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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가지 죽음]
‘죽음은 끝’이라는 생각 때문에 누구나 두려워한다. 죽음이란 의미를 찾는 것도 싶지 않지만, 죽음의 유형이 13가지나 된다니 의아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나이 들어서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으나 병들어 죽기도 하고, 범죄에 연루되어 타살되기도, 죄짓고 사형당하기도 하는 경우도 있듯이 여러 가지 이유로 죽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법학자인 이준일 교수는 이 책에서 죽음의 유형을 자연사, 뇌사, 안락사, 병사, 의사(義死), 자살, 사회적 타살, 고백적 죽음, 변사, 살인, 열사(烈士), 의문사, 사형 등 13가지를 꼽았다.
죽음은 ‘이 세상(이승)에서의 마지막을 의미한다’종교적인 신념으로 부활이나 윤회로 다음 생을 믿든, 안 믿든 간에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삶의 끝자락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상실의 순간이 되는 그것은 ‘슬픈 사건’임이 분명하다. 누구나 한 번쯤 죽음을 숙고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이유기도 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넘어서려고 했지만,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었고 세상의 부와 권력을 다 가지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만다. 죽음은 인간이 넘을 수 없는 한계인 점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보여 준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진다. 사람들은 아직 죽음에 대해 고민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고민을 무섭고 불편한 것으로 여긴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일은 쉽지 않다. 두렵기만 한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들어닥치기도 하는데, 불쑥 의사로부터 불치병을 통보받기도 하고 교통사고처럼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하기도, 범죄의 희생양이 되어 느닷없이 죽음을 맞기도 한다. 재난이나 전쟁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유독 나에게만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죽음이란 사건에 대해 피할 수는 없지만, 본능적으로 미룰려고 운동을 하고, 졸음운전과 음주운전을 하지 않고,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대책을 세우고, 재난과 전쟁에 대비하면서 죽음에 저항하고 죽음과 싸우면서 죽음의 시점을 유예하거나 생명을 연장하고자 한다.
그러나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고 공평하다. 죽음의 ‘일회성’과 ‘불가피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숙연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죽음보다 삶을 선택하고 삶이 의미 있는 것이 되도록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데 있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죽음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 속에 내던져졌다고 생각하고 아무런 책임감 없이 나약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갈 것이 아니라 어차피 세상에 내던져졌으니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고 만들어 냄으로써 자신의 실존에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삶이 죽음보다 더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부정하고 회피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인정하고 다가가 대면할 때 죽음으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말했다. “나는 삶을 완성시키는 죽음, 산 자에게 가시가 되고 굳은 맹세가 될 죽음을 그대들에게 보여 주고자 한다. 삶을 완성시키는 자는 희망을 가진 자와 맹세하는 자들에 둘러싸여 승리에 찬 죽음을 맞는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중에서
【1】자연사
사람마다 죽음이란 서로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처럼 죽음의 원인도 다양하다. 그 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바라고 원하는 죽음은 수명을 다하고 죽는‘자연사’일 것이다. 왜 자연사를 원할까? 천수를 다하는 죽음, 나이 들어 고통 없이 죽는다는 점에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자연사는 장수에 대한 꿈처럼 영생에 대한 꿈일지도 모른다. 장수를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자연사는 삶의 연장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 없이 죽는다는 것도 자연사가 유일한 답이 아니다. ‘안락사’도 있기 때문이다. 자연사는 억울하지 않은 죽음이라는 점에서 살아남은 사람에게 부채 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죽음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자연사는 흔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매년 25만 명 정도가 사망하는데 그중 20% 정도가 자연사한다. 많은 사람들이 암이나 질병, 사고, 자살로 죽기 때문에 순수한 자연사는 꿈에 불과할지 모른다.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라고 해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이야기조차 꺼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반드시 찾아와 맞닥뜨려야 하는 숙명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죽음은 모두가 기꺼이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여야 한다. 적어도 죽음은 ‘한 사람의 과정’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이라야 하고, 죽음이 인생의 종착점이되 삶의 영역으로 편입되어야 한다. 사실과 효과는 죽음 자체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삶의 전체를 조망하고 삶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삶을 보다 풍요롭게 가꿀 수 있다. 그래서 ‘죽음에 관한 대화’는 ‘죽음을 위한 대화’가 아니라, ‘삶을 위한 대화’다.
【2】뇌사
삶과 죽음의 경계는 무엇일까? ‘플라톤’은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여 영혼불멸을 주장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고 했다. 훗날 ‘토마스 아퀴나스’가 다시 둘의 분리를 주장하고 실제로 1768년에 출간된 ‘브리테리카 백과사전’초판은 죽음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라고 정의하기도 했으나, 2007년 판에서는 죽음을 ‘모든 생명이 종국에 경험하게 되는 생명이 완전히 중단되는 현상’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20세기 들어 그동안 전통적이던 ‘심폐사’보다 앞선 죽음이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뇌사’로서, 뇌가 불가역적 또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시점을 사망 시점이라고 본 것이다. 육체적인 죽음을 사망으로 보는 사회에서는 심폐사가 죽음으로 이해되는 반면, 정신(영혼)의 죽음을 사망이라고 보는 사회에서는 정신 기능을 담당하는 뇌, 특히 대뇌가 죽는 시점을 사망으로 이해한다. 죽음에 관한 권리가 인권으로 이해되고 죽음의 시점도 인간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지금, 뇌사 이후에도 심폐소생술 같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죽음의 시점을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뇌사를 사망 시점으로 인정하고 죽음을 앞당긴다고 해도 실제로 벌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자연적으로 사망했을 때보다 조작 10시간, 길어야 2주 남짓이다. 그런데도 사망 시점을 앞당기는 데는 많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뇌사자에게 사망 시점을 앞당기려는 이유는 심폐사에 이른 사람의 장기를 그가 살아 있을 때 적출 해 이식이 필요한 사람에게 생명을 나누고자 하는 데 있다. 실제로 1999년 2월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은 ‘뇌사 추정자의 장기 등을 기증하기 위하여’라고 규정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뇌사자 본인이 뇌사에 이르기 전 분명한 의사표시에 의하고 가족 동의만으로 뇌사를 인정하는 법은 여전히 문제를 안고 있다. 2013년 통계에 의하면 장기이식 대기자는 26,036명에 달하지만, 기증자는 2,416명 지나지 않았다. 우리 모두 운전면허증에 장기기증 의사 표시를 하도록 사실상 강요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또한 의사(醫師)는 불치병이 걸린 환자에게 장기기증 의사(意思)를 물어야 하는 부담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영국에서 뇌사 판정을 받은 교통사고 환자가 장기이식을 앞두고 의식을 되찾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면 누가 어떻게 죽음을 결정해야 할까? 물론 환자를 돌보던 담당 의사라는 것은 맞지만, 그런데 문제는 의사가 ‘뇌사판정위원회’의 일원이라는데 있다. 비의료인을 포함한 4∼6명의 위원 전원의 찬성 할 경우에 뇌사를 판정하기 때문에 의사들만의 찬성으로 뇌사가 결정되지는 않지만, 외부위원이 담당 의사의 의견에 반한 뇌사판정에 반대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뇌사판정은 본인의 의사를 가장 중요시하고, 본인과 가족의 의견이 충돌할 때는 본인의 의사를 우선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어야 하고 본인의 동의는 엄격한 절차를 거쳐 확인되어야 한다. 뇌사 전 직접적으로 언급할 것과 동의한 것이 명백해야 하고, 서면에 의한 동의도 필요하다. 그런데 가끔 어린이의 뇌사를 부모가 결정하는 뉴스를 접할 때는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3】안락사
애연가였던 프로이트는 16년간 구강암에 시달렸다. 그는 친구이자 주치의였던 ‘슈어’박사에게 의미 없는 투병 생활은 고문에 불과하다며 자살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3일 동안 모르핀 주사를 맞고 1939년 9월 23일 숨을 거두었다. 프로이트의 죽음을 의사 조력자살 혹은 자발적·적극적 자살이라고 부르는데, 프로이트는 1920년 발표한 논문에서 인간의 행동을 ‘삶을 향한 충동과 함께 죽음을 향한 충동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는 이 무렵에 구강암 발병 사실을 알고 죽음을 예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안락사는 환자의 동의 여부에 따라서 ‘자발적 안락사’와 ‘비자발적 안락사’로 구분된다. 환자의 동의 없는 비자발적 안락사는 살인 행위로 범죄에 해당한다. 죽음은 오로지 본인만 결정할 수 있고 그것은 안락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안락사는 불치의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가 치료를 중단하거나 죽음에 이르는 약물을 투여하는 결정을 내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말하는데, 적극적으로 살해하는 행위보다 죽어가는 사람을 그러도록 내버려 두는 소극적 안락사는 불법성이 덜하다고 하지만, 인공호흡기 같은 생명 연장 장치를 제거하거나 영양분과 약물의 공급을 중단하는 방법으로 시행되기도 한다. 이러한 소극적 안락사에 대하여도 우리 사회는 부정적 시각이다.
그런데도 ‘연명치료 중단’이라고 포장된 죽음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호스피스’치료라고 하는데, 치료를 중단한다는 점에서 소극적 안락사에 해당하지만,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완화하는 치료를 병행하고 환자가 죽음 앞에 비굴하지 않고, 당당히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존엄사’라고 하기도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상업적으로 이용해 마치 죽음을 영원히 미룰 것처럼 포장하는 의료산업의 감언이설에 속지 않기 위해서라도 호스피스 치료는 필요하다 할 것이다.
【4】병사
질병으로 인해 죽는다면 죽음에 이르게 된 당사자뿐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 줄 것이다. 질병은 피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평생 어떤 병에도 걸리지 않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면 병 걸리기 쉽고 고치기도 어렵고 심지어 병을 고치지 못해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병에 걸리면 유전자를 물려준 부모를 ‘원망’하거나, 하필 왜 나에게라며 ‘운명’을 탓하기도 한다. 병은 불치병도 있지만, 현대의학으로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병인데도 ‘경제적 빈곤’으로 치료받지 못해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질병의 원인은 유전적인 것도 있지만, 경제적 빈곤으로 인하여 건강과 멀어진 생활환경, 특히 충분치 않은 영양 공급 등이 결정적 이유일 수도 있다. 빈곤은 질병을 발생시킬 뿐 아니라 악화시키고 종국적으로 치료를 받지 못해 죽음에 이르게 한다. ‘질병을 퇴치’시키기 위해서는‘빈곤의 퇴치’가 필수적이다. 국가가 사회보장제도와 의료서비스법을 만드는 이유기도 하다.
우리나라 헌법은 ‘국민 보건권’을 보장하고 있고, 또 헌법재판소는 ‘국민건강보험’에 강제 가입토록 하는 조치가 ‘행복추구권과 재산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건강보험제도에 대한 불만은 여전히 높다. 직장가입자와 지역가입자의 형평성 논란으로 지역가입자는 소득뿐 아니라 재산에 대해서도 보험료를 부과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는데, 소득이 같아도 몇 배의 보험료를 내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러나 헌재는 직장가입자든 지역가입자든 각자의 경제적 능력에 맞추어 보험료를 산정하는 것으로 그것이 평등권을 침해하지는 않는다고 판시했다.
우리 사회에는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득이 빈곤하여 의료보험료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 수용자 등의 급여정지 등이 그것인데 질병 앞에는 빈부격차가 없도록 하는 사회안전망이 필요한 이유다. 공공의료서비스는 누구보다 빈곤한 사회 계층에게 더 절실하다. 이들에 대한 과도한 본인부담금이나 연체료, 급여의 제한 혹은 금지 때문에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개선과 사회적 논의가 시급한 이유다. 죽음을 야기하는 질병 치료도 중요하지만 애초에 질병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국민건강보험법’은 질병 예방을 위해 그에 따른 규정을 두고 있지만, 이것은 질병의 조기 발견을 위한 것으로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건강관리 문제까지도 규정해야 할 것이다.
건강보험료를 책정할 때 오랫동안 건강을 유지하여 의료서비스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혜택을 부여해 스스로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선천적 질병으로 계속적인 의료서비스가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는 경제적 부담을 공동체 전체가 부담하도록 하는 방안과 사회구조적 이유로 질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먼저 그런 구조적 환경을 제거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5】의사
의사라고 하면 목숨 바쳐 자신을 희생한 사람을 말한다. 우리는 흔히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등을 생각하기 싶지만, 그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의로운 행동으로 목숨을 바친 사람’으로 義士라고 하고, 여기서 말하는 義死는 ‘하나뿐인 목숨을 바쳐 타인의 생명을 구하거나 위험으로부터 구출한 사람의 의로운 죽음’을 말하고 이런 숭고한 희생을 의사자(義死者)라고 부르는데, 의사자는 개념은 물론 합리적 보상을 위한 절차가 꼭 필요하다.
의사자에 대한 보상은 무엇보다 유족에 대한 위로다. 공동체는 가족을 잃은 유족의 슬픔을 위로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희생자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었다면 사회가 유족의 경제적 곤경을 분담하는 것이 타당하다 할 것이다. 또한 의사자 결정은 엄격히 요건을 충족한 경우라야 하는데, 2001년 교통사고로 뇌손상을 입은 자율방법대원이 약 10분 동안 동승자의 구조를 돕다가 병원으로 호송된 후 사망한 것과 관련해, 1,2심은 의사자로 인정하였으나, 대법원은 동승자의 구조를 도운 행위와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의사자로 인정하지 않은 바 있다.
【6】자살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경제개발기구(OECD)평균 자살률이 10만 명당 12명인데, 28.5명이나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평균 700여 명이 생을 마감하고, 그중에 40여 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특히 10대에서 30대까지 청년 세대 자살률이 높은 것은 그들 세대가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세상을 비관하거나, 연애에 실패했거나, 가난을 극복하지 못해서거나 자살하는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자살과 관련된 문제라면 보험금 문제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보험회사 입장에서는 자살이 중대한 과실이 아니라 ‘고의’에 의한 것임을 증명해야 하는데, 고의성을 증명하기란 쉽지가 않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를 위장한 자살이 발생했을 때 그것이 고의에 의한 사고인지, 중대한 과실에 의한 것인지 증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 또한 가입자가 정신질환으로 자살한 경우에도 고의성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법은 보험금 지급이 면책되는 자살 사고를 ‘자기의 생명을 끊는다는 것을 의식하고 그것을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자기 생명을 절단하여 사망한 경우’로 제한하고 있다. 대법원은 ‘희생자가 정신질환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살했다면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외부에 있다고 보고 고의가 아닌 우발적인 사고로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
【7】사회적 타살
‘노예처럼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구속도 억압도 없이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 의지다. 겉으로는 본인이 스스로 초래한 죽음처럼 보이지만 원인을 따져보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외부의 상황이 개인을 궁지로 몰아간 경우도 많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의 죽음은 형식적으로는 자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환경 혹은 성실히 노력했음에도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드는 사회구조가 죽음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경제적 평등이 완벽히 실현된 사회를 이상사회로 보고 인류는 오랫동안 노력해 왔으나, 그것이 실현된 적은 한 번이라도 있는가? 개인의 성과에 따라 소득을 분배하면 사람마다 타고난 능력이 다르고, 노력의 정도도 다르며 심지어는 행운까지 작동해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 사람이 반드시 생기기 마련이다. 게다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특정 집단이 부를 독점하고 소득분대의 적정은 물론 빈곤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똑같은 능력과 노력에도 출발선이 달라 성과에도 차이가 발생하고 그것이 또다시 소득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선후보인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제시하고 있는 ‘기본소득’은 무엇이며 어떤 내용인지 잘 모르겠지만, 한 예로 미국 알레스카주에 거주하는 미국인은 기본소득인 ‘영구기금배당’을 받는다. 배당금은 석유에 대한 세금으로 조성된 투자 수익금에서 충당하고, 기금의 투자 수익률과 연동해 많을 경우 5인 가구 기준 연 1만 6,000달러, 적을 때는 연 4,000달러 정도를 무조건 지급받는다. 이 덕분에 알래스카주는 미국 50개 주 가운데 가장 평등한 주에 꼽힌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의미의 자살은 없다. 어떤 자살이든 거기에는 당사자가 어쩔 수 없는 외부 요인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국가나 기업에 의한 죽음이라면 법은 책임을 물어야 한다. 과도한 업무나 업무상 질병으로 인한 자살이라면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 보상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업무를 수행하던 중의 재해라는 것과 업무로 인한 재해로 볼 상당한 인과관계가 입증되어야 한다. 고문이나 폭행 등 국가 권력의 가혹행위로 인한 자살의 경우도 국가는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양심에 따른 병력거부’는 어떤가. 구시대를 산 나로서는 참 이해하기 힘들다는 생각도 들지만, 전쟁과 군대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징병제는 인간 내면에 대한 심각한 억압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2012년 「줄탁동시(窋啄同時」라는 영화로 주목받은 김경묵 감독은 양심적 병력거부를 선언하고 이렇게 말했다. “집단주의적 체제가 맞지 않아 고등학교를 자퇴한 뒤에는 어디에도 적을 두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왔다. 이런 내가 2년간 정신을 구속당한 채 군복을 입고 총대를 올리며 군사훈련을 받는 모습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이들에게 대체복무를 허용한 것은, 죽음을 막는 최선의 길이 될지 모르겠다.
【8】고백적 죽음
고백적 죽음에는 사회 부조리에 대한 고발과 저항이 담겨있다. 거기에 우리 사회가 눈 감는다면 어두운 진실에 자신의 몸을 던져 비추고 경종을 울리고자 한 작은 혁명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다.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죽음으로 선택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우리 사회는 죽음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수용해야 한다. 죽음을 조장하거나 선동한다고 오해하기 전에 ‘고백적 죽음’을 부르는 사회의 폐쇄성과 편협함부터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누명을 쓰고 잘못이 없는데도 벌을 받거나,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성과가 없을 때 부당함을 느끼고 억울함을 토로한다. 억울한 감정은 분노로 바뀔 수 있고 그 분노의 대상은 자신을 억울한 처지로 몰아넣는다. 억울한 처지에 놓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부당한 관행과 질서에 분노하고, 그에 순응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에게도 분노한다. 억울함이 절망감으로 변하기도 하고, 억울한 처지에 놓인 사람의 현실은 미래를 기약할 수도 없다. 그래서 현실에 좌절한 채 삶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결코 삶이 낙관적이지 않을뿐 아니라 차라리 죽음이 행복해 보이기도 한다.
재판은 억울함을 해소하는 가장 일반적인 절차고 장치다. 재판절차는 공정해야 하고, 판결은 사건의 실체를 완벽하게 파악한 뒤 내려저야 한다. 국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해결해야 한다지만, 여기에는 시민사회의 역할도 중요하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타인의 아픔보다 자신의 아픔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부당함을 당했다면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론화해서 해결책을 내놓도록 국가를 압박할 의무가 시민사회와 시민단체에게 있다. 부당함을 바로 잡고자 함께 소리쳐 주는 태도야말로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이 할 최소한의 책무다.
1997년부터 10년간 일어난 자살 사건의 유서 405건을 분석한 결과 소통되지 않아서 자살한 유형은 회피형, 이해형, 해결형, 배려형, 비난형, 각인형, 고발형, 탄원형 등 8가지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처럼 죽음을 표현한 개인의 생각은 매우 다양하다. 사소한 것일 수도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목숨과 바꿔 표현해야 할 정도로 소중한 사상이나 신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9】변사, 검시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매년 3만 명 이상의 변사자가 발생하고,
남자가 여자보다 2배 정도 더 많다. 또한 경찰청 통계는 변사의 유형을 15가지로 분류하여 끈 또는 줄로 목을 졸라 질식사한 ‘교사’, 끈 또는 줄을 목에 걸고 죽음에 이른 ‘액사(縊死)’를 비롯해 총포, 도검, 폭발물에 의한 죽음, 기차, 자동차, 비행기, 지하철 등 탈것에 의한 사고사, 추락사, 익사, 가스중독(와사), 음독, 화재(소사), 감전사 등이다. 그중에 스스로 목을 매거나 독극물을 마시고(음독)숨진 사람이 가장 많은데, 변사의 절반이 자살이고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꾸준히 줄고 있으나 자동차 1만 대당 2명으로 OECD 평균인 1.3명보다 많다.
1949년 겨울 어느 날 행려병자로 보이는 여성이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녀는 전근대적 가부장제에 맞서 여성해방을 주장한 서양화가이자 소설가 나해석이었다. 동경 유학시절 그녀는 김우진이란 시인과 사랑에 빠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연인과의 사별 후 나해석은 6년간 자신을 쫓아다니던 친구의 오빠와 결혼하고는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녀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다 남편의 친구인 최린과 다시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남편의 요구로 이혼했지만 곧바로 최린으로부터도 배신을 당한다. 나해석은 가정까지 버리고 사랑했던 남자의 배신으로 정조를 유린당했다며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바람에 비참한 인생을 살다가 행려환자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아무도 지켜봐 주지 않는 이런 죽음, 애도 받지 못한 죽음에 대해법은 서면으로 그 죽음을 기록하도록 하고 있다. 수재, 낙퇴, 파선 등 자연재해로 인한 사망,‘범죄에 기인 되지 않은 것이 명백한 시체’에 대한 검시는 ‘행정검시’로 분류되어 별도의 검시 절차를 거치는데 이런 경우 경찰은 검사의 지휘를 받지 않고 행정절차에 따라 처리한다. 결국 사람의 죽음은 의사가 발부한 ‘사망진단서’ 혹은 ‘사체검안서’ 한 장으로 끝나는 것인지 모른다.
【살인】
통계에 의하면 2013년 한 해 동안 ‘묻지마 범죄’가 109건 발생했고, 그 가운데 31건이 살인사건이었다. 그해에 살인 강도 강간 폭행 등으로 숨진 사람이 1,559명에 달했는데, 여기에는 과실치사를 제외한 사망자가 600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범죄희생자를 단지 운이 없거나 재수 없는 사람 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까? 같은 범죄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 피해를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범죄희생자의 억울한 죽음을 돌아보며 어떤 도움이 필요했을지 고민하는 ‘역지사지’가 필요한 때다.
범죄희생자에 대해 법은 그 유족에게 1년 반에서 2년 정도 살 수 있는 구조금을 지급해 주고 있다. 하지만 이 기간 후에도 생계보장이 필요한 경우가 있으므로 유족의 구체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지급할 필요가 있고, 일본의 경우 2008년 기준, 금액이 3∼4억 원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2014년 현재 최대 6,660만원이 지급된 바 있다. 늘여야 할 것이지만 ‘범죄피해자보호기금’으로 운영되는 지원사업의 다양화로 단시일 내 대폭 인상은 어려운 실정이다.
【열사】
국가나 민족, 민주주의와 같은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사람을 ‘열사(烈士)’라고 부르고 때로 지사(志士)·의사(義士)라고 호칭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생명이 우주보다 소중하다’는 교육을 받았음에도, 열사의 행동을 추앙하고 보상한다. 국가나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때문이다. 대의를 위해 희생한 것이 생명보다 중요한 가치임을 교육하는 것은 아닌지? 머리 속이 햐애진다. 생명의 가치보다 조국이나 민족 혹은 대의가 더 소중하다는 인식이 자리 잡음으로써 혼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는 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공동체의 대의와 생명 가운데 어느 한쪽이 반드시 객관적으로 더 가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공동체는 열사의 희생을 칭송하고 그를 보상할 수는 있어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은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다. 더욱이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공동체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희생은 강요할 수 없다. 생명은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듯이, 생명보다 소중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는 생명을 포기하고서라도 가치를 지킬 수 있다고 교육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또 두 가치가 충돌할 때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도록 교육해야 한다.
‘테러리즘’은 어떤가? 누가 어떤 편에서 정리하느냐에 따라서 정의가 되기도, 불의가 되기도 하는 것이 테러다. 서방세계에서는 무슬림의 열사들을 열사하고 부르지 않고 ‘테러리스트’라고 부른다. 파키스탄 출신의 작가 ‘모신 하미드’는 9.11 테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혐오스러울지 모르지만, 나의 첫 반응은 즐거움이었어요. 당신네들은 파키스탄인 모두를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라고 상상하면 안 돼요. 우리가 당신네 미국인들 모두를 변장한 암살자라고 상상하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죠”
로버트 페이프는 1980년부터 2003년까지 발생한 315건의 자살 테러를 분석한 다음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자살 테러와 이슬람 근본주의 혹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종교 사이에도 연관성은 없다. 오히려 거의 모든 자살 테러는 대체로 특정한 세속적 전략목표, 다시 말해 민주주의 국가들로 하여금 테러리스트들이 조국이라고 여기는 영토로부터 군대를 철수시키도록 강제하려는 목표를 갖는다. 2001년 9월 11일 이후 미국은 점차 증가하는 자살 테러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이슬람 국가들을 정복하는 시책을 시행하고 있다. 비록 이러한 전략이 여전히 나름대로 일리가 있지만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이슬람 국가들에게 유지시키는 것은 또 다른 9.11테러의 가능성을 증가시킬 것이 분명하다”군사적 제압이 테러리즘을 해결할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테러리스트는 제3자가 그들에게 부과하는 딱지이며, 누구보다도 테러 공격을 받은 국가가 찍은 낙인이다.
정당한 테러리즘이 없다면 대의에 목숨을 바친 열사의 행위도 정당화 될 수 없다. 따라서 테러리즘이 예외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고 볼 엄격한 기준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상대방의 선제적 폭력이 객관적으로 존재하였다는 사실과 거기에 방어적·저항적 폭력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사정의 입증이 전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정당방위 논리처럼 테러리즘의 정당성이 인정되려면 선제적 폭력의 객관적 존재, 과도함, 그로 인한 피해의 심각성, 테러리즘으로밖에 저항할 수 없는 상황적 불가피성, 저항으로서 행사되는 테러리즘의 강도와 규모 등이 전반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12】의문사
의문사 가운데는 사망 원인이 의도적으로 은폐되거나 조작되는 경우가 많다. 의도적이든, 우발적이든 공권력에 의한 죽음이 발생하면 그 죽음을 은폐하는 과정에 원인도 은폐된다. 수사기관 또는 군대 내의 가혹행위에 의한 사망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고문과 가혹행위로 인한 사망이 자살로 조작되는 경우로서, 심지어 정권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은폐된 의문사의 경우는 해당 정권의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원인을 밝히기가 어렵다.
1975년 8월 17일 산행 갔던 한 사내가 14m 절벽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경찰은 휘어진 소나무를 잡다 실족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상처가 없는 시신은 끊임없이 의혹을 받았다. 광복군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고, 해방 후에는 민주화에 투신한 장준하 선생 이야기다. 언론인이자 정치가로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 기도, 유신헌법에 반대한 그는 자신이 창간한 〈사상계〉에 군사 정변으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를 비판하는 글을 꾸준히 게재했다. 2002년에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그의 죽음은 추락사일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진상규명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10년 뒤, 그의 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 유골의 두개골에 외부가격에 의해 함몰된 것으로 의심되는 점이 발견되었고 의혹은 증폭되었으며 그리고 2004년 6월에야 1975년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지 18시간 만에 8명의 사형이 집행된 ‘인민혁명당 사건’등 11건을 ‘의문사 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장준하 사건도 고문 또는 조작사건임이 판명되었다. 이외도 진행 중인 제주 4.3사건, 거창 양민학살 사건, 미군에 의한 노근리 학살 사건 등이 진실규명을 기다리고 있고 과거청산을 위해서도 반드시 밝혀져야 할 일이다.
‘과거청산’은 과거에 이루어진 국가의 범죄를 조사하는 일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과 많은 비용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과거청산이 반드시 필요한 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과거청산은 경제적 측면에서만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국가공동체의 질서와 도덕성, 정통성을 바로 세운다는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난달 25일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80년대 부산대 시위사건과 관련해서 참고인 조사를 받은 것에 비추어 보면 옛날을 회상케 하는 그 이상이라는 생각이 분명히 들기도 한다.
【13】사형
사형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형벌 중 하나로, 흔히 ‘복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기도 한다.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살인범을 단죄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비겁하고 정당하지 못한 행위로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범죄자가 저지른 죗값에 해당하는 형벌이 내려져야 한다’는 헤겔의 이 말은 대중의 감정을 대변한다. 하지만 모든 복수가 정의롭다고 하면 국가가 아닌 개인의 복수 또한 정당화될 수 있는 문제가 있다.
사형제도가 필요한지에 앞서 우리는 사형 등 형벌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고 물어야 할 것이다. 형벌의 목적이 단지 복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피해자를 대신한 국가의 복수가 정당화된다 해도 여전히 논란은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형벌이 강화될수록 범죄 피해자가 감소 되는가? 법관의 오판으로 억울하게 사형 당하는 경우는 없는가? 심지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사형을 악용하는 경우는 없는가? 이와 같은 모순을 안고 있는 한 사형은 ‘사법살인’이라는 불명예를 떠안을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는 백인보다 흑인, 히스패닉에게 더 많은 사형이, 이슬람 국가에서는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가혹한 사형집행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짐승을 쳐 죽인 자는 짐승으로 짐승을 갚을 것이며, 사람이 만일 그의 이웃에게 상처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성경》〈레위기〉제24장 17∼20절
사형제도는 정말로 필요한가? 사형제 무용론이 대두된 지 오래되었다. 사형은 범죄자의 생명을 영구히 빼앗음으로써 개선되어 사회로 복귀할 수 있는 여지를 종국적으로 박탈해버린다. 교화한다는 것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기도 한다. 또 아무리 노력해도 교화되지 않는 범죄자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사형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라도 범죄자의 목숨을 박탈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노력과 비용을 투자하기 전에 개선이 불가능한지 식별해 낼 수 없고, 경제적 비용 때문에 개선을 포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많은 사람들은 형벌이 가혹해질수록 범죄가 줄어든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갖고 있다. 특히 사형이 그렇다. 범죄는 개인의 특성, 사회적 환경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발생하는데도 그 요인을 간과한 채 형벌의 경중만을 따져 범죄율 증감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가혹한 형벌과 범죄율 감소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증명되지 않았고 증명될 수 조차 없다. 논리적 타당성을 찾기 어려우면 국가는 여론조사를 통해 사형제도를 정당화하는 자료로 삼기도 하는데, 여론이 사형을 정당화하는 논거가 되려면 객관적으로 사형이 범죄율을 낮춘다는 사실이 입증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입증이 불가능한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범죄 피해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형벌을 강화하려고 한다. 무거운 형벌로서 범죄를 예방해야 범죄 피해자를 줄일 수 있다는 논리인데, 연쇄 살인 같은 잔혹한 범죄의 경우에 주장이 더욱 힘이 싣는다. 국가는 범죄를 예방 금지하고 형벌을 부과할 의무가 있다. 그렇지만 의무를 이행한 것으로 국가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사형을 확대 적용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대로 그렇게 해도 범죄가 증가하면 국가는 책임을 회피하려고 할 것이다. 결국 범죄의 책임은 범죄자 개인에게 돌리게 되고 나아가 국가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은 법의 힘을 보여 주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
사형제도에 순기능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죽어 마땅한 죄인에게 부과될 때의 이야기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 선고된다면 어떨까. 법관은 범죄의 목격자가 아닌 이상 증인이나 증거에 의존해 판단할 수밖에 없다. ‘1920년 미국 메사츠세츠 한 구두공장에서 강도살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경찰은 즉시 사코와 반제티를 체포했다. 범행에 사용된 총기를 유력한 증거로 검찰은 이들을 기소했으나 두 사람은 재판 내내 결백을 주장했다. 증거가 부족한데다 증인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았고, 진짜 범인을 지목하는 증언까지 나왔다. 당연히 무죄가 선고되었어야 하지만 재판은 오히려 반대로 흘러갔다. 결국 1급 살인 누명을 쓰고 전기의자에 앉혀졌다.
전 세계에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일제히 미국을 비난했다. 사코와 빈제티의 억울한 죽음은 사형제도의 불완전성과 사법살인의 폭력성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사실 앞에서 법관이 오판을 막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것만으로 무고한 생명이 희생된 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 판결에 오류가 없음이 전제되어야만 성립될 수 있는 사형제도의 원칙은 그 전제가 불가능하므로 정당화될 수 없다. 원칙적이고 궁극적으로 사형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사형제도가 존속되고 있다.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를 엄격히 규정했다면, 그 선고 요건도 엄격히 규정되어야 한다. 결과만을 가지고 사형을 선고한다는 것은 구체성이 없으므로 타당하다고 볼 수 없다. 법관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라 하더라도 범죄가 발생한 구체적 맥락, 가해자의 반성 여부, 개선 가능성 등을 충분히 고려하여 선고할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 사형제도의 폐지가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본다면 사형을 선고하는 동시에 그 집행을 유예했다가 유예기간 동안 범죄자의 개선 여부를 살펴본 뒤 감형시켜 주는 방법도 고려해 봄직하다.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형이 집행되는 중국에서도 집행유예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마오쩌둥의 부인 장청도 반혁명 혐의로 사형집행유예를 선고받고, 2년 뒤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가 후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바 있다. 그리고 사형을 대체할 형벌로 종신형 제도도 있다.
【부록】장례
유교적 관습이 남아 있는 우리나라는 보통 3일 동안 장례를 치른다. 처음에 빈소를 차리는데, 빈(殯)은 시신을 안치하는 장소로 죽음(死)과 손님(賓)으로 이루어진 글자다. 죽어서 영원히 손님이 되어버린,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영영 떠나야 하는 망자에 대한 슬픔과 아쉬움이 담겼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염(殮)하고 수의를 입혀서 입관하게 되고, 입관이 끝나면 관을 실은 상여나 영구차가 묘지를 향한다. 저세상으로 향하는 길을 의미하는 발인은 가슴에 거는 가죽끈을 의미하는 인(靷)과 출발을 뜻하는 발(發)이 합쳐진 말이다. 이 말을 들으면 어깨에 단단한 끈을 매고 상여를 옮기는 사람들 그리고 그렇게 영영 떠나가는 망자를 떠올려지게 된다. 발인을 거쳐 묘지로 운반되면 매장이나 화장으로 장사(葬事)지내게 된다.
기독교에서는 찬송과 기도, 설교가 이루어지고, 천주교는 미사형식으로 연미사와 위령미사 등을 차례로 지내며, 불교에서는 다비(茶毘)라고 하는 고유의 장례를 치른다. 우리나라의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장제급여가 포함되어 있어서 아무리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죽음의 의식을 치를 수 있도록 보호하고 있다.
법이란 흔히 규제를 의미하지만, 장례에 관한 법만큼 규제가 많은 법도 없을 것 같다. 장례식장의 설치기준, 시신 매장의 기준, 묘지의 설치기준 등등. 또 ‘묘지가 혐오시설인가’하는 문제로까지 비약하면 우리 국민의 의식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묘지를 혐오시설로 인식하는 관념은 죽음을 대하는 한국인의 문화를 보여주는데, 죽음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다 보면 당연히 죽은 자에 대한 공포감이 일고, 묘지에 대해서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죽은 자의 영혼이 늘 묘지와 결합되어 부정적 이미지로 등장하는 것은 이런 혐오감과 무관하지 않다. 죽음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여전히 전근대적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사는 곳에 화장시설이 없으면 당연히 가까운 다른 지역의 화장시설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관내에 거주하는 주민과 외지인의 이용료가 차등으로 적용된다는 점이다. 서울시의 경우 ‘서울추모공원’을 이용하는 시민에게는 이용료를 9만 원을 내도록 하지만, 다른 지역에서 왔다면 100만원을 내야 한다.(2014년 기준)
미국이나 유럽, 심지어 일본의 경우 민가나 학교와 가까운 인적 드문 곳에 공동묘지가 위치한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죽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일상 속에서 기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은 자에 대한 불필요한 공포감을 제거한다면 비록 묘지가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오히려 묘지의 접근성은 죽음을 마주함으로써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도록 한다. 묘지가 죽은 자를 기쁘게 추억할 수 있는 장소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끝으로, 죽은 뒤에도 남는 온라인상의 기록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이는 원칙적으로 당사자의 결정에 달려있다. 미국은 인터넷 공간을 열린 공간, 알 권리 차원에서 이해하는 반면, 유럽은 이를 인정하는 동시에 개인정보침해의 우려를 표한다는 차이가 있는데, 유럽은 1981년부터 정보처리에 규제를 가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죽어서도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자신의 흔적을 그대로 둘 것이고, 죽음과 함께 타인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 남긴 모든 글이나 사진을 지울 것이다. 이 경우에도 예외는 존재한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 공인의 기록 혹은 사회적·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기록이라면 본인의 결정과 무관하게 보존될 필요가 있다. 나는 어떤가? 나를 아는 사람 혹은 가족 외에 주목해 주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내 후손이 나의 기록을 공유하고 영속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맺는말
“나이 들어 죽고, 병들어 죽고, 사고로 죽고, 죽임을 당해 죽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고…, 죽는 이유도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가 죽으면 남은 사람들은 보통 그의 죽음을 슬프고 안타깝게 여긴다. 하지만 죽어 마땅한 사람이 죽었다는 말이 나오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저마다 다른 죽음의 이유와 평가 속에서 나는 어떤 이유로 죽게 되고, 또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그것은 살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큼 확실하지 않다. 나에게 내일이 주어질지도 불확실하다. 그래서 여기서는 꼭 하고 싶었던 말만 모아 갈무리하려고 한다”- 저자의 말이다.
죽음은 회피할 수 없다. 누구나 경험하는 ‘보편적 사건’이다. 그렇지만 죽음이 살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빈도와 강도로 의식되지는 않는다. 태어나자마자 숨진 아이처럼 죽음을 인식조차 못 하고 죽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죽음과 맞닥뜨려야 한다. ‘생의 완성’은 죽음을 적극적으로 의식하는 데서 이뤄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차피 한번은 죽는다는 사실만으로 삶의 의미가 전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내일이라도 삶의 종말이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기억에 영원히 남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남겨야 한다. 그렇다고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런 죽음도 삶의 일부 혹은 죽음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움은 남는다.
생명은 보호받아야 할 중대한 법익이다. 죽음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법적 쟁점을 야기 한다. 죽음은 때로 보험사기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타살을 자살이나 사고사로 위장되어 사인이 불분명한 의문사가 되기도 한다. 범죄로 인한 죽음에는 법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어떤 죽음이든 원인을 밝히는 것은 당사자에게나, 관련된 타인에게나 모두 중요하다. 죽은 자의 시신은 산자에 의해 처리되는데 시신은 함부로 훼손할 수 없고, 그것이 부패 되어 살아 있는 사람의 건강을 해쳐서도 안 된다. 장사(葬事)에 법의 규율이 적용되는 이유다.
죽음의 의제가 공적 의제가 되어 공론의 장으로 당당하게 나올 때 비로소 실존적 의미가 공유되고 죽음의 공포와 불안감 등 사회적 원인이 제거될 수 있다. 죽음에 관한 논의는 죽음 자체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삶과 죽음의 관계를 규명함으로써 삶에 관한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논의는 자연스럽고 일상적이며 유쾌해야 한다. 죽음은 일상적인 대화에서 가벼운 주제로 자주 등장하고 이야기되어야 한다. 죽음에 관한 논의 특히, 실존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의 논의가 중요하다. 죽음에 대한 법적 사유 또한 더이상 미룰 수 없다.
* 죽음을 이르는 말
‘죽다’를 한자어로 하면 ‘사망하다’이다.
한자어가 지배한 우리 옛말에는 ‘별세(別世)/운명(殞命)/영면(永眠)/작고(作故)/타계(他界)/서거(逝去)/붕어(崩御)/승하(昇遐)’등 여러 한자어가 있어 경우에 따라서 각기 달리 ‘죽음’을 표현해 왔다.
유교 문화의 반영인지는 몰라도 이 말들은 대부분 아무에게나 붙이지 않고 사람에 따라 쓰는 말로 구별 했는데 그런 점에서 이것들은 일종의 계급어인 것이다.
‘별세’는 윗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뜻으로 쓰는 가장 일반적인 높임말이다. ‘운명’역시 ‘죽을 운,목숨 명’으로 사람의 목숨이 끊어짐을 나타내며 ‘별세’와 함께 쓰인다. ‘영면’은 영원히 잠든다는 뜻으로,‘죽음’을 달리 이르는 말이고, ‘작고’도 고인이 되었다는 뜻으로 사람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여기까지 모두 윗사람의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높임말이지만 ‘타계’에 이르면 쓰임새가 좀 달라진다.‘타계’는 글자 그대로 ‘다른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인간계를 떠나 다른 계로 간다는 뜻으로 특히 귀인(貴人)의 죽음을 가리킨다.
1960년대 지식사회의 도래를 앞서서 예견한 미국의 경영학 대가 피터 드러커가 2005년 11월 사망했을 때 언론은 주로 ‘피터 드러커 타계’란 말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물론 이런 구별은 수학 공식처럼 딱히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영희 교수의 경우도 ‘타계했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서거’는 ‘사거(死去·죽어서 세상을 떠남)’의 높임말로 주로 왕이나 대통령 등의 사람이 죽었을 때 쓰인다.
‘붕어’는 ‘임금이 세상을 떠남’이란 뜻을 가지는 권위적 표현으로 요즘에는 거의 쓸 일이 없는 단어이다. ‘천붕지통(天崩之痛)’이라 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란 뜻이니 예전엔 ‘왕의 죽음’을 나타내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픔을 뜻하는 말로 더 많이 쓰인다.‘승하(昇遐)하다’는 말도 비슷한 데,직역하면 ‘멀리 올라가다’란 뜻으로 ‘임금이나 존귀한 사람이 세상을 떠남’을 높여 이른 말이다.
종교계에선 전통적으로 죽음을 가리키는 용어를 따로 사용한다.
2005년 4월 3일 운명한 교황 바오로 2세,2009년 2월 16일 세상을 떠난 김수환 추기경, 이들의 죽음을 알리며 가톨릭에서는 ‘선종’이라 했다. 선종(善終)은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로 ‘선하게 살다가 복되게 생을 마치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개신교에선 ‘하늘의 부름을 받는다’는 뜻으로 ‘소천(召天)’이라고 쓴다. 2000년 4월 19일 기독교계의 원로인 한경직 목사가,2006년 8월 17일에는 ‘시대의 어른’으로 존경받던 강원룡 목사가 소천했다.
1993년 11월 4일 조계종 종정을 지낸바 있는 성철 스님이 열반(涅槃)에 들었다. 스님의 죽음은 ‘입적(入寂)’이라 하는데 이는 ‘승려가 죽음’을 뜻하는 불교 용어다.
이 가운데 선종, 입적, 열반은 정식 단어지만 유독 소천은 아직 사전에 오르지 않았다. 정식 단어로 대접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런 연유에는 ‘하늘의 부름’으로 쓰는 ‘소천’이 조어법상으론 ‘하늘을 부름’이란 뜻이 돼 잘못 만들어진 단어 아니냐는 지적도 작용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