구 반대, 일본의 국내 석탄고 기지 철수, 한로은행 철거 등을 요구하고 제국의 자주독립 강화를 결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가 철회되고 일본도 국내의 석탄고 기지를 되돌려주었으며, 러시아와 일본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니시-로젠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세력이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자주독립국으로서 실천을 이룩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할 수 있었다. 이후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계속 추진하였지만 수구파의 모략과 고종의 왕권 유지 뜻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수구파는 독립협회가 의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고종을 폐위하고 공화제를 수립하려 한다는 전단을 뿌렸다. 이에 고종은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고 개혁파 정부를 붕괴시켜 수구파 정부를 수립한다. 여기에 자주 독립 세력을 꺾어버리는 것이 이롭다고 판단한 일본이 수구파에 가담, 독립협회를 탄압하도록 권고하여 이를 고종이 받아들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해산 시켰다. 하지만 수구파는 친 러시아적인 성향이 강하였고 이를 지켜본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한 일본은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을 위협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 하고 1905년 11월 17일 1905년 을사늑약(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으로 외교권 박탈하고 통감부 설치 등을 하여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일본의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