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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인물
남북국시대 신라의 학자, 문장가, 관료.
이칭
자고운(孤雲), 해운(海雲), 해부(海夫)시호문창후(文昌侯)
인물/전통 인물
성별남성출생 연도857년(헌안왕 1)
사망 연도미상
본관경주(慶州)
출생지경상북도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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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기/펼치기내용 요약음성 재생
남북국시대 신라의 학자, 문장가, 관료.
최치원 남북국시대 신라의 학자, 문장가, 관료이다. 당을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를 인정하면서도 신라의 고유성과 토착성을 알리려고 하였다. 특히, 사람에 도가 있고 사람은 나라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여, 인간 중심의 보편성과 그에 따른 다양성을 강조하여 신라의 세계화를 이끌었다. 다만, 생존 당시 신라가 쇠퇴하여 정치 이념과 사상은 신라 사회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이후 고려 국가의 체제 정비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문장은 동아시아 문서의 형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어서 조선시대에도 특별히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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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및 성장 배경
최치원(崔致遠)의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지만, 857년(헌안왕 1)에 태어나 908년(효공왕 12) 이후까지 활동하였다. 최견일(崔肩逸)의 아들이자 승려 현준(賢俊[賢儁, 賢雋, 玄準])의 동생으로, 최인연(崔仁渷[崔彦撝]) · 최서원(崔棲遠(崔栖遠))과는 4촌 내지 6촌의 형제 사이였다. 최견일은 861년(경문왕 2)부터 시작되었던 곡사(鵠寺)의 중창 불사에 참여하였고, 현준은 880년대 중반부터 해인사에 머무르며 왕실이 주관하는 불사(佛事)주1를 맡았다. 최서원은 884년(헌강왕 10) 견당사(遣唐使)의 수행원으로 활동하였고, 최인연은 한때 집사(執事) 시랑(侍郞)을 맡았다. 이들은 관료나 승려로 활동하면서 유교와 불교에 관심을 가졌다.
신라에서 6두품 집안은 유학을 익히거나 불법을 받들어 관료나 승려로 활동하였다. 신라 하대에도 6두품 출신은 유학이나 불교를 익히려 도당 유학하였다. 신라의 대표적인 6두품 집안인 경주최씨(慶州崔氏)는 경문왕~ 효공왕 대에 파견된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였다. 이들은 유학과 불법을 존숭하면서 숙위학생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경문왕계 왕실과 친밀하였다. 최치원의 입당 유학도 경문왕계 왕실과 관계하였던 집안 분위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자연히 그는 입당(入唐) 유학을 통해 왕실과 가까운 관직으로 진출하려는 성향을 가졌다.
접기/펼치기주요 활동
재당 활동
868년(경문왕 8) 당나라에 들어간 최치원은 동도(낙양)에 자리한 국자감의 태학(太學)에서 습업주2한 뒤, 874년(경문왕 14) 7월 이전에 예부시랑 배찬(裵瓚) 아래서 빈공의 자격으로 생도시(生徒試)의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다. 그는 진사시에 응시하면서 시부(詩賦)주3 논책(論策)주4을 익히는 데 진력하였는데, 그것은 빈공 진사시 급제 이후 동도에 머물면서도 계속되었고, 876년 겨울에 선주(宣州) 율수현위(溧水縣尉)로 나아간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877년 겨울에 그는 율수현위를 사임하고 박학굉사(博學宏詞)에 응시하려고 입산 수학하였다. 박학굉사는 상서이부(尙書吏部)에서 시문 삼편(三篇)을 시험보아 뛰어난 능력의 인물을 선발하는 것인데, 고급 관료가 되려면 이를 통과해야만 하였다. 최치원은 계속 시부를 익히며 좀 더 상위 관직으로 진출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879년에 굉사(宏詞)가 중단된 데다가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하였고, 황소군(黃巢軍)의 약탈 위협을 받게 되자 수학을 중단하였다.
그는 당시 당 조정의 경제적 기반을 관리하면서 황소군 진압의 중책을 맡아 점차 실세로 성장하며 선주까지 영향력을 미쳤던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을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휘하에서 종사하고 있었던 과거 동년인 고운(顧雲)을 통해 자신의 출사(出師)를 고대하였다.
최치원은 879년(헌강왕 5) 10월 이후부터 충성과 충정을 다짐하는 글을 올려 10월 이후 어느 달 25일에 관역순관(館驛巡官)으로 임명한다는 공첩을 받고, 880년 5월부터 병마도통을 맡은 고변 휘하에서 도통순관(都統巡官)으로 출사하였다. 이후 882년 정월부터는 다시 관역순관을 맡았다가 884년 8월까지 약 4년 동안 감찰과 문한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회남(淮南)은 신라 사신이 입조하는 길목이었다. 884년(헌강왕 10)에 김인규(金仁圭)는 ‘신라국입회남사(新羅國入淮南使)’의 자격으로 회남에 들어왔고, 신라 탐후사인 박인범(朴仁範)은 881년 7월~885년 3월에 서촉(西蜀)에 머물고 있던 희종을 알현하기 위해 회남에 도착하였다. 이때 최치원은 오랜 이국 생활에 지쳐 부모의 안부를 그리던 향수에 빠졌다. 더욱이 고변은 882년 정월에 도통에서 물러난 뒤 황제에게 불만을 토로하였다가 오히려 실권(失權)하여 도교에 침잠해 갔다. 최치원은 당에서 더 이상 자신의 포부를 펼치기 어려웠다.
귀국 후 활동
당 황실을 호위하는 번진에서 감찰과 문한을 맡고 있던 최치원의 활약상은 회남에 들어온 신라 사신을 통해 신라 왕실에 알려졌다. 최치원은 다른 도당유학생과 달리 10년의 유학 기간을 넘기면서 당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활약상이 귀국 후의 관직 진출을 보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자부하였다.
당시 신라의 헌강왕은 선왕인 경문왕을 이어 유학을 진흥하고 유학 지식인을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는 재위 5년 이후에 정치 세력을 재편하면서 측근 정치를 강화하였지만, 그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받고 있었다. 향수에 시달리면서 당의 사회상이 급변하고 신라의 정치 상황 역시 파행으로 치닫고 있음을 감지한 최치원은 마침내 884년(헌강왕 10) 8월에 17년 동안 머물며 관직 진출을 이룬 당나라를 떠나 자신의 뜻을 행하고자 금의환향하였다.
885년(헌강왕 11) 3월 신라에 도착한 최치원은 곧바로 국왕의 측근인 시독(侍讀)을 맡았고, 재편된 서서원(瑞書院)의 문한(文翰)에 임명되어 왕실이 주관하는 불사의 발원문과 찬을 작성하였다. 그는 정강왕~ 진성왕 대에도 여전히 국왕 측근의 문한관으로 왕실 주관 불사의 글을 짓거나 왕명을 받아 비명을 찬술하였다.
귀국 후 그의 활동은 경문왕계 왕실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889년(진성왕 3) 원종 · 애노의 반란을 계기로 전국 곳곳에서 초적이 일어났다. 왕실은 지방 사회를 안정시키는 대책을 모색하면서도 왕실을 거부하는 세력은 철저히 진압하려는 이중적 태도를 취해야 했다.
최치원은 재당 시절에 고변의 막부에서 번진 세력 간의 치열한 세력 다툼과 관할 지역에 대한 절도사의 지배 방식을 지켜보았다. 진성왕은 이러한 최치원의 경험을 살리고자 하였고,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 최치원 역시 자신의 능력을 알리기를 희망하였다.
그는 889년부터 「낭혜비명」을 작성하기 이전인 890년까지 병부 시랑으로 임명되어 반란군 진압과 왕경 방어에 힘썼다. 하지만 지방 곳곳에서 연이어 호족 세력이 크게 일어나자, 최치원은 직접 지방사회를 위무하기 위해 890년에 서서원 학사로 「낭혜비명」을 찬술한 직후에 대산군(大山郡)과 부성군(富城郡) 등의 서해안 일대 지방의 태수(太守)를 자임(自任)하기도 하였다.
893년(진성왕 7) 최치원은 중앙 정계로 돌아와 하정사(賀正使)주5로 임명되었으나 사행에 실패하였다. 이후 지서서원사(知瑞書院事[知瑞書監])을 맡아 이듬해 2월에 진성왕에게 시무십여조를 진상하였다. 시무책은 귀족 세력과 호족 세력을 견제 · 응징하여 왕실과 국가를 보전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때문에 그는 진성왕의 즉위에 반발하였던 정치 세력을 비롯한 진골 세력의 견제를 받아 895년(진성왕 9) 헌강왕 서자 요(嶢)의 태자 책봉을 계기로 중앙 정계에 남지 않고 지방 곳곳을 유랑하였는데, 특히 경문왕의 친동생 위홍(魏弘)의 원당(願堂)주6이었던 해인사에 머물렀다.
신라와 발해의 외교관계가 점차 경직되고, 진성왕이 태자 측근 세력의 심한 견제를 받아 선위(禪位)주7를 고려하자, 895년 10월 전후부터 898년 정월까지 지서서원사로 발해와 신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진성왕 선위와 효공왕의 계위(繼位)를 당 황제에게 알리는 외교 문서를 작성하였다.
이어 898년 정월 이후에는 897년(효공왕 원년) 6월 북궁(北宮)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12월에 훙거주8한 진성왕을 따라 가족을 이끌고 해인사에 옮겨가 정계를 은퇴하였다. 이후 그는 해인사 중창 불사의 기문과 화엄 승전을 찬술하여 신라 국가 재건의 호국 의지를 주장하다가 908년 이후 어느 시기에 삶을 마쳤다.
접기/펼치기저술과 사상
저술과 정치적 입장
최치원은 시문집을 비롯하여 비명 · 승전 · 결사 발원문 등의 불교 관련 저술, 외교 문서, 연표, 시부 등의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특히,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은 현전하는 한국 최고(最古)의 문집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최치원의 저술은 시부와 『계원필경집』에 실린 일부의 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저술이 국왕이나 상관을 대신하여 작성한 것이었다.
최치원은 만당 시기의 주요 인물이었던 고변 휘하에서 문한주9을 맡았고, 귀국 후에는 국왕의 측근 문사로 활동하였다. 따라서 그의 글은 대찬의 형식으로 작성되었더라도 문장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내용에는 당시 당과 신라의 사회상이 그대로 담겼다.
최치원의 저술은 그의 활동과 관련되어 작성되었다. 저술은 재당 시절은 물론 귀국 후에도 계속 이루어졌다. 『계원필경집』이 재당 시절의 모습을 담았다면, 발원문 · 비명 등의 불교 관련 저술은 귀국 후 문한 직을 맡아 찬술한 것이다. 외교 문서와 연표는 진성왕 말년 이후 신라와 당의 국제 관계는 물론 왕실의 권위가 점차 실추되는 상황 속에서 작성되었다. 화엄 승전은 입산 이후 해인사에 머물며 세상과 떨어져 칩거하면서 쓰여졌다. 시기별로 작성된 저술에는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그의 삶과 활동, 당시의 사회상 등이 고스란히 담겼다.
한편으로, 최치원의 저술은 당시 성행하였던 사상 경향을 반영하였다. 만당의 사상 경향은 『계원필경집』에 반영되었지만, 불교 관련 저술에는 화엄 사상을 중심한 신라 말 불교계의 동향이 소개되었다. 또한 「 난랑비서(鸞郞碑序)」 · 『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등에는 유교 · 도교 사상과 신라 전통에 대한 이해가 담겼다. 이들 저술은 당시 신라인의 경전 이해 수준을 보여 주고, 사상계의 다양한 변화 과정을 알려 준다.
그의 글은 후대에 전해지면서 일부 윤색되거나 가탁되기도 하였고, 많은 저술이 총류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 불국사고금역대기(佛國寺古今歷代記)』에 게재된 불국사 관련 글은 최치원과 관련되어 불국사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윤색되었고,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이나 「유설경학대장(類說經學隊仗)」은 신라의 전통을 전하는 과정과 후대 유학의 종조를 숭앙하려는 의도에서 가탁되었다.
이처럼 최치원의 글로 알려진 저술에는 위서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초기까지 그의 저작은 이전부터 알려진 글 외에 또 다른 글도 계속 전승되어 방대한 분량으로 남았다. 특히, 『 동문선(東文選)』에는 편찬 이전까지 활동하였던 여느 문인과 유학자에 비해 상당히 많은 195편의 글이 실렸다. 그것은 최치원이 자신의 논조를 정확히 논증하려고 많은 전고를 인용하였고, 사실을 그대로 전하면서 대안을 제시하는 실용적 문장을 구사하였기 때문이다.
최치원의 글이 국왕의 위상을 높이고 백성의 교화에 도움이 되기에, 조선 후기에도 『계원필경집』을 포함한 그의 저술은 후대인들의 주목을 계속 받았다. 최치원의 저작이 후대인의 주목을 받은 것은 그의 정치적 입장에서 비롯되었다. 최치원의 아버지 최견일은 곡사를 중창하는 불사에 참여하였고, 최치원은 곡사와 대숭복사(大崇福寺) 중창의 의미를 담은 「 숭복사비명」을 찬술하였다.
경문왕은 책봉을 받은 재위 5년(865)에 곡사를 중창하면서 아버지 김계명(金啓明)을 중심으로 김예(金銳) · 김계종(金繼宗) · 김훈영(金勛榮) · 김수종(金邃宗) 등 왕족에게 실무를 맡겼다. 한편으로 동생 위홍을 중심으로 결언(決言) · 현량(賢諒) · 신해(神解) 등 화엄 승려를 등용하여 자신의 측근 세력을 양성하려고 하였다.
곡사의 중창에는 문성왕 대부터 불사를 이끌었던 측근 세력과 함께 경문왕이 새로 등용한 측근 인물이 참여하였다. 경문왕은 이들을 통해 원성왕의 여러 후손을 왕실을 중심으로 한데 모으려고 하였다. 곡사 중창 이후 경문왕은 새로운 측근 세력을 등용하였다. 그는 김팔원(金八元) · 김함희(金咸熙) · 김일(金鎰) 등 왕족을 중앙의 요직에 중용하며 참여시켰고, 곡사 중창에 참여하였던 김계종 · 김훈영 · 현량 · 신해 등을 참여시켜 재위 12년(872)에 황룡사구층목탑의 중수 불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위홍을 중심으로 경문왕을 옹호하는 측근 세력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계명과 관계하였던 정치 세력은 점차 배제되었고, 경문왕은 왕권을 강화해 나갈 수 있었다.
불사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경문왕의 노력은 헌강왕 대에도 계승되었다. 헌강왕은 선왕이 중용한 여러 왕족 및 승려들이 사망하자, 이전부터 활동한 김일 이외에 김임보(金林甫) · 김순헌(金順憲) 등의 중신과 결언 · 현준 · 최치원 등을 왕실이 주관하는 불사에 새로 참여시켰다. 이들은 진성왕 대까지 왕실 관련 불사에 꾸준히 관여하면서, 조덕(祖德)을 기리는 불사를 통해 왕실의 위상을 높이려는 경문왕계 왕실에 충실히 협조했다.
다만, 왕실에 협조하는 왕족이 점차 줄고 불교계도 왕실이 화엄승려와 가까워지면서 거리를 두었기에, 헌강왕 이후의 경문왕계 왕실은 보다 작은 소가계(小家系)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헌강왕은 정치 세력의 반발이 점차 강해지자, 귀국한 최치원에게 「 숭복사비명」을 찬술하라고 명령하였다. 그것은 최치원 집안이 862년(경문왕 2)부터 시작된 곡사 중창에 깊이 관여하면서 경문왕계 왕실의 권위와 위상을 높이는 작업에 참여해 왔기 때문이었다.
헌강왕과 정강왕이 연이어 훙거하고 888년(진성왕 2)에 위홍이 죽은 뒤, 호족 세력의 봉기와 함께 진성왕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논란이 점차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치원은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진성왕의 의도를 받들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890년에 「숭복사비명」을 찬술하였다. 최치원은 왕족인 김준(金峻)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고, 현준을 통해서 왕족 김일과도 계속 인연을 이어갔다. 그는 보다 작은 소가계 중심으로 왕실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경문왕계 왕실과 정치적 행보를 함께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경문왕계 왕실과 정치적 행보를 함께 한 최치원은 당시 신라 사회를 개혁하려는 시무책을 894년(진성왕 8) 2월에 진성왕에게 올렸다.
유교 · 불교 · 도교에 대한 이해와 삼교 융합
신라 하대에 6두품 출신은 대개 유학과 불교를 익혔다. 특히, 경문왕대에는 경주최씨를 비롯한 6두품 출신 유학 지식인이 크게 활동하였다. 이들은 경문왕의 명령을 받아 선사의 비명을 지으면서 왕실이 유학 진흥책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던 노력을 은근히 강조하였다. 특히, 이전에 6두품 출신인 녹진(祿眞)이 강조한 인재 등용책의 개선을 부각하며, 국왕 중심의 정치적 질서 확립을 도모하는 유교적 정치 이념을 내세웠다.
최치원은 이전부터 추구되어 온 유교적 정치 이념을 더욱 강조하며 시무책을 제시했다. 최치원은 『계원필경집』에서 군주와 신하가 유교적 정치 이념에 입각하여 군신 상하의 체제와 질서를 확립하면, 덕화정치(德化政治)와 도(道)의 구현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군주가 덕화정치를 추구하고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해야 한다는 ‘군왕 자질론’, ‘군왕 역할론’을 제시하였다. 또한, 군주의 덕화정치 실현과 관련하여 군주는 공적인 경로를 통해 옳고 바른 신하를 선발하여 재능에 따라 임무를 부여하고, 어진 신하의 등용과 출세를 원활히 하기 위해 전형을 중시해야 한다는 ‘인재 등용론’도 강조하였다.
최치원은 귀국한 이듬해 정월에 헌강왕에게 『계원필경집』을 진상하면서 군왕의 자질과 역할, 신하의 도리와 자세를 부각하였다. 최치원은 귀국 직후에 여러 글을 찬술하면서 자신의 유교적 정치 이념을 계속 내세웠다. 특히, ‘ 사산비명(四山碑銘)’에는 군자국(君子國) 신라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한편, 인과 효가 군왕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질임을 애써 부각하였다.
곧 군왕이 선정을 이루려면 인 · 효에 밝은 군왕 자신의 자질도 중요하고, 능력있는 인재를 공정하게 등용해야 한다고 했다. 때문에 군왕이 유교적 정치이념을 구현하여 군자국을 건설하려면 바로 유학적 소양을 갖춘 6두품 유학 지식인의 등용을 통해야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최치원은 인 · 효 정치를 강조하면서 인재 등용책도 제시하였는데, 경문왕과 헌강왕이 이를 위해 노력한 것을 유독 강조하였다.
특히, 헌강왕은 경문왕처럼 불법을 존숭하고 유학을 진흥하였다. 그는 순행 중에 ‘산해정령(山海精靈)’과 남산신(南山神), 북악신(北岳神), 지신(地神)을 각각 만나 유학 지식인이 왕실을 등지고 반발하는 현상을 막으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 뒤 헌강왕은 유교 교육기관인 국학(國學)을 순행하고, 신하에게 시 1수씩을 지어 바치게 하는 등 유학적 소양을 가진 이를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하지만 왕권 강화에는 언제든지 왕실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에 의해 반발이 일어날 조짐이 잠재되었다. 때문에 최치원은 군주 자질론과 신하 역할론, 그리고 어진 임금과 어진 신하의 조화, 어진 인재 등용의 필요성을 담아 귀국 직후 헌강왕에게 『계원필경집』을 올렸다. 『계원필경집』은 헌강왕의 왕권 강화를 지지하는 이념적인 기반이었다.
하지만 『계원필경집』을 진상한 지 6개월 뒤에 헌강왕이 훙거하고 정강왕도 1년 만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뒤이어 진성왕이 즉위하였지만, 정강왕을 도왔던 준흥(俊興)이 계강(繼康) · 예겸(乂兼)과 함께 효공왕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전환하는 등 왕실은 점차 진골 귀족 세력의 견제와 반발에 직면하였다. 895년 10월에는 비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헌강왕의 서자인 요(嶢)가 태자에 올랐다. 최치원은 효공왕을 지지하는 진골 귀족 세력에 반감을 가졌다.
최치원은 화엄 불교를 중시하는 불교 사상을 가졌다. 화엄 사상은 왕실이 주관한 화엄 결사의 발원문이나 불국사와 해인사 관련 기 · 찬, 그리고 화엄 승려의 전기에 반영되었다. 최치원은 귀국 직후인 885년 3~8월 사이에 지엄과 의상을 추모하는 불사와 헌강왕의 명복을 비는 불사의 발원문을 작성하였다. 특히, 헌강왕 추복(追福) 불사는 왕족과 함께 결언 · 현준 등 해인사 승려가 주관하여 화엄 결사로 설행되었다.
불사는 정강왕 대에도 불국사를 중심으로 계속 설행주10되어 정토를 비는 결사가 이루어졌으며, 최치원은 결사의 기와 찬을 도맡아 작성하였다. 왕실 불사와 관련된 글을 찬술할 때, 그는 886년 7월부터 893년까지 진감 · 낭혜 · 지증 3명의 선사와 왕실의 원찰인 숭복사에 대한 비명도 작성하였다.
당나라에서 유학을 습업한 뒤 귀국한 그의 저술은 대체로 불사와 관련하여 이루어졌다. 최치원은 895년 7월에 해인사를 지키다 죽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 해인사묘길상탑기(海印寺妙吉祥塔記)」를 찬술한 뒤 898년 정월부터 해인사 중창 관련 글을 지었다. 그것은 그가 898년(효공왕 2) 정월 해인사에 들어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형인 해인사 현준을 비롯하여 결언 · 성기(性起) · 승훈(僧訓) · 난교(蘭交) · 희랑(希朗) 등 해인사 승려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현준의 부탁을 받아 901년(효공왕 5)부터 해인사 관련 승려의 전기를 찬술하였다.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의 전기를 쓴 다음에는, 신라와 중국의 화엄 교학을 정립하는 데 공헌한 의상(義湘)과 법장(法藏)의 전기를 지었다. 그의 불교 관련 저술은 당시 해인사의 화엄 사상과 깊은 관계를 가지며 작성되었다.
해인사의 승려인 결언 · 현준 · 성기 · 승훈 · 난교 등은 경문왕계 왕실의 왕명을 받아 결사를 맺거나 사찰을 창건하였다. 현준이 주로 헌강왕 대 말년 이후에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면, 결언은 이미 경문왕 대 초반부터 왕실과 친밀하였다. 다만, 현준은 아버지 최견일을 통해 이미 경문왕 대 초반부터 왕실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승훈과 난교는 해인사가 경문왕의 친동생으로 진성왕의 남편이자 숙부였던 위홍의 원당이 된 이후 경문왕계 왕실과 가까웠다. 그들은 진성왕의 해인사 입산 전후에 해인사의 중창 불사를 주관하였다.
해인사 승려들은 적어도 경문왕 대부터 진성왕 대까지 경문왕계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신라 말에 해인사는 의상계 화엄종을 대표하는 사찰이었다. 해인사 승려인 결언과 현준은 의상의 융섭적(融攝的)인 화엄 사상을 중심으로 유식 사상을 포함한 법장의 화엄 사상을 아우르려는 경향을 가졌다. 최치원은 901~904년 사이에 「석순응전(釋順應傳)」과 「석이정전(釋利貞傳)」, 그리고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을 지어 신라 화엄종의 형성 과정과 의상 화엄 사상을 정리하였다. 904년에는 의상과 가까웠던 중국 화엄종 법장의 전기인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지었다. 그는 「부석존자전」에서 의상과 문무왕의 관계를, 「법장화상전」에서는 법장과 측천무후의 관계를 특기(特記)하였다.
최치원은 화엄 승려의 전기를 지으면서 화엄 승려와 왕실의 관계를 특별히 부각하였다. 원칙을 중시하는 화엄 사상이 신라 왕실을 상징한다면, 차별을 인정하는 유식 사상은 지방 곳곳에 자리한 호족 세력을 의미하였다. 최치원이 불교 관련 저술을 찬술할 때, 신라 사회는 진골 귀족 세력과 호족 세력에 의해 분할되었고, 왕실은 점차 왕경 주변 지역에만 영향력을 미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치원은 화엄 승전을 찬술하면서 융섭적인 화엄 사상을 통해 지방 세력을 인정하면서도, 신라 국가의 지배 질서 안으로 편제하여 신라 국가를 재건하려는 염원을 담았다.
최치원은 재당 시절에 고변을 통해서 금단도(金丹道)를 중심으로 신선도(神仙道)를 이해하였고, 재사(齋詞)를 작성하면서 유교의 ‘좌국부민(佐國扶民)’ 사상과 관련된 도교 사상을 익혔다. 재당 시절 그의 도교 인식은 유교를 중심으로 이해되었는데, 당시 당나라 사람들이 가졌던 도교 의식과 다르지 않았다. 귀국 후에 그는 신선도를 중시하면서 외형보다 내면의 수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도교 사상을 정립해 나갔다. 그것은 금단도의 비판과 도교 사상 자체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보덕전(普德傳)」에 반영되었다. 최치원은 「보덕전」에서 보덕의 『열반경』 40권 강경과 도교 존숭으로 인한 보덕의 고대산 이거 과정을 특기하였다.
유교를 기초로 도교 사상을 이해했던 그에게 도교를 일방적으로 진흥하여 왕권을 억압한 연개소문은 호감을 받을 수 없었다. 최치원은 불교와 관련 없이 옥황(玉皇)을 존숭하는 도교적 신선술을 비판하면서 도교 사상에 대한 이해를 위해 노자(老子)와 『도덕경(道德經)』을 중시하는 경향을 내세웠다. 신라 사회에서는 이미 유학 사상과 관련하여 『도덕경』을 이해하고 있었다. 유학을 익혔던 6두품 출신은 은일적 노장 사상에 심취되어 심신의 수련을 통해 득선(得仙)을 구하려고 하였다.
최치원은 6두품 유학 지식인이 희구하였던 신선사상을 계승하여 내심(內心)을 닦아 사람을 구제하는 수련적 신선사상을 제시하였다. 신라에서 신선사상은 일찍부터 유교 · 불교와 연관되었다. 최치원은 신라 전통에 의지하여 수용된 유교와 불교를 특별히 ‘유(儒)’와 ‘선(仙)’으로 표현하였다. 자연히 불교의 수용과 발전은 신선의 관념과 관련되어 강조되었다.
최치원은 신라 고유의 전통을 중시하며 유교와 불교를 존숭하여 내심을 수련하였던 신라의 왕을 최고의 신선으로 정의하였다. 신선이 머무르는 신라에서 조덕을 추복하였던 경문왕과 헌강왕은 최치원에 의해서 최고의 신선으로 상정되었다. 최치원은 귀국 후 신선사상을 중심으로 도교 사상을 정립하면서 경문왕계 왕실의 위엄을 강조하려고 하였다.
귀국 후 그의 도교 사상은 신라의 유교 · 불교와 관련되어 나타났지만, 특별히 불교적인 기반을 가졌다. 최치원은 불교에 토대를 둔 수련적 신선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는 불교와 도교를 함께 이해하는 경향을 가졌다. 자연히 불교와 유교를 또한 함께 이해하고자 하였다. 최치원은 불사 발원문에서 죽은 왕실 친족의 혼백이 불보살(佛菩薩)의 가피력(加被力)으로 불국정토(佛國淨土)에 이르게 되기를 염원하였다. 이것은 효 · 우애의 유교적 관념이 불법(佛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염원은 「사산비명」에 주로 반영되었다. 헌강왕과 정강왕, 진성왕의 경문왕계 왕실은 최치원에게 「지증비명」 · 「숭복사비명」 · 「진감비명」 · 「낭혜비명」의 찬술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최치원은 찬술을 명령받은 차례와 관계없이 887년 7월부터 893년까지 약 7년 동안 비명의 체재를 달리하면서 「진감비명」 · 「숭복사비명」 · 「낭혜비명」 · 「지증비명」을 차례로 작성하였다. 비명의 체재를 달리한 것은 최치원이 각 비명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려는 의도를 담았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진감비명」에서 유교 · 불교 양교를 구분하여 이해하거나 갈등을 조장하는 당시의 사조를 비판하면서 양교를 함께 이해하는 사상 경향을 제시하였다. 「숭복사비명」에는 유교적 효도의 추구가 불교의 추복(追福)에 의해서 가능함을 제시하여, 유교 · 불교 양교 교의(敎義)의 교섭뿐만 아니라 실천 덕목의 일치를 강조하였다. 「낭혜비명」에는 삼외(三畏)와 삼귀(三歸), 오상(五常)과 오계(五戒)의 조화로운 융화를 강조하면서 불사를 통해서 조덕을 추복하는 호법(護法)이 왕도정치를 구현하는 방편임을 부각하였다. 「지증비명」에는 도헌의 생애를 육시(六是)와 육이(六異)로 정리하면서, 유교 · 불교의 융화를 강조하면서도 유교적 관념을 불교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사산비명」에서 유불 교섭의 사상 경향을 제시하고 호법에 의한 왕도정치를 강조하였다.
최치원은 이전의 유학 지식인이 제시한 유불 교섭의 사상 경향을 수용하였다. 그는 재당 시절은 물론 귀국 직후에 『계원필경집』을 헌강왕에게 진상하면서, 유교를 중심으로 도교와 불교를 이해하였다. 하지만 귀국 직후 불사 관련 글을 작성하면서는 불교를 중심으로 유교와 불교를 함께 이해하는 사상 경향을 보였다. 특히, 신라 사회에 상존하는 유불 교섭 사상의 경향이 신라의 전통과 밀접하게 연관되었음을 강조하였다. 경문왕계 왕실은 신라 전통을 계승한 유교와 불교를 존숭하고 진흥하였는데, 그것은 호법을 통해 왕도정치를 펴려고 의도한 것이었다.
결국, 최치원은 유불 교섭 사상의 경향을 토대로 호법 왕도론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시무책과 함께 신라 사회를 개혁하려는 또 다른 방안이었다. 또한, 그것은 유교 · 불교와 함께 삼교의 사상적 융합을 도모하는 바탕으로 기능할 소지를 지녔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때 활동하였을 때, 당시 당나라에서 성행한 삼교 융합의 경향을 익혔다. 귀국 후에도 그는 「사산비명」을 찬술하면서 불교를 통해서 유교와 도교를 인식하거나 융합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신라 말 유학 지식인이 가졌던 것이었다.
최치원은 특별히 불교와 연관된 선(仙)에 관심을 가졌다. 귀국 후 그의 삼교 융합론은 신라 사회에 상존하는 신선사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신라 사회에서 신선사상은 일찍부터 제시되었다. 그것은 신라에 수용된 유교 · 불교와 융화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화랑은 유교 · 불교 · 도교 삼교와 관련되었는데, ‘나라의 신선인 국선(國仙)’이라고 불려졌으며, 토착적인 산신의 도움으로 신라에 등장하였다.
자연 삼교는 신라 고유의 신선사상과 관련된 화랑을 통해 융합될 수 있었다. 경문왕은 ‘국선’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즉위 후 요원랑(邀元郞) 등 4명의 국선에게 지지를 받았다. 최치원은 화랑이었던 경문왕이 풍류를 떨치며 삼교를 융합하였다고 내세웠다. 그는 군주인 화랑, 곧 ‘난랑(鸞郞)’인 경문왕을 기리기 위해서 「 난랑비서」를 찬술하였다.
최치원은 「사산비명」에서 유불 교섭 사상의 경향과 함께 삼교 융합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유교 · 불교 · 도교를 모두 경문왕계 왕실과 관련하여 이해하였고, 경문왕계 왕실의 권위와 위상을 높였다. 자연 경문왕계 왕실이 몰락한 뒤 신라의 존재가 위협받는 상황에 이르자, 최치원은 신라 재건의 이상을 꿈꾸면서 경문왕계 왕실의 몰락을 아쉬워하였다.
그는 경문왕계 왕실을 연 국선 경문왕을 ‘난랑’으로 부각하고, 그가 신라 고유의 풍류 사상을 통해 삼교를 융합하였음을 애써 강조하였다. 자연히 「난랑비서」는 특별히 화랑 출신이 정국의 전면에 다시 등장하였을 때 찬술되었다. 최치원은 902년(효공왕 6)에 화랑 출신인 효종랑(孝宗郞)이 시중에 오르자, 국선인 경문왕을 강조하려는 뜻을 담아 「난랑비서」를 찬술하였다.
역사의식
최치원은 약 17년 동안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익혔다. 하지만 그는 신라 전통을 은연 중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중국과 신라의 왕실을 중심으로 두 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제왕연대력』에 반영되었다. 최치원은 신라를 군자국으로 인식하였다. 그것은 유교적 이상인 인(仁)에 투철하였고, 중국 문화의 기반인 유학을 진흥하여 인을 크게 흥성하였기 때문이었다.
유학 진흥을 강조한 군자국 인식은 최치원뿐만 아니라 신라 하대에 활동하였던 유학 지식인들에게 공유되었다. 최치원 역시 다른 유학 지식인처럼 신라가 중국의 제후국임을 유념하였다. 다만, 그는 자신과 같은 한림(翰林)에 의해서 신라가 중국의 문물과 제도에 투철하여 중국을 개벽할 만큼 중국의 제후국 가운데 가장 뛰어난 나라로 발전하였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러한 발전이 이미 신라가 어진 나라였기에 비로소 가능하였음을 설명하였다. 최치원은 신라를 중국의 제후국으로 위치하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가졌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중국 문화의 수용과 발전이 신라의 전통적 토착 문화를 토대로 구현되었음을 부각하는 소중화적 자존의식(小中華的 自尊意識)도 함께 지녔다.
최치원은 선사의 비명과 사찰 관련 글을 작성하면서 신라의 고유 제도나 언어를 제시하였다. 특히, 중국적 세계관을 유념하면서 중국 독자를 염두하여 그 뜻을 세주(細註)로 풀이하였다. 그의 신라 토착 문화에 대한 이해와 언급은 중국 문화와 대비하는 과정 속에서 제시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이전부터 신라 전통으로 전해져 왔던 토속어(土俗語)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불교적 의미를 함축한 고유어에 특별히 유념하였다.
신라 불교의 융성과 승려의 업적을 찬양하면서, 그것이 신라 문화의 발전과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던 요인이었음을 강조하였다. 다만, 신라의 불교와 유학이 동일한 신라 전통에 기반하여 비로소 발전하였음을 특기하였다. 그는 신라를 중국의 제후국으로 상정하는 인식을 유지하면서, 한편으로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적극 수용하고 유학의 진흥과 불법의 숭상을 통해서 왕권강화를 도모하였던 경문왕계 왕실의 치적을 강조하였다.
경문왕은 제왕의 권위를 수식하며 치국의 유교적 관념을 담은 금도(琴道)를 중흥하였다. 화랑과 관계하였던 대구화상(大矩和尙)주11은 유교적 이상을 담은 노래를 지어 금도의 중흥을 꾀한 경문왕의 권위를 제고하였다. 때문에 진성왕 대에 대구화상은 위홍과 함께 『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하여 신라 전통을 정리하고 부흥하려고 노력하였던 경문왕계 왕실의 권위와 존엄을 국내외에 강조하였다.
886년(헌강왕 12) 북적(北狄)의 침입과 892년(진성왕 6) 견훤의 후백제 건국은 신라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약화시켰다. 경문왕계 왕실의 문한관으로 활동했던 최치원은 신라의 국운이 크게 약화되자, 경문왕계 왕실이 중국의 제후국 가운데 가장 뛰어난 군자국을 만들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자연히 그는 신라의 왕호를 ‘왕’으로 부르면서 화이(華夷) 양국 왕실의 사적을 정리하여 『 제왕연대력』을 찬술하였다.
최치원이 활동하였던 당시에 신라는 발해와 외교적인 다툼을 벌였고, 진성왕은 자신의 즉위가 부적당한 것임을 밝히며 효공왕에게 선위하고 북궁으로 물러났다가 곧 훙거하였다. 신라는 국내외에서 여러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였다. 최치원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였고, 그것을 당시 당나라에 보낸 외교 문서에 반영하였다. 최치원은 884년(헌강왕 10) 가을부터 898년(효공왕 2) 정월까지 외교 문서를 집중적으로 작성하였다.
그는 당 황제에게 보내는 표나 장뿐만 아니라 배찬, 이극용(李克用), 고상(高湘) 등 관료에게 보내는 글에서도 발해를 언급하였다. 발해에 대한 언급은 주로 외교 문서에서 제시되었지만, 최치원 개인의 의견이 구체적으로 투영되었다. 최치원은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로 표현하였다. 당시 당나라 사람들은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라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당 황제의 교화가 두 나라에 미쳐 천하의 풍속을 이루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최치원은 숙위학생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당나라 사람들이 가졌던 발해 인식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의 발해관은 당을 중심한 세계관을 토대로 신라와 발해를 이해하는 모습이었다. 다만, 신라가 발해보다 먼저 황제의 교화를 받들었음을 강조하면서, 당 중심의 세계관 속에 신라의 위상을 강조하는 이중적인 발해관(渤海觀)을 가졌다. 최치원은 효공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발해를 부정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는 발해를 속말갈의 후예로 규정하였고, 이전부터 부르던 ‘북국(北國)’이 아닌 신라의 위계를 받은 ‘적국(狄國)’이라 불렀다. 이를 통해 발해가 신라의 속번으로 애초부터 신라와 비교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또한 신라가 예부터 많은 숙위학생을 파견하여 문덕을 닦았고, 여전히 숙위학생을 꾸준히 파견하고 있기에, 당 황제의 교화를 이룰 유일한 나라라고 자부하였다.
그는 신라와 발해를 함께 이해하는 발해관을 가졌지만, 신라를 중심으로 한 발해관을 제시하였다. 발해 관련 글을 작성할 때 최치원은 진성왕과 효공왕의 왕위 계승에 관련된 외교 문서를 작성하였다. 또한 그는 왕위 계승과 관련한 외교 문서를 가지고 897년 6월 전후에 직접 사행을 맡기도 하였다.
그의 발해관은 진성왕과 효공왕의 왕위 계승 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최치원은 신라와 발해의 경쟁이 격렬해지자, 제후국인 신라와 신라의 속번인 발해와의 관계를 당에 구체적으로 알리고자 하였다. 또한, 진성왕과 효공왕의 왕위 계승이 급박하게 전개되고, 효공왕을 둘러싼 정치 세력의 대립이 점차 격렬해지자, 최치원은 왕실의 안녕을 해치는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숙위학생 파견을 통해 군자국 신라를 이룬 경문왕계 왕실의 노력을 애써 부각하였다.
아울러 견훤과 궁예가 나라를 세워 신라 왕실의 권위와 위엄에 도전하자, 그는 호족 세력들에게 신라 왕실이 당의 공식적 인정을 받은 유일한 나라이며, 발해와 비교될 수 없는 뛰어난 문덕을 이룬 나라임을 부각하고자 하였다. 자연히 최치원의 발해관은 어디까지나 신라 중심적, 왕실 중심적인 것이었다.
당시 국내외의 정세를 읽는 최치원의 현실 인식은 어디까지나 신라 사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최치원의 신라 사회에 대한 이해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것은 그의 골품관(骨品觀)과 호족관(豪族觀)을 통해 살필 수 있다. 최치원은 6두품을 중심한 골품관을 가졌다. 그는 「낭혜비명」에서 신라의 다섯 신분 가운데 6두품인 득난(得難)이 얻기 어려운 귀성(貴姓)임을 세주를 붙여 강조하였다. 그는 6두품을 중심으로 신라 사회를 이해하려고 하였고, 6두품 중심의 골품관은 신라 사회를 개혁하려는 사회 개혁안에 반영되었다. 사회 개혁안은 6두품의 귀족적 특권을 옹호하면서 왕권의 강화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므로, 그의 골품관은 왕권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최치원은 왕실의 존엄을 받들고 국가의 안녕을 강조하는 호족관을 가졌다. 국가 체제를 부정하면서 왕실의 위엄을 견제하는 세력은 마땅히 응징해야 할 무리로 인식되었다. 때문에 지방을 근거로 세력을 규합한 호족은 물론 왕실에 대항하는 진골 귀족도 제거되어야 하였다. 최치원은 왕실과 국가의 존립을 부각하였으므로, 왕실과 국가를 보위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호감을 가졌다. 그는 친왕적 · 친국가적 성향을 가진 수창군 호족 이재(異才)와 교유하였다. 6두품 출신인 이재는 불법의 존숭을 통하여 신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신라 말에 신라 사회에는 말세 의식이 자리하였다. 자연히 신라 국가를 재건하는 방향은 이러한 말세를 벗어나는 구원을 얻으려는 것과 관련되었다. 최치원은 자신이 살던 시기를 말세로 규정하였지만, 말세를 구원할 주체로 경문왕계 왕실을 내세웠다. 특히, 경문왕계 왕실과 관계하였던 낭혜를 계족산에서 미륵을 기다리는 가섭으로 비유하였다. 왕실의 교화를 도왔던 낭혜는 동방의 계림에 미륵이 강림하게 하였다. 최치원은 경문왕과 헌강왕이 현세에 미륵의 강림을 도모한 낭혜를 존숭하였음을 강조하면서, 말법을 구원하는 미륵의 덕화는 왕실의 통치를 보좌하면서 실현될 수 있었다.
이재는 전쟁의 폐해를 없애고 나라의 경사를 기원하려고 높은 산에 성을 쌓으면서 등루를 세웠다. 그는 자신을 ‘호국의영도장(護國義營都將)’이라 부르면서 성의 이름을 특별히 ‘호국’이라 하였다. 최치원은 「 등루기」를 찬술하면서 호국을 위해 불사를 일으킨 이재를 칭송하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불법 숭상을 통해 신라 국가의 재건을 갈망하였던 자신의 의지를 재천명하려는 것이었다.
최치원은 유교적 정치 이념을 구현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 호법을 통해 호국을 강조하며, 신라 고대 국가의 재건과 안녕을 꿈꾸었다. 최치원은 재당 시절에 당나라에 성행하였던 사상적 흐름에 익숙하였다. 그것은 대체로 유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귀국 후에는 화엄 사상을 중심으로 신라 사회에 상존하는 불교에 바탕을 둔 도교 사상, 신라 고유의 전통에서 수용 · 발전한 유불 교섭 사상, 유교 · 불교 · 도교를 아우른 신라 고유의 풍류 사상을 중심으로 삼교를 융합하려 하였다.
그는 원칙을 강조하는 화엄 불교에 익숙하였다. 그리고 도교 사상에서 내심을 닦은 수련적 신선사상을 제시하면서 경문왕계 왕실을 ‘신라 최고의 신선’으로 상정하였다. 또한 유불 교섭 사상의 경향이 유교를 진흥하고 불법을 숭상한 경문왕과 헌강왕 등 경문왕계 왕실에 의해서 진작되었음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국선인 경문왕이 풍류를 통해 삼교를 융합하였다고 부각시켰다.
최치원은 경문왕계 왕실의 권위를 부각하려고 유교 · 불교 · 도교는 물론 풍류 사상을 내세웠다. 삼교 융합 사상과 풍류 사상에 대한 이해는 어디까지나 경문왕계 왕실의 권위와 잉존(仍存)을 고려하여 이루어졌다. 자연히 각 사상에 대한 이해는 깊을 이유가 없었다. 더욱이 당시 성행하였던 선종 불교가 실천적인 면을 강하게 내세우면서 사회 혼란을 수습해 나갔다. 자연히 최치원이 내세운 왕실 중심의 사상 경향은 당시 사회 상황에 썩 어울리지 않은 것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왕실을 옹호하며 전통을 강조하는 그의 사상 경향은 은근히 내세워질 수 있었다.
최치원은 관직 진출을 위해 유교적 정치 이념을 익혔다. 그것은 일찍부터 그의 집안이 경문왕계 왕실과 깊이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는 헌강왕의 왕권 강화가 일부 정치 세력의 견제를 받아 흔들리고 있을 때, 자신의 정치적 진출을 도모하려고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에는 왕실 측근의 근시 직에 있으면서 새로 개편된 문한을 맡고, 연이어 중앙 관서의 차관직을 겸직하면서 정국 전면에 나섰다.
그는 불교 관련 글을 지으면서 호법을 통해 왕도정치를 이루려는 경문왕계 왕실의 위상을 내세웠고, 왕권의 강화를 염원하며 신라 사회를 개혁하려는 사회 개혁안을 올리기도 하였다. 특히, 위홍 사후에 진골 귀족 세력이 진성왕에 대해 반발하고, 지방 곳곳에 자리한 호족 세력이 신라를 부정하자, 경문왕계 왕실을 위호하려고 애썼다. 최치원은 6두품 세력을 중심으로 경문왕계 왕실의 위상을 강조하는 존왕적 정치 이념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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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와 추숭
최치원의 자취는 석각, 사우 또는 서원, 관련 유적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주로 지금의 경상남도, 경상북도, 전라북도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사우 · 사원과 유적은 대체로 적게는 4곳에서 많게는 8곳에 이를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석각은 32곳에 남아 있다. 다만, 전라북도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반면,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에 대부분 분포하고 있다. 석각이나 관련 유적은 귀국 후 그의 활동과 관련되어 전승되고 있다.
최치원의 사후에 그를 모시거나 기리기 위해서 건립한 사우와 서원도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모두 24곳의 사우와 서원 가운데 정읍 무성서원, 경주 서악서원, 군산 염의서원 · 현충단․옥산서원 · 진주 남악서원, 김제 벽성서원, 함양 백연서원 등은 최치원 외에 김유신, 설총, 신잠, 고경, 고용현, 이건명, 조태채, 임병찬, 김종직, 김일손, 옥구 선현 14위 등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다. 이들 사우와 서원은 전형적인 선현봉사(先賢奉祀)의 모습을 띠고 있으므로, 유림들이 건립이나 향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셈이다.
반면에 서산 부성사, 광주 지산재, 울진 아산영당, 서천 도충사, 순창 지산사 등은 최청, 최운한, 최형한, 최익현, 최몽량 등의 후손을 배향하고 있다. 광주 지산재, 대구 문창후영당, 포천 청성사, 하동 운암영당, 청도 학남서원, 울진 아산영당 등은 처음부터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사우로 건립되었다. 안동 용강서원, 군산 문창서원, 대구 문창후영당, 포천 청성사, 하동 운암영당, 창원 두곡서원, 청도 학남서원, 합천 가야서당, 익산 단동사, 영덕 모운사, 대구 대곡영각 등도 최치원만 모시고 있다. 후손을 배향하거나 처음부터, 또는 최치원만 모신 사우․서원의 건립과 향사에는 경주최씨 문중의 영향력이 제법 미쳤다.
최치원의 영정은 현재 19곳에 봉안되어 있다. 그것은 대체로 문인풍의 영정과 신선풍의 영정으로 나뉜다. 문인풍의 영정은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관복과 관모를 갖추어 입은 모습이 대부분이지만, 심의(深衣)에 복건을 쓴 유학자의 모습이나 옷과 요대, 관모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문인의 모습으로도 표현되었다. 신선풍의 영정은 모두 계곡이 있는 깊은 산속에 앉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최치원의 영정은 대체로 문인풍이지만, 하동 운암영당의 영정처럼 원래 산신풍의 영정을 문인풍으로 바꾸어 덧칠한 것도 있고, 광주 지산재의 영정처럼 문인풍의 영정에 신선풍이 혼효되어 있기도 하다. 최치원의 영정은 애초에 신선풍으로 제작되었다가 점차 문인풍으로 변화하였다.
최치원을 모시는 사우와 서원은 고려 말에 정읍 무성서원이 건립된 뒤, 1483년에 재건되었고, 1561년부터 숙종 때까지 경주 서악서원, 함양 백연서원, 안동 용강서원, 군산 염의서원과 문창서원 등이 연이어 건립되었다. 1623년에 서악서원이 사액된 다음, 무성서원과 염의서원이 사액되었다. 성종 때 일어난 최치원에 대한 숭모 분위기는 선조 때 부성사가 위패를 모신 문중 사우로 처음 건립되는 데 영향을 미쳤고, 1737년에 광주 지산재가 건립되면서 영정을 모신 문중 사우와 서원이 점차 전국에 건립되었다.
영정을 모신 문중 사우와 서원은 경기도, 경상남도, 경상북도, 광주, 대구, 전라북도, 충청남도 등 거의 전국에 건립된 반면에, 유림이 관여한 서원은 대체로 경상남도, 경상북도, 전라북도에만 분포한다. 전라북도에만 무성서원, 염의서원, 현충단, 옥산서원, 벽성서원 등 5곳이 자리하고 있다. 전라북도 일대에 자리한 서원은 무성서원을 중심으로 최치원에 대한 유림의 숭모와 관련되었는데, 이것은 문인풍의 영정이 대체로 호남과 호서 일대의 사우와 서원에 주로 봉안된 것과도 관련된다.
다만 경상남도, 경상북도의 경주최씨 문중에서는 경주 서악서원의 사액을 기점으로, 문중 공동체의 발전과 유지를 위해서 영당의 건립을 확대해 나갔다. 이것은 영남 일대의 사우와 서원에서 대체로 신선풍의 영정을 모신 것과도 연관되었다. 특히, 영남 일대는 최치원이 자연을 벗삼아 노닐었던 말년의 삶과 연고되었으므로, 다른 지역보다도 신선풍의 영정이나 석각의 전승이 특별히 강조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접기/펼치기참고문헌
원전
『동문선(東文選)』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당서(新唐書)』
단행본
이황진, 『고운 최치원의 생애와 시문학 세계』(학자원, 2020)
김복순, 『최치원의 역사인식과 신라문화』(경인문화사, 2016)
이문기, 『신라 하대 정치와 사회 연구』(학연문화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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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중생을 교화하는 일. 우리말샘
주2
학업, 예술, 기술 따위를 배워 익힘. 우리말샘
주3
시(詩)와 부(賦)를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4
시사 문제 따위를 논한 글. 또는 그런 문체. 우리말샘
주5
조선 시대에,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 새해를 축하하러 중국으로 가던 사신. 동지와 정월이 가까이 있으므로 동지사(冬至使)가 정조사를 겸하였다. 우리말샘
주6
소원을 빌기 위하여 세운 집. 우리말샘
주7
임금의 자리를 물려줌.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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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규 박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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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학의 종주] 문창후 최치원(崔致遠) -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한국민족문화대백과
상세정보 인명전거정보 자료수정내역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CD5CCE58C6D0B0857X0
자 고운(孤雲)/ 자 해운(海雲)/ 생년 857(문성왕 19)/ 졸년 ?(미상)/ 시대 신라/본관 경주(慶州)
활동분야 학자 >유학자 / 부 최견일(崔肩逸) / 출신지 경주 사량부(沙梁部)
[상세내용]
최치원(崔致遠)에 대하여
857년(문성왕 19)∼미상. 신라 말기의 학자‧문장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
1. 가계 및 유년시절
한국사의 5천년 연원이며 한민족의 5천년 원류인 [고조선-부여,고구려,삼한] 삼한시대 경주왕경 경주최씨 정통인물로서
《삼국사기》,《삼국유사》의 삼한시대 신라6부 대부족장이며 신라개국 원훈인 최소벌도리공의 후예인 한문학의 종주 최치원은
[신라의 대표지성 가문] 출신으로 태대각간 최유덕의 후손이며 숭복사 중창 관료였던 문사/관료 최견일의 아들이며 해인사
대승려였던 별대덕 현준의 동생이며 중국 당 유학 과거급제 신라3천재 / 신라3최 [최치원,최언위.최승우]의 종형이다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始祖) 문창후(文昌侯)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서기 857년(신라 헌안왕 원년) 신라 왕경 경주
사량부(沙梁部)에서 출생하였다. 삼한 6부 대부족장의 후예인 삼한최씨 경주대종은 4~5C 신라의 중앙집권 왕권강화 과정에서
왕권아래 6두품귀족 중앙관료 가문으로 자리하였고 학문과 사상에 정통한 왕권측근,숭불불사,유교진흥,귀족관료,천재엘리트
가풍으로서 해외 중국유학 과거급제후 벼슬이나 왕권측근 관료나 대승려로 활동하였고 중국 당나라 유학생중 가장 많은
중국 과거급제자와 관료,학자를 배출한 삼한, 신라의 명문가문이였다.
최치원은 어려서부터 총민(聰敏)하고 학문(學文)을 좋아했으며 12세의 어린 나이로 배를 타고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아버지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들여 “인백기천 수기안위(人百己天 修己安人)” 하며 학문에 열중하였다. 신라3천재 최언위, 최승우 등과
신라10현 최광유, 중국 유학자 최이정, 최서원, 신라4최 승려 현준,행적,형미,혜소. 고려왕건 개국공신 원보 최은함과 아들 최승로,
등이 대표적인 친,인척들이다. 문창후, 고운, 해운 최치원은 "신라3천재", "신라3최", "신라군자", "신라10현", "신라3문장",
"신라국사" 등등으로도 불리웠다.
부친(父親) 견일(肩逸)은 신라 원성왕의 원찰(願刹)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한 문사, 관료였는데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
12세에 당나라 유학을 떠날 때, 부친은 "10년 안에 학문(學文)의 대가(大家)를 이루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격려하였다.
2. 당나라에서의 활동
서기 874년(경문왕 14년) 유학 7년 만인 나이 18세되던 해 과거에 한번 시험으로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 장원 합격한 후, 2년간
낙양등지로 유랑하면서 부(賦)와 시(詩)를 짓고 다니다가 (작품은 전하지 않고 기록에만 남아 있슴), 그때 지은 작품이 《금체시
(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雜詩賦)》 30수 1권 등이다.
2년뒤 (서기876년) 선주(宣州:지금의 중국 양주) 율수(溧水)의 현위(縣尉)의 벼슬을 받았고, 이 때부터 선생님은 여러 작품을
썼는데 선생은 작품활동 뿐 아니라 관리로도 훌륭하였다. 이 때 지은 글들을 모은 것이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1부(部) 5권이다
. 877년 겨울 표수현위를 사직하고 얼마 후 양양(襄陽) 이위(李蔚)의 문객(門客)이 되었고, 곧 이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
(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서기 879년(헌강왕 5년) 당(唐)나라 반적(反賊)의 우두머리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道統)
고변(高騈)이 이를 토벌할 때 최치원 선생에게 격황소문(檄黃巢文)을 짓게 하니 반적 황소(黃巢)가 이 격문(檄文)을 읽다가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떨어졌다고 할 만큼 뛰어난 명문(名文)이다.
그 뒤 4년간 고변의 군막(軍幕)에서 표(表)‧장(狀)‧서계(書啓)‧격문(檄文) 등을 제작하였다. 최치원 선생은 이러한 치적(治積 :
정치적으로 남긴 공적)으로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오르고 포상으로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고,
이어 당나라 황제로 부터 882년에 자금어대(紫金魚袋 : 금으로 장식되어 허리에 차던 장신)를 하사(下賜) 받았다.
3. 유학및 교류, 위국애민 충효정신
그는 당나라에 벼슬에 있으면서도 기울져가는 고국(신라)을 구하고 부모님을 뵙고 싶은 애뜻한 마음을 시(詩)로 달래며 공무중
여가를 이용해 다섯 권의「중산복궤집(中山覆集)」을 엮어 훗날 고국의 왕에게 올렸다. 그가 고국을 그리며 읖은 시(詩)는 다음과
같다.
창 밖에는 밤이 깊도록 비가 내리고 (窓外三苦雨) 등불 아래 마음은 고국을 달리네 (燈前萬里心)
가을바람에 시를 읊네 (秋風惟苦吟) 세상에 내마음을 아는 이 없네 (世路少知音)
서기 884년(헌강왕10년) 나이 28세 때 그가 귀국할 뜻을 당(唐)나라 희종(僖宗)이 알고
사신(使臣)에 임명하여 조서(詔書 : 임금의 명령을 적은 문서)를 가지고 귀국하게 했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지은 글이 표‧장‧격(檄)‧서(書)‧위곡(委曲)‧거첩(擧牒)‧제문(祭文) 등 1만여수에 달하였는데,
귀국 후 정선하여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을 지어 헌강왕에게 바쳤다. 이 가운데 토황소격(討黃巢檄)〉은 명문으로
중국에서도 그 가치가 높다.
885년 귀국 때까지 고운(顧雲)‧나은(羅隱) 등 당나라 문인들과 사귀어 그의 글재주는 더욱 빛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당서
(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그의 저서명이 수록되었는데,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 권22 잡문(雜文)의 〈당서에
최치원전을 세우지 않은 데 대한 논의[唐書不立崔致遠傳議]〉에서 《당서》 열전(列傳)에 최치원의 전기가 없는 것은 중국인
들이 그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 연유를 설명하고 있다.
4. 귀국후의 활동
서기 885년(헌강왕11) 29세에 신라로 돌아와 최치원 선생은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
지서서감(知瑞書監)등 여러 벼슬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해에 왕명으로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등의 명문을 남겼고,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하여 국왕에게 진헌하였다. 이때 조정(朝廷)의 기강(紀綱)이 어지러움으로 스스로 직(外職)을
자청하여 태산(현: 전북 태인) 및 부성(현: 충남 서산), 합천의 태수가 되어 왕권 덕치주의와 백성 애민주의를 몸소 실천하였다.
서기 894년(진성여왕 8년) 나라는 계속 혼란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허덕이므로 그는 왕에게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 : 국정개혁
수습책)를 상소(上疏)하여 아찬(阿 : 신라 17관등 중 여섯째벼슬)의 벼슬까지 받았으나 국정은 날로 어지러워지고 여러번에 걸쳐
상소한 국책론(國策論)이 시행되지 않아 나라의 위태로운 형세를 개탄(慨嘆)하며 "계림은 누른 잎과 같고(鶴林黃葉) 송도는
푸른 소나무와 같다.(告鳥 嶺靑松)"는 놀라운 글을 상서(上書)하였으니 훗날 신라 사람들은 그의 감식지명(鑑識之明)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진성여왕과 그 뒤를 이어 새로이 즉위한 효공왕을 위하여 각 각 대리 작성한 상표문(上表文)에서 신라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과 당나라에서 직접 황소의 반란등을 체험한 바 있는 최치원은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재난이 당나라에서 연장 파급되어 지는 것을 상기 글에서 박진감 나게 묘사하였다.
5. 시국관
신라말 신라는 붕괴를 앞두고 있었는데, 지방에서 호족세력이 대두하면서 중앙정부는 주(州)‧군(郡)의 세금도 제대로 거두지
못하여 재정이 궁핍한 실정이었다. 889년(진성여왕 3)에는 마침내 주‧군의 세금을 독촉하자 농민들이 봉기하여 전국적인 내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최치원은 895년 내란의 와중에서 사찰을 지키다가 전몰한 승병들을 위하여 만든 해인사(海印寺) 경내의 한 공양탑(供養塔)의
기문(記文)에서 “당토(唐土)에서 벌어진 병(兵)‧흉(凶) 두 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었고, 동쪽 신라로 옮겨와서 더욱
험악해져 굶어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 있었다.”고 처참한 상태를 적었다. 당에서 황소의 난을 체험한
그에게는 고국의 상황이 당나라의 그것이 파급, 연장된 것으로 느껴졌던 모양으로, 당대 제일의 국제통(國際通)다운 시대감
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최치원선생은 통일신라말 신라왕실의 부패와 백성들의 피폐해진 삶에 대한 아쉬움과 회환으로 다시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산림
아래와 강 해변(江海邊)을 거닐면서 정자(亭子)를 짓고 송죽(松竹)을 벗삼아 풍월(風月)에 심취하며 학문과 진리의 길로 즐겨
찾았다고 하는 데, 주로 찾은 곳들은 경주 남산, 강주(剛州):지금의 의성)의 빙산(氷山), 합천(陜川)의 청량사(淸寺),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 합포현(合浦縣 :현 창원)의 별서(別墅)등과 이밖에도 동래의 해운대(海雲臺)를 비롯하여 그의 발차취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당시의 신라의 정치,사회적 모순과 환경, 학문석학의 정치적 이상과 혜안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문제들을 개혁하지 못하고 결국 학문과 구도의 이상을 초월한 선각자로서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6. 사회개혁 활동
귀국 뒤 의욕적으로 당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 하였으나,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원하여 890년에 대산군(大山郡: 전라북도 태인)‧천령군(天嶺郡: 경상남도 함양)‧부성군(富城郡: 충청남도 서산) 등
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893년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 때문에 가지 못하고, 그 뒤 다시 사신으로 당에 다녀왔다. 894년에는 10여년 동안
중앙과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귀족의 부패와 지방세력의 반란 등의 사회모순을 목격하고 개혁안으로 〈시무10조〉를 올렸다.
시무책은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져서 아찬(阿飡)에 올랐으나 그 개혁안은 실현될 수 없었다. 진골귀족들에게 그 개혁안이 받아
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진성여왕이 즉위 11년 만에 정치문란의 책임을 지고 효공왕에게 선양(禪讓)하였다.
7. 중국 당 유학급제 황금어대 천재엘리트의 유랑, 구도의 만행(漫行)과 저술 학문
최치원은 퇴위하는 진성여왕과 이어 즉위한 효공왕을 위하여 각각 대리 작성한 상표문(上表文)에서 신라가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을 묘사하였다. 이에 그는 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을 느껴 관직을 버리고 소요자방(逍遙自放)하다가 은거를 결심하였다.
당시의 사회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저술과 학문에 증진하였고, 즐겨 찾은 곳
, 만행(漫行)은 경주의 남산(南山), 강주(剛州: 지금의 義城)의 빙산(氷山), 합천(陜川)의 청량사(淸凉寺),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
, 합포현(合浦縣: 지금의 昌原)의 별서(別墅) 등이었다. 이 밖에도 동래(東萊)의 해운대(海雲臺)를 비롯하여 그의 발자취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만년에는 형(兄)인 승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
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가 지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의하면 908년
(효공왕 12)말까지 생존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마침내 진성여왕 재위 11년에 인책선양으로 조카인 효공왕에게 양위를 하자 최치원 선생은 드디어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
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가 지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
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의하면 908년(효공왕 12)말까지 생존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만년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대승려이며
형(兄)인 僧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학문과 구도에 몰두하였는데 언제 해인사에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 수가 없다.
8. 고려 건국을 즈음한 태도
최치원전에 의하면 고려 왕건(王建)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그 가운데 “계림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이고, 개경의 곡령은 푸른 솔
(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어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새로 일어날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이 왕건
에게 서신을 보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가 송악(松岳)에서 대두하던 왕건세력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당시 해인사에서는 희랑(希朗)과 관혜(觀惠) 등 두 사람의 화엄종장(華嚴宗匠)이 있어서 서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고 있었다. 즉,
희랑은 왕건을 지지하는 데 비하여, 관혜는 견훤(甄萱)의 지지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 때에 최치원이 희랑과 교분을 가지고 그를
위하여 시 6수를 지어준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로 보아 최치원은 희랑을 통해서도 왕건의 소식을 듣고 있었고, 나아가 고려의 흥기에 기대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역사의 중심
무대가 경주에서 송악으로 옮겨지고 또 그 주인공도 경주의 진골귀족이 몰락하는 대신 지방 호족세력이 새로 대두하고 있던 현실
을 직접 눈으로 내다보았다. 어느 편에도 적극 가담하여 사회 전환과정에서 주동적 역할을 못하고 신라인으로 남아 은거로 생을
마쳤으나, 현실에 대한 고민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문인(門人)들이 대거 고려정권에 참가하여
새 지배층을 형성함으로써 새로운 정치‧사회질서의 수립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9. 학문적 입장
한편, 최치원이 살던 시대는 사회적 전환기일 뿐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정신계의 변화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는 정신계
의 변화면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자신을 '부유(腐儒)'‧'유문말학(儒門末學)' 등으로 표현하였던 것으로 보아
학문적 입장은 유학(儒學)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유학을 단순히 불교의 부수적인 것으로 이해하거나, 왕자(王者)의 권위수식에만
이용하던 단계를 지나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내세우면서, 골품제도라는 신라사회의 족적 편제방법(族的編制方法)을 부정하는 방향
으로까지 발전시켰던 것이다. 유교에 있어서의 선구적 업적은 뒷날 최승로(崔承老)로 이어져 고려의 정치이념으로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10. 역사인식
그는 유교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해 역사를 정리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이다. 이 책에서 거서간
(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尼師今)‧마립간(麻立干) 등 신라왕의 고유 명칭은 야비하여 칭할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면서
왕(王)으로 바꾸었는데, 그것은 유교사관에 입각해서 신라를 이해하려는 것이었다.
최치원의 유교사관은 유교에 대한 이해가 보다 깊어지는 김부식(金富軾)의 사관에 비해 모방적인 성격이 강하였고《제왕연대력》
은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가야를 포함하여 삼국>의 연표와 통일신라, 그리고 중국 연표가 들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나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 등에 나타난 발해인에 대한 이방인 표현
으로 보아 발해사(渤海史)는 제외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상태사시중장〉에서는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로 발전한 것으로 인식하고, 또한 발해는 고구려의 후예들이 건국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로 보아 그가 인식한
한국고대사체계는 삼한―삼국―통일신라와 발해로 이어지는 것이었고, 나아가 그 자신의 시대에 와서 통일신라 자체도 이미
붕괴되고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11. 한문학‧불교업적
유교에 있어서의 선구적인 역할과 아울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문학사(漢文學史)의 업적이다. 그의 한문학은 중국문학을
차용해서 형성되었는데, 신라의 전통에서 성립된 향가문학(鄕歌文學)과 대립되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였다. 그리고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다. 《동문선》과 《계원필경》에 상당수의 시문이 수록되어
전하고 있는데 평이근아(平易近雅)하여 당시 만당시풍(晩唐詩風)과 구별되었다.
최치원은 유학자로 자처하면서도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승려들과 교유하고, 불교관계 글들을 많이 남겼다. 불교 가운데서도
종래의 학문불교‧체제불교인 화엄종의 한계와 모순에 대해서 비판하는 성격을 가진 선종(禪宗)의 대두를 주목하고 있었다.
지증(智證)‧낭혜(朗慧)‧진감(眞鑑) 등 선승들의 탑비문(塔碑文)을 찬술하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 특히 〈지증대사비문
(智證大師碑文)〉에서는 신라선종사(新羅禪宗史)를 간명하게 기술한 것으로 유명한데, 신라의 불교사를 세 시기로 구분하여
이해한 것은 말대사관(末代史觀)에 입각한 것으로서 주목된다.
불교에서 주목한 것은 선종만이 아니었다.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종래의 지배적 불교인 화엄종이었다. 화엄종 관계의 글을
많이 남기고 있어서 오늘날 확인되는 것만도 20여종에 이른다. 특히 화엄종 사찰인 해인사에 은거한 뒤부터는 해인사 관계의 글을
많이 남겼다. 화엄종 관계의 글 가운데는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석순응전(釋順應傳)》
‧《석이정전(釋利貞傳)》 등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이로 보아 신라화엄종사(新羅華嚴宗史)의 주류를 의상(義湘)―신림(神琳)―
순응(順應)―이정(利貞)―희랑으로 이어지는 계통으로 이해한 듯하다. 화엄학 이외에도 유식학자(唯識學者)인 원측(圓測)과 태현
(太賢) 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어, 화엄학과 함께 신라불교의 양대 조류를 이루었던 유식학(唯識學)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주목된다.
12. 도교‧노장‧풍수지리연구
유교와 불교 외에도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도교(道敎)와 노장사상(老莊思想)‧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었다. 당에 있을 때 도교
신자였던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도교 관련 글을 남긴 것을 보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계원필경》
권15에 수록된 〈재사(齋詞)〉에서 도교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 그리고 귀국 후 정치개혁을 주장하다가 진골귀족의 배척을 받아
관직을 떠난 뒤에는 현실적인 불운을 노장적(老莊的) 분위기 속에서 자족하려고 하는 면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현실
도피적인 행동이 뒷날 도교의 인물로까지 잘못 전하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찬술한 〈대숭복사비문〉에 의하면 도참신앙(圖讖信仰)과 결부되어 국토재계획안적인 성격을 가지고 사회적 전환의
추진력이 되고 있었던 풍수지리설에도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사회 인식이나 역사적인 위치가 도선(道詵)과 비슷한 점은
주목할만하다. 이처럼 유학자로 자처하면서도 불교나 노장사상, 그리고 풍수지리설까지도 모순 없이 복합하여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유교와 불교의 조화에 노력한 면이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등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13. 평가 및 사후 존숭
이러한 사상적 복합화가 중앙 귀족들의 독점 지배체제와 그들의 고대적인 사유방식에 개혁적인 최치원에 의하여 추진되었다는
사실은 신라 고대문화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사상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하였다. 일본의 한문학의 대표지성 가벌인
대강유시가 960년경에 편찬한 시문집 [천재가구]에도 최치원의 시가 게제되어 있는데 그 당시 세계 초강국 동아시아 중국 한반도,
일본는 물론 일본의 한문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잘 알수 있다. 그러나 신라말의 왕권쟁탈과 민생난국, 혼란과 무질서 시대인
말년에 해인사에서 학문과 진리의 구도 생활을 한 것은 국가와 사회가 혼란한 전환기로 인해 중세적 지성의 선구자로 위기에 처한
시대적 불가피성과 한계성을 나타내며 학문과 구도에 매진한 한국의 대표지성,대학자,사상가의 모범적인 사표로서 생애를 마쳤다.
1020년(현종 11) 현종에 의하여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다음해에 문창후(文昌候)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永平)의 고운영당
(孤雲影堂), 대구 해안현(解顔縣)의 계림사(桂林祠) 등에 제향되었다. 또한 해동 최초로 중국 공자와 같이 문묘에 모셔 추앙받고
있으며, 설총과 함께 국가문묘, 국자감, 조선 성균관과 234여개 향교에 “동방18賢”으로 모셔져 있다. 그리고 중국 양주의
"최치원기념관"에서 신라, 唐시대부터 한.중선린외교의 효시로 추모되고 있다.
14. 저술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계원필경》 20권, 《금체시》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100수 1권, 《잡시부》 30수 1권,
《중산복궤집》 1부 5권, 《사륙집(四六集)》 1권, 문집 30권 등이 있었고, 사서(史書)로는 《제왕연대력》이 있었으며, 불교 관계
저술로는 《부석존자전》 1권, 《법장화상전》 1권과 《석이정전》‧《석순응전》‧《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이 있었으나,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법장화상전》‧《사상비명》뿐이고, 그 외는 《동문선》에 시문 약간, 사기(寺記) 등에 기(記)‧
원문(願文)‧찬(讚) 등 일부만이 전한다. 글씨도 잘 썼는데, 쌍계사의 〈진감선사비문〉이 남아 있다.
그리고 많은 설화가 전해오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조선시대 김집(金集)의 《신독재전집(愼獨齋全集)》에 실린
〈최문헌전(崔文獻傳)〉이 있다.
[주1] 출신지: [삼국사기] 정사 기록 - (사량부/최씨 & 본피부/정씨)
《양산재 신라대제; 사량부/최씨 와 본피부/정씨들의 공인,고증된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정사- 사량부 /《삼국유사》야사- 본피부
[참고문헌]
三國史記 / 三國遺事 / 新增東國輿地勝覽 / 新編諸宗敎藏總錄 / 華嚴寺事蹟 / 佛國寺古今歷代記
東文選 / 崔文昌候全集(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72)
국역 孤雲先生文集 上‧下(孤雲先生文集編纂會, 1972‧1973)
韓國佛敎撰述文獻總錄(東國大學校佛敎文化硏究所, 1976)
崔文昌候全集 解題(李基白, 崔文昌候全集, 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72)
崔孤雲의 文化的 地位(崔益翰, 春秋 2―6, 1941) / 孤雲 崔致遠의 思想硏究(金福順, 史叢 24, 1980)
孤雲 崔致遠의 社會改革思想(崔根泳, 韓國思想 18, 1981) / 崔致遠硏究(崔敬淑, 釜山史學 5, 1981)
崔致遠의 歷史敍述(趙仁成, 歷史學報 94‧95合輯, 1982)
新羅統一期 및 高麗初期의 儒敎的 政治理念(李基白, 大東文化硏究 6‧7合輯, 1970)
新羅骨品體制下의 儒敎的 政治理念(李基白, 新羅時代의 國家佛敎와 儒敎, 한국연구원, 1978)
韓國古代政治의 性格과 中世政治思想의 成立過程(金哲埈, 東方學志 10, 1969;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南北國時代와 崔致遠(李佑成, 創作과 批評 38, 1975;韓國의 歷史像, 창작과 비평사, 1982)
新羅下代禪宗九山派의 成立(崔柄憲, 韓國史硏究 7, 1972)
新羅下代 賓貢及第者의 出現과 羅唐文人의 交驩(李基東, 全海宗博士華甲記念史學論叢, 1979;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한국연구원, 1980)
羅末의 戰亂과 緇軍(李弘稙, 史叢 12‧13合輯, 1968;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1973)
新羅六頭品硏究(李基白, 省谷論叢 2, 1971;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桂苑筆耕集(徐首生, 韓國의 名著, 1969) / 東國文宗崔孤雲文學(徐首生, 語文學 1‧2)
최고운의 사상과 문학(양광석, 한국문학론, 일월서각, 1981)
[이미지] 고운 영정 - [집필자] 최병헌(崔柄憲)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
★ 한국최씨 경주대종 본관 ★
★ 한국사 5천년 연원, 한민족 5천년 원류 - 한국사 최초, 최고, 최대 - 명문거족 명가명손
★ 중국정통사 4대사서 - 한국정통사 삼국사기,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
왕권 국가 정통 역사 공인 - 유일무이 - 정통 명문거족 명가명손
★ BC4세기 삼한시대 / 신라 6부 대부족장 /신라개국원훈 - 문열왕 소벌도리
★ 한문학의 종주, 삼한 신라 3천재 귀족, 한국최초의 성인 / 위인, 성균관 문묘 배향 - 문창후 최치원
★ 신라대표지성 명가 /신라3천재 - 최치원,최언위,최승우 / 신라개국6대부족장
/나정 혁거세 발견 양육, 창림사 /신라대표지성 귀족가문, 신라 10현 가문
★ 고려왕권 개국세력 문벌귀족 권문세족 명예전통 - 정치,경제,사상,사회,문화 왕권 문하시중,국사
★ 고려 5대 문벌귀족 권문세족 - 광종;태자태사 문하시중 최 량 - 고려전기 5왕
고려3대 문하시중 / 최승로,최숙,최제안 (최승로-아들-손자 100년)
/ 현종; 검교태부 수문하시랑 최 항
/ 충숙왕; 성균관대사성 최 해 / 명종; 정당문학 최여해
[한국최씨 경주대종 본관] 한국사 성씨 본관은 문헌에 대략 300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거의가 지명 뿐, 그 중 시조가 분명히 밝혀져 있는 것은 불과 40여 본이다. 주요한 본관은 경주(慶州) · 계림(鷄林) ·전주(全州) ·동주(東州: 철원)·해주(海州) ·삭녕(朔寧) ·강릉(江陵) ·화순(和順) ·강화(江華) ·영천(永川) ·탐진(耽津:康津) ·수원(水原) ·영흥(永興) · 수성(隋城) ·우봉(牛峰:金川) ·충주(忠州) 등이다. 최씨는 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씨족의 하나로, 역사에서 숱한 명신 ·학자 ·문인을 배출한 신라시대 이래의 전통적 명문거족이다. 최씨의 원조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斯盧:서라벌, BC 50?) 6촌(村) 중의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沙梁郡)의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6부(部) 촌장들은 모두 천강인(天降人)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6촌에 6성(李 ·崔 ·孫 ·鄭 ·裵 ·薛)을 각각 사성(賜姓)한 것이 32년(신라 유리왕 9)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최씨의 실질적인 시조는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24세손)이다.오늘날 거의 모든 최씨의 관향(貫鄕) 분파가 최치원을 1세로 하는 경주최씨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2200년 동조동근(同祖同根)의 한국 최씨의 전모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그 선 대 세계(世系) 및 분파 연원을 체계화한 《경주최씨상계세보(慶州崔氏上系世譜)》를 통해 그 연원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세보에 따르면 최치원은 소벌도리의 23세손이 되는데, 최치원의 전대(前代)에서 분파한 관향으로 개성 ·삭녕 ·동주 최씨와 전주최씨의 일파가 있고, 최치원의 장손(長孫)인 승로(承老)의 후손에서 함양(咸陽) ·청주(淸州) ·영흥 ·충주 ·용강 ·수원 ·부안(扶安) ·강릉 ·강화 ·화순 ·통천(通川)양주(楊州) ·원주(原州)· 최씨 등이 분파되었으며,이 밖에 해주 ·진주(晉州) · 탐진 최씨가 최치원의 지손(支孫)에서 분파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세보에 대해서는 《아동최씨고(我東崔氏考)》등에서 가설의 이론이 존재하기도 하나, 모든 최씨가 BC4C 삼한시대 소벌도리와 최치원을 잇는 한국인 고유 최씨의 삼한 / 신라인의 후예가 된다는 데에는 이론이 없다. 신라의 신라대표지성 / 신라 3천재 - 치원(致遠) · 승우(承祐) ·언위(彦) 등 3인이 똑같이 당(唐)나라에 유학,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와 문명(文名)을 날려 ‘일대삼최(一代三崔)’라 불렸거니와 특히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정통 삼한, 신라, 통일신라, 고려의 5대 권문세족 문벌귀족 명문으로 최고의 번영을 누렸는데, 그 중에서도 고려 건국초기부터 개경지역과 무신시대, 최씨가 특히 세력을 떨쳤다. 삼한 대부족장, 신라개국, 신라대표지성, 신라3천재 가문으로 고려시대에 명망을 높이고 권세를 누린 최씨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상신 7명, 대제학(大提學) 4명,문과급제자 437명을 배출하였다. 2200년 한국사 5천년 연원, 한민족 5천년 원류 - 한국사 최초, 최고, 최대 - 명문거족 명가명손이며 중국정통사 4대사서 - 한국정통사 삼국사기,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왕권 국가 정통 역사 공인 - 유일무이 - 정통 명문거족 명가명손인 한국최씨 경주대종은 오늘날 127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960년도 국세조사에 보면 총 20만 4154가구에 인구 119만 2662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4위였으며,1985년도 조사에서도 가구수 45만 4696가구, 191만 3322명으로 전국 274성 중 역시 제4위였다.
[경주최씨(慶州崔氏)] 우리나라 최씨(崔氏) 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굵은 경주최씨는 사로(斯盧) 의 6촌(村) 중 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村長:사량부)소벌도리(蘇伐都利)를 원조(遠祖)로 받들고, 그의 24세손으로 전하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시조(始祖)로 하여 누대로 살아온 경주(慶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명문거족(名門巨足)의 문호(門戶)를 열었다.857년(신라 헌안왕1) 신라의 사량부(沙粱部)에서 출생했던 고운은 어려서부터 총명, 민첩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10년안에 학문의 대가(大家)를 이루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3세 때 혼자 당(唐)나라에 건너가 18세에 빈공과(賓貢科)에 금방(金榜:장원)하여 선주율수현위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치적(治績)을 쌓아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오르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승사(承賜)받았다.879년(헌강왕5) 당나라 반적인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관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참전했던 고운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문명을 떨쳤다.[...다만 천하의 사람이 다 죽이기를 생각할 뿐 아니라 또한 땅 속의 귀신들도 이미 죽이기를 의논했노라...] 반적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가 혼비백산하여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으리만큼 가슴을 꿰뚫는 세찬 힘을 지닌 글로서 천하를 감탄시킨 명문으로 알려졌다. 특히 고운은 관계에 나가서도 학문에 힘을 기울여 [중산복궤집]과 [육조사적(六朝事蹟)]에 오른 [쌍녀분기담(雙女墳奇談)], [계원필경(桂苑筆耕)] 등의 명저(名著)를 저술했으며, 884년(헌강왕10) 28세가 되던 해 10월 당나라 희종(僖宗)의조서(詔書)를 받들고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국정이 문란하고 기강이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외직(外職)을 자청하고 태산(太山:태인), 함양(咸陽), 부성(富城:서산)등지의 태수로 나갔다894년(진성여왕8) [시무10여조(時務十餘條)]를 상소하여 국정의 어지러움과 민생의 도탄을 구하려 했으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세상에 뜻을 버리고 퇴관하여 산천을 소요하며 소풍농월(嘯風弄月)과 휘호농필(揮毫弄筆)로 울적한 마음을 달래다가 만년에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961년(고려 광종2)에 선화(仙化) 했다고 한다. 특히 고운(孤雲)은 당시 동이(東夷)라고 멸시해 오던 동방인(신라인)으로서 당나라 명사(名士)들과 학문으로 겨루어 조금도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고운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와 친교가 두터웠던 고운(顧雲)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지은 시(詩)가 고운이 당나라에서 명성을 펼쳤던 준다.
[내가 들으니 바다 위에 세 마리 금자라가 있어 그들은 머리에 높은 산을 이고 있고,산 위에는 황금의 궁궐, 산 아래에는 한없는 바다로되 그 중 푸른 계림이 있어 거기 특이한 인물이 태어나니 그는 3세에 바다를 건너 문장으로 중원을 감동케한 이로서,18세에 문단에서 마음껏 겨루며 단 한 번의 화살로 금문책(金門策:과거)을 맞추었노라] 이 한편의 시를 통해서 중원을 주름잡던 고운의 자취를 엿볼 수 있으며, 그가 남긴 심오한 문장은 깊은 함축 속에 많은 뜻을 간직하여 우리 한문학의 조종(朝宗)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조선전기의 문장가로 알려졌던 서거정(徐居正)은 그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이르기를[계원필경을 봄에, 아직도 알지 못할 곳이 있으니 당시의 기풍이 이처럼 놀라웠음은 아직도 이 땅의 문장이 일찍이 예와 같이 않음이로다]라고 했으며, 성종(成宗) 때의 대문호였던 성현(成俔)은 그의 [용재총화(傭齋叢話)]에 [우리나라 문장은 최치원으로 부터 비롯된다.(我國文章始發於崔致遠)]고 쓰고 있다. 또 효종(孝宗)과 숙종대(肅宗代)의 학자 홍만종(洪萬宗)은 그의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최치원의 시는 격률이 엄격하고...표현에 뜻이 깊은 함축이 있어 직접적 표현 대신 끊이지 않는 여운이 있다]라고 평했다.
일찍이 신라의 국정을 개탄했던 고운은 [계림은 누른 잎과 같고, 송도는 푸른 소나무와 같다.]고 말하여, 고려가 신흥국가로 융성하리라는 예시(豫示)를 왕건(王建)에게 보냈으며, 그의 자손들과 문하생들이 고려 건국 초에 출사하여 벼슬을 지냈으므로 후일 현종(顯宗)은 [최치원이 고려창업에 은밀한 공이 있다]하며 내사령(內史令)에 증직하고 문창후(文昌侯) 로 증시(贈諡)하였으며, 조선 때 와선 인조(仁祖) 명종(明宗) 선조(宣祖) 임금이[이 문창후 최치원은 우리 동방의 이학시조(理學始祖)이니 그의 자손은 귀천이나 적서를 막론하고 비록 먼시골에 사는 사람까지라도 군역(軍役)에 동원하지 말라]고 전교(傳敎) 하였다. 이렇게 신라 말과 고려 초기에 명망을 떨쳤던 경주최씨는 문창후 최치원의 후대에서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와 판서공파(判書公派)를 비롯하여 광정공파(匡靖公派)와 계림군파, 충렬공파(忠烈公派), 정랑공파(正郞公派), 사성공파(司成公派), 문밀공파(文密公派),문정공파(文正公派), 화숙공파(和淑公派) 등 크게 26파로 분파(分派)되어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명문거족의 지위를 굳혀왔다.
[월성최씨(月城崔氏)]는 현재의 경주(慶州)시를 비롯하여 월성군(月城郡)일대에 터를 잡아 세거해왔다. 시조(始祖)는 최치원(崔致遠), 자(字)는 고운(孤雲), 시호(諡號)는 문창후(文昌侯)이며 경주최씨의 시조(始祖)이시다. 그러나 월성최씨(月城崔氏)는 조선 선조때의 인물로 무과(武科)에 올라 공조참판(工曹參判)겸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이르고 임진왜란때 창의(倡義)하여 훈공(勳功)을 세웠으며 인조 병자호란 때 순절한 최진립(崔震立)을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경주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한 후 월성(月城)이라 관향(貫鄕)을 정하여 계대(系代)를 이어오고 있다. 주요 상계파(主要上系派)를 보면 부사공파(府使公派), 배반파(排盤派), 견곡파(見谷派), 이조파(伊助派)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지파(支派)중 가암파(佳岩派)를 중심으로 보면 일부 자손들이 4세(世) 최대기(崔大基)·최원기(崔源基)의 대(代)를 전후하여 영양(英陽) 울산(蔚山)·영덕(盈德)의 영해(寧海)·의령(宜寧)·함안(咸安) 등 지로 옮겨 살았고,6세 최종만(崔宗萬)·최종선(崔宗善)의 대(代) 이후에 영일(迎日)·영천(永川)·광양(光陽) 등지에도 터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8세(世) 최제종(崔濟宗)이 안동(安東)의 서후면(西後面)으로 옮겨가 세거하였고, 일부 11세(世) 최현태(崔鉉泰) 이래로 영주(榮州)에 그리고 14세(世) 최병효(崔炳孝) 이래로 진천(鎭川)에 각각 정착하여 살아던 것으로 보인다.1930년경에 이르러 월성최씨(月城崔氏)의 자손들은 경북 영일군 동해면(慶北 迎日郡 東海面)과 당시의 경주군 내남면(慶州郡 內南面)·강서면(江西面)·현곡면(見谷面)·천북면(川北面)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1세(世)인 최진립(崔鎭立)의 자(字)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이고, 사후(死後)에는 정무(貞武)의 시호(諡號)를 받았다.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2년 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정유재란 때 결사대 수백명을 이끌고 서생포(西生浦)의 왜적을 격멸했다.이어 권율장군과 함께 도산(島山)에서 대승하여 선무공신(宣武功臣)이 되었다. 그뒤에 경기수사 겸 3도통제사(京畿水使兼3道統制使) 전라수사(全羅水使)를 걸쳐 공주영장(公州營將)으로 있을 때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용인 험천(險川)에서 적군과 싸우다가 전사 하였다. 후에 병조판서(兵曹判書)가 추증되고 고향에 정문이 세워졌다. 5세(世) 최경로(崔慶老)는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영조 4년 소론계(少論系)에서 일으킨 이인좌의 난을 토벌하는데,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 되었다. 그 이후 3읍(邑)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모두 치적(治績)이 있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3대(代)가추증되었다. [태인 최씨(泰仁崔氏)]의 시조(始祖)는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으로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고, 태산(太山)으로 낙향(落鄕)하여 동인지교(東人之交)를 편수한 최 해(崔 瀣)의 6세손 최용전(崔勇田)이다. 용전은 조선(朝鮮)연산군(燕山君) 때 예빈사판사(禮賓寺判事)에 올라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환향(還鄕)한 후 1530년(중종25) 안릉(安陵)으로 이주(移住),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용전(勇田)의 고향인 태인(泰仁)을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한편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계대(系代)를 알 수 없는 최인길(崔仁吉)을 시조(始祖)로 기록하고 있으나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정확히 상고(詳考)할 수 없다.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은 효종(孝宗) 때 참봉(參奉)을 역임하였고, 태인(泰仁)의 용계서원(龍溪書院)에 제향된 서림(瑞琳)이 유명하고, 용전(勇田)의 손자 효근(孝根)은 호군(護軍)을 지내 당대에 뛰어났다. 제학(提學)을 지낸 흡(洽)은 효근의 증손으로 참봉(參奉)을 역임한 아들 덕연(德淵)과 함께 가문을 이어온 인물이다. 그 외 제방(濟邦:참봉), 제국(濟國:참봉), 제읍(濟邑), 제벽(濟酸) 4형제는 덕연의 아들로 각 일파(一派)로 분파(分派)되었고, 후손에서 정규(正珪)가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정민(正敏)은 중추부사(中樞府使)를 역임하였다. 부호군(副護軍)에 오른 상우(尙 ), 참봉(參奉)을 역임한 영희(永熙), 현감(縣監)을 지낸 희도(熙道) 등이 가문을 유명하게 했다.
[수원 최씨(水原崔氏)]는 최씨 득성시조(得姓始祖)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경주 최씨(慶州崔氏)와 동원(同源)이다. 수원 최씨는 동성동본(同姓同本)이면서 시조(始祖)를 달리하는 두 계통으로 나뉘어 지는데, 한 통은 고려 때 산원동정(散員同正)을 역임한 최 정(崔 靖)을 시조로 하고 또 한 계통은 고려 예종 때 수주(水州)의 호장(戶長최상저(崔尙 )를 시조로 한다. 가문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 고려 때 문신(文臣)이며 효자(孝子)인 최누백이 유명하다. 그는 수원(水原)에서 호장(戶長)을 지낸 상저(尙 )의 아들로, 그의 나이 15세 때 아버지가 사냥을 하다가 호랑이에게 해를 당하였다. 누백이 호랑이를 잡으려는 것을 어머니가 말리니 "아버지의 원수를 어찌 갚지 않겠습니까" 하며 도끼를 들고 추적하자, 호랑이는 이미 그의 아버지를 먹고 배가 불러 누워 있었다. 누백이 곧장 달려가 "너가 우리 아버지를 먹었으니 나는 마땅히 너를 먹으리라" 하고 호랑이를 꾸짖어 말하니 호랑이가 꼬리를 흔들며 엎드렸다. 그러자 얼른 도끼로 찍어 죽이고 그 배를 갈라 아버지의 뼈와 살을 내고 호랑이의 고기는 독에 담아서 냇물 가운데 묻고 아버지의 해육(骸肉)을 그릇에 담아 홍법산(弘法山) 서쪽에 안장하고 3년 동안 여막(廬幕)에살았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조선 세종때 왕명으로 엮은 수신서)]에 그의 이러한 행적이 수록되어 있다 그 후 문과에 급제하여 의종(毅宗) 때 기거사인(起居舍人)에 올라 1153년(의종 7) 금(金)나라에 가서 용흥절(龍興節)을 축하하고 돌아와 1155년(의종 9) 국정(國政)에 관한 왕의 자문에 응했으며 뒤에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충렬공(忠烈公) 자성(滋盛)은 성품이 강직하고 민첩하여 여러 벼슬을 훌륭히 역임하였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거쳐 1121년(예종 16) 동북면병마가 되고 1127년 (인종 5)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이듬해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다. 1129년(인종 7)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133년(인종 11)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하였다.
고려 현종(顯宗) 때 현신(賢臣) 사위(士威)는 1010년(현종 1) 통군사(統軍使)에 보직되어 강조(康兆)등과 함께 30만 군사를 거느리고 통주(通州:평북 선주)에 나가 거란의 침입을 방어하였으며 그 후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올랐고 1052년(문종 6) 왕이"검교태사내사령(檢校太師內舍令) 최사위가 선왕조(先王朝)에 청절(淸節)과 직도(直道)로써 많은 도움이 있었고 국난(國難)을구제하고 종사(宗社)를 편안히 보존하여 나라의 중흥을 일으켜 국가에 이익을 끼친 바 많았다"하여 묘정(廟庭)에 배향케 하였다. 그 외 고려 때 신호위보승별장(神虎衛保勝別將)을 역임 중조선이 개국되자 금부도사(禁府都事)에 임명되었으나 취임을 거부한 원(原), 조선 중종(中宗) 때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고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진 유정(有井)이 있으며, 명원(明遠)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
[전주최씨] 전주최씨는 계보가 복잡하다. 최균(崔均)을 시조로 하는 파와 최군옥(崔群玉)을 시조로 는 일파, 또 최아(崔阿)를 시조로 하는 파가 있는데 세보에 따르면 균은 치원의 지손이요, 군옥은 동주최씨의 시조되어 준 옹(俊邕)의 후손으로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은 인물은 최균파(派)에서 나왔다. 위의 3파를 합하여 전주최씨는 조선시대에 상신 3명, 대제학 2명, 청백리 3명, 문과급제자 109명을 배출하여 최씨 중에서 가장 빼어났다. 중흥(中興)의 조(祖)로는 유경(有慶)을 들 수 있다. 상신 ·대제학 ·청백리가 모두 그의 자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대표적 인물은 명길(鳴吉)인데, 그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1등공신으로 대제학 ·영의정을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 석정(錫鼎:숙종 때 영의정) ·석항(錫恒:경종 때 좌의정) 형제도 정승을 지냈다. 특히 석정은 당시 소론(少論)의 영수로서 당론의소용돌이 속에서 6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한편 군옥의 후손으로는 고려 말기의 절신(節臣)으로 《두문동(杜門洞) 72현록(賢錄)》에도 들어 있는 양(瀁)이 있다. 그 밖의 인물로는 고려 말기의 좌참찬 부(府), 태종 때의 예문관 직제학 덕지(德之), 선조 때의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한 철견(鐵堅) 등이 있고,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크게 활약한 기필(琦弼) ·균(均) ·경행(敬行) 등도 있다. 전주최씨는 경기 화성(華城), 전북 남원(南原)·김제(金堤) ·부안, 전남 영암(靈巖) 등에 동족부락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 최씨(崔氏) 가운데서도 역사상 가장 많은 인재(人才)를 배출해낸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동본(同本)이면서도 계보(系譜)를 달리하는 4계통(系統)이 있다. [전주최씨연원보(全州崔氏淵源譜)]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정종(靖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숙종(肅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와 신호위 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지내고 완산부개국백(完山府開國伯)에봉해진 최순작(崔純爵)을 시조(始祖)로 하는 계통과, 역시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지내고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해진 최군옥(崔群玉)을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으며, 또 다른 계통은 고려 인종(仁宗)때 문과에 급제한 후 1174년(명종4) 동북로 도지휘사(東北路道指揮使)로 조위총(趙位寵)의 난에 순절하여 완산군(完山君)에 추봉된 최 균(崔 均)을 시조로 하는 일파와, 완산부개국백 문열공(文烈公) 최순작의 7세손으로 충숙왕(忠肅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진 최 아(崔 阿)를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다.
균(均)의 현손(玄孫)으로 대제학(大提學)과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역임했던 비일(毗一)의 아들 성지(誠之)는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元)나라에 다녀와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광양군(光陽君)에 봉해졌으며, 충선왕을 보필하여 조정의 기강확립과 조세(租稅)의 공평, 인재등용과 농잠업의 장려, 동성결혼금지와 귀족횡포 엄단, 각염법( 法) 실시와 토지개혁 등 혁신정치에 총책을 담당하였다. 특히 시(詩)와 글씨에 뛰어났던 그는 원(元)나라에서 배워온 역수학(易數學)으로 고려학계에 크나큰 공헌을 하였다.인품(人品)과 덕망(德望)이 탁월하여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혔던 문도(文度)는 전법판서(典法判書)와 첨의참리(僉議參理)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사검(思儉)을 비롯한 5명의 손자들이 대(代)를 이어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자주 군사(滋州郡事) 용(溶)의 아들 부(府)는 조선이 개국된 후 예문관과 춘추관의 수찬관(修撰官)을 역임했고 광주 목사(光州牧使)와 동부대언(同副代言)을 거쳐 세종(世宗) 때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천추사(千秋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대사헌(大司憲)과 공조(工曹) 및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다.
[동주최씨] 철원(鐵原)최씨라고도 하는데, 동주(東州)는 철원의 고려 때 지명이다.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 최준옹(崔俊邕)이다. 고려 말기의 최영(崔瑩)을 고비로 조선시대에는 두드러진 인물이 없다. 준옹의 현손 석(奭)의 아들로, 고려 예종 때 집현전 대학사를 지낸 유청(惟淸) 때부터 가문이 번창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아들 당()과 선(詵)이 유명하다. 당은 신종 때 문하평장사를 지냈고, 선은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다. 고려 말기의 명장 영은 유청의 현손이며 동원부원군 원직(元直)의 아들이다. 그는 강직청렴한 명장이요 명재상으로서 왜구를 무찔러전공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10여 차례에 걸친 왜구 소탕과 함께 수차례의 내란에 공을 세웠으나 위화도에서 회군한이성계(李成桂)의 군사와 맞섰다가 결국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현대의인물로는 국학(國學)의 대가 남선(南善)이 유명하다.
[삭녕최씨] 고려 명종 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최유가(崔兪嘉)를 시조로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영의정 2명, 대제학 1명,문과 급제자 32명을 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항(恒) ·흥원(興源) ·한기(漢綺) 등이 있다. 항은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영의정을 두 차례나 역임하였다. 흥원은 항의 증손으로 선조 때 유성룡(柳成龍)의 뒤를 이어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조선 실학의 거두인 한기는 항의 14대손으로, 영 ·정조 때에 융성했던 실학이 학문으로서 이론적 ·사상적으로 미숙하던 것을 철저한 경험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무실사상(務實思想)을 전개하여 실학의 체계를 확립한 학자이다. 사가(史家)들이 그를 가리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가교자(架橋者)’라 평할 만큼 그는 한국 사상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삭녕최씨는 주로 경남지방에 많이 살고 있는데, 특히 사천군 사천면(泗川面) ·정동면(正東面) ·사남면(泗南面) 일대에 특색 있는 동족부락을 이루고 있다.삭녕 최씨(朔寧崔氏)는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최천로(崔天老)를 시조(始祖)로 하고,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낭장(郎將)을 지낸 최선보(崔善甫)와 경전 부사(慶殿副使)를 역임했던 최연(崔 )을 각각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을 이어왔다.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낭장(郎將) 선보(善甫)의 아들 충(忠)이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충의 아들 윤문(潤文)은 우찬성(右贊成)을 역임하였으며, 윤문의 셋째 아들 사유(士柔)가 태종(太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춘추관 기사관(春秋?記事官)을 역임한 후 장흥고사(長興庫使)를 거쳐 노인직(老人職)으로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에 올랐다.그의 아들 항(恒)은 삭녕 최씨 가문을 명문의 반석(盤石)위에 올려 놓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조선 초기 훈구파(勳舊派)의대학자로서 세조(世祖)를 도와 문물제도(文物制度) 정비에 큰 역할을 했다.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으로 정인지(鄭麟趾),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참여했으며, 집현전 교리(校理)로 오례(五禮)를 찬진했고,집현전 응교(應敎)로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창제에 참여, 이어 [동국정운(東國正韻)], [훈민정음해례(訓 民正音解例)], [용비어천가보수(龍飛御天歌補修)] 등을 찬진했다. 역사(歷史), 언어(言語), 문장(文章)에 능통하여 당대의 팔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명나라에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은거의 그가 담당하여 썼다. 또한 항(恒)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을 세워 정난일등공신(靖難一等功臣)으로 책록되어 도승지(都承旨)에 올랐고, 형조(刑曹), 공조판서(工曹判書), 예문관 대제학, 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했으며, 우의정(右議政)및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두 차례나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강릉최씨] 고려시대의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 최필달(崔必達)을 시조로 하고 있다. 《경주최씨상계세보》에 보면,그는 경주최씨의 시조 치원의 후손인 승로(承老)의 증손이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는 32명으로 전주 ·해주 ·경주 최씨에 다음가는 숫자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치운(致雲)과 수성(壽城)을 들 수 있다. 치운은 시조 필달의 16대손으로 세종 때의 명신이었으며 특히 형옥(刑獄)에 밝아 왕명을 받고 《무원록(無寃錄)》을 주석하였다. 수성은 치운의 증손으로 성리학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시문 ·서화 ·음률 ·수리(數理) 등 다방면에뛰어난 당대의 기재절필(奇才絶筆)이었다. 강릉최씨에는 시조를 달리하는 일파가 있으니 그 시조는 고려 충숙왕의 부마(駙馬)인 문한(文漢)이다. 그는 고려 말기에 강릉으로 낙향했는데, 그 자손들이 강릉과 충북 충주에 문호(門戶)를 열어 현재 삼척 ·양양 ·평창 등지에 수천 호가 거주하고 있다. 주요인물로는 조선 세조 때 이조참판을 지낸 자점(自霑), 성종 때이조판서를 지낸 세건(世楗), 인조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응천(應天) 등이 있다. 강릉 최씨(江陵崔氏)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상계(上系)를 달리 하는 다음 3계통(系統)이 있다.
첫째는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삼한벽상 개국찬화공신(三韓壁上開國贊化功臣)에 책록되어 영첨의좌정승(領僉議左政丞)을 역임한 후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에 봉해졌던 충무공(忠武公) 최필달(崔必達)의 계통이고,
둘째는 고려 태조(太祖)의 부마(駙馬)로 대경(大卿)에 올랐던 최흔봉(崔欣奉)의 계통이며, 또 다른 한 계통은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부마(駙馬)로 삼중대광(三重大匡)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에 올랐던 충재(忠齋) 최문한(崔文漢)을 시조(始祖)로 하는 계통이다. 이들 각 계통별로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충무공(忠武公) 필달(必達)의 증손 숭언(崇彦)이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명주부원군(溟州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3세손 한주(漢柱)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대중대부(大中大夫)로 종정경(宗正卿)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명주군(溟州君)에 봉해졌으므로 이들, 필달,숭언,한주는 강릉 최씨가 자랑하는<삼군(三君)>이다. 고려말에정선군수(旌善郡守)를 지내고 중정대부(中正大夫)로 삼사 좌윤(三司左尹)을 역임했던 동강(東崗) 원량(元亮)의 손자 치운(致雲:국자생원 안린의 아들)은 조선 전기의 명신(名臣)으로 세종(世宗) 때 훌륭한 치적(治績)을 남겼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가는 1390년(공양왕2) 6월 19일 강릉에서 태어난 조은(釣隱) 치운(致雲)은 조선 태종(太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世宗) 원년(元年)에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 여러 주요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덕망(德望)과 식견(識見)을 인정받아 국정(國政)을 논할 때마다 왕(王)의 자문에 응했고, 다섯 차례나 명(明)나라를 다녀오면서 외교적인 업적을 남겼다. 특히 조은(釣隱)은 왕명(王命)을 받아 [대명률(大明律)]을 참고로 [무원록(無寃錄)]을 주해(註解)하여 위로는 형조(刑曹)로부터 아래로 군옥(軍獄)에 이르기까지 억울한 옥사(獄事)가 없도록 하였고, 천성이 청백하여 왕이 내려준 전답(田畓)과 노비를 일곱 번이나 사양하였다. 그는 평소에 술을 좋아했는데, 세종이 그의 건강을 걱정하여 친필(親筆)로 계주(戒酒)의 어찰(御札)을 내려 주었다.조은은 그 어찰을 벽에다 붙여 두고 출입할 때마다 경계하였는데, 어쩌다가 바깥에서 폭음(暴飮)을 하고 오는 경우, 부인이 머리를 들어 주면서 어찰이 붙은 벽을 가리켜 보이면 취중에도 번번히 사죄(謝罪)하는 모습을 지었다고 하며, 술이 깨면 "내 임금의 은혜에 느껴서 술을 경계할 것을 늘 마음 속에 두었으나 다만 술을 만나면 전날의 경계를 갑자기 잊어버리고는 취하기에 이른다"고 하였다. 치운(致雲)의 둘째 아들 응현(應賢)은 단종(端宗)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으나, 고향에 계신 노모(老母)의 봉양을 위하여 강릉 훈도(江陵訓導)에 머무르다가 세조(世祖) 때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직을 억지로 받게 되자 6년의 의무기간 동안 고향 근방의 수령(守令)직을 주청(奏請)하여 영월(寧越)과 고성(高城)을 맡아 목민관(牧民官)의 임무를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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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성 최씨(杆城崔氏)]는 강릉 최씨(江陵崔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으로 고려 태조의 부마(駙馬)로 대경(大卿)을 지내고 강릉군江陵君)에 추봉된 최흔봉(崔欣奉:강릉 최씨 일파의 시조)(의 후손 최무동(最茂東)을 시조로 하는 계통과 역시 강릉 최씨 일파의 시조 최필달(崔必達)의 후손으로 고려 말에 문과에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상호군(上浩軍), 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지내고 조선조에서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한 후 간성군(杆城君)에 봉해졌던 최지순(崔之洵)을 시조로 하는 두 계통이 있으나 상계소목(上系昭穆)을 고증할 문헌이 전하지 않아 정확히 상고(詳考)할 수 없다. [간성최씨정축보(杆城崔氏丁丑譜)]에 의하면 지순(之洵)의 손자 효민(孝敏)이 조선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과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지내며 직간(直諫)을 하다가 함경북도 온성(穩城)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 살면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그의 손자 준량(俊良:일명 漢良)이 명종조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부사직(副司直)을 지내고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내자시주부(內資寺主斧簿)를 역임한 후 함경남도 이원(利原) 지방에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이원파조(利原派祖)로 받들고 있다고 한다.
[화순최씨] 시조는 《조선씨족통보》 등에 고려시대의 최언(崔堰)으로 되어 있으나 《화순최씨세보》에는 계대(系代)를 알 수 없는 언의 원조(遠祖) 세기(世基)로 되어 있다. 세계는 언에서부터 확실히 나와 있다. 그의 아들이 계신(繼臣)인데, 계신의 두 아들 영호(永浩)와 영유(永濡) 대에서 2파로 갈라졌다. 영호는 고려 충렬왕 때 좌우위 보승산원(左右衛保勝散員)을지냈고, 영유는 공민왕 때 해주목사를 지냈다.대표적인 인물로는 당대의 저명한 성리학자로 대사헌(大司憲)이추증된 영경(永慶)이 있다.
[통천 최씨(通川崔氏)]의 시조는 고려 때 정의대부(正義大夫)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중서좌상시(中書左常侍), 감찰어사(監察御使) 등을 역임한 최경현(崔景賢)이다. 그의 두 아들 사순(事舜)과 우순(遇舜)의 후대에서 증손 유(侑)가 문하평리(門下平理)를 지냈으며, 녹(祿)의 아들 운해(雲海)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호군(護軍)으로 고우(高郵)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워 통천 최씨(通川崔氏)의 가문을 빛낸 대표적 인물이다.운해는 아버지의 전공(戰功)으로 공민왕(恭愍王) 때 충용위 산원(忠勇衛散員)에 기용되었고 조전병마사(助戰兵馬使)에 올라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수차에 걸쳐 왜구를 격퇴한 뛰어난 장군이었다. 그는 조선(朝鮮)이 개국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고 (門下評理)로 양광도 절제사(楊廣道節制使)가 되어 왜구를 격파하였고1396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경상도 병마도절제사(慶尙道兵馬都節制使)가 되어 영해에서 왜구를 격퇴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이성도 절제사(泥城道節制使)를 거쳐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로서사직했다. 운해의 아들 윤덕(潤德)은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아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다녔고 싸움터에 나가 전공(戰功)을 세워 부사직(副司直)이 되었다. 1433년(세종15)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 이만주(李萬住)가 국경을 침범하여 백성을 괴롭히므로 왕명을 받들어 토벌하고 돌아오니, 세종이 매우 기뻐하며 친히 영접하여 노고를 위로한 후 우의정(右議政)에 특진시켰다. 그는 장군(將軍)으로 30여 년간 변경에서 위력을 떨쳐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에까지 올랐으며 궤장( 杖)을 하사받아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한편 녹(祿)의 후손이며 자양(自陽)의 아들인 입( )은 조선(朝鮮)중기의 학자로서 문장에 능하고 학문이 뛰어났으며,임진왜란 때 승문제조(承文提調)로 외교문서 작성의 제1인자였고, 여러차례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문명(文名)을 날렸다. 특히 시(詩)와 글씨가 뛰어나 그의 문장과 차천로(車天輅)의 시(詩), 한호(韓濩)의 글씨는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불리웠다. 그 외 인물로는 윤덕(潤德)의 아들 숙손(淑孫)이조선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고, 숙손의 동생 광손(廣孫)은 군수(郡守)를, 윤덕의 동생 윤옥(潤玉)은 수찬관(修撰官)을 역임하여 명문(名門)인 통천 최씨(通川崔氏) 가문을 유명하게 했다.
[강화최씨] 강화 최씨(江華崔氏)의 시조(始祖) 최익후(崔益厚)는 경주 최씨(慶州崔氏) 시조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의후손으로 고려 중엽에 사복시소경(司僕寺少卿),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강화(江華)에서 터를 잡고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강화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2세 효장(孝章)이 고려 때 도평리(都評理)를 지냈으며 3세 중의(重義)는 시중(侍中)을 지냈다. 중의(重義)의 동생 광의(光義)는 지도성사(知都省事)를 역임하였고, 광의(光義)의 아들 근(瑾:충숙공)은 1232년(고종 19) 상장군(上將軍)으로 이 통(李 通)의 난을 토평(討平)하고 수문각 대제학(修文閣大提學)을 거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문하시중(門下侍中)과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종수(宗秀)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거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지냈으며, 손자 유( )는 선부전서(選部典書), 수문각 대제학(修文閣大提學),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예부상서 등을 역임했고,수진(秀眞)은 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을 지냈다. 백전(伯全)의 손자이며 판사(判事)를 역임한홍(泓)의 아들인 용소(龍蘇)는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1394년(태조 3)에는 회례사(回禮使)로 일본에 건너가 포로로 잡혀간 본국인(本國人) 570여 명을 데리고 왔으며, 1397년(태조 6)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를 거쳐 다음 해 강원도 도관찰사가되고 1400년(태종 1) 도진무(都鎭撫)를 역임한 후 1403년(태종 3) 승녕부윤(承寧府尹)이 되었다. 1413년(태종 13)에는 형조 판서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공조판서,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를 역임,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이르렀다. 용소(龍蘇)의 동생 귀수(龜壽)는 목은(牧隱) 이 색(李 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 재(吉 再)와 교유하여 벼슬이 사복경(司僕卿)에 이르렀는데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 충신의 절개를 지켰다. 한편 수진(秀眞)의 아들 항(恒)은 감찰어사(監察御史)를, 항의 아들 유간(有澗)은 개성소윤(開城少尹)을 지냈다.중종 때 예조 판서를 역임한 한문(漢文)은 귀수(龜壽)의 증손이며, 그의 아우 자윤(自潤)은 기묘사화의 원흉인 남 곤(南 袞) 일당의 비행을 논척(論斥)하고 양주 사천(楊洲沙川)으로 퇴거하여 살았다.
[계림 최씨(鷄林崔氏)]의 시조(始祖)는 본래 경주인(慶州人)으로 신라 때 계림부 태수(鷄林府太守)를 지낸 최윤순(崔允順)이며, 그의 후손들이 경주 최씨(慶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그를 시조(始祖)로 삼고 계림(鷄林)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를 살펴보면 참의(參議)를 지낸 강(江)의 일파(一派)와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진 세준(世俊)의 일파(一派)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산 최씨(牙山崔氏)]의 시조(始祖) 최예립(崔禮立)은 판이부사(判吏部事)를 역임한 해주 최씨(海州崔氏) 최 온(崔 溫)의 21세손으로 조선조에서 사과(司果)를 역임했고 선대(先代)부터 세거(世居)해 온 아산(牙山)에서 정주(定州)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선조(先祖)의 고향인 아산(牙山)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그의 손자 석창(碩昌)은 조선에서 충익위(忠翊衛)를 지냈고, 석창의 아들 극준(克峻)은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죽산 최씨(竹山崔氏)]는 소벌도리(蘇伐都利)의 원손(遠孫)이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으므로 본관(本貫)을 죽산(竹山)으로 하여 계대(繼代)를 이어왔으나, 중간계보(中間系譜)가 병화(兵火)로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을 밝힐 수 없으므로 죽산군(竹山君)의 원손(遠孫)인 일죽공(一竹公) 최효운(崔孝雲)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그는 조선조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내고 홍문관대제학(弘文?大提學).지경연사(知經筵事)에 이르렀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일세조 효운(孝雲)의 아들 세형(世亨)이 부총관(副摠管)을 지냈고, 그의 아들 충좌(忠佐)는 조선 세조(世祖)의 맏아들 덕원군(德源君)서(曙)의 사위가 되었다. 충좌(忠佐)의 아들 영( )은 면천 군수(沔川郡守)를 지냈고, 영의 아들 임(琳)은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안방준(安邦俊)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전쟁에 공(功)을 세우고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을 지냈으며, 개천 군수(价川郡守)를 역임한 침(琛)은 형인 임(琳)과 함께 삼정사(三亭祠)에 제향(祭享)되었다. 그외 많은 후손들이 관직에 등용되어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한남 최씨(漢南崔氏)]는 고려조에서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지낸 최홍연(崔洪衍)을 시조(始祖)로 하며, 그의 후손 계방(繼芳)이고려조에 수사공(守司空), 상서 우복야(尙書右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 판삼사사(判三司事) 등을 역임하였다.계방의 아들 함( :자는 자화, 시호는 문간)은 예종조(睿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125년(인조3) 우정언(右正言), 지제고(知制誥)가 되었고, 이듬해 이자겸(李資謙)의 난(亂)이 일어나자 국새(國璽)를 가지고 행재소(行在所)까지 왕을 시종하였으며 예부 시랑(禮部侍郞),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로 만수절사(萬壽節使)가 되어 금(金)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병부 상서(兵部尙書),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으며, 문장(文章)에도 능하였다. 그후의 세계(世系)에 대하여서는 자료가 부족하여 상고(詳考)할 수 없다.
[고부 최씨(古阜崔氏)]는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시조(始祖)인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의 후손으로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를 역임하고 평북 구성(平北龜城)에 정착한 최 척(崔 陟)을 시조(始祖)로 하고 선조(先祖)들의 전세거지(前世居地)인 고부(古阜)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후손 용인(龍仁)은 조선에서 참의(參議)를 역임하였으며, 치민(致敏)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또한 치항(致恒)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종수(鐘秀)는 감찰(監察)을, 태덕(泰德)은 의관(議官)을 역임했다. 그외 희철(喜哲:오위장), 의걸(義杰:별장), 득룡(得龍:부사과) 등이 유명했고, 종익(鐘翼)은 주부(主簿)를 역임하여 장사랑(將士郞)에 오른 호정(虎精)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양주 최씨(楊州崔氏)]의 시조 최 억(崔 億)은 득성조(得姓祖)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으로 고려 때 학문과 덕행으로 명성이 높아 태사(太師) 에 천거(薦擧)되었고, 1353년(공민왕2)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여 양주군(楊州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억(億)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양주(楊州)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그후 문경공(文敬公) 억(億)의 아들 연(淵)이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고, 손자 숙(淑)은 병조전서(兵曹典書)를 지냈으며,증손 경운(慶雲)은 공조전서(工曹典書), 경운의 아들 항(沆)은 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인 정안(井安)은 1433년(세종15) 우정언(右 正言)을 거쳐 1437년(세종19) 이 천(李 )의 종사관으로 함경도(咸鏡道)에 침투한 야인(野人)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그후 벼슬이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다. 정안의 동생 정연(井涓)은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정연의 아들 결(潔)은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혼(渾)의 아들 홍도(弘渡) 는 1539년(중종34)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545년(인종1) 저작(著作)을 거쳐 1564년(명종19) 부정(副正)이 되었다가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역임한 후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홍도(弘渡)의 동생 홍개(弘漑)는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하여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후손 정걸(挺傑)은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왕을 호 종(扈從) 하였으며 적군을 쳐부수는 데 용맹이 뛰어나 많은 공훈을 세웠다. 그외 완(浣)은 조선 때 감찰(監察)을 역임했으며 정해(挺海)는 절제사(절節制使)를, 극태(克泰)는 군수(郡守)를, 선태(先泰)는부사(府使)를 지내 가문을 빛냈다.
[직산 최씨(稷山崔氏)]는 최씨(崔氏)의 득성조(得姓祖) 소벌도리(蘇伐都利)의 후손인 최홍재(崔弘宰)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본래 장군(將軍)의 아들로 태어난 홍재(弘宰)는 기(氣)를 숭상하고 말 달리기를 좋아하여 명장(名將) 윤 관(尹 瓘)을 따라 여진을 정벌하여 공을 세워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역임한 후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 포주(抱州)를 수복하였다. 그후 의주성(義州城)을 쌓는데 공을 세워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형부상서(形部尙書)#판삼사(判三司)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등을 역임하고, 한때 순천(順天)으로 유배되었다가 판리부사(判吏部事)로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고 수사공 우복야(守司空右僕射)#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직산(稷山)에 토착(土着)하여 세거하면서 본관(本貫)을 직산(稷山)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직산 최씨(稷山崔氏)의 가문을 빛낸 인물 중 홍재의 아들 서(瑞)는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고, 온(溫)은 의종(毅宗) 초에 판합문사(判閤門事)에 올라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1170년(의종24) 판중근 병마사#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문본(文本)은 음보(蔭補)로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이 되었고 1275년(충렬왕1) 승선(承宣)에 승진 후에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러 명망높은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해주 최씨(海主崔氏)]의 시조(始祖)는 해주(海州)의 목민관(牧民官)으로 뒤에 판이부사(判吏部事)를 역임한 최 온(崔 溫)이다. 선조(先祖)들이 일찍이 대령군(大寧郡) 수양산(首陽山)밑에서 누대(累代)에 걸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해주(海州)로 삼고 문호(文戶)를 열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황해도 대령군에서 시골 향리인 온(溫)의 아들로 태어난 충(沖)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1005년(목종8)20세의 나이로 갑과(甲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우습유(右拾遺)를 거쳐 1013년(현종4)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이 되어 태조(太組)에서 목종(穆宗)까지의 실록편찬(實錄編撰)에 참여하였다.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형부상서(刑部尙書), 중추사(中樞使)를 거쳐 1047년 (문종1)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법률관들에게 율령(律令)을 가르침으로서 고려 형법(刑法)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농번기(農繁期)의 공역 금지와 국가재정 낭비를 금하도록 상소하여 이를 실행케 했다. 그후 동여진(東女眞)의 동태를 파악,국방경계의 강경책을 쓰도록 하는 등 많은 업적을 세워 1053년(문종 7) 궤장( 杖)을 하사받았고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協謀同德治理功臣)으로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문하시중, 상주국 치사(上柱國致仕)가 되었다.1055년(문종 9) 내사령(內史令)으로 치사(致仕)한 뒤 사숙을 열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그의 제자들은 해동공자, 문헌공도(文憲公徒)라 불렸다. 후에 국가의 공교육과 반하는 사림의 폐해등으로 제도적으로 폐지 소멸되었다.
[영천최씨] 고려 중기의 공신 최한(崔漢)을 시조로 한다. 한은 전주최씨의 시조 균의 9대손으로, 전주최씨에서 분적한 분파이다.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세종 때 서예가로 유명한 흥효(興孝)가 있다. 그는 홍문관 제학을 지냈으며 예서와 초서를 잘 썼다.흥효의 후손에서 영천최씨는 12파로 갈린다. 고려 말기의 유명한 인물로는 발명가 무선(茂宣)이 있는데, 그는 원(元)나라의 화약 기술자로부터 기술을 배워 그 제조법을 익혔으며 조정에 건의, 화통도감(火都監)을 설치는 천연기념물 제 166호로 지정되었고, 천연기념물 제 97호로 지정된 밤나무는 지금도 해마다 굵은 밤이 열려 귀중하게 보관 되고 있다. 그의 아들 삼형제는 모두가 벼슬에 나가 고려 왕조에 공헌했는데, 장남 백청(伯淸)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역임했고, 차남 중청(仲淸)은 판관(判官)을 지냈다. 삼남 우청(遇淸)은 인종(仁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진례현위(進禮縣尉)에 올랐으며 명종(明宗)이 즉위하기 전에 전첨(典籤)으로 있다가 명종 즉위 후 대간(臺諫)을 역임했으며, 1174년(명종4) 병마부사(兵馬副使)로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진압하여 공을 세웠고 1182년(명종12)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를 거쳐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다. 원유(原儒)는 중청(仲淸)의 5세손으로 고려 말 유림(儒林)의 영수로서 당대의 명신(明臣) 정몽주(鄭夢周) 등과 교유했고 벼슬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렀으며, 정몽주(鄭夢周)가 순절(殉節)하자 음독 자결했다. 원유(原儒)의 아들 염은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정승(檢校政丞)이 되었고 ,세째 아들 순(洵)은 1396년(태조5) 문과에 급제한 후 성절사(聖節使)로 중국에 다녀와 여러 관직을 거쳐 직제학(直提學)이 되었으며 세자필선(世子弼善)으로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후 중군 총제(中軍摠制)와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다. 우청(遇淸)의 손자 빈(濱)은 언양 현감(彦陽縣監)으로 있을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언양 현민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웠으며, 빈(濱)의 현손(玄孫) 맹현(孟賢)은 여러 지방 관직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냈는데 고을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어 향민의 칭송을 받았다. 순(洵)의 6세손 개국(盖國)은 1538년(중종3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1547년(명종2)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지평(持平)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명선(明善)은 1555년(명종10)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방부사(地方府使)를 거쳐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으며, 정호(挺豪)는 1603년(선조3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1609년(광해군 1)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으며 은총(恩寵)이 무비(無比)하여 벽옥적(碧玉笛)을 하사받았다. 그 외 인물로는 효자(孝子)로 이름난 혁(爀)이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동지돈령(同知敦寧)을 지낸 규석(奎錫)이 유명하고, 학자(學者) 동봉(東鳳)은 후진양성에 전심하는 한편 문집(文集)을 남겨 문명(文名) 높은 가문을 빛냈다.
[초계 최씨(草溪崔氏)] 시조(始祖) 최용궁(崔龍宮)은 전주 최씨 일파의 시조 최 균(崔 均)의 4세손으로, 1296년(충렬왕22)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충익대보조공신(忠翼戴保祚功臣)으로 판사(判事)와 참찬(參贊)을 거쳐광록대부(光祿大夫)로 세자태부(世子太傅)에 이르렀으며, 팔계군(八溪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초계(草溪)로 하여 문호를 열었으나, 상계(上系)의 기록이 실전되어 그의 13세손 신재(新齋) 산두(山斗)를 중시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산두(山斗)는 참봉(參奉)을 지낸 한영(漢榮)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용모와 기개(氣槪)가 뛰어났고 학문을 좋아하여 9세 때 까마귀가 그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봉양함을 보고 그 효성(孝誠)에 감동하여 영오시(詠烏詩)를 지었다.1513년(중종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수찬(修撰)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호당(湖堂)에 뽑혔으며, 사간원 헌납#지평(持平)을 거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올랐고, 문장에 뛰어나 윤 구(尹 衢)·류성춘(柳成春)과 함께 호남(湖南)의 3걸로 알려졌다. 산두는 슬하에 교적에 오른 병길(丙吉)과 장령을 지낸 정길(丁吉) 형제가 있었으며, 후세에서는 규록(圭祿)의 아들 경모(璟模)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白衣從軍)한 이( )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후에 수문장(守門將)이 되어 명망높은 가문을 빛냈다.
[개성 최씨(開城崔氏)]의 시조(始祖) 최우달(崔佑達)은 원래 황주(黃州) 토산현(土山縣) 사람으로 신라조에 대상(大相)을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응(凝)이 태조를 도와 고려개국에 공을 세워 여러 관직을 지내고 누대(累代)에 걸쳐 개성(開城)에 세거(世居)하며 호족(豪族)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우달(佑達)을 시조(始祖)로 하고 개성(開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우달의 아들 희개공(熙愷公) 응(凝)은 개성 최씨의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인데, 그에 대한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어머니가 애기를 배었을 적에 그 집에 누런 오이 덩굴이 있었는데 갑자기 참외가 맺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궁예(弓裔)에게 알렸다. 궁예가 점을 쳐보게 하니, "사내아이를 낳으면 나라에 이롭지 못할 것이니 아예 키우지 못하게 하십시오"하였다.그 부모가 숨겨서 길렀는데, 그후 이미 장성하여서는 오경(五經)에 통달하고 글짓기를 잘하여 궁예 밑에서 한림(翰林)이 되어 매우 존경을 받았다. 915년(신라 신덕왕 4) 궁예가 왕건(王建)을 불러들여 모반(謀叛)의 누명을 씌울 때 왕건이 변명을 하자 응은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 줍고자 뜰에 내려와서 왕건에게 굽히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귀띰해 주어 화를 면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왕건과 가까워져, 고려가 개국하여 왕건이 즉위하자 원봉성사(元鳳省事)를 거쳐 광평 낭중(廣評郎中)으로 승진하고 이어 내봉경(內奉卿), 광평시랑을 역임하며 태조의 총애를 받았다. 932년(태조 15)에 그가 35세로 죽으니 태조가 매우 슬퍼하며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증직했다. 이외 후손 천보(天寶)가 조선에서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역임했으며, 그의 증손 명창(命昌)은 1504년(연산군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수찬(修撰)을 지내고, 1519년(중종 14)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일찍이 이 이(李 珥)의 문하에서 글을 읽어 문장과 시에 능하였던 입( )은 1561년(명종 16)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여러번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그곳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名文章家)라는 격찬을 받았으며 그의 글과 차천로(車天輅)의 시(詩), 한 호(韓 濩)의 글씨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일컬었다.
[상원 최씨(祥原崔氏)]는 신라 대상(大相) 최우달(崔佑達)의 아들인 최응(崔凝)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응(凝)은 태조(太祖)를 도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벼슬이 내봉경(內奉卿)에 이르렀고, 태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뒤에 대광태자태부(大匡太子太傅)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그 후 보첩(譜牒)이 실전되어 후손 효동(孝動)을 일세조(一世祖)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조선에서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를 역임한 무철(武哲)을 시조(始祖)로 기록하고 있다. 상원 최씨(祥原崔氏)는 개성 최씨(開城崔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상원(祥原)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석명(錫明)과 상영(象永)을 들 수 있다. 석명(錫明)은 조선 후기의 무신(武臣)으로 개성(開城)에 살며 성동(城東)의 호정(虎亭)에서 제자들에게 궁술을 가르쳤다. 특히 그는 활 쏘는 기술이 뛰어나 중국의 양유기(養由基)에 비유되었으며, 순조(純祖) 때 춘당대(春塘臺) 유엽사(柳葉射)의 어시(御試)에서 활쏘기에 뛰어나 수문장(守門將)에 이르렀다.상영(象永)은 1854년(철종 5) 교관(敎官)에 보직되어 임기를 마친 후 감찰에 전임되었고 그 후 인천항 경무관(仁川港警務官)을 지냈다. 조선조에 도정(都正)을 지낸 상옥(象玉), 오위장(五衛將)을 지낸 창우(昌祐)는 도정(都正)을 지낸 상태(象泰)와 함께 상원 최씨(祥原崔氏) 가문을 명문으로 빛냈다.
[수성 최씨(隋城崔氏)]는 영규계(永奎系)와 거경계(居涇系)의 두 계통이 있는데, 영규계의 시조(始祖) 최영규(崔永奎)는 신라 경순왕(敬順王) 김 부(金 傅)의 후손으로 본래 성이 김씨(金氏)였다. 1261년(원종 2) 문과에 급제하고 남조 전서(南曹典書)에 있으면서 보문각 대경(寶文閣大卿)을 겸하고 문학으로 서경(西京)의 학도(學徒)들을 가르쳐 명망이 높았다. 충렬왕(忠烈王) 때 수주(水州) 일대의 풍속이 퇴폐하고 이륜( 倫)을 지키지 않아 사람의 행동이 금수(禽獸)와 다름없음을 왕이 개탄하니, 그가 자청하여 호장(戶長)으로 부사(副使) 안 설(安 說)과 함께 나가서 효제(孝悌)로 백성을 다스리고 의리(義理)로 설득하여 일년이 못되어 윤강(倫綱)이 부흥하자 왕이 가상히 여겨 1302년 (충렬왕 28) 포상하고 수성백(隋城伯)에 봉(封)한 후 최씨(崔氏)로 사성(賜姓)하여 이 때부터 문호(門戶)를 열었다. 한편 거경계(居涇系)는 고려 때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을 지낸 거경(居涇)을 중시조(中始祖)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영규의 아들 흡(洽)은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 전서(工曹典書),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뒤에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원개(元凱)는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대부(奉常大夫)로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하고 향리(鄕里)에서 후진 양성과 저서로 일생을 보냈으며, 그의 후대에서 안양공파(安襄公派), 가산공파(嘉山公派) 등 다섯 파로 갈라졌다.원개(元凱)의 손자 경(涇)은 조선이 개국되자 출사(出仕)하여 사정(司正)에 올랐으며, 죽은 후에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책록되었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경(涇)의 아들 유림(有臨)은 1450년(세종 32)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고성 현령(固城縣令)을 거쳐 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를 지냈고,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平定)한 공으로 적개삼등공신(敵愾三等功臣)에 책록되어 수성군(隋城君)에 봉해진 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都 兵馬節度使)가 되었다.유림(有臨)의 아들 윤신(潤身)은 사마(司馬)로 있을 때 공로가 있어, 천거로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다가 치사(致仕)한 후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했으며, 윤신의 손자 희효(希孝)는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지방 판관(判官)을 거쳐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등을 지냈고 1555년(명종 10) 동지사 서장관(冬至使書狀官)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참고 : http://www.genealogy.co.kr/전통족보문화사,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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