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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세계 구원관(궁극구원)의 정의.
1. 구원의 개념과 정의.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인데 교회에서 이 구원에 대해 자주 말은 하지만 정확한 개념에 있어서는 많은 오해와 혼동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구원이란 일반적으로건 신앙적으로건 ‘더 나은 곳이나 더 나은 상태로의 상승’을 의미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는 것은 일반개념의 구원이요, 죄로 인해 죽은 자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은 영을 살려서 하나님의 성품을 입혀주는 것은 기독교의 일반적 구원개념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안에는 예수 믿어 천당 가는 구원만이 아니라, 예수 믿어 천당 가는 것은 전제로 하고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을 잘 닮아가는 성화구원이 있고, 믿는 자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성화구원을 잘 이룬 후에 천국에 가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성화구원을 입은 양대로 하나님과 함께 그 천국을 마음껏 다스리고 누리는 영화구원이 있습니다. 이런 서정은 더 나은 상태로의 상승이라는 점에서 ‘기본구원, 성화구원, 영화구원’ 등등의 ‘구원’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입니다.
1-1. 성화구원의 개념과 정의.
그런데 기본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에 의해 되는 것이고, 영화구원은 성화구원을 이룬대로 누리는 것이므로 믿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가장 신경을 쓰고 이루어가야 할 것은 바로 성화구원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대부분은 성도들로 하여금 바로 이 성화구원에 힘을 쓰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것이나, 이방인들과의 싸움이나, 성전의 모형이나, 성전에서의 제사의식이나, 예수님의 교훈이나,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를 행하신 것이나 성경 구절적으로 ‘신앙싸움을 싸우라’는 것이나, ‘열심을 내라’는 것이나, 푯대를 향하여 달음박질하라‘는 것 등의 우리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 모두는 기본구원의 교훈이 포함된 것도 있지만 거의가 성화구원에 관한 도리와 이치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성화구원은 성령님의 인도와 조명과 각성을 따라 자신에게 오는 모든 존재와 사건과 환경과 마찰과 충돌과 대립과, 심지어는 마귀의 활동을 통해서 각이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 가는 것인데 이렇게 각양의 방법으로 성화를 이루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의지세계 구원관에서는 앞에서 말한 구원의 서정에 따라 ‘기본구원 성화구원 영화구원’ 등등의 ‘구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큰 틀의 성화구원 안에서 다시 또 각이한 사건과 환경에서 ‘구원’이라는 용어를 붙여 사용함으로써 매 사건마다에서 성화구원에 대해 강한 의식을 하게 해서 성화에 매진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물질이 있을 때 이것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면 ‘물질구원’이라 하고, 자신의 건강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면 ‘건강구원’이라는 등등의 말을 합니다.
이 성화구원은 기본구원을 전제로 하고 되어지는 것인데, 성화구원의 방편은 중생된 사람이 성령님과 유기적으로 자기의 마음과 몸을 움직일 때 되어지는 것인고로 영이 중생을 하지 못한 자(기본구원을 얻지 못한 자)는 절대로 이 성화구원을 이루어 갈 수가 없습니다. 영이 죽어있는 자는 일단 그 영이 살아나야 만이 살아난 그 영을 주격으로 이성과 몸을 움직여서 성화구원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성화구원은 성령님의 단독사역이 아닌 구원 얻은 자가 성령님과 유기적인 관계로 이루어가는 것인데, 이는 내가 어떤 사건을 만날 때나 마음을 쓸 때 이미 듣고 깨달은 성경말씀이 떠오르면서 ‘내가 이럴 때는 이렇게 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구나’ 하는 마음이 생기면 이것은 성령님의 감화요 각성이요 조명이니 나의 생각과 욕심을 따라 행동을 하거나 생각을 하지 않고 성령님의 그 감화와 조명을 따라 생각을 하거나 행동을 하게 되면 그 때의 나의 이성과 몸은 중생된 영을 따라 성령님의 감화와 인도대로 움직인 것이므로 여기에는 성화구원이 되는 것이며, 이것을 성령님과 유기적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이건 신앙적인 생활이건, 또한 마음의 생각이던 행동이던 나의 전 삶의 부분 부분마다에서 이 성령님의 조명과 각성(성령님의 감화)을 따라 행해지지 않는 것은 나의 이성과 몸이 성령님과 끊어진 상태에서 되어진 것인고로 성화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화구원에 대한 예를 든다면 자기는 다른 사람이 잘 사는 것을 보면 시기 질투가 일어나는데 성경말씀을 보니 시기나 질투를 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어서 ‘아, 내가 시기 질투를 하면 그와의 관계가 멀어지고 결국은 나의 처세나 세상살이에 손해가 많겠구나, 그러니 성경말씀대로 나의 이 시기 질투의 마음을 버리자’ 하고서 상대와 화해를 했다고 하면 이것은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판단과 가치를 따라 움직여진 마음과 행동이므로 아무리 성경말씀을 따라 한 것이라고 해도 이는 성령님을 따라 한 것도 아니고, 성화구원도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사건에서 ‘저 사람이 잘 사는 것에 대해 내가 시기 질투를 하는 것은 내 마음 속에 세상물질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그렇구나, 이 시기 질투심은 천국에 가지고 들어가지도 못하고 세상물질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인데 내가 왜 영원한 천국에 대한 욕심은 없고 그런 임시적인 것에 욕심을 내며 저 사람을 미워하고 있나’ 하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물질에 대한 욕심과 질투심을 버리고 상대와 화해를 했다면 이것은 그렇게 하는 생각과 판단과 이해타산과 가치가 이 세상 것이 아닌 천국적이고 영적이고 영원한 것을 목적하고서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한 것이므로 여기에는 성화가 되는 것입니다. 즉 성령님의 감화를 따라 한 것이므로 주님의 성품을 닮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주시려는 것은 당신의 성품이요, 세상과 세상 것이 아닌 영적이고 신령한 천국이니 성령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영이요 지혜의 영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로 인도하고 가르치고 영원의 그 나라의 사람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믿는 내가 어떤 상황이나 사건이나 존재를 만나더라도 자신의 세상적이고 육신적이고 죄악적인 생각과 마음을 꺾고 성령님의 역사하심대로의 천국적이고 영적이고 신령하고 영원한 그 세계를 목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가치평가를 내리고 수지를 따지는 것은 성령님을 따라 하는 것이니 이렇게 할 때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게 되어 성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종교적인 활동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의 일상의 삶에서도 늘 자기 마음속에서 진리로 인도하고 가르치시는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그 감화를 따라 살아갈 때 성화가 되어나가는 것이지만, 반면에 종교적인 일이건 일상생활이건 세상적이고 육신적이고 임시적인 것에 목적을 두고, 그러한 정신과 사상과 감화로 해 나간다면 성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속성이 입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물질세상이 악하다거나 물질 자체가 악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 물질세상과 세상의 사건과 환경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잘 이용하고 활용하고 응용하여 성화구원을 이루라고 주신 것인데 이에서 벗어나 세상과 세상의 것에 정신적 사상적 목적적으로 욕심을 품고 이를 위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건강이나 물질이나 재능 등등을 투자하는 것은 성령의 감화가 아닌 마귀의 감화로 사는 것이니 이것은 하나님 앞에 곧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구원을 크게 기본구원과 성화구원으로 나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단일대속을 둘로 쪼갠 것이 아니라 단일의 그 대속이 영적 존재인 영과 물질적 존재인 심신의 성질에 따라 영에게는 즉각적으로, 마음에게는 점진적으로 적용이 되기 때문에 그 적용의 모습을 따라 이름을 달리 붙인 것입니다.
1-2. 의지세계 구원관과 하나님의 인격성과의 관계.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행하실 때 인간들처럼 아무 계획과 목적도 없이 하는 분도 아니고, 인간들처럼 어떤 일을 해 나가다가 문제나 잘못이 발견되면 고쳐가면서 진행하는 분도 아닙니다. 완전하신 지혜지식과 인격을 가지신 우리의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기 전에 이미 그 마음에는 그 일에 대한 계획과 설계가 이미 다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의 계획을 세우실 때에도 그 구원을 실행하기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마음) 안에는 구원을 하시게 되는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 편에서는 동시요 순간이지만 인간의 논리로 말할 때 이렇게 분리를 해서 생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집을 지을 때 집 지을 땅에 무성한 풀만 자라고 있지만 설계사의 마음에는 이미 그곳에 완성된 집이 마음속에 다 지어져 있고, 그 집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과 절차가 미리 다 머릿속에 그려져 있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세상을 만들고, 이 세상에 인간을 짓고, 타락을 허용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구원을 하고, 부활을 통해 천국에 데리고 가셔서 그 천국을 당신과 함께 영원토록 누리게 하려는 계획과 설계가 이 세상을 만들기 그 이전인 영원 전,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천국에 독존하시면서 당신의 의지세계에서부터 이미 다 완성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2. 의지세계 구원관과 타락 후 구원론과의 관계.
이렇게 본다면 기존의 인간이 타락을 하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 깨달음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에 비추어 볼 때나,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절대로 인간에 의해 변경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독권성이나 절대성이나 완전성에 비추어 볼 때 그 이상의 무언가 더 명확한 깨달음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의지세계 구원관에서는 인간을 창조하고, 이 인간이 타락을 하고, 타락한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 구원을 하고, 부활과 승천을 통해 천국에 데리고 가는 이 모든 순서와 과정은 이런 일이 진행되기 이전인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이미 다 예정과 계획과 설계가 다 되어 있었고, 영원 전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된 이 계획과 설계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 진행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므로 일반적인 타락 후 구원론에서 말하는 인간이 타락을 하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구원해 준다고 하는 이 순서는 이미 설계된 대로 진행되는 과정 안에 속한 것이 되니 하나님의 모든 속성에 전혀 위배가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타락 후 구원론은 인간이 타락을 하니 구원해준다는 식이니 여기에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궁극적인 목적이 희미하고, 인간의 타락을 예상하지 못한 하나님이 되어 버리니 하나님의 전지성이나 지혜지식성이 묻혀버리고, 인간이 사고를 치면 하나님은 인간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그 뒤처리를 해준다는 식이 되니 하나님의 주권성과 예정성과 완전성 등이 무시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의지세계 구원관은 인간 창조 이후의 모든 구원의 서정은 이미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다 예정 계획 설계된 것이고, 하나님의 그 설계대로 그대로 진행이 된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속성에 하나도 위배됨이 없고,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궁극적인 목적성이 분명하고 뚜렷한 깨달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의지세계 구원관에 대해 ‘그렇게 되면 타락의 과정도 다 예정이 되었다는 말이니 그러면 인간에게 죄를 조장하는 하나님이 아니냐’ 하는 반문이 있을 수도 있으나 이 문제는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와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면 쉽게 해결되는 문제이고, 또한 아담과 하와 이들은 생명과를 따먹을 절대적인 자유도 주어졌고 선악과를 따먹을 절대적인 자유도 주어졌음에도 그들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해서 타락을 하게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타락을 조장하거나 강요해서 그들이 타락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그들의 죄로 인해 타락을 하게 된 것입니다.
3. 의지세계 구원관과 계시와의 관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신실하심은(특히 구원문제에 대해서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동일하십니다. 따라서 이 분께서 영원 전서부터 나에게 가지셨던 구원의 계획과 목적 역시도 영원토록 변치 않고 동일하십니다. 만일 인간의 행동에 따라 하나님의 영원 전의 그 계획이 취소되거나 변경되거나 한다면 하나님의 완전성과 지혜지식성은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의 구원이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타락과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과정도 예정 계획 설계가 이미 되어 있었고, 그 설계의 과정대로 인간이 타락을 하고, 구원을 얻게 된 것이라는 내용이 없는 채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을 때 원래는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살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그만 인간이 타락을 해서,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지옥에 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비상수단으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서 구원해 주셨다고 한다면 이러한 모순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의지가 영원토록 동일한 이 분께서 영원 전에, 만물을 짓기 전에, 나를 이 세상에 만들기 전에 천국에 독존적으로 계시면서 당신의 의지세계에서 그리스도로 통해 나의 구원을 예정 계획 설계하셨는데, 이러한 당신의 모든 의사와 과정을 문자적 액면적 사건적 역사적인 성경말씀 속에 담아 놓으셨으니 성경의 문자 속에 담긴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문자 속에 담긴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영원 전의 그 의사와 뜻을 성령님의 조명과 각성으로 깨달아 이 계시를 나의 정신과 사상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
인격자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의사표시를 할 때 말이나 글이나 행동으로 표시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나 보이는 말이나 글이나 행동은 그의 의사에서(속마음)나오고, 또한 그의 의사는 그의 인격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인격자이신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의사를 글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나타내셨으니 그것이 바로 성경말씀인데 믿는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하나님의 의사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성경의 표면적 문자적인 내용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그 의사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계시입니다.
계시란 감추어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고 히브리서에 말씀하셨듯이 성경의 보이는 문자의 액면을 통해 그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의사)을 아는 것이 계시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의 정신과 사상을 내가 갖는 것을 계시신앙이라고 합니다.
4. 의지세계 구원관과 구원의 시발과의 관계.
일반적으로 인간이 타락을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구원이 시작되는 것으로 보지만 계시개념으로 성경을 보는 의지세계 구원관(궁극구원)에서는 인간이 타락하기 훨씬 이전인 이 세상을 짓기도 전, 인간을 만들기 전 하나님께서 당신 홀로 천국을 누리며 쾌락하고 계실 때 당신의 의지세계에서부터 우리의 구원이 예정 계획 설계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일반적으로는 인간이 타락을 해서 지옥에 가게 되었는데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 당신의 택자를 구원해서 천국 가게 한다고 하는 ‘존재선택’에서부터 인간의 구원이 시작되는 것으로 보지만 의지세계 구원관에서는 존재선택 그 이전에 당신께서 천국을 누리고 있었는데(이것은 사건선택임- 당신이 누리는 그 사건처럼 다른 존재로 하여금 그 사건을 겪게, 즉 누리게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 당신의 속성상 애정성이 발로가 돼서 이 천국을 다른 존재와 함께 누리고 싶으셔서(이것은 목적선택임) 그 대상자로 택자를 예정하셨으니(이것은 존재선택임) 이 예정을 위해 세상을 만들고, 인간의 타락을 허용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구원의 순서와 과정을 마련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선택’과 ‘목적선택’이 바로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진행된 우리의 구원계획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일반적으로는 앞의 ‘사건선택’과 ‘목적선택’은 없고 그 아래 단계인 ‘존재선택’에서부터 우리의 구원이 시작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의지세계가 아닌 눈으로 나타나 보이는 부분인 인간이 타락을 하니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시작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의지세계 구원관은 기존의 이 서정은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인간창조 이전, 인간타락 이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인간(택자)의 구원에 대해 예정 계획 설계한 과정에 속하는 ‘사건선택’과 ‘목적선택’을 ‘존재선택’ 앞에 추가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구원론은 하나님의 인간의 구원의 계획과 설계를 하는데 있어서 인격자에게 있어서 가장 근원적이고 가장 깊은 부분인 하나님의 의지세계는 잘라놓은 채(모른 채) 그 아래 단계인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해서 에덴동산에 살게 했는데 그만 인간이 타락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기에서 구원해 천국에 데리고 간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나를 향해 가지셨던 그 뜻을 바로 알기가 심히 어려운 것입니다.
이는 마치 내 친구가 나를 향해 모진 말을 했는데 나는 그의 말만을 듣고 그 친구가 나를 미워해서 한 소리로 알았지만 나중에 그 친구의 말을 들으니 그의 속마음은 나를 바로 서게 하기 위해서 그런 모진 말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처럼 인격자의 세계에서는 말과 행동 이전에 그의 마음(의지세계)의 뜻을 정확히 알아야 서로 간에 오해를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격자이신 하나님 역시도 그런 분이십니다. 표면적 문자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요, 의사표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표면적 문자 속에는 하나님의 의사가 담겨 있으니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성경의 표면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이 의사를 알아야 하나님의 뜻에 적중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부가 당신의 백성을 장차 천국에서 최고의 영광자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주신 것이니 의지세계 구원관은 성경의 표면적 액면적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이 의지세계로부터의 나를 향하신 구원계획과 목적을 알아 나의 전 삶을, 그러니까 나의 몸과 마음과 정신과 사상과 취미와 추구성과 지향성과 목적성과 나의 이해타산과 가치평가와 수지성을 다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의 나를 향하신 영원하고 궁극적인 그 뜻에 두고 그것을 위해 총 매진하는 신앙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나 세상의 사건을 바라볼 때 나타나 보이는 문자적 표면적 유형적 가견적인 그것만을 놓고(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하면 나타나 보이는 그것과는 정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해석을 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과는 정 반대의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성경의 예를 본다면 발람과 발락의 사건에서 선지자 발람이 발락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갈 때 하나님께 물어보니 가라고 했으나 하나님의 속뜻이 아무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러 가라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말하자면 공부도 안 하는 아이가 밖에 나가려고 외출옷도 차려입고 친구하고 만나기로 연락을 다 취해놓고서는 엄마에게 와서 ‘엄마, 나 친구 만나러 나갔다 올까요?’ 한다면 엄마의 마음은 집에서 공부를 하기 원하지만 아이가 하는 행동을 보고 할 수 없이 나갔다 오라고 하는 것처럼 발람이 이미 물질에 욕심이 생겨서 마음은 발락에게 가서 있으면서 하나님께 묻기는 ‘하나님이 가라시면 가겠습니다’ 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시고 ‘네 마음이 정 그러면 한 번 가 봐라’(여기에는 발람에게 그가 거기 가서 겪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해 주려는 뜻이 들어있음)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처럼 우리가 성경을 표면적 문자적 액면적으로만 알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의사를 모르면 하나님의 뜻을 곡해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 간에도 상대를 한 두 번 겪은 것으로는 그에 대해 제대로 알 수가 없고 그의 전 이력과 인격을 알아야 만이 그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듯이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려면 성경 한 두 구절만으로 불가능하고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인간을 향해 하신 이력과, 그렇게 하신 그 분의 인격을 알아야 만이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 수가 있고, 그래야만이 하나님의 의사대로 바로 순종을 해서 주님의 성품을 온전히 닮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자식이 잘못을 해서 호되게 매를 때리면 매를 맞는 그 자식은 자신을 때리는 엄마의 그 하나의 행동만을 보면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엄마가 평소에 자신에게 가지셨던 지극한 사랑의 마음과 행동(엄마의 전체적인 이력)을 잘 안다면 지금 자신을 호되게 때리는 엄마의 마음이 자신을 잘 되게 하려는 목적으로 때리는 것으로 알아 매를 맞으니 아프지만 그 엄마의 마음을 잡고 바로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경의 한 두 구절이나, 나에게 오는 사건과 환경의 한 부분만을 볼 때는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처사가 이해가 되지 않고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성경 전체를 통해 은밀계시적으로 나에게 말씀하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놓고 성경을 대하고 사건 환경을 대하게 되면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인간을 향해 가지셨던 영원 전의 그 계획과 설계와 목적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 역사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4-1. 의지세계 구원관과 사건과의 관계.
인간이 타락 후에 구원해 주는 것이라고 하는 기존의 구원론은 그 구원의 개념이 늘 사건이 있고 나서, 그 다음에 그 사건에서 구원(해결)이 진행되는 식입니다. 이런 구원의 개념은 사람이 물에 빠지는 사건이 먼저 있고 나서 그 다음에 거기에서 건져줌으로써 그 사건을 해결해 주는 일반세상의 구원과 그 개념이 같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습관이나, 우리의 신앙의 방식이나, 사건과 환경을 겪을 때 늘 이런 방식으로 그런 것들을 대하게 되면 그 말씀과 사건을 주심은 영원 궁극적인 그 나라의 누림의 실력을 만들라고 주시는 것인데 하나님의 이 의사성은 무시가 되고 표면적인 그 사건의 해결에만 마음이 집중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식의 신앙은 자연적으로 그러한 성경말씀을 주신 근원적인 목적과, 그러한 사건을 주신 근원적인 목적에서 벗어난 기복주의 신앙과 세속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의지세계 구원관은 구원의 개념이 사건 이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당신의 백성의 구원을 미리 예정 계획 설계를 해 놓고 그 목적에 따라 사건과 환경을 주신다고 하는 것이니 구원의 계획과 설계가 먼저 있고 나서 이를 위해 사건과 환경을 당신의 백성에게 보내서 성화를 이루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이나, 예정이나, 택자의 구원의 확실성이나, 하나님의 모든 속성에 하나도 위배되지 않고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그 목적성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의 예를 든다면 ‘내가 태어난 후에 엄마가 부랴부랴 유아용품을 준비해서 나를 키우느라 고생했다’고 하는 것보다 ‘내가 태어나면 사용할 모든 유아용품을 미리 다 준비해 놓고 내가 태어나기만을 고대하다가 내가 태어나자 미리 준비한 용품들로 나를 애지중지 키웠다’고 하는 것이 나를 향하신 엄마의 사랑을 더 크게 느낄 수 있고, 그런 자식이 부모에게 더 효를 행하듯이 세상을 만들기도 전에, 인간이 타락하기도 전에, 내가 세상에 오기도 전에 당신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나를 구원해서 당신의 나라에서 당신과 함께 영원히 그 나라를 다스리고 누리게 하기 위한 나의 모든 구원을 위한 과정과 계획을 설정해 놓으셨다는 의지세계 구원관의 깨달음이 내가 하나님의 그 목적에 보다 더 욕심을 내고, 하나님의 뜻을 보다 더 자원적으로 순종할 수 있고, 이로 인해 성화구원이 더욱 더 촉진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4-2. 의지세계 구원관과 일반적 구원관의 효율성 비교.
의지세계 구원관은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인 나로 하여금 천국에서 당신과 함께 당신처럼 그 천국을 마음껏 다스리고 누리게 해 주려고 나를 이 세상에 살게 했고, 그래서 나를 구원해 주셨고, 이를 위해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나에게 여러 가지 사건과 환경을 보내서 성화구원을 이루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그 의지세계에서부터 나를 향하신 궁극적인 목적을 늘 자신의 정신과 목적으로 삼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이 신앙관을 가진 사람은 성경을 대할 때도 각 구절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나를 향해 계획하고 설계하신 그 뜻을 잡고 성경을 해석을 하고, 자신에게 오는 사건과 환경과 존재 역시도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나를 향하신 그 궁극적인 뜻을 앞세우고 해석을 하고, 그 정신과 사상으로 말씀에 순종을 하고, 사건과 환경을 헤쳐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의 모든 가치평가와 이해타산이 천국에 가서 있으니 그의 목적은 늘 궁극의 그 세계를 바라보며 사는고로 이는 물질을 초월한 신앙정신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정신과 사상 면에서의 속화를 막을 수가 있음은 물론이고, 육신과 세상의 조건이나 여건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자원적인 순종을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의 우리에게 향하신 그 마음을 잡고 신앙하는 사람은 그의 정신과 사상이 세상과 세상의 것에 목적을 두지 않고 가치판단이나 이해타산이나 평가성이나 추구성이나 목적성을 늘 천국에 최종의 목적과 결과를 두고 살기 때문에 그의 속사람이 세상성이 빨리 벗어짐으로 해서 성화구원이 더욱 더 효력적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의지세계 구원관은 기존의 구원의 서정과 다른 것이 아니라 기존의 구원의 서정은 전제로 하고 이러한 구원의 서정을 마련하신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하나님의 의사를 잡고 신앙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표면적 문자적인 것에서 더 들어가 하나님과의 인격적 정신적 사상적 인격적 애정적 관계적인 면으로 성경을 깨닫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지세계 구원관은 기존의 타락 후 구원론을 보다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확립해 주는 교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이면에 담긴 하나님이 의사를 잡고 신앙을 해야 만이 하나의 이론이나 지식이 아닌 나에게 실질적으로 주님의 인격과 성품이 입어져서 장차 천국에서 그 효력성을 그대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목적에 맞는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믿는 사람들에게 이 의지세계 구원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신학이나 교리를 따라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바른 신앙의 길을 전혀 갈 수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닌 말로 기존의 신학에 따른 신앙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의지세계에 비하면 구원의 확신 면이나, 성화구원에 더 박차를 가할 수 있는 촉구성 면이나, 성화구원에 효력성 면이나, 성화구원의 결과에 대한 뚜렷한 욕심성이 훨씬 뒤떨어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성도의 세속화를 막는 면이나 성화구원의 결과 면에 있어서 의지세계 구원관을 따라 신앙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지세계 구원관은 인간의 타락 후에 구원이 시작된 것으로 보는 일반적인 구원론에 비해 우주만물을 만들기 전, 인간을 만들기 전인 영원 전의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우리의 구원이 예정 계획 설계된 것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영원 전서부터 우리의 구원이 예정되었다고 하는 성경말씀을 분명히 드러내주며, 아울러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현실의 형편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심지어는 심각한 죄악에 빠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원 전서부터 나에게 가지신 그 신실하심을 따라 ‘나는 영원 전서부터,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부터 천국에 보내기로 작정된 자다, 그러니 내가 돌아갈 곳은 하나님 품 안뿐이다’ 하는 자신의 구원의 확실성을 붙잡고 다시금 신앙을 회복하는데 크나큰 용기와 힘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상하고 차원 높은 신앙의 도리나 원리를 주장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이와 같은 효력이 없다면 그것은 단지 신앙이 아닌 하나의 종교일 뿐이요 하나의 이론이요 지식이요 학문이요 철학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다 같이 성화구원이 되는 것이라 해도 더욱 더 효과적이고 효력적인 것을 선택해서 그 길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천 원짜리 콩나물을 살 때도 100원이라도 깎아보려고 이 가게 저 가게로 돌아다니고, 더 싱싱하고 깨끗한 것을 찾아 이리저리 다니는데 하물며 우리의 영원과 관계가 되는 성화구원에 있어서 어찌 보다 더 효력적 효과적인 것에 대해 무관심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열심을 내서 부지런히 하나님을 믿되 보다 더 효율적이고 효력적이고 정확하게 믿는 것이 천국을 사모하는 자로서의 바른 믿음이요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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