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실 아기씨의 탄생(나라의 복을 담은 태 항아리)
● 안태문화
생명의 시작인 태(胎)를 소중하게 여기고 신앙적인 차원에서 다루는 것은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문화이다. 하지만 태를 다루는 방법은 그냥 땅에 묻기, 인형과 함께 관에 넣기, 나무에 매달아 놓기, 태우기, 강이나 바다에 떠내려 보내기, 등 다양하지만 매장이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다. 조선도 태를 깨끗이 씻어 술로 소독 후 항아리에 넣어 땅에 묻었다.
● 조선왕조 태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 하는 것으로서 부모와 자식을 연결해 주는 고리로 효(孝)의 상징으로 믿어 함부로 버리지 않고 신성시 하였다. 특히 왕실에서는 왕족의 태를 묻고 태실을 만드는 일이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하여 국운의 융성을 기원하는 국가적인 행사로 진행 하였고 조선왕조 전 시기에 걸쳐 고유한 왕실 의례로 지속 되었다.
또한 당나라 승려 일행(一行)의 육안태법(六安胎法)에 남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벼슬이 높으며 병이 없을 것이요, 여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얼굴이 예쁘고 단정하여 남들이 공경하고 우러러보며 사모한다, 하였다.
태는 대게 태옹(胎甕) 이라는 항아리에 안치 하는 것이 통상이었으나 왕세자 왕세손 등 왕위를 직접 계승할 위치에 있는 사람의 태는 훗날 태봉(胎封)으로 봉해질 것을 감안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안태(安封)는 길방(吉方)에 안치해 두었던 태를 남아는 생후 5 개월 여아는 생후 3개월째 되는 날 하였다.
태는 출생 후 3일 내지 7일째 깨끗한 물로 100번 씻고 향기로운 술로 한 번 더 씻어 작은 항아리에 담았다. 이 항아리를 기름종이와 파란명주로 봉하고 태의 주인과 날짜 등이 적힌 붉은 패찰을 달아 붉은색 끈으로 한 번 더 밀봉한 다음 다시 큰 항아리에 넣은 후 빈공간은 솜으로 채웠다.
태실(胎室)은 왕 자녀들의 태를 땅 속에 뚜껑을 갖춘 원통형의 석함(石函)을 마련하고 생년월시 및 태를 묻은 날의 연월일시를 새긴 태지(胎誌) 등도 함께 묻고 표석을 세운 것으로 석물(石物)을 세워 왕실 위엄을 더 했으며 전국 각지 명당을 찾아 만드는 것이 관례였다.
왕세자는 지표 높이 50 ~ 100m 정도 되는 계란형의 단독봉우리를 골라 태실을 만들고, 기단 위에 둥근 몸돌을 얹은 석물과 팔각형의 난간을 해 마치 작은 왕릉을 연상시켰다. 비석과 금표를 세워 신성시하였고 사람의 접근을 막아 벌모(伐毛), 채석(採石), 개간(開墾)을 못하게 하였고 4명의 수호군사를 두었다.
태의 주인이 왕이 되면 석물과 난간을 더욱 웅장하게 하고 태실주변에 사찰과 수호군사 8명을 두어 관리 했다. 왕의 태실은 3개의 비가 있다. 태실을 세울 때 만든 아기태실비, 태의 주인공이 왕위에 오른 후 만들어진 왕자 비, 왕이 죽으면 그의 업적을 기리는 비이다.
조선왕조의 태실은 조선후기까지 130여 곳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1928년 조선왕조의 권위를 하락 시키고 민족의 긍지를 말살하고자 하는 일제의 음모에 의해 조선 역대 임금의 태실을 대부분 서삼릉으로 옮기고, 전국 태실을 대부분 훼손하였다. 현재 경북 성주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 등 3~4곳이 원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 태(胎)항아리 : 태호(胎壺), 태항(胎缸) 또는 태옹(胎甕)이라고도 불리는 왕실 이나 상류층 아기의 태를 담아 보관하던 항아리(어깨에 구멍이 뚫린 4개의 귀가 달려있다.)
※ 안태(安胎) : 항아리에 보관된 태를 태봉지(胎封址)를 선정해 묻는 것
※ 태봉(胎峰) : 왕실의 태를 봉안하는 태실 가운데 그 태의 주인이 왕으로 즉 위하면 태실을 봉(奉)하는 제도,
또한 왕실에서 태어난 갓난아이의 태를 묻는 것이나, 그 지역 을 말한다, 태봉(胎封), 태산(胎山), 태봉지(胎封址), 등의 명칭이 있는 지명은 이곳에 태실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 태지석(胎誌石) : 앞면에 태 주인의 이름과 출생 년,월,일,시,가 적혀있고 뒷면에
안태일의 년,월,일,시,가 적혀 있다.
● 백자도병(百子圖屛)
아이들이 건강하고 훌륭하게 자라기를 기원하는 길상화(吉祥畵) 이다.
완전한 많은 수를 상징하는 백(百)과 아들을 뜻하는 자(子)를 결합하여 백 명의 아이들과 같이 많은 자손을 낳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결혼한 여자와 아이들 방의 장식용으로 사용 되었고, 궁중혼례 때 간택된 세자빈이
머무는 별궁에 설치하기도 하였다.
● 자손번창 문양
동자(童子) - 다손(多孫) 다남(多男)
포도넝굴 - 자손번창
석류 - 다손 다남
봉황 - 부부화합과 다산, 번영, 상징
연꽃, 덩굴식물 - 자손 생산의 연속성,
연밥 - 다손과 풍성한 자식생산
물새 - 잉태와 득남
나비 - 남녀 화합과 장생(長生)
물고기 - 어(漁)의 중국발음이 여유를 의미하는 여(餘)와 같아 부귀여유(富貴 餘裕)를 상징하여 부귀, 경사, 자손의 번성
구추봉(九雛鳳) - 아홉 마리 새끼를 거느린 봉황으로, 다손
● 탄생당(誕生堂) 현판 - 영조가 80세(1773)에 1694년 자신이 태어난 산실 (産室) 창덕궁 보경당을 기념하기 위하여 친필로 써서 에 걸었다.
● 산실구봉안(産室具奉安) 현판 - 산실을 설치하는데 필요한 물품을 소중하게 보관 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영조가 80세에 쓴 현판이다.
● 임산예지법(臨産豫知法) - 왕실에서 산모가 출산 전후에 알아야 할 모든 것 을 정리해 논 내용의 글이다. 첩으로 되어있는 이 자료의 원래 의 이름을 알 수 없어 맨 앞에 기록된 임산예지법을 이름을 한 다. 중간 이하가 훼손되어 없지만 조선 왕실의 출산 지침을 알 려 주는 유일한 자료로 가치가 높다.
●백일 - 삼신상을 차리고 아기씨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그동안 어려운 고 비를 넘기고 건강하게 자란 것을 축하하고 성장과 장수를 기원하는 행사(양육자 포상, 과거시험, 경범죄자 석방, 등)를 치렀다. 친인척 과 관료들의 문안을 받았고 신하들은 아기씨를 볼 수 있었다.
※삼신 -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인간세상에서 출산을 돕고, 산모와 갓난아기를 보 호하며, 자식 갖기를 원하는 부인에게 아기를 점지하는 신인데, ‘삼신할 매’, ‘제왕할매’, ‘제왕님네’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여성신격이다.
● 돌(초도初度) - 궁중에서는 일반 민가와 달리 미나리 한 다발을 홍실로 묶 어 놓기도 하였는데, 미나리처럼 사철 푸르고 장수를 염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 왕실가족 탄생일 현판 - 하단부가 쪼개져 사라져버린 현판으로 철종 비 철 인왕후는 없고 효명세자 익종의 부인 신정왕후가 기록 되어 있는 것 으로 보아 1878년~1890년 고종 때 제작된 것으로 게시된 장소는 알 수 없다.왕, 왕비, 동궁, 여러 빈의 생일, 선원전 다례 날짜, 민비의 사친(私親)기일, 명나라 세 황제의 기일이 적혀 있다.
● 보양청(輔養廳) 현판 - 왕실의 원자(元子)와 원손(元孫)의 보호와 양육을 맡아보던 관청의 현판으로 숙종 어필로 추정
● 문효세자 보양청 계병 - 정조 8년(1784) 1월 창덕궁 대은원에서 있었던 문 효세자와 보양관(보양청에서 세자, 세손의 교육을 맡은 관직)의 상 견례를 기록한 그림 병풍
● 봉부인등록(奉夫人謄錄) - 왕자나 왕녀에게 젖을 먹이던 여인을 ‘유 모’라 했고 그 아이가 왕이 되면 외명부 종 1품에 해당하는 작호(爵號) 봉부인에 책봉 되었다. 이 봉부인에게 매년 지급하는 공상 (供上) 물품의 기록
● 장조태실(사도세자) : 경북 예천군 효자면 명봉리(황정산 자연휴양림 근처), 사도세자는 원래 가봉(加封) 대상이 아니었으나 정조 가 추숭사업으로 했다. 이 태실 아래 문종(文宗)의 태실이 있다.
● 순조태실 :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속리산 안쪽 ,
● 헌종태실 : 충남 예산군 덕산면 가야산 명월봉(옥계저수지 근처)
● 순종태실 : 충남 홍성군 구향면 태봉리(서해안고속도로 홍성IC 근처)
● 명종태실 :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농협 서산한우목장내 개심 사 근처) 2018년 3월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조선 왕실의 많은 태실은 일제에 의해 본래의 자리에서 옮겨졌거나, 변형된 경우가 대부분인데 명종대왕 태실 및 비’는 조선왕조실록 등에 관련 기록이 상세히 전해지고 원 래의 자리에 온전하게 남아 있으면서 주변 지형 등 환경 까지도 비교적 잘 보존돼 있어있다. 태실에 봉안됐던 태항 아리와 지석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경 일제에 의해 경기 도 고양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겨졌다가, 1996년 국립문화 재연구소의 발굴조사를 통해 수습해 국립고궁박물관에 이 전, 보관하고 있다.
● 태항아리는 조선의 도자기 변천사를 따라 그 때 그 시절 가장 좋은 도자기로 만들어 졌기에 조선초기에는 분청사기 조선 후기에는 백자를 사용 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도굴되고, 일제가 1928년경 대부분의 태실을 훼손하여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겨버려 정확한 실체는 알 수 없다.
첫댓글 참 오랜만에 올리는 글이다.
나의 해설을 위해 나의 편의 위주로 정리한 내용이다.
누군가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