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아름다운 풍속
번역문
반송사(伴送使) 허종(許琮)이 하직 인사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신이 오는 길에 명(明)나라 사신과 우리나라의 풍속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사신이 이르기를, ‘선대 황제의 실록을 만들 때 그 내용을 싣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비록 믿을 수 없는 말이기는 합니다만,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속이 중국 조정에 알려지게 된다면 또한 다행일 것입니다. 예컨대 상제(喪制)나 직전(職田), 또는 재가(再嫁)한 여자의 자손에 대하여 그 관직의 진출을 막는 것과 같은 사항들을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모두 기록하여 신에게 보내도록 하소서. 그러면 신이 사신과 한담을 나눌 때 그 내용들로 부탁해보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이 아뢴 대로 하겠다.”
하였다.
원문
伴送使許琮辭, 仍啓曰: “臣在路上, 與天使言本國風俗, 天使云: ‘修先帝實錄時, 當載之矣.’ 此雖不可信, 使本國美俗傳播中朝, 亦幸矣. 如喪制, 職田, 再嫁女子孫禁錮事, 令該曹盡錄, 送付於臣, 則臣與天使閑話時, 欲以此囑之.” 傳曰: “當如卿啓.”
- 『성종실록(成宗實錄)』 19년 3월 18일 1번째 기사
해설
성종 19년 봄에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새 황제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조선에 왔다. 그때 동월을 맞이하러 나온 허종(許琮)은 솔깃한 제안을 들었다. 자신에게 조선의 아름다운 풍속을 알려주면 나중에 명나라의 실록을 만들 때 그 내용을 실어주겠다는 것이다. 허종은 이 제안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문화를 중국에 알림으로써 조선이 당당한 문명국임을 입증할 확실한 기회를 허종은 놓치지 않았다.
허종은 성종에게 동월의 제안을 보고하고 중국에 자랑할 만한 아름다운 우리 풍속을 기록으로 만들어 보내주길 요청했다. 그리고 그 예시로써 다음의 세 가지를 언급했다. 첫째는 상례(喪禮)에 관한 예법, 둘째는 관리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인 직전(職田), 셋째는 재가(再嫁)한 여자의 자손에 대하여 관직의 진출을 막는 일(이하 ‘재가녀자손금고법(再嫁女子孫禁錮法)’) 이 그것이다. 이중 재가녀자손금고법은 성종의 결단으로 비로소 제정되었고 당시 성종의 법 제정에 적극적으로 찬동했던 대표적 인물이 바로 허종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본래 조선에는 재가(再嫁)를 제한하는 제도가 없었다. 다만 삼가(三嫁)한 여성은 실행(失行)한 것으로 간주해 성적으로 문란한 부녀자의 명단인 자녀안(恣女案)에 이름을 기재하고 그 자손을 주요 관직에 등용하지 않는 법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성종 8년에 그 법을 더 강화하여 재가한 여성의 자손은 아예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처가 시행되었고, 성종 16년에는 이 내용이 《경국대전》에 실려 국법으로 명문화되었다.
의리와 지조를 강조하는 유교 사회에서 여성의 정절은 언제나 지켜져야 할 도덕으로 인식되었으나 여성의 재혼에 제도적 제약을 가한 경우는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에도 없던 일이었다. 물론 그런 점 때문에 윤리 문제에 엄정한 조선 사회의 면모를 잘 드러내는 독특한 풍속으로서 중국에 소개될 법도 했고, 더욱이 허종의 입장에서 이 법은 다름 아닌 지금 자신이 모시고 있는 임금의 치적이고 자신도 거기에 적극 찬성한 바 있으므로 이 기회에 꼭 언급해 두고 싶었을 것이다.
허종의 바람대로 재가녀자손금고법에 관한 내용은 이후 동월을 통해 중국에 알려졌다. 동월이 사행을 마치고 조선의 풍물을 알리기 위해 지은 작품인 《조선부(朝鮮賦)》에 ‘재가한 여자의 자식은 학식이 뛰어나도 사류(士流)에 낄 수 없다네.’라는 대목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러면 그 당시 조선 내부에서도 과연 재가녀자손금고법이 모두에게 아름다운 풍속으로 받아들여졌을까. 사실 여성의 재혼에 제도적 제약을 가하는 문제는 성종이 처음 발의했던 순간부터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이 법이 처음 논의되던 날의 《성종실록》 기록에는 총 46명에 달하는 신하들의 의견이 실려있는데, 그중 허종을 포함한 단 4명 만이 법의 제정에 찬성했고 나머지 대부분은 이를 반대했다.
신하들은 여성의 재혼 그 자체를 법으로 금지해서는 안 되며 기존의 세 번 결혼한 여자의 자손을 등용하지 않는 법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맞섰다. 또 여성의 재혼을 제약할 법이 꼭 필요하다면 부득이한 사정이 없는데도 함부로 재혼한 여성에 대해서만 그 자손을 등용하지 않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반대의 논거로 든 것 중 대표적인 문제는 과부의 생계였다. 조선시대에 사족 부녀자는 남편이나 자식, 혹은 친척의 도움이 없으면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으므로 재혼을 막는 것은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자식도 없고 보호해줄 친척이 없는 과부가 집안의 논의를 거쳐 재혼하는 경우나, 외동딸이 남편에게 의지해 부모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상황에서 과부가 된 경우 등, 부득이 재가할 수밖에 없는 사례에 대해서는 실행(失行)한 여성과는 다르게 처우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일부종사 원칙의 완벽한 실행을 꿈꾸는 패기 넘치는 젊은 임금에게 부녀자의 죽음은 그저 ‘작은 일’에 불과했다. 성종은 ‘굶주려 죽는 일은 작은 일이고 절개를 잃는 것은 큰일이다.’라는 중국의 성리학자 정이(程頤)의 말을 내세워 40여 명에 달하는 신하의 반대를 묵살하고 ‘재혼한 여성의 자손을 사판에 올리지 않는다.’라는 명을 내려 기어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재가를 직접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예외도 없이 재가한 여성은 곧 실행한 여성임을 못박은 것이다.
한편 재가를 통렬히 규제하고자 한 결연한 의지가 무색하게도 ‘재혼한 여성의 자손을 사판에 올리지 않는다.’라고 한 명령은 당장 그대로 현실에 적용되기에 무리가 있었다. 재가(再嫁)한 여성의 자손, 심지어는 삼가(三嫁)한 여성의 자손들이 유능한 관리로서 요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법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대뜸 이들을 모두 축출하는 것은 국가 운영상의 큰 타격이었으며 또 실제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실은 명나라 사신에게 자랑스럽게 재가녀자손금고법을 소개하던 바로 그해에도 조정에서는 세 번 개혼한 여성의 자손을 등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논쟁이 벌어졌다. 새로 제정한 법에 따라 개혼한 여성의 자손은 모두 개차하여 요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서릿발 같은 사헌부의 간언이 이어졌지만, 성종은 상기한 현실적 제약으로 인해 결국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며 어물쩍 그들을 그대로 등용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이 당시 재가녀자손금고법은 ‘아름답다’라고 하기엔 그것이 초래할 폐단이 빤하고 ‘풍속’이라고 하기엔 아직 현실에 온전히 적용하기는 어려운 우려스럽고 어색한 법령이었던 것이다.
재가녀자손금고법이 조선 사회에 안착하여 풍속이라고 이를만한 기조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더 후대의 일이었다. 17세기 초반의 저술인 《지봉유설(芝峯類說)》은 ‘성종 때 재가녀자손금고법이 만들어진 이후 사대부 집안에서 과부를 재가 시키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과부들이 많아졌다.’고 하였으며, ‘이 법에 의해 교화된 부녀자들이 임진왜란 때 스스로 정조(貞操)를 지켜 몸을 더럽히지 않고 자결하였다’고 전한다.
이를 통해 부녀자 재가에 대한 금기가 강화됨에 따라 일부종사의 원칙과 여성은 반드시 한 명의 남편과만 성적 접촉을 해야 한다는 정조에 대한 강박 관념도 함께 심화하여 간 양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애초에 정절을 위하여 여성의 죽음은 ‘작은일’로 치부하며 성립된 이 법은 점점 더 비정한 방식으로 여성을 억압했고, 종래에는 성적으로 순결하지 않은 여성의 폐기(자기 자신의 폐기를 포함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풍조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로서 병자호란 이후 벌어진 환향녀에 관한 논란을 들 수 있다. 청나라 군사에게 끌려갔던 아내들이 집으로 돌아오자 대다수의 남편이 포로로 끌려갔던 여자는 재가하여 실절한 여자와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며 이혼을 요구했다.
환향녀 남편들의 이혼 요구가 발생한 초반에는 나라에서 포로로 잡혀간 것과 재가한 것은 경우가 다르다며 아내와의 이혼을 금지했었다. 그러나 이미 사회적으로 만연한 순결하지 않은 여성에 대한 혐오 감정은 왕명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효종 때에 이르러 환향녀와의 이혼이 공식적으로 승인됐고, 간신히 살아 돌아온 아내들은 남편에게 버림받고, 그 자손은 실행(失行)한 여성의 자손으로 낙인찍혀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여성에게 정절을 강요하고 그것을 법으로 통제하려는 일체의 시도가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재미있는 점은 여성의 정절을 국가에서 단속하는 것을 당연한 상식으로 여겼을 당대 지식인들 가운데서도 이 법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줄곧 있었다는 것인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송시열(宋時烈)이다. 그는 권시(權諰)에게 보낸 편지에서 과부의 재가를 제한하는 법의 불합리성을 주장하며 ‘대체적 원칙은 그렇지만 사람으로서 어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라는 주희(朱熹)의 말을 논거로 들었다. 이 말은 ‘굶어 죽은 것은 작은 일이고 정조를 잃는 것은 큰일이다.’라고 말한 장본인인 정이(程頤)가 도리어 과부가 된 자기 조카딸을 재혼시킨 그 모순적 행위를 변호한 것이다. 송시열은 주희의 이 말을 몹시 극찬함으로써 하나의 원칙도 결국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처지에 맞게 재조정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백성의 생계에 관련된 절박한 문제와 자의와 상관없이 겪는 불행을 외면하는 방식으로 제정되고 운영된 재가녀자손금고법은 결국 사회구성원 사이의 미움과 불신을 조장하였고 그 피해는 법의 적용을 받는 백성뿐만 아니라 법 집행의 주체인 국가에도 미쳤다. 국가는 이법을 통해 여성의 실행(失行)을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지만 ‘부부 사이의 신의’라는 또 다른 가치를 손상시켜야 했고, 과부의 증가 및 부부의 해체와 같은 사회 문제도 떠안아야 했다. 결국 성종이 누군가의 절박함과 불행을 잘 헤아려 배려하는 것이 법과 원칙의 실현에 있어 대전제가 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그 순간부터 그가 만들어 낸 법은 결코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없던 것이 아니었을까.
글쓴이 최소영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출처]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