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子除夕
滄洲 全克恬
一杯燈下歲華遷
送盡韶光倍惘然
人不動心年四十
雪空侵髮丈三千
勲名已晚將何望
豪氣全衰亦可憐
遅暮巧竆違夙計
匣中虛負舊秋蓮
병자년 [1636년] 섣달그믐날 밤을 보내며
창주 전극념
한 개의 등잔불 아래에서 좋은 세월은 흘러갔으니
청춘을 다 써버렸으니 한층 슬프고 멍하다.
사람들이 말하길 40세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데
눈(雪)이 사방으로 3000장(丈)까지 쌓여 머리카락까지 침범하였다.
명성은 저무는데 장차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호탕한 기상은 완전히 쇠하였으니 역시 가련하다.
황혼 속에서 재주를 다하여도 평소 계획은 어긋나기만 하고
궤 속에서 이미 진 가을 연꽃처럼 헛되이 보냈구나
[국역] 전과웅
[출처] 창주선생문집
● 소광韶光
봄 경치. 춘광(春光).
● 망연忘緣
넋을 잃어 멍한 모양
● 勳號 훈호
훈공(勳功)이 있는 사람에 주는 칭호(稱號).
● 遲暮 지모
차차 나이가 많아지는 것.
[시대적 배경]
● 정묘호란, 병자호란
요약
정묘년(1627)과 병자년(1636) 두 번에 걸친 청나라의 침입.
힘을 키운 여진족은 후금을 세우고 조선을 쳐들어왔으며(정묘호란), 청나라를 세운 후에는 황제가 직접 쳐들어왔다(병자호란).
정묘호란
광해군은 후금과 소통을 하며 후금과의 관계를 좋게 하려 애썼지만 인조가 정권을 잡은 후 후금과의 관계는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조선에 인조가 들어설 무렵 후금에서도 조선과의 화친을 주장하던 누르하치가 죽고 조선 침략을 주장하는 그의 아들 홍타이지가 왕이 되었다. 후금의 권력자 성향이 바뀌었다면 조선에서는 미리 대비를 해야 했지만 후금과 소통이 없어 변변한 준비를 못했고, 후금의 군사력을 당해낼 수도 없었다.
홍타이지는 왕이 되고 나서 3개월 뒤 조선에 군사를 보냈다. 후금의 군대는 빠른 속도로 쳐들어왔고, 인조는 급하게 강화도로 몸을 피했다. 후금은 강화도로 사신을 보내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동생이 되는 형제 관계를 맺자고 했다. 명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쟁을 앞둔 후금은 조선과의 전쟁이 부담스러웠고, 이를 알아챈 인조는 후금의 조건을 받아들이고 화의를 맺었다.
병자호란
명나라를 궁지로 몰던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이제부터 조선은 '신하의 나라'라며 청나라에 신하로서 예를 갖추라고 요구했다. 이때 신하들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와 적당히 이야기하여 화해를 하자는 주화파로 나뉘었다. 결국 조선은 척화파의 주장이 우세하여 만주족을 야만족이라 무시하며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화가 난 청나라는 군대를 이끌고 다시 침입했는데, 이것이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이다.
막강한 청나라 군대는 순식간에 한양 근처까지 쳐들어 왔고, 인조와 신하들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5일간 싸웠다. 하지만 차츰 먹을 것이 떨어지고 청의 공격을 당해낼 수 없게 되자, 마침내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3번 큰절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꽝꽝 박아 그 소리가 단 위에 앉아 있는 청 태종에게 들리도록 하는 굴욕적인 항복을 삼전도에서 해야만 했다(삼전도의 굴욕).
[네이버 지식백과] 정묘호란, 병자호란 (한국사 개념사전, 2015. 02. 24., 최인수, 공미라, 김수옥, 김애경, 김지수, 노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