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목사는 1902년 12월 29일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아버지 한도풍(韓道豊)과 어머니 청주 이(李)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진광소학교를 거처 오산학교에서 이승훈 조만식 선생을 통해 민족정신에 눈뜨게 된다.
평양 숭실대학 이과를 졸업후, 미국 유학의 길에 올라 엠포리아대학과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했다. 1932년 귀국 후, 1933년 신의주 제2교회에 전도사로 부임, 1934년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1945년 8월 15일 소련군이 진주하자, 공산화를 막기 위해 윤하영 목사와 함께 신의주자치회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하였다. 1945년 10월 월남 후, 같은 해 12월 2일 영락교회의 전신인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민족과 교회의 재건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한편, 후진 양성을 위해 교육 사업과 모자원, 고아원 등의 사회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홀트양자회 이사장 및 세계선명회 이사장, 숭실대학 학장, 이사장, 장로회신학대학교 이사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0회 총회장과 한국기독공보사 사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을 역임했다. 영락학원 이사장,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총재, 군복음화운동후원회 회장,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명예회장 등의 직을 역임하며, 한국 기독교·문화·교육 등의 분야에 평생을 헌신했다.
그는 평생을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에 대한 사랑의 봉사자요, 한국 교회 부흥의 최고 기여자요, 국내 및 해외선교사역을 널리 펼쳐 나간 세계선교와 평화의 지도자로서 1992년 ‘템플턴상’을 수상하였으며,‘국민훈장 무궁화장’과 ‘건국공로장’을 받았다.
2000년 4월 19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 그간 남긴 것은 휠체어와 지팡이, 털모자, 입던 옷가지 몇 점, 생필품이 전부였다. 주요 저서로는『건국과 기독교』, 『신자의 사회적 사명』, 『팔복』,『민주국가의 정신기초』,『한경직 목사 설교전집』,『병상에서의 묵상』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