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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동 시집 <무궁화 상소문>(리토피아, 2010)
|해설|
생에 대한 강렬한 긍정과 사무사(思無邪) 정신
김용락
김시동 시인은 내 제자이다. 지금부터 26년 전(1984년) 우리는 경북 안동에 있는 한 고등학교 교실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일곱의 나이로 그해 3월 교단에 첫 발을 내디뎠다. 같은 해 1월에 나는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온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라는 엔쏠로지에 시를 발표해 막 문단에 얼굴을 내민 신인 시인이기도 했다. 김시동 군은 당시 고교 2학년이었는데 그 이듬해 현장실습으로 학교를 떠나 현재 삶의 보금자리가 된 경기도 안산시에서 쭉 살고 있다. 그 동안 결혼해 가정을 꾸려 어엿한 가장이 되었고, 산업역군이 되어서 자기 몫을 훌륭하게 하고 있는 중견 사회인이 되었다. 참 고맙고도 반가운 일이다.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다. 불가(佛家)에서도 이 ‘인연’에 대해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나는 그 학교에서 3년 반 정도 근무하고 대구에 있는 언론사로 직장을 옮겼다. 그리고 김시동 군과는 인연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소위 반세기가 넘어 김 군이 시인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워낙 불민하고 부족한 선생이라 김 군이 고등학교 재학 할 때 뚜렷이 기억에 남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가르쳤다거나 보살펴 준 기억도 없다. 그런데 25년이 지나서 나를 찾아왔고, 시집 해설을 부탁하는 것이다.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인연의 깊고 무서운 의미를 이제야 조금 짐작하겠다.
시집 원고를 쭉 훑어보고 궁금했다. 고등학교 졸업 전 실습나간 그 현장에서 40대 중반이 되도록 직장을 옮기자 않고 중견 간부가 되어 있는 김 군이 시를 언제 썼을까? 왜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일요일도 없이 근무하는 빡빡한 일과 속에서 동료들은 산악회다 친목회다 하는 데, 자신은 갈 곳도 특별한 취미도 없어서 노트에 시를 끄적이기 시작해서 시를 쓴 노트가 30권 40권이 이상이 모였고, 이후 잡지를 통해 문단에 등단도 했다고 한다. 이번에 출간하게 된 이 시집도 그렇게 쓴 시 가운데 가려 뽑은 것이라고 한다.
김시동 시인의 예를 보면서 새삼, 문학이란 무엇인가? 창작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마침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한겨레신문>(2010. 9. 18)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려 있다. 영어판만 해도 4천만부가 팔렸다는 <동물동장>의 작가인 조지 오웰(1903-1950)이 ‘왜 쓰는가?’ 에 대해 말 한 게 보도되었는데 오웰은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네 가지로 고백하고 있다. 그가 글을 쓰는 이유는 첫째로는 ‘순전한 이기심’ 때문이라고 말 하고 있다.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얘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나를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그런 따위의 욕구 때문이고 제2, 제3의 동기는 미학적 열정과 역사적 충동인 데 ‘미학적 열정’은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다.
낱말과 낱말의 적절한 배열이 주는 묘미, 훌륭한 이야기의 리듬에서 찾는 기쁨, 혹은 글꼴이나 여백 따위에 대한 매혹일 수도 있고 ‘역사적 충동’은 기록 욕망을 말한다. 이것은 사물을 있는 대로 보고 진실을 후세에 보존하려는 욕구일 것이다. 영국 탄광지대 노동자의 밑바닥 삶을 기록한 르포 <위건 부두로 가는 길>과 스페인 내전 참전기 <카탈루냐 찬가>를 쓴 기자 오웰이 고백하는 글을 쓰는 이유다.
글을 쓰는 네 번째 욕구는 ‘정치적 목적’이다.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고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다. 정치와 예술의 분리 담론을 옹호하는 이들에게 오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김시동 시인이 글을 쓰는 이유를 오웰의 생각에서 찾는다면 아마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유 때문일 거 같다. 시를 쓰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좀 더 안정되게 유지하고 풍요롭게 하려는 의식이 김시동 시인이 시를 쓰게 된 첫 번째 이유이고, 다음은 어릴 때 떠나온 고향과 부모형제에 대한 추억과 사랑의 감정을 그림으로써 미학적 즐거움을 느끼고 싶었던 욕구 때문인지 모른다.
문학하는 것의 의미와 관련해서 최근 생태교양지 <녹색평론> 114호(2010. 9-10월호)에 실린 문학평론가 김종철 선생의 글 <대지(大地)로 회귀하는 문학> 이란 글도 의미심장하다. 이 글에서 김 선생은 이시무레 미치코(石牟禮道子)라는 일본 여류 작가의 소설 <슬픈 미나마타(원제는 苦海淨土>에 대해 언급하면서 ‘행복한 인간은 글을 쓰지도 않고, 쓸 수도 없고, 쓸 필요도 없다’고 하면서 작가 이시무레가 미나마타병(수은중독 공해병)에 걸려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해 그렇게 치열하게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시무레가 어렸을 때 불행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그 ‘불행한 의식’ 이 그녀를 뛰어난 작가로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김 선생은 사람들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나 좌절을 경험하면서 의식이 굉장히 날카로워지고 괴로움이 깊을수록 의식이 극한가지 가 닿으면서 그 극한에서 오히려 인간은 굉장히 풍요로운 생명감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요지의 말을 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 선생의 많은 글에서 문학적 영감을 받곤 하는 데 이번 글도 영감을 주는 탁견이다. 나는 이 글의 의미를 특히 김시동 시인이 곰곰이 곱씹어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물질적 빈곤이 곧바로 불행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물신주의 숭배의 자본주의사회에서 물질의 빈곤이나 문화, 사회적인 기반의 미확보 속에서 마냥 행복을 기대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김시동의 시를 보면서 문학대학도 다니지 않고, 요즘 그 흔한 평생교육원의 창작과정도 한 번 다니지 않고 이렇게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대견하기도 하지만, 좀 더 미학적인 눈으로 엄밀하게 따져본다면 한계가 없는 게 아니다.
감상(感傷)에서 벗어나지 못한 서투른 감정 표출, 불명확인 현실인식, 역사의식이나 사회의식의 빈곤 같은 문제는 앞으로 김시동 시인이 해결해야할 과제이다. 내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수도권 안산시 일원은 공단지대이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 시집에는 이런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 크게 보이지 않는데 이 점에 대해 김 시인은 좀 더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거 같다.
그러면 김시동 시인의 시를 읽어보자. 대부분의 시인이 그렇듯이 김 시인의 시 역시 자신의 고향과 유년에서 시작하고 있다.
뜨거운 열에 그을린 검은 피부
울퉁불퉁한 굵은 힘줄
논매고 돌아오시는 아버지 얼굴 같다.
속에서 우러나는 맛은
끝없이 자식 사랑하시는 땀의 맛이다.
비록 검을지라도
속은 비단결보다 곱다.
여리지만 탄력이 있는 피부는
아버지의 손바닥 같아서,
나는 짜장면을 먹지 못한다.
-<자장면>전문
먹을 것 없던 유년시절
거지가 따로 있는 거 아니라시며
밥그릇 들고 어디든
얻어 먹으로 가라시던 어머님.
쑥쑥 자라는 자식의 옷
챙기지 못해 한숨만 쉬시던 어머님.
아롱아롱거립니다.
그 자식들 동서남북 흩어져
오늘도 빈 그릇 채우려고
머슴 노릇 하고 있습니다.
맥 빠지는 날에도 빈 그릇 들고
일터로 가야합니다.
그래도 이 머슴에겐 그 시절처럼
꿈과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머슴> 전문
미움과 서러움이 발끝에서
머리까지 차곡차곡 쌓이고
하늘과 산천초목은 나를 비웃었다.
벗어나야 한다고 발바닥은 동동 구르고
신발은 나를 태우고
돌아보지 말고 가자고 했다.
낯선 거리는 나를 보고
냉정한 놈 정 없는 놈이라 하고
어둠은 울타리 되어 나를 가로 막았다.
힘겨운 삶 속에 너를 그리지만
쉼터가 되어야 할 너는
왜 나를 떠밀고 어디로 가라 했는지,
그 이유 알기 전에는
너를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냉정한 고향> 전문
인용한 <자장면> <머슴> <냉정한 고향>은 이 시인의 현실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뜨거운 열에 그을린 검은 피부/울퉁불퉁한 굵은 힘줄/논매고 돌아오시는 아버지 얼굴”을 자장면에 비유하고 그런 아버지에 대한 애정 때문에 자장면을 먹지 못하는 마음, 가난 때문에 “거지가 따로 있는 거 아니라시며/밥그릇 들고 어디든/얻어 먹으로 가라시던 어머님.”의 말씀을 듣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냉정한 고향’은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다.
근대 이후 고향이란 인간의 근원적인 삶의 터전이자 정신적인 안식처였다. 고향에서 밀려난 자가 대처에서 근대 문명의 폭력과 세속의 찬비바람에 휘청거릴 때에 고향이라는 존재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힘이 되었다. 그러나 김시동 시인은 아직까지는 그 고향과 화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힘겨운 삶 속에 너를 그리지만/쉼터가 되어야 할 너는/왜 나를 떠밀고 어디로 가라 했는지,/그 이유 알기 전에는/너를 제대로 볼 수가 없다.”는 진술이 그 근거이다. 물론 김 시인이 고향에서 밀려난 게 된 진짜 이유를 모르지는 않는다. 근대 산업사회의 노동력 이동의 큰 물결 속에서,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순수한 영혼이 갑자기 산업사회의 질서에 편입되었을 때 느꼈을 그 차가움과 비정함은 시인 스스로에게도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외진 모퉁이 연립 반 지하 각진 방.
퇴근해서 창문 열면 매일매일 나를 반기고
부끄러워 화살처럼 몸을 숨기는 것을 보면
너는 야행성이기에 환한 것은 죽음이구나.
으슥한 밤이 오면 너는 나를 찾아 온몸을 더듬고
애무에 키스까지 하니 널 외면할 수 없다.
온몸을 누비고 다녀도 지치지 않을 것이고,
나는 송장이고 보니 배는 고프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난 널 사랑하고 있는지 모른다.
끝내 나는 약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너에게 보금자리 빼앗기고도 미워하지 못했던 것은
하루도 잊지 않고 찾아주는 마음 때문이었다.
너와 나 사이에 남은 것이 하나 있다
너에게 돌려줄 수 없는 삼각형 입술자국이다.
-<바퀴벌레와의 동거>전문
주택 사거리 뒷골목 늦은 밤
지렁이의 간판은 졸고 있다.
콩나물 글씨도 꾸벅꾸벅 졸고 있고
잔업 마친 외국인 근로자 눈빛은
네온사인 불빛보다 더 빛나는 밤이다.
생김새는 분명 홍콩이다.
눈과 코 피부 머리 모양
각색의 옷차림과 덮어쓴 모자,
공중전화는 모르는 말소리에
잠들지 못하고 귀만 아프다.
노래방에서 흘러나오는 노랫가락에
휘청거리는 불법체류자의 젖은 두 가슴,
선술집 하품 속으로 들어가면
주택사거리 뒷골목의 밤은 술로 젖어 있다.
-<바람은 갈 곳을 잃었다>전문
산업역군이 되어 그가 올라온 수도권공단에서 그가 가장 먼저 마주쳐야했던 것은 바퀴벌레가 누비고 다니는 “외진 모퉁이 연립 반 지하 각진 방”이다. 그 속에서 시인은 “너에게 보금자리 빼앗기고도 미워하지 못했던 것은/하루도 잊지 않고 찾아주는 마음 때문이었다 ”고 말할 정도로 외로움에 치쳐있다. 그래서 반 지하 방 밖에 나와 보면 “휘청거리는 불법체류자”들이 넘쳐나는 뒷골목의 밤은 술에 젖어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김시동 시인은 현실과 생을 긍정한다. 신경림 시인도 <가난한 사랑노래>라는 시에서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가난하다고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라고 말 한 적 있지만 가난한 청춘에게도 사랑은 있고, 이 사랑은 결국 생에 대한 강렬한 긍정적 에너지로 변해 삶을 충만하게 해 준다. 이 과정에서 물론 이별도 있고 슬픔도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사랑은 인간의 영혼을 완성시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인용한 두 편의 시에서 김시동 시인의 사랑에 대한 입장을 읽을 수 있다.
긴 이별이 될 줄
하늘도 땅도 몰랐다.
세상에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어디에도 없을 텐데,
인연이 아니라고
삶은 나를 떠밀고 있다.
환청과 환영은
친해지려다 얻은 죄값이다.
당신 그리다 벌레 먹은 마음의 상처
단풍잎으로 변하고,
당신의 마음 알기 전에 떠나야 하는 것을
낙엽은 알고 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가는 것이 행복인지
어둠을 밀고 오는 해에게
묻고 싶다.
-<사랑이 깊으면 아픔도 깊다>전문
나는 당신을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눈이 부시어 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을 만질 수도 없습니다.
너무 뜨거워 손을 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빛나는 눈빛과 뜨거운 정열은
나를 미치게 하지만 다가갈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는 이 마음 깊은 속에는
응어리만 알알이 맺혀갑니다.
저녁이면 어딜 가는지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도 자꾸 미련이 남아
당신 계시던 곳을 바라봅니다.
초생달만 쓰라린 외로움을 더해줍니다.
역시나 사랑한 것도 죄인가 봅니다.
-<태양을 사랑한 사람>전문
그렇다 사랑이 깊으면 아픔도 깊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슬픔은 인간을 절망의 상태나 폐허의 상태로 그냥 방치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사랑을 가져다주고, 그 새롭게 등장한 사랑은 역시 인간들에게 생의 강렬한 활력소가 되는 게 분명하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부부가 되고 아이 낳고 한 가족을 꾸려 사회 구성의 기초가 된다.
인용한 <새끼줄부부>는 이런 사실을 소박하게 그린 시이다. 둘이 함께 할 때 비로소 기쁨은 두 배가 되고 슬픔은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 시는 주장하고 있다.
당신 한 가닥
이 몸 한 가닥
부둥켜 살지요.
꼬깃꼬깃 탄탄한 인생
잡아당길 때나 가둘 때나
둘의 힘은 배
살 비비며 살아가지요.
먼저 가는 일도
뒤처져 오는 일도
둘은 나란히
한평생 같이 가는
새끼줄 부부지요.
-<새끼줄부부>전문
김시동 시인이 조선조 중기 대유학자인 퇴계 이황을 배출한 경상도 안동 예안땅에서 태어나, 안동 시내에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도권 안산시까지 흘러들어와 산지도 어느덧 30년을 앞두고 있다. 순수하고 영혼이 맑던 한 어린 소년이 자본주의의 차가움과 비정함이 가장 예각적으로 드러나는 수도권 공단지역에서 보고 겪었던 삶의 정서와 감정이 이 시집에 잔잔하게 그려져 있다.
때론 아픔과 슬픔으로, 때론 분노와 절망의 몸부림으로 표출한 이 시집은 김시동 시인의 청춘의 비망록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김시동 시인 개인에게 이 시집은 하나의 역사이자 자신 삶에 대한 거짓 없는 증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시집을 읽는 독자들에게 감동을 줄게 분명하다.
그러나 앞 서 지적한 것처럼 이 시집에 실린 시편들은 지나치게 소박하고 단순하다. 그리고 시로 충분히 농익지 않은 센티멘탈과 관념으로 그치는 경우도 많다. 시인 자신이 압축적이고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추동한 성공한 후발자본주의국가인 대한민국의 수도권 공단지대, 주변에 흔히 마주치는 외국인노동자, 피할 수 없는 고단한 일상의 노동 등 좋은 소재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에게 좀 더 깊이 있고 냉정한 눈길을 주지 못했다는 한계는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첫 시집이 완전히 만족스런 시집은 아닐지라도 이제 제대로 된 시인의 길로 들어서는 이정표는 충분히 되리라 본다.
그것은 공자가 이야기 했듯이 김시동 시인에게는 힘든 노동의 시간과 격심한 세파가 있었음에도 인간 본연의 순수함을 잃지 않은 ‘사무사(思無邪)가 있고, 생에 대한 강렬한 긍정이 있기 때문이다. 아래 인용한 <무궁화상소문>은 그런 시인의 정신적인 자세를 잘 보여주고 있다.
“향기에는 미련 없이 중도를 지키며/신의와 정직 그리고 정의,/어느 누구에게도 기울지 않는 평등까지,/실핏줄 터지도록 꽃잎에 적어 해를 향해 투쟁” 하듯이 자신을 에워싼 역경과 싸우면서 한 줄의 시를 쓰듯이 인생을 오롯이 꾸며가는 김시동 시인 앞날에 문운과 행운이 있기를 기대하며 시집출간을 다시 한 번 축하한다.
그늘에서는 마음껏 필 수가 없다.
하늘을 보고 해가 나를 볼 때까지.
향기에는 미련 없이 중도를 지키며
신의와 정직 그리고 정의,
어느 누구에게도 기울지 않는 평등까지,
실핏줄 터지도록 꽃잎에 적어 해를 향해 투쟁이다.
해가 뜨면 스스로 펼쳐 보이고,
읽고 나면 스스로 돌돌 말아 부끄럼 없이 낙하한다.
나의 고귀한 상소문 읽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는 다는 것쯤은 알아야 한다.
진실과 믿음 맺어지지 않는다면
애당초 꽃으로 피지 않는다.
-<무궁화상소문> 전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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