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끽다거(喫茶去)는 본래 중국 조주(趙州)선사로부터 비롯된 화두(話頭)의 하나이다. 그는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차 한 잔 하고 가게’라는 법담(法談)을 전했다고 한다. 원근 각처에서 자신의 무거운 삶의 애환을 가슴에 담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큰 스님에게서 가슴이 뻥 뚫어지는 삶의 지혜를 얻고자 기대를 하였을 것인데 방문객들에게 한결같이 ‘끽다거(차 한 잔 하고 가게!)’로만 응수를 하니 얼마나 답답하고 실망스러웠을 것인가? 이에 참다못한 시자(侍者)가 “스님! 멀리서 오신 손님들이니 스님의 거룩한 깨달음의 진리를 한 마디 해 주시지요”라고 거들었다. 이때 조주스님은 “응 그래? 너도 끽다거!”라고 말씀하셨다. 과연 무슨 뜻일까?
또한 조주선사는 무자(無字)화두로도 유명하다. 한 제자가 “스님!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一切衆生)이 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 하여 생명이 있는 것이나 생명이 없는 것이나 모든 중생들은 모두 부처님이 될 수 있는 불성(부처의 성품)이 있다고 하셨는데 개(犬)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때 선사는 한 마디로 “무(無)!”라고 대답하였다. 제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니 왜 그렇습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역시 이번에도 스님은 “무(無)!”라고 대답하였다. 왜 그랬을까? 이렇게 해서 오늘날까지도 큰 의문(화두)으로 전해오고 있다.
불가(佛家)에 이러한 화두들은 자그마치 1,700공안(公案)이나 된다. 특징적인 것은 모두가 다 물음(의문)만 있지 그것을 풀 수 있는 어떠한 해법이나 답안은 전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연 화두(話頭·말머리)란 무엇일까? 화두는 그 의미 그대로 ‘말 한 마디 나오기 이전의 상태’ 곧 ‘언전대기(言前大機)’를 일컫는다. 우리가 뭔가 행동직전에 한 생각이 있고 그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성품(性品)이 있는데 화두는 바로 이 성품자리를 뜻하는 것이다. 가령 마음이라는 ‘마음자리’는 본래 한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요 호수요 거울 같은 것이었다. 이 마음에 괴로운 생각이 담기면 지옥이요 즐겁고 행복한 생각이 담기면 그것이 바로 극락(極樂)이다. 따라서 본래 텅 비어있는 그 마음자리가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지옥도 되고 극락도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여 ‘모든 것은 마음먹기(한 생각 일으키기)에 달려있다’라고 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이처럼 괴롭다거나 즐겁다거나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내 스스로가 한 생각에 끄달려(사로잡혀)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것이 아닐까 한다. 지금 괴로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그릇에 스스로 ‘괴로움(苦)’을 불러들인 것이요 즐겁고 행복한 사람은 역시 자신의 마음에 ‘즐거움(樂)’을 끌어들인 사람이다. 지금 당장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바꾸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우선 무거운 짐(괴로움)을 먼저 내려놓은 다음 그 빈자리에 즐거움을 채우는 일이 현명하다. 먼저 마음그릇을 비우라.
이러한 의미에서 화두를 들고 좌선이나 명상을 하는 까닭은 마음그릇을 비우는 일, 곧 무념무상(無念無想)의 본래 마음자리(본래면목)를 찾아가는 방법인 것이다. 텅 비어있는 거울을 보고 웃어도 보고 찡그려도 보라. 그 거울 속에 행복이 담기든 불행이 담기든 그것은 바로 내가 할 탓이다. 나의 행불행(幸不幸)은 부모형제 탓도 아니요 이 사회 탓도 아니다. 오직 내가 지어 내가 받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인 것 외 다름이 아니다. 따라서 ‘끽다거(喫茶去)’나 ‘무자(無字)’화두는 풀어내려고 애쓰지 말라. 답을 밖에서 찾으려 하지 말라. 모든 답은 질문자인 바로 나에게 있는 것, 내가 바로 답이다.
조주(趙州)선사의 끽다거(喫茶去)는 내게 상당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 화두에 왜(?)가 붙는 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모든 질문에 그 어떠한 특정의 답이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만 버린다면 구태여 답을 찾을 까닭이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바로 보고 받아들이면 그것이 바로 정답일 수 있다. 수영이나 승마, 싸이클과 같은 운동은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팬플룻과 오카리나 연주역시 이론보다는 몸으로 체득되어야 한다. 몸으로 학습(學習)된 것은 결코 잊혀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끽다거를 인용하여 용심론 인문학강좌 모임의 이름으로 ‘광주대각사끽다거’와 ‘제주끽다거’에 명명하여 쓰고 있다. 화두는 마음공부요 실천이다.
[퇴허자스님 칼럼] 끽다거(喫茶去), 차 한 잔 하게마씸! - 광주매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