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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 시평(2011. 6. 5)
朴在森 시의 현실의식
- 제2시집 『햇빛 속에서』중심으로
문화유물론자들은 문화를 토대와 연관 지어 설명한다. 다시 말해 문화를 생성시킨 당대의 하부구조 즉 경제적인, 물적 토대와 관련하여 그 상부구조에 해당하는 문화, 예술, 종교, 법률, 이데올로기 등을 이해하는 것이다. 현실을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조응관계로 파악하는 이들의 눈에는 문화의 곁가지에 해당하는 문학도 당대의 현실과 결부시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문학 특히 시의 질료에 해당하는 언어나 감성도 초역사적, 초현실적인 고유의 영역이 있는 게 아니라 시대와 현실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관점을 전제로 하고 박재삼 시인의 시를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 같다.
박재삼(朴在森) 시인에 대한 문단의 대체적인 평가는 자연, 가난, 한(恨), 허무 등의 정서를 우리가락에 실어 드러내는 전통 서정시인으로 귀결되어 있다. 1933년 일본에서 태어나 4세 때인 1936년 경남 삼천포에 이주, 성장해서 1953년『文藝』에 모윤숙에게 시조 <강물에서>와 1955년『현대문학』에 서정주에게 <정적(靜寂)>, 유치환에게 <섭리(攝理)>를 추천받아 등단한 후 1997년 타계할 때까지 시집 15권, 시조집 1권, 수필집 10권, 시선집 13권을 펴내는 비교적 왕성한 활동을 벌였는데 이런 그의 문학적 총량을 가로지르는 문학정신이 바로 가난, 한, 허무 등과 같은 소위 우리의 전통서정인 것이다.
대체적으로 이러한 범주를 형성하고 있는 박재삼 문학에 대한 평가에 대해 조금 색다른 평가가 있기도 한다. 고은 시인은 박재삼의 시를 “퇴영적 슬픔의 미학에 갇혀 소재주의적 정서의 한계에 갇혀”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월간문학』 1970. 1. P261-270). 근래 박재삼 시에서 현실의식을 읽어내려고 노력한 김경 시인은 박재삼 초기 시의 주요 등장인물인 ‘춘향’이나 ‘흥부’가 당대 핍박받는 가난한 하층민이라는 점을 들어 그의 사회현실에 대한 미학적 발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박재삼 시 연구-원형인물 중심으로」『마루문학 30호』2000, P137-138).
박재삼의 연보(이하 연보 및 작품은 박재삼시사랑회 (
박재삼의 또 다른 글에서 보면 야간학교 급사시절 교복과 교모를 쓴 동급생이 중학교 가는 것을 보면서 급사생활을 하는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숨었다거나 중학교 다니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1951년 4년제 중학 졸업 후 삼천포고등학교 2년에 편입학 하였고, 1953년 삼천포고등학교를 수석 졸업(제1회) 한 후 피난지 부산 동광동에서 제2대 민의원이었고 중학교 시절 교장이었던 정헌주(鄭憲住) 선생의 집에서 식객노릇을 했다고 한다. 이 당시 그는 『文藝』에 시조를 추천 받았다. 연보에 따르면 박재삼은 4세 때 일본에서 삼천포로 이주해 온 이래 적어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53년 그의 나이 20세 때까지는 삼천포에서 성장하고 거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1954년 은사 김상옥 시조시인의 소개로 ‘현대문학사’에 취직해 서울 생활을 하기까지는 삼천포와 부산 등 고향 언저리에 살았던 것이다.
당연히 박재삼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의 처참한 학살 사건의 참상을 목격했을 수 있고, 적어도 풍문으로라도 들었을 수 있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박재삼의 친한 친구인 이종수라는 사회주의자가 이 무렵 박재삼과 가까운 친교를 나누기도 했다.
최근 하병주(사천뉴스 편집국장)이 발표한 글에 따르면(「국가가 민간인에 행한 폭력이 ‘진실’-진실위 진실규명결정서로 본 사천보도연맹의 실체」『마루문학 30호』2000, p90-100) 1950년 7월을 전후하여 사천지역에서 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당한 사람이 공식적으로 22명이라고 한다. 이 숫자는 진실위원회의 짧은 조사기간 때문에 추정 숫자에 비해 너무 적은 수자라는 단서가 붙어있어 실제로는 이 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사천, 삼천포지역에서도 희생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희생자 명단을 살펴보니 청년 박재삼이 자주 올라가서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는 노산공원에서 희생당한 사람도 있다.
박재삼은 1954년 상경해 대학을 중퇴하기도하고 이곳저곳 직장을 전전하다가 1962년 결혼을 하고 1965년 <대한일보> 기자로 입사해 3년간 근무하다가 1967년 남정현의 소설 <분지> 사건 공판을 처음 보고 충격을 받아 고혈압으로 쓰러져 6개월가량 입원했다고 한다. 그 후 <대한일보>에서 퇴사하고 1969년 삼성출판사 입사,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 11-83번지에 처음으로 집을 마련함과 동시에 다시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연보에 따르면 이때의 고통과 이 고통에서 벗어난 기쁨을 시로 엮은 것이 제2시집 『햇빛 속에서』이다.
<분지> 사건이란 1965년『현대문학』 3월호에 남정현이 발표한 소설 <분지(糞地)>가 반미, 용공작품이라고 해서 검찰에 기소되고 작가는 구속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이 사건은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문단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박재삼은 이 사건을 방청하고 충격을 받아 고혈압으로 쓰러져 신문사를 사퇴한 것으로 되어있다.
1960년대는 문단 쪽의 <분지> 사건 뿐 아니라 우리사회 곳곳에 여러 가지 후진적이고 야만적인 정치와 사회문화현상이 산재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1960년 4.19혁명, 이듬해 5.16군사쿠데타, 중앙정보부 창설, 1962년부터 연이어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 등 60년대를 한마디로 말하면 ‘종속경제와 군사파시즘’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박현채 엮음『청년을 위한 한국 현대사』소나무, 1994). 미국의 원조에 의한 자본의 축적은 중소기업과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졌고 특히 농민은 비민주적이고 불철저한 농지개혁 등에 의해 심각한 궁핍 상태를 초래했고, 아울러 도시빈민과 실업자가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농촌의 황폐화와 가중되는 부담, 저곡가정책, 과중한 부채 등으로 이농민이 급격히 증가하여 이들이 도시에 집중하면서 도시인구 또한 급증하였다.
이런 시대현실 속에서 박재삼은 1962년 첫 시집『春香이 마음』(신구문화사)을 출간 한다. 훗날 박재삼 시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대부분의 시가 이 시집 속에 포함되어 있고, 가난, 恨, 허무와 전통서정이라는 박재삼 시의 원형질이 이 시집 속에 거의 응축돼 있다. 이 첫시집에는 눈물, 울음, 바람, 햇살, 슬픔, 꽃 등과 같은 자연과 恨 친화적인 시어들이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1960년대 우리 시단의 현실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박재삼의 첫시집에는 어떻게 이렇게 사회현실을 깨끗이 표백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현실의식이나 역사의식은 휘발하고 증유상태로 남았는지가 신기할 정도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 가난과 신문배달, 중학교 급사, 야간중학생, 6.25 전쟁, 고향 삼천포에서 보도연맹학살, 4.19혁명, 5.16군사쿠데타를 거쳐 오면서 겪었을 처참한 가난과 고난의 흔적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첫시집에 나오는 시 가운데 유일하게 ‘가난’이라는 제목을 달고 현실의식을 내 보일법한 시에서조차 그러하다.
골목골목이 바다를 향해 머리칼 같은 달빛을 빗어내고 있었다. 아니, 달이 바로 얼기빗이었었다. 흥부의 사립문을 通하여서 골목을 빠져서 꿈꾸는 숨결들이 바다로 간다. 그 程度로 알거라. 사람이 죽으면 물이 되고 안개가 되고 비가 되고 바다에나 가는 것이 아닌것가. 우리의 골목 속의 사는 일 중에는 눈물 흘리는 일이 그야말로 많고도 옳은 일쯤 되리라. 그 눈물 흘리는 일을 저승같이 잊어버린 한밤중, 참말로 참말로 우리의 가난한 숨소리는 달이 하는 빗질에 빗어져, 눈물고인 한 바다의 반짝임이다.
-<가난의 골목에서는> 전문
“우리의 골목 속의 사는 일 중에는 눈물 흘리는 일이 그야말로 많고도 옳은 일쯤 되리라. ”고, 사는 일이 눈물 흘리는 일이 많고도 옳은 일이라면서도 그 눈물이 근원이 되는 간난한 현실은 철저히 방기한 채 그냥 그 가난은 “달이 하는 빗질에 빗어져, 눈물고인 한 바다의 반짝임이다.”는 식으로 철저히 현실을 비껴간다. 어떻게 우리의 가난한 숨소리가 눈물고인 한 바다의 반짝임인가?
처절한 가난한 정치적 격변의 한 중간에 서 있었던 시인의 시 작품에서 현실이 이렇게 완전히 거세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현실을 완전히 거세한 작품을 쓰는 시인의 내면세계를 제대로 밝혀내는 것이 박재삼 시연구의 외연과 내포를 확장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박재삼의 두 번째 시집『햇빛 속에서』(한국시인협회발행 1970)에는 첫시집과 달리 전면적이지는 않지만 약간의 현실의식에 대한 변화가 엿보인다. 1962년에 출간한 첫시집 이후 1970년 두 번째 시집 사이 8년 동안 쓴 시를 수록한 이 시집에는 첫시집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사회과학적 언어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資産’(<貞陵 살면서> ‘高血壓’(<잠이 먼 밤에>) ‘金融組合’(<은행잎 感傷>) ‘財産’(<한 名唱의 노래에서>) ‘魚物到付’(<追憶에서>) ‘無期懲役’(<맑은 하늘 한복판>) ‘千石꾼 萬石꾼’(<흥부의 햇빛과 바람>) 등 두 번째 시집에 실린 시가 모두 34편인데 적어도 7곱 편의 시에서는 현실과 사회과학적 인식이 투영되는 시어가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시를 보면 알겠지만, 적어도 이들 시에서도 사회과학적 시어는 등장하지만 현실은 구체적이거나 전면적으로 형상화되지 않고 있다. 감추고 얼버무리고 있다. 이런 현상은 박재삼 특유의 시창작방법론 때문인지, 아니면 억압적인 시대현실을 회피하는 시인의 소심증 때문인지 밝혀내는 일은 온전한 박재삼 연구에 매우 중요해 보인다.
시를 몇 편 읽어보자. 솔잎 사이 사이 아주 빗질이 잘된 바람이 내 腦血管에 새로 닿아 와서는 그동안 허술했던 목숨의 운영을 잘해 보라 일러 주고 있고…… 살 끝에는 온통 금싸라기 햇빛이 내 잘못 살아온 서른여섯 해를 덮어서 쓰다듬어 주고 있고…… 그뿐인가, 시름으로 고인 내 肝臟 안 웅덩이를 세월의 동생 실개천이 말갛게 씻어주며 흐르고 있고…… 친구여, 사람들이 돌아보지도 않는 이 눈물나게 넘치는 資産을 혼자 아껴서 곱게 가지리로다.
-<貞陵 살면서 >전문
앞서 연보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이 시는 시인이 고혈압으로 쓰러졌다가 회복하면서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腦血管’이라는 시어도 그렇고, “내 잘못 살아온 서른여섯 해를” “이 눈물나게 넘치는 資産” 등은 모두 자신의 건강과 관련된 언어로 보인다. 잘못 살아왔다는 것은 가난과 억압적인 정치현실에 정면으로 대결하지 못했다는 회오라기보다는 자신의 건강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의미이며, 資産이라는 언어도 금융자산이나 사회적 자산이라기보다는 물질적인 자신의 몸, 신체 정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새도 바람소리도 잠결 언저리로 몰려간 뒤 山이 하는 기척은 이제는 뼈골에 사무치는 물소리 하나다. 짐승보다도 더러운 핏줄 내 高血壓도 맑혀 주었으면…… 그런 건 모르겠다, 그런 건 모르겠다, 山 공부나 다시 하거라, 그렇게 밖에는 들리지 않는 섭섭한 섭섭한 물소리. 나만 빼돌려 놓고 아내의 숨소리도 아이들의 그것도 함께 휘말아 가누나. ……참말로 그러긴가.
-<잠이 먼 밤에>전문
이 시에서 묘한 구절은 “그런 건 모르겠다, 그런 건 모르겠다,/山 공부나 다시 하거라,”이다. 앞 행의 “짐승보다도 더러운 핏줄/내 高血壓도 맑혀 주었으면……”에서 짐승보다 더러운 핏줄/내 高血壓이라고 하는 진술은 고혈압의 고통을 의미한다고 보아야한다. 그러나 자신의 지병인 고혈압을 짐승에 비유하여 자신의 (비록 고혈압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피를 짐승보다 더러운 핏줄이라고 진술하고 있는 까닭은 없을까?
비약이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 자신의 처참했던 가난과 언론인 신문기자로서 남정현의 <분지> 사건을 보고도 제대로 발언하지 못한 소심하고 나약한 지식인이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짐승보다도 더러운 핏줄/내 高血壓 ”으로 비유하고 있다고 읽는다. 그 다음 행이 이런 해석을 가능케한다.
“그런 건 모르겠다, 그런 건 모르겠다,/ 山 공부나 다시 하거라,/그렇게 밖에는 들리지 않는/섭섭한 섭섭한 물소리.”라는 구절에서 “그런 건 모르겠다”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서 ‘그런 건’ 아마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억압이 횡행하는 야만적인 현실 앞에, (당시까지만 해도) 정의의 사도요 무관의 제왕으로 불렸던 신문기자였던 시인이 아무런 항거를 하지 못했던 그런 사실을 지칭하는 게 아닐까? “내 高血壓도 맑혀 주었으면……”하는 ‘고혈압’으로 상징되는 어두운 현실에 대한 극복과 저항의지가 결국 ‘山 공부나 다시 하거라’ 라는 소리로 변질되고, 체제순응의 물소리를 받아들이면서도 ‘섭섭한’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시인의 갈등과 자아분열이 드러나는 구절이 아닐까? 아마 60년대 한국문단이 김수영과 같은 시인이 함께 활동했던 시기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어쩌면 박재삼의 자기분열은 최소한의 지식인의 양심이었을 수도 있다.
맑은 하늘 한복판 새소리의 무늬도 놓쳐버리고 한 처녀를 사랑할 힘도 잃어버리고 너댓살짜리 아기의 발 뻗는 투정으로 울고 싶은 나를 천만뜻밖에도 無期懲役을 때려 이만치 떼어놓고 환장할 듯 환장할 듯 햇빛이 흐르나니, 바람이 흐르나니.
-<맑은 하늘 한복판 >전문
이 시는 박재삼이 고혈압으로 쓰러진 상황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박재삼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고혈압은 말 그대로 ‘맑은 하늘 한 복판’의 청천벽력인 셈이다. 그 상황을 ‘無期懲役’이라는 정치적인 용어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시인이 사용하는 시어에는 나름 역사가 있는 것이다. 모든 언어가 그렇지만, 언어에는 언어 자체의 역사가 있는데 그 언어를 문맥에 넣어 활용할 때도 그 주체(시인)의 언어 활용에는 사회적 문화적, 혹은 정신적인 맥락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貞陵 살면서 >에 쓰인 ‘資産’과 같은 언어도 시인의 현실인식이 어느 정도 투영돼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시 <맑은 하늘 한복판 >에서 ‘無期懲役’이라는 이 용어는 혹시 남정현의 징역구형과 연관은 없을까?
남정현의 <분지>는 1965년 3월에 발표되어 사회문제가 되고 2년 후인 1967년 5월에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의 검사구형을 받는다. (최종적으로는 선고유예로 끝남) 당시 안수길, 한승헌, 이어령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이 사건을 변론했다. 아마 장안이 떠들썩하고 한국문단에 충격을 주었을 이 사건을 박재삼 연보에 따르면 박재삼은 1967년에 처음 법정에서 이 사건을 직접 방청하고 충격을 받아서 고혈압으로 쓰러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박재삼에게 고혈압은 물리적 신체에 가해진 질병적 충격이자 중층적 의미에서 정치적인 충격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충격에 대한 반응이 바로 인용한 시 <맑은 하늘 한복판>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를 <분지>와 관련한 현실주의적인 시로 보기에는 너무 현실구체성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연관성을 전혀 배제할 수도 없다.
千石꾼 萬石꾼의 재산 불어나는 그 기쁜 인생도 저 햇빛과 바람이 짜 올리는 씨와 날의 밝고 넘치는 것을 당할 수야 없으리. 하늘이여 저 햇빛과 바람이 짜내는 엄청난 재산을 누구나 골고루 갖게는 하되 욕심 많은 놀부한테보다 더 많이 흥부한테는 눈물 섞어 그것을 갖게 하는 곡절을 나는 오늘 비로소 마태복음에서 읽어낸 참이노라.
이 시를 보면 박재삼은 천생 자연친화적인 시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千石꾼 萬石꾼의 재산 불어나는/그 기쁜 인생도/저 햇빛과 바람이 짜 올리는/씨와 날의 밝고 넘치는 것을/당할 수야 없으리.” 라고 하는 정도이니 바람과 햇빛이 합성해 내는 자연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 인용시 2연을 보면 그 가치를 “누구나 골고루 갖게는 하”는 평등이 중요한 것이며, 가난한 흥부에 그 가치를 눈물 섞어 갖게 하는 하늘(세상)의 이치를 마태복음에서 읽어냈다고 한다. 알려진 바처럼 마태복음은 예수를 구원자로 확정하는 복음서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흥부처럼 가난하고 눈물을 흘려야만 한다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공감이 가는 주장이다. 그리고 평등에 대한 인식도 공감이 간다. 그런데 박재삼의 많은 시들이 그렇듯이 평등이나, 가난이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자기절제와 청빈사상, 혹은 전쟁과 폭력, 정치적 억압에 대한 저항과 같은 이념을 구체적으로 형상화되는 예는 거의 없다. 이것은 박재삼 시가 갖는 중요한 한계이다. 제2시집『햇빛 속에서』에서도 이 한계는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면 박재삼은 아예 현실의식이나 비판정신이 선천적으로 거세된 인물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첫시집 『春香이 마음』(1962), 제2시집『햇빛 속에서』(1970)보다는 시기적으로 한참 뒤이기는 하지만 그의 첫 수필집『슬퍼서 아름다운 이야기』(1977, 경미문화사)에 보면 ‘원고료’와 ‘출판기념회’ 관련한 그의 주장이 보인다.
“원고료를 적게 내거나 통 내지 않거나 하면서 좋은 시를 얻겠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니까 겨우 얻어 싣는다는 것은, 삼문(三文)시인이 시답잖은 시거나 아니면 무명으로 발표욕에 급급한 사람들의 시를 중점적으로 다루게 되는 것은 뻔한 순서다. 애당초 돈을 벌자고 시를 쓰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최소한도의, 또는 응분(應分)의 원고료만은 외면할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주고받는 <시 한편에 3천원>, 이것도 실은 너무 적은 액수인데, 이를 훨씬 하강(下降)하는 원고료의 지불에 시잡지라고 봉사하는 기분으로 고분고분 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시인은 어느 시대에나 가난하다>___가령 이러한 명제가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그 가난한 시인에게 주는 응분의 원고료마저 에누리해 가면서 시의 융성(隆盛)을 바란다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원고료를 바라보고 시를 쓰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시잡지의 경영자나 편집자까지 「원고료 보고 시를 썼느냐?」고 반문해 올 근거나 권한까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응분의 원고료를 지불하고, 그리고 좋은 시 얻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잡지는 꼬박꼬박 내어야겠고, 좋은 시는 들어올 리가 없고___이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다가는 시잡지를 내어야 할 근본적인 취지를 뒤트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그 악순환을 척격해야 된다. 제대로의 원고료를 지불할 생각부터 하고 시잡지를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이 값이다, 조판비다, 인쇄비다, 하는 잡지 제작상의 경비는 시잡지라 해서 에누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시잡지를 만드는 데 제일 큰 원동력이 되는 시인의 원고에만은 에누리를 해야겠다는 것은 벼룩 간 내어 먹는 식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래서 지금의 시잡지는 좋은 작품을 받아낼 도리가 없고 그것이 많이 있어서 시단이 풍성할 리도 없는 것이다. 아무리 시잡지가 많고, 거기 실리는 시의 편 수가 많다고 하더라도 시는 늘 질이 문제지 그 양이 문제인 것은 아니니까.”
-수필 <詩稿料에 대하여> 일부분 시집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거기 따라 출판기념회도 빈번하게 열리고 있다. 다른 나라에도 이런 이름의 모임이 있는지 없는지 과문한 탓으로 잘은 모르지만, 우리 주위에서는 이 행사가 너무 잦아서 눈에 안보이는 골칫거리의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 실정인 것 같다.(중략) 이러한 것을, 시단의, 혹은 문단의 경사로서만 치부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시단의적, 혹은 문단의적 한 공해 현상으로서만 간주된다. 경조사(慶弔事)에 있어 의례준칙이 공포되어 한창 그 실효를 거두고 있는 판국에도 불구하고 이 출판기념회만은 번성 일로(一路)를 치닫고 있을 뿐이니, 이런 것은 시대의 역조(逆潮)를 타고 있지 않은가 반성해 봄직하다. 문단에는 무슨 협회, 무슨 협회 하는 단체도 많으련만, 이러한 단체에서 나서서 이 출판기념회 자제(自制)의 길을 마련할 수는 없는지.(중략) 정말 이래서 될 일인가. 거듭 생각해 보거니와 시인은 겉치레식(式)은 엎드려 절받기식(式)출판기념회에 연연(戀戀)할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경건하게 시를 잘 쓸 생각을 해야 할 것이고, 죽어서 많은 독자가 슬퍼하는 그런 시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수필 <出版記念會에 대하여>일부분
인용한 산문에서 보면 70년대 우리문단의 낙후되고 관례적인 원고료 떼먹기와 출판기념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엿보인다. 마치 60년대 우리문단의 전근대성과 연고주의, 허위의식과 같은 낡은 관습에 대해 좌충우돌하면서 날카롭게 비판했던 김수영의 산문을 보는 것과 같다.
산문에서는 이런 문제의식과 비판의식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박재삼은 시에서는 왜 그런 치열한 현실의식이 증발해버렸을까? 그나마 두 번째 시집에서 현실의식의 단초를 조금 열어보였던 그의 시정신이 이후에도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않고 여전히 자연과 가난의 언저리를 단조로운 전통가락과 서정으로 배회하다가 끝난 것은 재능이 뛰어났던 시인 박재삼 개인의 불행일 뿐 아니라 한국문학의 불행인 것은 분명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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