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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溪 박희용의 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6월 9일]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금지된 이름 19인 (1)
조선의 혁명, 무엇을 할 것인가 박헌영,
‘피와 순수의 시대를 살아간 항일독립운동가 19인의 이야기’란 부제를 단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는 1960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장편소설 『파업』으로 제2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한 안재성이 지었고, ‘도서출판 인문서원’에서 2015년에 발행하였다.
이 책에 등장하는 19인은 부제대로 항일독립운동가이다. 독립운동가라도 평범한 인물들이 아니라 뚜렷한 업적을 이룬 유명 인물들이다. 그들은 모두 공산주의자였다. 일제 치하 항일운동의 주력은 공산주의자들이었으며, 1920년대 후반 이후 중국에서의 무장 투쟁도 온전히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계승되어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목처럼 한국 현대사에서 잃어버림을 당했다. 현대 한국에서 외면, 소외, 부정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 석 자는 잃어버려 잊혀진 게 아니라 알면서도 역사의 지층 깊숙이 매장되어 있다.
그들은 조선, 식민지, 해방 조선의 시대를 살았다. 조국과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대열에 앞장서서 맹렬하게 투쟁했다.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부터는 반국가사범이 되었다. 그들은 1925년에 결성된 이래 20년간 지속한 조선공산당의 주류인 중앙위원들로서, 이승만 대통령 중심의 대한민국에 참여할 수 없었고, 폭력적인 탄압을 당하자 대거 월북하여 북한 정권에 참여하였다.
이후 그들의 행적은 다 알다시피 6.25 남침 전쟁 계획과 참전이었고, 전쟁 말기부터 시작된 숙청으로 역사의 현장에서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저자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대 공산주의 이론과 실천이 가진 맹점들, 치명적인 오류와 잘못들에 대해서는 더 많은 아픈 지적을 나열할 수 있다.
다만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일제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그들의 생애를 기록해두고 싶은 마음이다. 4천 년 역사상 처음으로 평등의 가치를 체계화하여 자본주의의 야만성과 투쟁했던 이들이기에 더욱 소중하다. 이들은 비록 오류와 잘못도 많지만, 우리 역사에 평등의 가치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이들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본다」
먼저 19명의 이름을 부제와 함께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의 혁명, 무엇을 할 것인가 박헌영,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이관술, 고요하고 거세게, 불꽃은 타오른다 이주하, ‘소’라고 불린 사나이 김형선, 혁명에 배신당한 한국전쟁의 영웅 이승엽, 조국 해방에 오롯이 바친 40년 홍남표, 하룻밤에 야체이카 하나씩을 만들고 김삼룡,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북으로 간 ‘조선의 로자’ 이순금, 중공이 사랑한 조선 최고의 무장 김무정, 조선공산당은 위조지폐를 발행하지 않았다 권오직, 소비에트의 대나무 홍덕유, ‘10년 후 대통령감’으로 손꼽힌 엘리트 이강국, 베레모를 쓴 모던보이에서 카프문학의 전사로 임화, 10년 감옥 생활 빼면 이제 겨우 스물셋 박진홍,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북한의 헌법을 기초하다 최용달, ‘사상 기생’과 붉은 연애론 정칠성, ‘조선의용대’의 주석 김원봉.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자, ‘가장 목소리가 크고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는’ 조선공산당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명확했다.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도 용인한다는 원칙이었다.
친일 경찰과 극우 청년단의 무자비한 탄압은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저항에 나서게 만들었다. 미 군정의 탄압에서 살아남기 어렵게 된 박헌영은 1946년 가을에 월북한다.」
‘어떠한 수단도 용인한다’는 원칙과 ‘무자비한 탄압’에 ‘극단적인 저항’은 필연이다. 이 필연에 따라 남한 각 지역의 폭력 항쟁과 공산주의자 대거 월북, 6.25 남침 전쟁으로 현대사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상적인 소리일지 모르지만, 이 필연의 ‘극단적인 저항’의 붉은 깃발을 내리고, 분하고 억울하지만 피눈물을 삼키며 ‘온건한 저항’을 선택했다면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을까. 명색이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는 미국이 아무리 ‘어떠한 수단도 용인한다’는 원칙을 정했지만 구속한 공산주의자들을 재판도 없이 총살형에 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악독한 일제경찰 치하에서도 감옥살이를 하지 않았는가 수많은 공산주의자들. 박헌영과 조공 지도부의 선택이 이후의 역사를 만들고 말았다.
역사의 물줄기는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이 원칙이지만 시대에 따라서는 지도자들의 선택에 의해 물길을 바꾸기도 한다.
이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40년 초, 경성콤그룹을 조직하기 위해 그는 여러 사람을 직접 만나러 다니는데, 경성제대 국문과 교수이던 김태준이 당시 소련에 대해 전해지는 ‘좋지 않은 이야기’들의 진실을 묻자 대단히 ‘교과서적인’ 답변만 한다.
“폴란드 합병 문제는 제국주의적 합병은 아니고 공산주의적인 것이며 일 보 일 보 세계혁명을 진행하는 일환입니다.”
“(20만 명에 이르는 조선 유민들을 스탈린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시킨 것은) 국제적 견지에서 불량분자를 이주시킨 것이지 조선 민족을 탄압하려는 것이 아니요.”
“(1930년대 중후반부터 김단야를 포함한 수십만 명이 제국주의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한 대숙청은) 스탈린 수상에 반대하는 제정시대의 백계파가 소련의 각 정치, 경제 기관에 남아서 태업과 폭동 등의 파괴 공작을 해왔기 때문에 스탈린 수상이 탄압을 하지 않을 수 없던 것입니다.”
결국 김태준도 박헌영의 확신에 감화되어 교수직을 버리고 운동에 뛰어든다. 그리고 박헌영보다도 먼저 남한 우익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1945년 경성대학의 초대 총장으로 선출됐으나 미군정청의 인정을 받지 못한 국문학자 김태준은 1949년에 이현상의 지리산 빨치산 유격대를 찾아 위문공연을 하고 돌아오다가 전북 남원에서 체포되어 11월 총살당했다. “이제부터 공산주의를 버리고 국문학자로 평생을 살겠다”라고 결심을 밝혔으나 며칠 후 탕 탕!
소련의 폴란드 합병은 나치독일과 협잡한 명백한 제국주의 침략이었다. 2차대전 후 폴란드는 독립하였고, 소련이 붕괴하자 자유민주진영 나토의 최일선 국가가 되었다. 20만 명이나 되는 조선인이 불량분자였다는 말은 우리 민족을 폄하하는 어리석은 말이다. 또한 스탈린의 대숙청은 정적과 반대파를 제거하는 광기의 학살극이었다.
그런데도 박헌영은 소련과 스탈린을 옹호하는 ‘교과서적인’ 답변만 한다. 그 똑똑한 김태준도 감화시키는 박헌영의 능수능란한 화술은 “인민군이 남진만 하면 30만 남로당원이 봉기하여 빠른 시일 내에 남조선 전역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로 발전하여 김일성 수상을 감화시켜, 그로 하여금 남침 결심을 더 굳히게 하고 말았다.
인민군 장교 최태환 중좌의 한국전쟁 참전기 『젊은 혁명가의 초상』(도서출판 공동체, 1989)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신의주 용암포에 있던 인민군 6사단이 1950년 6월 초에 송악산 주능선에 전진 배치되었다. 다른 부대들도 이동해 삼팔선 근처에 전진 배치되었다. 6월 23일 송악산 계곡에서 열린 대대장급 이상 군관들이 소집된 비밀회의에서 김일성, 박헌영, 허가이, 김책과 함께 정치국원인 김두봉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동안 공화국에서는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왔습니다.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회의 개최, 해방 5주년 기념식 서울 개최, 조선최고입법기관 구성에 따른 총선 실시, 중앙선거지도위원회 구성, 공화국의 최고인민회의와 남조선의 2대 국회와의 합작 제의를 하였으나 모두 거부되어버렸습니다. 그 모든 것은 미제와 남조선 친일파 반동분자들의 책동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앉아서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동포를 해방시켜야만 합니다. 이제 부득이 해방전쟁을 개시하게 되는데, 일주일 동안만 서울을 해방시킬 것입니다. 서울은 남조선의 심장입니다. 그러므로 심장을 장악하게 되면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거기서 남조선 국회를 소집하여 대통령을 새로이 선출하고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정부가 통일이 되었음을 세계 만방에 알리면 어느 외국도 우리를 간섭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쟁 준비와 부대 전진 배치, 정치국원 김두봉의 말이 6.25 전쟁의 진실을 담고 있다. 그리고 젊은 고급군관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회의 개최, 최고인민회의와 남조선의 2대 국회와의 합작 제의 등 일련의 대남 평화 공세는 인민군 전진 배치와 함께 이루어진 위장 평화 공세였다. 김두봉은 한글학자로서 존경받고, 연안 독립동맹의 주석으로 팔로군과 함께 항일전투를 전개한 연안파의 거두이다.
정치국원들 모두 전쟁이 길어져서 동족상잔의 참극이 벌어지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참전을 우려했지만, 단기간에 서울만 점령하면 미군이 개입할 시간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서울을 점령한 사흘 동안 2대 국회의원들을 찾았으나 대부분이 피난하거나 숨어버렸다. 미국은 사흘 만에 전투기를 띄웠고 곧 미군을 부산에 상륙시켰다. 미군 철수와 에치슨 라인이 진짜였다면 미군이 단기간에 참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군 참전을 판단 착오한 것이다. 인계철선, 미국의 두뇌가 북한 정치국원 두뇌보다 한 수 위였다. 단기전을 계획한 인민군이 장기전에 들어가면서 종심이 깊어질수록 무기와 군수물자 보급이 어려워지면서 전력이 약화되었다.
이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박헌영 장을 끝맺는다.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박헌영과 그의 동지들은 시대적 한계와 개인적 한계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평생을 바쳐 추구했던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 이상까지 훼손해서는 안 된다. 박헌영을 기억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이다.」
전쟁 말기에 김일성이 박헌영에게 “당신 말대로 30만 남로당원 봉기를 믿고 밀고 내려갔는데, 봉기가 전혀 없었소”라며 소리 지르며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김일성인들 동족상잔의 전쟁이 3년간이나 벌어지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서울을 3일 안에 점령하고, 박헌영의 호언장담대로 남로당원들만 봉기하면 확전은 없을 것이라고 계산했을 것이다. 박헌영과 남로당계 숙청은 전쟁 책임을 떠넘기고 정적 제거를 위한 1차 정권 강화작전이겠지만, 박헌영의 허풍에 속은 분노 때문일 수도 있다. 북한 정보에 환한 미군정 당국이 박헌영의 호언장담을 그냥 놔둘리 있겠는가? 전쟁이 터지자말자 보도연맹원 30만 명 전부를 학살해버렸다. 박헌영이 정세 판단을 정밀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은 그냥 말하지만 역사적 업적을 남긴 사람은 ‘인물’이라고 한다. 그럼 인물은 어떤 기준으로 평가해야 할까. 물론 보편적인 평가 기준이 이미 정해져 있다. 그런데, 그 인물의 업적을 평가함에 있어서 전반기와 후반기의 행적이 다를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박헌영의 1946년까지 업적은 견결한 공산주의 지도자로 민족 해방과 조국독립을 위해 노력한 업적이 크다. 그러나 1946년 이후는 북한의 부수상으로 남침 전쟁의 일익을 담당했다. 그를 추종하는 남로당원들과 일부 남한 사람들은 인민군으로 직접 참전하거나 빨치산 등이 되어 대한민국을 붕괴시키려고 노력했다. 인민군으로 6.25 남침 전쟁에 참전한 여러 사람의 참전 수기를 보면, 남한에서 쫓겨 올라간 모든 남로당 지도자들과 당원들이 남침 전쟁 개시를 학수고대했다고 한다. 강동정치학원을 설립하여 수배 명 청년들을 훈련시켜 편성한 유격대를 1949년부터 남파하였다. 또한 박헌영은 김일성과 함께 소련과 중국에 가서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남침 전쟁 계획을 설명하고 무기 지원을 요청하였다. 김일성 등 북한 공산당의 영역인 북한에서는 주류가 될 수 없지만, 본 영역인 남한에서는 김일성 북한 세력을 견제하고 정권을 잡은 후 위세를 부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6.25 동족상잔 전쟁을 부추긴 역사적 과오가 심대하다.
박헌영의 전반기 항일투쟁가로서의 업적은 위대하다. 그러나 후반기의 북한 정치가로서의 업적은 우리 한국에 유해하다.
박헌영은 자기가 생각하고 노력했던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 이상이 결국 동족상잔의 참극으로 이어진 것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제헌의원들을 소집하여 통일 결의만 하면, 쉽게 빨리 미군이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마칠 수 있으리란 계산이 얼마나 억측이었는지를 뼈저리게 반성했을까? 저자는 ‘박헌영을 기억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에 초점을 맞추지만, 민족사는 박헌영을 동족상잔을 벌인 주역으로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박헌영과 같은 인생행로를 걸었다. 전반기의 업적은 위대하지만 후반기의 업적은 대한민국에 거역한다. 그래서 ‘금지된 이름’이고,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이다.
그러나 수백 년 세월이 흐르고 난 후에는 역사적 평가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지금 우리가 삼국시대를 기억하고, 고구려의 을지문덕과 연개소문 장군, 백제의 계백 장군, 신라의 김춘추 장군을 동급의 민족 영웅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처럼 ‘금지된 이름 19인’도 그때는 ‘일제 식민지 시대의 민족 영웅’으로 자리매김 될지 안 될지.
장장하일에 이런 류의 글을 쓴 마음이 착잡하다. 혹자는 74년 전 낡은 인물들을 다시 불러내서 무슨 현실적인 이득이 있느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45년 8월부터 1953년 7월까지 8년 동안 벌어진 이념 갈등과 노선 투쟁, 동족상잔 전쟁의 후유증과 여파는 현재진행형이다. 현대 한국인의 의식과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장 남과 북이 극한 대치 중이다. 일촉즉발, 자칫 온 민족이 절멸할 수도 있는 큰 전쟁의 블랙홀이 불시에 아가리를 쩍 벌릴 수 있는 절박한 황이다.
이 절박한 상황을 순화시키기 위해서는 과거 인물들을 불러내어 역사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 그리곤 그들의 공과 과를 낱낱이 해부해야 한다. 그리하여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역사에 기록해야 한다. 이 기록이 수백 수천 년 후손들이 20세기 한반도를 연구하는데 유익한 사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