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輓詞) [ 계동 전경창 선생을 애도하며 ]
지평(持平) 홍인서(洪仁恕)
司馬聯名乙卯年
情深兄弟義已全
李生客死人皆慟
韓子官卑命獨偏
千里孤魂返舊室
九原靈櫬隔新阡
都門數曲薤歌怨
執紼難堪涕自漣
사마시에 나란히 이름 걸던 을묘년
정은 형제처럼 깊고 의리는 온전하였다네.
이생(李生)이 객사(客死)하니 사람들이 다 슬퍼하였고
한자(韓子)가 관직 낮은 건 운수 유독히 박복했음이네.
천 리에 외로운 혼이 옛집으로 돌아가니
구원(九原)의 영구가 새 무덤을 사이로 했네.
도성 문에서 부르는 두어 해로(薤露)의 노래가 원망스러운데
상여 줄잡은 마음 가눌 길 없어 눈물이 줄줄.
142. 을묘년 : 1555년으로 명종 10년이다.
143. 이생(李生)이 객사(客死):
당나라 문인 이관(李觀)은 한유(韓愈)의 벗이었다. 문장을 지을 때 전인(前人)의 글을 답습하지 않았다. 퇴지와 실력을 겨루었는데, 29세에 타향에서 요절하자 퇴지가 묘지(墓誌)를 지어 슬퍼하였다. < 舊唐書 卷 190 下〉
144. 한자(韓子) 당나라의 문호 한유(韓愈)를 가리킨다. 한유는 오랫동안 낮은 벼슬을 전전했다.
145. 저승.
[출처] 국역 계동선생문집 [國譯 溪東先生文集]
● 홍인서 [ 洪仁恕 ]
정의
1535(중종 30)∼? 조선 중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응추(應推). 홍귀손(洪貴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성 홍이평(洪以平)이고, 아버지는 홍덕윤(洪德潤)이며, 어머니는 유의신(柳義臣)의 딸이다. 형은 부제학을 지낸 홍인경(洪仁慶)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55년(명종 10)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1573년(선조 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이후 의정부가 작성한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다. 1583년 사간원헌납이 되어 이이(李珥)의 거조(擧措)가 온당하지 못하며, 정철(鄭澈) 또한 사류들을 잘 모함한다고 비판하는 동시에 스스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나 곧이어 인척인 민정명(閔定命)이 장령이 되자 상피(相避: 일정한 인척 관계에 있는 자는 같은 소속의 관청에서 근무하는 것을 피함.)하여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자 왕이 민정명에게 외방직을 맡게함으로써 인서도 계속 지평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후 예조정랑·사헌부장령,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여 간관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특히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이후 선조가 경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해 오자 당시 개성부유수로서 동요하던 백성들을 효유하여 안정시켰으나 곧바로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러다가 1593년(선조 26) 호조참의가 되었지만 전란의 와중에서 병을 이유로 동궁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였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인서 [洪仁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